2022년

이 페허를 응시하라

백_일홍 2022. 12. 17. 19:53

이 페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서곡. 폐허에서 발견한 날카로운 기쁨

 

지진은 무시무시했고 며칠간 계속된 여진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다수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가난해지지 않고 오히려 풍요로워졌다. 

 

재난 속에서 자라나는 이러한 감정은 과연 뭘까? 자신의 고장을 덮친 대형 허리케인을 이야기하며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지는 헬리팩스의 남자를 만난 뒤부터, 나는 그런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이 특이한 감정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며, 재난 이후의 세상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키는지 감지하게 되었다. 16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건, 스스로 생존하거나 이웃을 구하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용감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비상 상황으로 던져넣었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감정들은 우리가 사회적 유대와 의미 있는 일들을 열망하고 있고, 그런 것들이 즉석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우리에게 커다란 보람을 안겨준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만 우리의 경제사회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다. 또한 경제사회 구조는 이데올로기적이며,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한 철학을 담고 있다. 가진 자들을 위한 이 철학은 우리 모두의 삶을 결정하며, 뉴스에서 재난 영화에 이르기까지 대중매체가 확산시키는 통념으로 더둑 강화된다. 이데올로기의 편린은 개인주의, 자본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홉스와 맬서스의 정치철학, 인습에 사로잡힌 현대 경제학자들의 글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합리적인 이유로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고 가정하며, 이러한 목적에 맞춰진 왜곡된 시스템이 우리의 생존과 안녕에 필요한 것들을 훼손하는 현실을 외면한다. 

 

재난은 우리가 속한 지뎍사회의 건강과 사회의 정의가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시실을 증명한다. 우리에겐 유대가 필요하다. 게다가 유대는 목적의식과 직접성, 주체성 뿐 아니라 기쁨까지 가져다 준다. 재난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발견되는 놀랍고 날카로운 기쁨 말이다. 사람들의 증언은 모든 낙원이 필요로 하는 시민들, 용감하고 유통성 있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시민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도래를 막기 힘들 정도로, 낙원의 가능성은 목전에 와 있다. 만일 지옥에서 낙원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기존 질서와 체제가 작동을 멈춘 상태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살며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 덕분이다. 18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적 지형을 바꾸어놓은 이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이 있음을 함의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조차 문제가 되었다. 재난을 연구하다보면 인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여러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지는데, 특히 두드러지는 본성은 회복력과 임기웅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 깉은 것들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재난의 영향을 일관되게 '트라우마', 곧 정신적 외상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참을 수 없이 연약한 인간, 행동하기보다는 행동의 영향을 받는 자아, 한마디로 피해자가 되기 딱 좋은 인간을 암시한다. 재난 영화와 대중매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직면하면 병적 흥분에 빠지고 광포해진다고 묘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다른 인간 본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훌륭하게 대처하 이야기를 다루며, 그러한 대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룬다. 이 주제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주제다.

 

그러나 사람들의 훌륭한 대처와 아울러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고 숨기는지 이해하려면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하나는 재난이 닥쳤을 때 종종 야만적으로 대응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태도다. 다른 하나는 대중매체의 믿음과 표현이다. 그들은 낙원과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볼 수 없게 하는, 왜곡된 거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또한 믿음이 관건이며, 대중매체와 엘레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믿음은 2차적 재앙이 될 수 있다. 20

 

2003년 8월 15일 무더운 밤, 뉴욕 시에서는 은하수가 보였다. 그것은 그날 늦은 오후에 북동부 지방에서 정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볼 수 없던, 오래전에 사라진 '낙원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이 인공 불빛과 비슷한 것, 즉 재난 시에 끊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전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빈자리로 즉흥적이고 집단적이고 협동적이고 국지적인 사회가 복귀한다. 연대와 이타주의와 즉흥석의 별자리는 우리 대 부분의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이런 순간에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정전이라는 재난은 불행이지만, 이 오래된 천체들의 재출현은 이와 반대다.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다. 23

 

 

1부 황금시대의 우애: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난의 파괴적 힘, 말하자면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능력이다. 재난이 발생한 순간, 구질서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즉층적으로 구조 활동을 벌이고 대피소와 공동체를 형성한다. 32

 

우리는 대부분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이야기한다. 한쪽에 밝고 봬할한 면을, 다른 한쪽에는 순전히 부정적인 면을 놓는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을 깊음과 얕음, 풍요와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사고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깊이 있는 감정을 느끼고,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연결되고, 자신의 감정과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낸다면 죽음의 순간에조차, 혹은 전쟁이나 재난 속에서도 풍요로울 수 있는 반면, 종종 객관적으로 행복하다고 여기를 상황에서도 깊이 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안락한 사람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권태와 고뇌가 이런 사실을 암시한다. 33

 

재앙이 닥쳤을 때, 낯선 사람들은 친구가 되고 협력자가 되며, 물건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즉석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서 해닌다. 돈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사람들이 서로를 구조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함께 보내는 사회, 사람들 사이의 오랜 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함께 공유함으로써 한결 가벼워지는 사회, 현재의 순간이 너무도 급박해서 예전의 불평과 근심이 달아나 버리는 사회,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어쩐 중요성과 목적의식을 의식하는 그런 사회를 상상해보자. 끔찎한 시간 동안 아주 짧게 등장하는 유토피아다. 34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서 꼭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거나, 자치 공동체에 들어가거나, 산속의 게릴라 조직에 합류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을 떠보니 갑자기 변해버린 사회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연관을 맺은 사람들, 우리가 느끼는 감정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변화의 일부가 될 것이다. 엘리트와 당국은 종종 재난이 불러온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그러한 변화가 혼란과 파괴를 의미하거나 적어도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킬 거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재난 중에는 권력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러한 투쟁이나 자아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 덕분에 진정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생긱 수 있다. 또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지 않으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될까 두려워, 2차적 재난을 낳는 억압적인 대책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급진적 사상을 갖고 있지도 않고, 혁명을 믿지도 않으며, 심오한 사회변화를 의식적으로 바라지도 않는 많은 이들이 변화한 세상에서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을 꾸려가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41

 

왜 전에는 이웃들을 먹여주지 않았으면서, 지진과 화재 중에는 먹여주었느냐? 

재난이 닥친 뒤에는 장기 계획 대신 즉가적인 생존의 요구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인 것이었따. 그 순간 사람들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연대의식과 동병상련을 느꼈다. 

 

재난이 늘 평등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이 경우 전에 부자였던 사람들이 더는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구호물자를 받았다. 이기심은 대체로 현재의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서보다는 미래를 위해 축적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51

 

대부분의 샌프란시시코 시민들은 집이 없는데도 편안함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집단은 편아하지 않았다. 혼란을 감시하고 명령을 내리라는 지시를 받은 점령군, 시민 봉기를 두려워하는 부자들, 자신들에게 권력이 없음을 알고 다시 권력을 되찾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믿는 시 통치자들, 그곳에서 편한하게 활보하고 다닐 수 없는 외부인들은. 52

 

"나는 돈이란 연약한 인간들이 부당하게 우위를 점하고자 할 때 이용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돈이 정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요, 우리 문명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는 그 며칠, 돈이 아무 가치도 없던 그 시간 동안 세상이 얼마나 달랐던가!" 54

 

<난민이 되어 모든 것을 잃은 건 어떤 기분인가-난민이 된 폴린 야콥슨>이라는 기사를 발표한 기자보다 더 좋은 시간을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에 바를 크림과 비누, 옷가지를 사러 오클랜드로 갔다" 그런데 그녀는 물건을 사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만일 물건을 샀다면, 그것을 담을 트렁크도 사야 했을 테고, 그러면 크렁크를 실어 나를 누군가를 고용해야 햇을 것이며, 그런 행동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예전의 영속적 질서로의 회귀"를 뜻하는 거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녀가 말한 영속적 질서에서는 누구는 고용주가 되고 뭔가를 소유하는 반면, 누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계급적 분열이 포함되었다. 55

 

"그때 이후 우리들중 대부분은 다시 다양한 희로애락의감정으로 돌아갔지만, 그 기저에는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고 거품처럼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쁨이 있음이 감지왼다. 우리의 상실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다. 그것은 황금시대(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상상 속의 미래)에나 있을 법한 우애의 분위기다. ... 모든 대탈출에서 .... 모두들 당신의 친구가 되고, 당신은 또한 모두의 친구가 되었다. 고립된 개인적 자아는 죽고, 사회적 자아가 군립했다. 새로운 도시에서 사방의 벽이 다시 우리 방을 둘러치더라고, 우리를 이웃과 차단시켰던 예전의 외로움을 다시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 다시 나 혼자만 역경과 불운을 당할 운명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지진이나 화재가 주는 달콤함과 반가움이다. 용감함도 강인함도 새로운 도시도 아닌, 새로운 연대의식이 주는 기쁨이다. 다른 인간에게서 느끼는 기쁨" 57

 

엘리트 패닉

'약탈looting'이라는 단어(위기 상황에서 현금없이 필요한 물건을 긴급하게 조달하는 행위와 기회를 틈타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한 데 썩은 말)

공포에 의해 촉발된 과잉반응

군대와 주 방위군은 종종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일을 막기 위해 배치되었다. 

 

당국의 두려움은 대중의 행동으로 깊어진 것이 아니라, 격변의 시기에 존재하는 불안감으로 가속화된 것이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는 군중은 폭도로 변하기 십상이며, 폭도들은 지배 체제의 정당성을 의심하므로 아주 작은 기회만 주어져도 그것을 찢어발길 거라고 예상했다. 66

 

미션 지구만은 시민들이 먹는 장소와 방ㅇ식을 제도화하는 데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시민이 먹는 것을 자급자족하는 일과, 식권이나 외부 행정 직원이 필요하 제도에 따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일의 차이는 독립과 의존의 차이였다. 제공하는 이들과 제공받는 이들은 별개의 두 집단이 되었고 먹을 권리를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한데 음식을 받는 일에서는 어떤한 즐거움도 연대감도 느낄 수 없다. 78

 

재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구호를 제공하고 도시를 다시 돌아가게 하지만 예전의 부당함과 차별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권력자들의 그림이 나온다. 그들은 공공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며, 때로는 대중을 정복하고 통제하고 억눌러야 할 적으로 본다. 결국 그 짦은 연대와 조화가 끝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사회의 이익과 다수의 이익이 일으키는 충동이다. 79

 

윌리엄 제임스(20세기 실용주의 철학자)이 연구는, 인간은 주도적이고 질서정현하고 친절하게 대응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재난 속에서 인간은 침착하며, 고통과 상실은 남들과 함께 경험할때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제임스는 지진 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찾아온 것을 발견했다. 바로 전쟁을 대신할 도덕적 등가물, 다시 말해 과거 역사가 군인 기질을 자극햇던 것 처럼 시민 기질을 자극하는 상황을. 시민 기질, 이것은 사회 참여가 단지 의무가 아닐 하나의 취향이자 지향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92

 

그녀(도로시 데이)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쓴다. "어느날 오후, 해변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에세이를 읽다 이런 구절에 이르렀다.... 가난이 가치 있는 종교적 소명이라는 믿음의 부할이 혹시 군인의 정신력과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로 허눈 영적 개혁의 변형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중에 측히 영어권 사람들은 가난의 찬가를 다시 한 번 과감하게 부를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옛날에 가난의 실현이 의미하는 바 - 물질적 집착으로부터의 해방과 매수할 수 없는 영혼, 남자다운 골평무사함,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빚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언제라도 삶을 놓아버릴 권리 - 를 상상할 힘조차 잃어버렸다" 98

 

다른 사랑의 풍경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개인화된 자아 관념을 먹고 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 활동의 적절한 영역은 개인적 영역이고, 공적 세계에 관여해야 할 정당한 이유는 없으며, 참여하는 행동 자체가 유치하고 맹목적으로 감성적일 뿐더러 실제 열정의 원천을 전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일 정부가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면, 그래서 결국 파멸적인 미래로 우리는 인도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어 나은 세상이나 더 나은 과도적 체제를 꿈꾸는 것이 정당한 열정이라면, 우리가 포괄적인 자아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안녕에 광범위하고 이상주의적인 참여가 포함된다면? 오스카 와일드는 유토피아가 포함된 세계지도를 요구했다. 이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인간 심리, 다시 말해 우리의 심리 중에서 유토피아적인 부분, 혹은 아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저 영혼이 포함된 인간 심리의 지도는 어디에 있는가? 101

 

시트콤, 소소한 감정적 시련은 자세히 살펴보지만 이상도 없고 이기적인 욕구의 추구를 넘어서는 가능성도 없는 영역처럼 축소되어 보였다. 인간은 순수하게 개인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곳은 도로시 데이의 정치활동이나 로페즈의 바다처럼 우리가 바깥 활동을 하다가 휴식을 위해 돌아갈 수 잇는 따뜻한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쉼터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말하자면 그곳은 감옥이었다. 102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나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읽을 때 우리가 바라견하는 인간은 가정생활과 남녀관계를 위한 존재보다 훨씬 더 큰 존재다. 그 존재는 영혼과 윤리, 이상을 갖고 있으며, 영웅처럼 행동할 가능성과 역사를 결정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원칙에 입각하여 동기부여를 받는다. 103

 

우리 대부분은 이처럼 민주적인 공적 활동과 발언, 소속감, 전적으로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목적과 의미를 갚이 열망한다. 우리는 더 큰 자아와 세계를 원한다. 이것이 윌림엄 제임스가 경고한 전쟁의 유혹이다. 전시에는 흔히 사람들이 이런 공통의 명분과 희생정신을 느끼고, 더 큰 무언가를 향해 몰입한다. 104

 

 

2부 핼리팩스에서 할리우드까지 중대한 논쟁

 

이와 동시에 프린스는 르봉을 비롯한 대부분의 19세기 사상가완ㄴ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 사상가들의 관념도 참고한다. 예컨데 무정부주의 철할자이자 혁명가였던 표트르 크로폿킨을 두 차례 언급한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실질적, 지성적 면에서 재난에 대한 모든 반응이 놓인 철학적 토대로 우리를 다시금 데려간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강압적 권위가 부재할 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종류의 사회가 가능한지를 묻는 더 큰 질문이 존재한다. 128

 

혁명주의자와 반동주의자

 

상호부조 대 사회적 다윈주의

일반적 자선 행위와 거리가 먼 상호부조는 서로를 묶어주는 보살핌 속에서 모든 참여자가 주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 됨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호작용이며, 서로 협력하여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지구 주민들이 공동체 급식소를 정부기관에서 운영하는 급식소로 대체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이들은 상호부조가 자선에 밀려나는 걸 거부한 것이다. 135

 

디거스와 서바이버

홉스 이후 350년이 지난 뒤, 생물행동과학자 셀리 E.테일러와 로라 쿠시노 클라인은 인간이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가정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종종 함께 모여 관심과 능력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배려와 친교' 패턴은, 그동안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 모두가 스트레스에 보인 반응이라고 여겨진 '투쟁 혹은 도피' 행동 패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들에게 '투쟁 혹은 도피' 패턴은 전혀 말이 안 된다. 암컷이 새끼를 침략자와 싸우는 동안 자식에게 자기방어를 맡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암컷들은 새끼를 보호하고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줄 다른 암컷들과 유대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하면, 위기와 스트레스는 종종 경쟁과 고립을 초래하기보다 사회적 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143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십중 팔구는 산업화된 세계의 사회는 경쟁과 희소성 모델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환전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J.K.깁슨-그레이엄 같은 급진적 경제학자는 우리 사회를, 수면 위로는 경쟁적 자본주의의 관행이 보이지만 그 밑에서는 가족과 친구, 이웃, 교회, 조합, 지원자, 야구연합에서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조직들이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도움과 협력이 숨어 있고, 시장 밖에서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는 행동, 노동과 재화의 물물교환, 비상업적 사업자들의 북적이는 망상 조직이 숨어 있는 빙산으로 묘사한다. 크로폿킨이 말한 서로 돕는 부족과 친족, 마을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 우리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47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는 경쟁보다 협력이 생존에 더 중요할 수 있음을 멋지게 논증한다. 그런데 이 책은 생존보다 더 절실한 갈망을 설명하지 않는다. 몽블랑 호가 폭발하기 전에 한 선원이 원주민 아기를 낚아채서 숲으로 뛰었을 때, 거기에는 어떤 상호적인 요소도 없었다. 그는 인종도 지역도 완전히 다른 타인을 위해 신변의 위험을 감수했다. 148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이 나치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는 생존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눈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는 의미를 찾고 간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중심에 있는 '쾌락에의 의지'나 '권력에의 의지'와 대조되는 '의미에의 의지'에 대해 말한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수용소의 혹독한 조건 속에서 목적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더 쉽게 죽었지만,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진 사람은 투쟁했으며, 그중에 일부는 살아남았다. 프랑클은 이렇게 결론 짓는다. '애초에 인간에게는 평형 상태, 혹은 생물학에서 상상성이라고 말하는 무긴장 상태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신위생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한 오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무긴장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적, 즉 자유롭게 선택한 임무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할 잠재적 의미를 불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149

 

핼리팩스 폭발은 매우 끔직한 재난인 동시에 이성을 넘어서는 관대함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였다. 분명 우리 일상 속에서도 생각보다 더 상호적인 도움과 이타적인 도움이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질문은 왜 이런 짧은 상호부조아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이다. 150

 

그녀는 젊었고 연인 곁에서 살아남았으며, 런던이 아주 가끔씩 공습의 표적이 될 때까지 55일간 폭격의 밤을 견뎠다. 시간과 전쟁도 그녀의 기억을 바꿔놓지 않았다. 35년 뒤 런던 대공습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해리슨이 그녀를 추적 조사했다. 최근에 할머니가 된 그녀는 그날 밤을 회고하며 그때를 "아기를 출산한 경험과 맞먹는 승리감과 행복감을 느낀 최고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과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과의 대면은 비본질적인 것을 잘라내고 삶의 본질과 목적에 충실하도록 유도하는 확실한 도구가 되곤 한다. 질병과 사고 역시 감사의 마음과 열망을 되살리기도 한다. 161

 

2007년 나온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은 위기의 순간에 엘리트들을 이롭게 하는 경제 정책이 어떻게 대중에게 강요되는지를 연구 조사하여 신랄하게 밝힌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검증되지 않은 기존 용어로 사람들을 묘사하며, 재산을 때로는 인민적, 혁명적 결과를 가져오를 힘겨루기의 기회로 보기보다는 위로부터 일방적 정복 기회로 본다. ... 그녀가 프리츠를 읽었더라면!

 

프리츠가 제시한 최초의 급진적 전제는 삶은 일종의 재난이며, 실제 재난은 일상적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는데, 다만 평상시에는 그런 일을 혼자서 겪는다는 점이 재난과 다르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 '정상'과 '재난'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거의 언제나 일상생활의 이런 반복적인 스트레스와 이 스트레스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거나 최소화한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으로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며 꾸준히 성장해온 정치사회적 분석들을 무시한다. 이런 분석들은 현대 사회가 공동체와 일체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하도 있음을 지적한다"  167

 

"재난은 현재의 상황에서 순간순간의 직접적인 필요에 집중하게 만들어, 과거나 미래와 관련된 걱정과 금지와 불안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시켜준다." 재난은 우리가 종종 사로잡히는 슬픔과 두려움, 억측과 습관의 거미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그 효과는 실질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기도 하다. 

 

구원없는 재난, 재난없는 구원

사회학자 카이 에릭슨은, 1972년 탄광 페기물이 쌓인 댐이 폭발하면서 산골짜기로 검은 물이 콸콸 흘러내려 폐허가 된 광산 지역인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시골 지역사회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이때 급류로 주민들이 많이 죽고 댑분의 집이 휨쓸려 내려갔다. 그는 다른 재난에서 언급된 행복감과 유토피아가 그곳, 버펄로 크리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이 펼쳐진 한 가지 이유는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래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나 고립되었고, 대개는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었다. 구조 작업은 대체로 제복을 입은 외부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174

 

우리는 확실성과 안전, 안락을 얻기 위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치지만, 막상 그런 것들을 얻으면 종종 권태와 무의미함이 찿아오기도 한다. 의미는 투쟁 속에서 존재하며,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직면한 복잡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삶의 동기를 유지하게 해주는 목표와 필요에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느냐다. 이것이 곧 빅토르 프랑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뒤에 말한 의미 추구다. 시장에서는 많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안전과 안락, 호화로움을 추구하도록 몰아간다.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목적과 의미는 상품화하기 힘들다. 그리고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한다. 프리츠는 "현대사회는 공동체의 일체감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이 부수적 효과로서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 즉 그가 말하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시성과 소속감, 목적의식이 이미 충만한 사회에서 재난은 그저 재난일 뿐이다. 서로위 삶이 밀착된 수렵채집 사회의 삶은 말하자면 지속적 재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위험과 투쟁, 긴장과 협동의 필요성, 크나큰 보상이 존재하는 상황 말이다. 우리는 그 보상을 안락과 안전, 개인주의와 맞바궜다. 그리고 소외와 무질서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새로운 재난이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팔아넘긴 것이 아니다. 조금씩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결정은 집단적으로 내려졌으며, 우리가 시민사회로 결집할 때마다 거의 매번 당국이 보내는 경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결정들은 때로 우리와 이해관계가 다른 권력자들의 주도로 내려졌다. 177

 

프리츠는 또 다른 의미의 종교를 향해 과감하게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이 종교는 공동체로서의 종교나 믿음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종교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자들을 죽음이나 필멸성, 질병, 상실, 불확실성, 고통 처럼 우리가 직시하기 두려워하는 것들로 눈을 돌리게 하고, 어떤 면에서는 삶이 늘 재난이라는 현실을 보게 한다. 또 많은 종교적 실천은 모은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재난이 느닷없이 가져오는 상호부조와 이타주의를 일상적 실천으로 가르친다.  불교는 번뇌가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전망에 대한 집착,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재난은 과거와 미래, 물건에 대한 집착을 끊게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해 추상적인 것과 사물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다른 존재들과 존재 자체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든다. 사람들은 긴박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몰입의 순간에 자유로워진다. 178

 

2008년 여름 캘리포니아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 험준한 산중에 위치한 타사하라 공동체 거주자이자 수행원신 선산 센터가 불에 탈 위기에 처했다. 

 

" 이 시간 동안 가장 흥미로웠던 일, 돌이켜봐도 여전히 가장 만족스러운 일은 불이 요구한 끊임없는 각성과 노력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부정할 수 없는 부처의 가르임을 전해준 산불에 관심과 존경심을 품고 큰절을 울린다" 주지스님 스티븐 스터키는 훗날 강연에서 이 불과의 만남은 '무슨 일이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했다. 180

 

어쩌면 재난 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기쁨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은 종교적 언어일 것이다. 

그런 기쁨은 평상시 제도들이 붕괴하면서 나온 것이기에 무정부적이다. 그러나 그 기쁨이 무정부적인 이유는 평상시의 제도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발견하고, 변화하고, 진화한다. 종교는 수천 년 동안 상실의 해방에 대해 이야기해왔고, 티베트 현자들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에 이르기까지, 영적 과정의 첫걸음을 바로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였다. 스스로 선택했거나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재난이 불시에 덥쳤을 때 남는 것은 상실과 고통뿐이므로. 그러나 놀랍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을 십분 활용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재난으로 많은 것을 잃었거나 고통받는 사람들고 포함된다. 심각한 질병이나 상실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존의 반응으로서 초월적 태도가 어디에나 스며든다. 181

 

현대 언어는 재난의 영향을 정신적 충격 혹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만 표현한다. 이 말이 암시하는 두 가지는, 우리는 원래 고통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연약한 우리는 고통 때문에 피해만 입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고통이 주어졌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고통을 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단순한 부담이 아닌 불확실한 선물로서 삶의 의미를 고양시키는 도덕성의 자각 역시 종교적 가르침을 연상시키는데. 이 역시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정신적 충격을 이겨낸 사람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심리학 교수 로니 야노프-불만은 이렇게 쓴다. "신체적 정신적 전멸 위기에 직면하면 본질적으로 삶의 본질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일은 생존자들을 피상적인 것에서 심오한 것으로 향하게 하는 전환점이 된다. 삶은 새로운 의미를 띠고 종종 재조정된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범죄,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우리의 연구에서,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삶이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82

 

엘리트 패닉

 

재난 사회학자, 캐슬린 터어니, 

"엘리트들은 사회질서가 교롼되고 자신들의 정당성이 도전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녀는 공황에 빠진 대중과 영웅적 소수의 이미지를 거꾸로 뒤집어 '엘리트 패닉'을 말한다. 그녀는 엘리트 패닉의 요소들로 이런 것들을 열거한다.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 달리 말하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소수이며, 다수는 상황에 잘 대처한다. 그리고 그 소수는사실이 아닌 믿음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이 공황에 빠지거나 폭도가 되거나 경제적 관계를 전복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어쩌면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조치를 취한다. 그 결과, 재난에는 악의적인 행동이 뒤따른다는 근거 없는 통념이 현실이 된다. "무법성과 강력한 사회 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중매체는 재난 관리에서 군대의 역할 확대를 요구하는 정치적 담론을 반영하는 동시에 강화한다. 이런 정책적 입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군국주의가 미국에서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통치가 부재할 때의 인간에게 티어니가 보인 신뢰와,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보인 신뢰는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 엘리트들은 시민들이 노이로제에 걸릴 거라고 에측했고, 핵전쟁을 계획한 미국 지도자들은 어이없게도 생존자들이 폭탄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엘리트 패닉은 모든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투사하는 권력자들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경쟁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높이 올라갈수록 이타주의가 사라진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시베리아에서 크로폿킨이 발견한 사실보다는 사회적 다원주의의 사나리오에 훨씬 더 가까운 드라마를 펼친다. 권력자들은 종종 최악의 불안에 빠진 폭도만큼이나 야만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범죄를 저지르면서 범죄를 예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201

 

시민사회의 부할

 

찜통 같은 집에서 나와 야외나 에어컨이 켜진 상점이나 식당, 패스트푸드점으로 간 노인들이나 이웃에게 도움을 청한 노인들은 생존 확률이 높았다. 다시 말해 더위는 죽음을 결정하는 한 가지 요인일 뿐이었다. 또 다른 요인은 집이 참을 수 없을 때에도 집에 틀어박혀 있게 만드는 두려움과 고립이었다. 이것 역시 자연재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웃에서 찿을 수 있는 사회적 즐거움과 사회적 공간의 수준에 따라, 마을 자체가 사람들에게 가정이 되어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죽거나 살았다. 227

 

 

3부 축제와 혁명:멕시코시티 대지진

 

재난과 혁명이 지닌 유사성과 그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많은 혁명 반대자들이 전적으로 동의하듯이 만일 혁명이 재난이라면, 그 이유는 재난 역시 일종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재난과 혁명, 이 두 현상은 연대와 불확실성, 가능성, 평소에 가동되는 체제들의 전복같은 측면들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규칙들이 깨지고 많은 문이 열린다. 243

 

시간의 진청한 축제

카니발을 혁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혁명은 우리를 익숙한 경계선으로 나누고 서로에게서 소외시키고 서먹하게 만드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이므로, 이때 경계선이 사라지고 우리는 하나가 된다. 카니발은 열광적이고 짧고 떠들석한 유토피아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잇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토피아의 한 형태다. ... 카니발은 어떤 의미에서 공식화한 재난이며, 재난의 비극적 결과를 최소화하면서 재난의 이익을 수확하기 위한 의식이다. 카니발은 시기와 파괴 정도를 에측할 수 있는 재난이락도 할 수 있다. 252

 

재난은 때로 희년처럼 상황을 백지로 돌린다. 이런 재난은 기쁨을 낳지만, 부당함과 고립을 부채질하는 재난은 씁쓸함을, 다시 말해 재낸학자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침식'만을 낳는다. 어떤 재난, 어쩌면 모든 재난에는 양면성이 있다. 말하자면 재난은 하나의 끝이요, 피과와 죽음의 절정인 동시에 시작이요, 개방이요, 다시 시작할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노동 윤리를 사유화의 원동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화는 개신교의 영적 사유화뿐 아니라 그때까지 공적 영역이었던 도시생활의 사유화도 포함된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카니발과 공동체와 정치적 참여의 순간들은 비생산적이고 시간 낭비이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을 벌하던 17세기 뉴잉글랜드 신교도를 떠올리면 심지어 믿음에 위배되는 행이다. 통제되지 않은군중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은 미국의 도시설계, 특히 교외 설계에서, 대중 집회를 금지하는 독재자에게서, 르봉의 저서에서, 재난 대응 계획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며, 이런 것들은 카니발과 대중의 힘에 대항하는 일종의 대책들이다. 262

 

 

4부 달라진 도시, 뉴욕의 비애와 영광

 

오하라 선사는 그보다 다소 엄숙한 교감을 뉴욕의 공기에서 발견했다. "냄새는 몇 주 동안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느 ㄴ사람들을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화약 냄새나 폭발물 냄새 같았어요. 사람은 물론이고 온갖 것이 완저너히 분해된 냄새였지요. 사람들과 전기장치와 돌, 유리를 비롯해 모든 것이 뒤섞인 냄새 말입니다. 그 냄새는 시내 어디에서나 났어요. 우리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일부를 호흡하고 있음을 느껴보라고 내가 어느 단체 사람들에게 권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놀랍도록 개방적인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순간이 종료되면서 수축되고 반동적인 상태로 들어간 것 같았어요. 자아가 너무 강할 때는 마음이 수축되어 '오직 나'만을 담게 되지요. 전체는 '나는 이 모든 사람이기도 해. 나는 한 경찰관의 엄마고, 소방관의 딸이고, 이 모든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수축되면서 반동적인 상태로 돌아간 거죠.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렇게 되기까지 2-3주 걸린 것 같아요. 

 

미국 역사에서 이처럼 갑작스러운 대규모 죽음의 장면이 펼쳐진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참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재난이 가져오는 천국과 지옥의 기묘한 결합, 긴급성과 공감, 필멸성의 자각으로 말미암아 깊이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일 - 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이 상호부조와 이타주의, 임기웅변과 연대의 축제였다면, 제도의 반응은 무엇보다 파괴적인 엘리트 패닉이었다. 이런 반응은 서서히 등장하더니 뉴욕 거리에서 벌어진 연민의 카니발을 압도했다. 317

 

9/11이 남긴 질문들

 

2007년 <테러 드림>이라는 저서에서 수전 팔루디는 대중매체가 그 재난을 전통적인 남성성의 승리이자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하기에 얼마나 급급했는지를 추적했다. 대중매체는 미국이 공격받은 이유가 중동 문제 개입과 사우디아라비아 미군 주둔 등 강경 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나약해지고 여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찿아서 인터뷰했다. 팔루디는, 테러리스트드이 여성을 혐오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인데도 많은 대중매체가 페미니스트들을 테러리스트와 아울러 미국을 약골로 만드는 요인으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고, 줄리아니와 부시는 그 열망으로 득을 보았다. 만일 전쟁이 그 공격에 대한 해답이고 재난 속에서 안전을 제공한다면, 이 담론에서는 당연히 남성성이 가장 중요하다(적어도 남성성이 호전성과 군국주의와 같다면). 지도자들이 이처럼 기를 쓴 이유는 그동안 여러 차례 부시 행정부를 향해 경고가 있었고 예전에도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이 있었는데도 9/11 공격을 막지도 대비하지도 못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그 공격이 매우 지역적인데다 미국인들만이 아니라 많은 외국인 사망자를 냈는데도 거의 보편적으로 미국 전체에 대한 공격이자 성공적인 상징 행위로 해석되었다. 326

 

테러리즘 전문가, 루이즈 리처든슨은 이렇게 말햇다. "미국인들은 9/11 공격 때 알카에다의 지원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대응하기보다는 알카에다가 한 우주적 전쟁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에 따라 반응을 선택했다. 사실 이 참사의 사망자 수가 3,000명이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1년에 그보다 최소 다섯배가 넘는 살인 사건에 익숙해져 잇음을 감안할 때, 어쩌면 좀 더 현명하고 온건한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327

 

'정신적 외상' 대 '외상 후 성장'

 

주류 담론은 또한 9/11 사태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은 죄다 정신적 외상의 피해자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특별한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느낌을 갖는 것은 정상저거인 반응이며,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남단으로 모여든 약 9000명의 심리치료사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부 치료하려 들었다. 그것은 생존자들을 회복력이 잇는 사람들이 아닌 연약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캐슬린 티어니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살아 생전에 '정신적 외상 산업'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것을 보다니, 흥미로운 일이군요. 재난이 광범위한 PTSD를 초래한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입증되지 않았고, 상당한 논란거리예요. 재난 피해자의 회복에 사회적 지원보다 전문가의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고요" 

 

그보다는 덜 알려진 '외상후 성장'이라는 심리학 개념도 있따. 이것은 집단 경험과 개인의 경험에 두루 적용되는 용어다. "이 외상성 경험에 내재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나 소중하게 여기던 역할이나 능력의 상실, 삶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의 상실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상실, 그리고 상실이 초래하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전보다 더 나은 쪽으로 재건한다. 그들에게 상실이 피해는 더 나은 새로운 삶의 구조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그런 외상의 가능성과 그것에 대처하는 더 나은 방법을 결합하는 새로운 심리적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새롭게 발견한 자신들의 힘과 이웃과 공동체의 힘을 올바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 덕분에 개인들은 현재의 삶과, 비록 상실과 슬픔이 동반되더라고 그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집단과 사회는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겪으면서 새로운 행동규범과 집단 내이 개인들을 보살피는 더 나은 방식을 도출할 수 있다" 332

 

절반의 성공

 

우리는 9월 11일부터 새로 시작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다. 제일 먼저 확인된 것은 정복할 수 없는 시민사회의 생명력이었다. 그것은 폭력에 대항하는 애정과 연대의 힘이었다.  헌신적인 사람들은 아마도 이 시점부터 이 사회를 중동이 석유와 그에 동반되는 더러운 정치의 구덩이에서 독립시키려는 대대적인 변화를 실천하려 햇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 사회가 세계에서 제 역할을 자각하고 무기가 아닌 국내외적으로 변화된 역할에 의해 보장되는 진정한 안전과 소속, 목적, 존엄성을 향한 시민들의 갈망을 각성하게 하기위한 포괄적인 변화를 실천하려 햇을 것이다. 

 

이런 용감한 결단력과 깊은 관심, 각성된 시민사회가 부시 행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던 듯, 부시 행정부는 즉기 그것을 억누르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국민들을 집 안에 머물러 있고 경기 부양을 위해 쇼핑을 하고 큰 차를 타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을 지원하도록 유도했다. '미국, 사업을 개장하다' 캠페인은 소비주의와 애국주의를 동일시했으며,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334

 

이전의 많은 재난들과 달리, 거리의 대중 자체가 적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엘리트 패닉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행정부는 민족과 출생국, 종요에 따라 테러리스트를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은 죄다 악마로 몰고, 영장도 없이 중동 사람들을 납치, 고문, 구금하는 바람에 그들의 인권과 법적 권리는 사라졌다. 이민자들 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시민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나라에서 체포된 남자들과 소년들도 피해자였다. 주시 행정부는 국내법도 국제법도 이런 수감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며, 고문과 무법, 미국 역사에서 유례없는 무제한 행정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336

 

정권은 늘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했다. 실제로 태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은 사실을 오애곡하는 자기당착적 어법이다. 테러리즘은 하나의 전술이었고, 이 세상에서 전술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행정부가 시작한 전쟁은 공포와 두려움을 가라앉히기는 커넝 부추겼다. 이라크 공격 후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희생자 가족들은, 9/11 이후에 만들어진 여러 반전단체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이름으로 안돼'를 결성하고 가입했다. 공격이 있은지 며칠 뒤에 곧장 전쟁에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337

 

어떤 면에서 9/11 사건은 구조자들과 상호부조, 대중 토론의 장 덕택에 활성화된 시민사회와 여러 형태의 엘리트 패닉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재난이었다. 멕시코 사람들이 재난 후에 정부와의 권력 싸움에서 이겼다면, 미국인들은 9/11 이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졌고, 그 결과 인권과 사생활 보호가 퇴보하는, 군국화한 사회가 남았다. 9/11 이후 3개월 뒤 아르헨티나가 갑작스러운 경제적 재난을 사회적 재탄생의 기회로 만들었다면, 미국인들은 그 기회를 잃었다. 우파적 해결책에 대한 '사랑'이 꽃츨 피웠고, 군국주의와 개인주의, 소비주의가 다른 가능성들을 무력화했다. 아르헨티나는 전제주의와 억악, 외세 간섭이라는 가나긴 터널 끝에서 떨쳐일어났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쌍둥이 빌딩의 폐허 속에서 나타났던 현상을 기리기는 고사하고, 그것을 표현할 말조차 사라졌다. 또한 시민들이 스스로 창조하고 운영하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이 상호부조와 협력, 임기웅변, 권한 부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도 함께 사라졌다. 순종에 가까운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전시 논리가 이용되었다. 공격 이후 몇 시간, 몇칠 동안 시민사회는 승리했지만, 정부가 말하고 대중매체가 되풀이한 익숙한 이야기들 앞에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342

 

 

5부 뉴올리언스, 공유지와 살인자들

 

허리케인 카트리아 이후에는 인종주의와 위압적인 폭풍우로 엘리트 패닉이 이례적인 상태에 달했다. 이런 상황 자체가 재앙을 낳았다. 카트리나 피해자는 골칫거리나 괴물로 간주되었고, 당국의 대응 방침이 구조에서 통제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더 심한 대응도 있었다. 카트리나는 여러 재난이 겹친 재난이었다. 폭풍우라는 자연재해가 있었고, 엄밀히 말하면 자연재해가 아닌, 세인트 버나드 군과 뉴올리언스의 상당 부분을물에 잠기게 한 제방 붕괴가 있었으며, 대피와 구조를 제공하기를 거부하거나 실패한 여러 당국으로 인한 사회적 피해도 있었고, 지역 당국에 이어 주 당국과 연방 당국이 피해자들을 범죄자로 간주하고 뉴올리언스를 감옥도시로 만들어버린 오싹한 참화도 있었다. 당국은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사람들의 대피를 막거나,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음을 방조했다. 351

 

반체제 문화에서 비롯된 단체들, 1960년대 저항의 공동체, 흑표범단과 '레인보 패밀리', 경제 정의와 환경 정의 , 인권을 추구하는 최근의 운동과 관련된 아나키스트들고 있었다. 대규모 단체들이 겨우 업무를 분류하고 있거나 관료주의에 얽매여 있는 동안, 이런 급진적 소규모 집단이 더 빨리 움직이고 더 오래 머물고 더 깊이 관여하고 더 적절히 즉각적 필요에 대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427

 

'사랑으로 만든 카페' = '히피 부엌' 

 

오서 오세요! 

이 풍경은 1960년대 이래로 반체제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된 집단 캠프 생활과 닮았다. 특히 1970년대 이래로 매년 개최되는 레인보 개더링은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집단 캠핑 모임이다. 

 

이런 모임들은 분장, 춤, 음악, 축제, 의식, 대규모의 어울림을 끼워넣음으로써 유토피아적 실험과 전통적인 카니발을 연결한다. 만일 주류사회를 하나의 재난으로 본다면, 그에 대한 대안이자 피난처로서 재난 공동체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혁명과 재난과 카니발이 융합되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무언가로 탄생하는 현장이다. 

 

나는 거기에서 상호부조의 선물경제 사회를 창조하려는 소망과 그 소망의 부분적 실현을 보았고, 달콤하고 개방적이고 관대한 분위기에 깊은 인상과 감명을 받았다. 441

 

 

에필로그, 페허의 문

 

재난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목적과 의미를 추구할 뿐 아니라 연대를 갈망하는 사회적 동물임을 입증한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면, 도처에서 일상생활이 하나의 재난이며, 때로는 그 일상이 파열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상의 파열들은, 말하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 난 균열이며, 그 균열을 통해 밀려들어 오는 것은 대단히 파괴적일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다. 위계질서와 기존의 제도는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는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정서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할 뿐 아니라,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자원을 실천적으로 동원하는 데에도 성공적이다. 대재난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이런 분산된 권력 구조가 적합하다. 재난이 엘리트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453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서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454

 

현대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 이런 사랑(개인적이고 사적인 애정이 아닌 시민으로서 품는 애정, 타인에 대한 애정,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 등)은 대체로 잠들어 있고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일상 생활이 하나의 재난이 된다. 

 

재난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을 제공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재난에 앞서, 또는 재난이 지나간 뒤 거기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평상시에 이런 갈망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깨닫는 일이다. 

 

재난은 때로 제도와 구조를 허물고 사생활을 중단시켜, 더 넒은 눈으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해준다. 우리 앞에 놓인 임무는 그 문을 통해 보이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일상이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