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는 뇌가 아니다(1)

백_일홍 2023. 6. 29. 08:46

나는 뇌가 아니다:

칸트, 다윈, 프로이트, 신경과학을 횡단하는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

 

 마르쿠스 가브리엘 

 

목차

 

프롤로그
물질 입자와 의식 있는 유기체
뇌의 10년
뇌 스캔 속의 정신적 자유?
USB 스틱으로서의《나》
신경강박과 다윈염 ─ 「파고」의 경우
정신-뇌 이데올로기
자기해석의 지도

1장 정신 철학은 무엇을 다루는가?
우주 안의 정신?
헤겔의 정신
사회적 무대 위의 역사적 동물
왜 모든 사건은 아니더라도 일부 사건은 목적을 향해 일어나는가

2장 의식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의식 영화 속의 어지러운 입자들
불상과 뱀과 박쥐
신경 칸트주의의 물결 위에서
자기 경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
믿음, 사랑, 희망은 모두 다 환상인가?
각각의 자아 속에 이타주의자가 들어 있다
데이비슨의 개와 데리다의 고양이
입맛의 두 측면과 논쟁이 가능한 문제
지능과 로봇 청소기
의식과 데이터 뒤범벅
메리가 모르는 것
수도원에서 발견한 우주
감각은 중국 영화에 달린 자막이 아니다
신의 조감 관점

3장 자기의식
정신사의 의식 확장 효과
풍차 비유에 나오는 모나드처럼
바이오가 테크노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아우구스트는 어떻게 전능을 반박하려 했는가
순환하는 자기의식

4장 《나》는 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일까?
환상의 실재성
사춘기 환원주의와 화장실 이론
《나》는 신이다
거의 잊힌《 나》 ― 철학의 거장
학문론의 세 기둥
인간 안에서 자연이 눈을 뜬다
〈아빠에게 맡겨〉: 프로이트와 「슈트롬베르크」
어떻게 충동은 엄연한 사실과 충돌하는가
오이디푸스와 우유 포장

5장 자유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는 바를 의지하지 않기를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슬롯머신이 아니다
왜 원인과 이유는 다른지, 그리고 이것이 토마토소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호적인 목록과 형이상학적 비관론
인간 존엄은 건드릴 수 없다
신과, 혹은 자연과 동등할까?
첨언: 야만인은 없다
인간은 모래 속의 얼굴이 아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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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물질입자와 의식있는 유기체.

우리는 우리의 인간상을 기술의 진보에 어느 정도가지 맞추처야 할까? 이런 중대한 질문들에 유의미하게 접근하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론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 곧 의식, 정신, <<나>>, 사유, 자유 등을 일상에서 익숙하게 사용할 때보다 더 꼼꼼하게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컨데 자유 의지란 실은 없다고, 혹은 인간 정신(의식)이란 말하자면 뇌의 표면 장력일 뿐이라고, 혹은 최근에 프랜시스 크릭과 크리스토프 코흐가 주장한대로, 인간 정신이란 40헤르츠 진동수 구역의 동기화된 뉴런 점화일 뿐이라고 누군가가 자신있게 논증할 때, 그 논증에 어떤 허점들이 있는지 꿰뚫어볼수 있다. 

 

의식 철학(영어로 philosophy of mind)의 현재 주류와 달리 이 책이 추구하는 이론은 반자연주의적이다. 영어 philosophy of mind를 독일어 Philosophie des Geistes(정신철학)로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틀린 번역이다. 자연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결국 자연과학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전제힌다. 또한 유물론이 옳다는 것을, 바꿔 말해 오직 물질적 대상들만 - 무정한 물질-에너지적 실재에 속하는 것들만 - 존재한다는 명제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연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은 의식은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더구나 의식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적 설명이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데 말이다. 의식, 곧 인간 정신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탐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해진다. 17

 

이 책은 반자연주의 관점을 채택한다. 즉, 모든 존재가 물질적이지는 않다는 것, 혹은 자연과학적으로 탐구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바꿔 말해, 나는 비물질적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상식적 통찰이라고 본다. 18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중에 어느 쪽이 궁극적으로 옳으냐는 질문은 철학이라는 학술 분야를 위해서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더구나 지금은 종교가 회귀하는 시대라고 많은 이들이 지목하기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종교는 비물질성의 요새로 여겨지고, 그것은 정당한 평가다. 비물질적 실재들을 (우리 시대의 자연주의자들처럼) 너무 성급하게 무시하면 결국 종교를 이해할 능력조차 잃게 된다. 처음부터 종교를 일종의 미신이나 괴담으로 간주할 테니까 말이다. 자연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진보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들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결함이 있는 듯하다. 19

 

반자연주의적 정신 철학의 관점을 오늘날에 복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과학적 세계상과 종교적 세계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세계상들 둘 다 원리적으로 그릇되었다. 요새 역사적 신학적 지식이 부족한 일군의 종교 비판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신무신론>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그들 가운데 저명한 사상가들로 샘 해리스, 리처드 도킨스, 미셀 옹프레, 대니얼 데닛 등이 있다. 이들은 종교(즉, 이들이 미신이라고 여기는 바)와 과학(즉 이들이 냉철하고 꾸밈없는 진실로 여기는 바)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속한 근대 민주주의 사회들이 근본적인 세계상-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충분히 논박했다. 

 

이제 이 책에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의식 있는 정신적 생물로서의 우리 자신을 보는 반자연주의적 관점을 개발하는 것이다. 나는 그 관점이 정신의 역사 속에서 -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고 - 전개된 위대한 자기인식의 전통들과 연결되기를 바란다. 20

 

뇌 10년.

공식적으로 2010년 12월 31일에 종료된 미국과 독일의 뇌의 10년은 의학적 진보에 머물지 않고 자기인식을 향한 희망을 우리에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신경과학은 한동안 인간의 자기탐구를 선도하는 분야로서의 사명을 짊어졌다. 사람들은 인간의 사유, 의식, <<나>>, 심지어 우리의 정신 그 자체가 위치한 장소를 알아내고 그것을 공간과 시간 안에서 관찰 가능한 사물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뇌 혹은 중추신경계와 동일시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생각을 간단한 신경중심주의로 명명하고 이 책에서 반박하려 한다. 24

 

신경중심주의의 기본 사상에 따르면, 정신적인 생물이라는 것은 적당한 뇌를 가졌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신경중심주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나는 뇌다>로 요약된다. <<나>>, <의식>, <자아>, <의지>, <자유>, 또는 <정신>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철학이나 종교 또는 상식 따위에 문의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최선의 경우에는 신경생물학과 짝을 이뤄) 뇌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언급한 정신 철학의 기본 개념들 외에 <자유 의지>도 면밀히 고찰할 것이다. 우리는 단적으로 자유로울까, 아니면 우리의 자유를 의심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실은 생에 대한 갈급에 내몰린 생물학적 기계이며 오로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만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간주할 정당한 근거들이 최근에 정말로 나온 것일까? 나는 우리가 실제로 자유로우며, 우리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신적인 생명이라는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25

 

<<나>>와 뇌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생각의 주요 약점 중 하나는, 그런 식의 동일시로 인해 뇌가 우리에게 <<나>>와 외부 세계의 허상을 보여줄 뿐이라는 주장에 곧바로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실재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고 뇌가 만드는 실재의 정신적 그림들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적 삶 전체는 일종의 환상 또는 환각일 것이다. 나는 이미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이 주장을 신경 구성주의로 규정하고 공격한 바 있다. 신경 구성주의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 능려들은 뇌 구역들과 동일시할 수 있으며 그 구역들의 기능은 실재의 정신적 그림들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그 그림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그것들을 실재 자체와 비교할 수 없다. 28

 

뇌 스캔 속의 정신적 자유?.

내가 펼칠 <정신적 자유>의 개념은 장폴 샤르트르가 말한 <실존주의>와 연결된다. 사르트르가 철학적, 문학적 작품들에서 그린 자유의 상은 고대에서 기원했으며, 그 흔적은 프랑스 계몽철학, 임마누엘 칸트, 독일관념론(피히테, 셀링, 헤겔), 카를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그 밖에 많은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다. 오늘날 철학에서 이 전통은 주로 미국에서 칸트와 헤겔의 이름을 앞세워 활발히 추진되는데, 키르케고르와 니체도 거기에 한 몫한다. 반면 카뮈와 사르트르는 아직까지 외면당한다. 

 

내가 거명한 사상가들은 그들이 공유한 사상의 대표자들일 뿐이다. 나는 그 공통의 상상을 신실존주의로 명명한다. <신>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것은, 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실존주의 위에 거명한 사상가들이 실존주의에 붙어 있는 바닥짐 없이 존립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신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상을 스스로 만들어 보유해야 비로소 누군가이고, 그런 한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누구이기를 원하고 누구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자화상을 그리고, 다양한 규범, 가치, 법, 제도, 규칙의 형태를 띤 그 자화상을 지침으로 삼아 길을 찾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무튼 어떤 생각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가치들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그 가치들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지도, 우리를 독단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생각은, 우리가 흔히 그릇되고 왜곡된 자화상을 그리며 심지어 그 자화상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놔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 실재 속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삽입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런 존재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회상과 세계상을 그리고, 심지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대한 파노라마로 굽어보기 위하여 형이상학적 믿음 체계를 구성한다. 37

 

이 책의 일차적 의도는, 민주 사회의 대중들 사이에서 인문학이 변방으로 밀려남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적 자유의 공간이 어두워지는 것에 맞서 그 공간을 환히 밝히는 것 뿐이다. 38

 

USB 스틱으로서의 <<나>>.

우리의 <<나>>를 우리의 두개골 속의 뇌와 동일시하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부담 벗기의 환상만이 아니다. 현재의 세계상에서 그 욕망의 발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불멸과 불가침을 향한 바람이다. 40

 

신경강박과 다윈염 - <파고>의 경우

영국의 의학자 레이먼드 탈리스는 신경강박과 다윈염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단어들로 현재 인류의 자기 오해를 표현한다. 신경강박이란 인간의 중추신경계 - 특히 뇌의 작동방식 - 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계속 늘리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다윈염은 우리의 까마득한 생물학적 과거를 끌여들여 신경강박을 보완한다. 다윈염에 걸린 사람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종들 사이에서 벌어진 생존투쟁에서의 적응적 장점들을 재구성하면 현 인류의 전형적인 형태를 더 잘 혹은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경중심주의는 신경강박과 다윈염의 조합이다. 즉 뇌의 진화 역사를 고려하면서 뇌를 연구해야만 정신적 생물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신경중심주의다. 44

 

자기해석의 지도.

신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책이 의도하는 여러 목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 비판과 동시에 나는 정신 철학의 핵심적인 기본 개념들을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자기인식의 정신적 지형을 보여주는 지도를 작성하고자 한다. 의식, 자기의식, <<나>>, 지각, 사유 같은 개념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애당초 어떻게 우리의 어휘 안으로 진입했을까? 

 

본문에서 우리는 긍정적 자기인식, 곧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도 다룰 것이다. 이 책에서 개략적으로 제시한 신실존주의의 긍정적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 정신은 불특정 다수의 정신적 역량들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그 자기해석들을 통해 자화상을 제작하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자화상을 제작하고 그럼으로써 다수의 정신적 실재들을 산출한다. 이 과정은 역사적으로 열린 구조를 가지며, 그 구조를 신경 생물학의 언어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의 이유는 우리가 지금 다양한 언어들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다. 인간 정신이 순수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거짓된 세계상과 자아상도 그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거짓된 자아상도 그것을 참된 자아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언가 말해준다는 점이다. 

정신적 실재 산출의 스펙트럼은 예술, 종교, 학문(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등)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서부터 매우 다양한 형태의 환상 - 이데올로기, 자기기만, 환각, 정신병 등 - 까지 폭이 넓다. 우리는 의식, 자기의식, 사유, <<나>>, 몸, 무의식 등을 가지고 있다. 

 

방금 열겨한 개념들은 인간 정신이 그리는 자화상의 요소들이다. 이때 인간 정신은 그 자화상의 기반에 놓인 사물이 아니다. 인간 정신은 이 자화상의 요소들로부터 독립적인 - 따라서 이 자화상의 요소들과 비교할 수 있는 - 실재성을 가지지 않는다. 인간 정신은 오직 자화상을 그리는 방식으로만 실존하다. 따라서 인간 정신은 항상 스스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정신은 역사를, 정신사를 가진다. 54

 

정신사에서 우리의 시대, 곧 근대는 신경중심주의를 산출했고, 그 입장은 근대의 근본 동기를 중 하나인 <과학을 통한 계몽>과 전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더 망각해온 것은 이 시대의 역사성, 그리고 이 시대가 좌초하고 붕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적은 근대성이 아니라 더 많은 근대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근대성은 우리 자화상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을 포함한다. 우리 자화상의 역사성은 지난 200년 동안 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정신의 개념을 다룰 때 우리는 그 역사성을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55

 

 

1장 정신철학은 무엇을 다루는가?

 

지난 세기에 정신 철학에 다가가는 새로운 유형의 접근법, 곧 영어권에서 <심리철학 philosophy of mind>으로 부르는 것이 생겨났다. 버트런트 러셀이 1921년 출판한 저서 <정신의 분석 The Analysis of Mind>는 심리 철학의 모범으로 꼽을 만하다. <philosophy of mind>는 독일어 의식 철학으로 번역해야 적합한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접근법을 기존 사상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의식 철학>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접근법의 새로움은 그 내용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명확한 질문에 답하는 것을 정신 철학의 과제로 부여한다는 점에 있다. 어떤 것을 정신적 상태 혹은 사건으로 식별하기 위한 표지는 무엇일까? 오늘날 퍼진 이 접근법에 따르면, 정신 철학은 우선 <정신적인 것의 표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 철학자가 받아들이는 표지는 의식이다. 이 때문에 정신 철학은 인간 정신의 능력들 중 하나일 뿐인 의식에 너무 일면적으로 집중해 왔다. 60

 

정신적인 것의 표지를 묻는 질문의 배경에는, 과거에 우리가 정신적이라고 간주한 많은 것들이 순전히 자연적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근대적인 생각이 있다. 60

 

우주 안의 정신?.

 

대 다수의 의식철학자, 전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순전히 자연적인 실재는 정확히 하나의 대상 영역을 이루며, 우리가 자연과학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갖추면서 파악하고 서술하고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그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물리적 실재의 영역을 우주라고 칭한다. 64

 

우리가 정신을 우주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옳다. 하지만 이로부터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결론은 우주가 존재의 유일한 영역이며 유일하고 참된 실재라는 우주상을 채택할 때만 나온다. 그런데 그런 우주상은 자연과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입증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필요할 경우 철학적 논쟁거리로 삼을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실재의 영역이 단 하나라는 전제는 좌초하고 만다. 65

 

이 대목에서 자연주의자들은 모종의 설명을 통해 정신을 아예 부정함으로써 - 이를 이론 환원주의라고 한다. - 방금 개관한 문제를 간단히 없애야 한다고 느낀다. 이론 환원주의란 정신적 과정들을 거론하는 모든 이론을 <정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이론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정신적 과정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만일 우리가 정신을 우주 안에서 찾으려 하고 우주를 유일하고 참된 실재로 간주한다면, 전근대적 미신의 잔재로 보인다. 65

 

헤겔의 정신.

심리 철학은 우리가 물리적 실재를 실재 개념의 표준 혹은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의식적 실재는 이미 정의상 물리적 실재의 건너편에 놓이게 되고, 우리는 곧바로 물리적 실재와 의식적 실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우거나 제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같은 문제 설정 방식 전체를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명명하자. 형이상학이란 실재 전체(이른바 <세계>)의 통일성에 관한 이론이다. 형이상학은 모든 것, 가장 큰 전체, 삼라만상을 다룬다. 그런데 삼라만상을 자연과 동일시하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적이어야 한다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이 견해는 흔히 <자연주의>와 짝을 이룬다. 즉, 실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것만 자연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는 주장과 결합한다.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의해야 하는데,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은 어떤 개별 자연과학 분야나 자연과학 분야들 전체에서 나온 확증된 연구 결과도 아니고, 물리적 연구의 전제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은 세계 전체가 어떠한가에 관한 하나의 철학 이론이다. 66

 

<심리 철학>의 엄밀한 틀이 근거가 없다고 여기고, 나는 심지어 틀렸다고 생각한다. 

첫째 문제는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이 터무니없이 격상되었으며 또한 낡은 자연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며, 최선의 경우에 그 우주를 <만물의 이론>과 같은 통일된 물리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도 지극히 유토피아적 생각으로 보인다. ... 현재 거론되는 통합 물리학의 후보인 끈 이론의 다양한 버전들은 실험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듯하다. 67

 

둘째 문제는 그것이 정신을 다루지 않고 <마인드>를 다룬다는 점이다. 벌써 이런 주제 선정을 통해서, "정신이 의식적 체험과 같은 유형의 주관적 현상이다"라는 견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적 전통의 상당 부분이 배제된다. 그 전통에 따라 독일어권에서는 예컨대 시대정신이 거론된다. 헤겔은 <객관적 정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에 기초하여 그는 도로 표지판을 정신적 대상으로 본다. 왜냐하면 도로 표지판은 공인된 인간 행동 규칙을 명확히 밝힐 의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신은 언어와 연결된다. 그런제 언어는 과연 순전히 주관적일까? 과거로부터 전승된 텍스트는 한 정신이 받았던 인상을 전달해 줄 수 있다. 68

 

오늘날의 철학은 이미 얼마 전부터 이른바 독일 관념론의 르네상스를 겪는 중이다. 독일 관념론이란 칸트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전반기까지 발전한 위대한 철학 시스템을 말한다. 독일 관념론의 르네상스는 정신과학들의 혹은 세계 해석을 위한 학문으로서 철학의 가치 절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정신>이라는 표현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놓은 헤겔이다. 헤겔 철학은 <자연>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데, 이는 여전히 풍부한 잠재력을 지녔다. 무엇보다도 헤겔은, 인간 정신의 본질이란 자기 자신을 - 그리고 자기를 훨씬 벗어난 실재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생각의 상당히 설득력 있는 버전을 내놓았다. 70

 

그 생각을 헤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정신이란 단지 정신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귀결일 따름이다. 정신은 자기를 산출하고 파악하는 활동이다.> 이 문장 안에는 칸트와 피히테의 몇몇 근본 사상들이 들어 있다. 이 두 철학자 역시 오늘날의 윤리학과 실천 철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된다. <마인드>를 중심에 놓고 정신 철학을 단지 통상적인 의미의 <심리 철학>으로 이해하면, 이 같은 전통 전체가 배제된다. 70

 

내가 거론하는 정신 철학은 플라톤부터 사르트르와 그 너머까지 이어지는 철학 전통을 포함한다. 또한 그 정신 철학은 <심리 철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상적인 <심리 철학>에서 처럼, 우리의 의식적 내면의 주관적 현상이 익명이고 맹목적이며 무의식적이고 의도가 없는 - 그 규칙성이 자연과학적으로 서술되는 - 자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면, 이것은 이미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 설정은 낡은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엄밀한 틀로 확정하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을 개발하려면, 가장 먼저 이 독단을 깨부숴야 한다. 71

 

사회적 무대 위의 역사적 동물.

칼 마르크스, 

이제것 인간이 거짓된 이데올로기적 자화상들을 그려 왔으며 그 자화상들을 정치경제의 장에서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거짓 자화상들의 출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다. 이 생각은,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라는 실존주의적 근본 사상의 특수한 한 형태다. 마르크스 역시 정신이 자연과학적으로 탐구 가능한 우주를 의미하는 자연에 속한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71

 

우리가 사회적 실천들에 기초하여 특히 노동에 기초하여 인공물들을 생산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은 한 조각의 자연이다. 인공물에서 인간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실재를 형성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로)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런데 헤겔과 달리 마르크스는 본질적으로는 정신은 물질적으로 표현된 노동을 통해서, 곧 감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환경의 개조를 통해서 자기를 산출하며, 그 일차적인 산출 형태는 예술, 종교, 철학 따위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마르크스 역시 인간 정신을, 우리의 두개골 속에서 일어나며 예컨대 심리학 실험이나 심지어 뇌 스캐너를 수단으로 삼아 연구할 수 있는 주관적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경제를 정신의 자기인식의 특권적 형태로 여긴다. 72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의 이른바 실존주의까지 정신 철학의 핵심적인 생각 하나는, 인간은 사회적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이므로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우선 자기를 단적으로 실존하는 놈으로서 발견하고 이어서 끊임없이 이 사태에 대해서 모종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 구별된다. 바로 이 것, 곧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모종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사르트르는 유명한 에세이 <실존주의는 인본주의다>에서 우리의 <본질>로 칭한다. 그리하여 그는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73

 

신실존주의는 사르트르의 생각, 곧 한 개인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의 인생 계획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어받는다. 개인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유의미하게 빚을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생각의 틀 안에서 다양한 행위들 중에 일부를 선택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 수행의 핵심이다. 75

 

왜 모든 사건은 아니더라도 일부 사건은 목적을 향해 일어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실제로 하나의 무한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무한들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현상들의 바탕에 깔린 단 하나의 실재(유일무이한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존재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하나의 실재, 하나의 세계 - 모든 일이 일어나는 장소 - 가 존재한다는 전제는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한 코스모스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코스모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5원소론과 마찬가지로 마침내 폐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80

 

뇌 과학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지침으로 삼은 고유한 인식 관심의 틀 안에서, 목적론적 세계상에서 유래한 과거의 생각들을 무력화한다.  81

 

유기체 내에서의 생물학적 기능은 목적론적 행위 설명에서 거론되는 의미의 목적이 아니다. 특정 신경 세포들의 정확한 기능 방식을 서술하면, 적어도 뇌 속 과정을 마치 거기에 관여하는 주도자가 없는 것처럼 서술할 수 있다. 82

 

우리의 목적론적 행위 설명들이 모조리 환상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은 20세기 후반기에 실존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그 주장 역시 역사를 가지며, 그 역사에서 예컨대 마르크스와 그를 계승한 일부 사회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그 주장에 곧바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것은 구조주의다. 구조주의에 따르면, 인간적 목적들은 개인들이 시스템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일종의 환상이다. 구조주의는 피상적인 자유의 인상을,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제도나 익명의 권력 구조의 탓으로 돌린다. 나는 구조주의(포스트 구조주의)가 틀렸다고 본다. 우리를 조종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미 스스로 그 구조에 속해서 우리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다. 84

 

2장 의식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의식은 정말 기이한 현상이다. 대체 왜 우주 안에서 누군가가 우주가 존재함을 의식하는 일이 벌어져야 할까? 철학자 셀링이 제기한 오래된 생각에 기대어 오늘날에도 쓰이는 아름다운 비유는, 인간 안에서 자연이 눈을 뜬다는 것이다. 87

 

미국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 <정신과 우주> 오늘날 자연과학은 저 질문을 적절히 다룰 능력을 영영 획득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이글은 코스모스, 곧 자연의 총체적 질서라는 관념에 얽매여 있으며 정신을 그 질서 속에 다시 기입하려 애쓴다. 우리는 저 질문을 의식에 관한 우주론적 수수께끼로 명명하자. 88

 

의식이란 놈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유기체가 처리한 인상 중 일부만이 <의식의 병목>을 통과한다. 유기체 전체를 감안할 때, 그 인상들은 순수한 자연적, 무의식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깊은 바다 위로 솟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90

 

우리는 의식에 친숙하다. 의식은 우리가 의식 상태에 있음을 통해서, 또한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오로지 우리가 의식 상태에 있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흔히 철학자들은 이를 내면 과점, 또는 일인칭 관점이라고 부른다. 곧 <<나>>의 관점이다. 일인칭 관점의 핵심은 정확히 우리 각각이 의식 있음을 통해서 바로 그러함을 통해서만 우리가 의식에 친숙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

 

의식은 항상 누군가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소유조건이라고 부르자. 나는 나의 의식을, 당신은 당신의 의식을 가진다. 나는 당신의 의식에 직접 친숙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당신은 나의 의식에 직접 친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내가 당신이 되거나 당신이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유조건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오직 내면으로부터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오직 자기 자신의 의식만 의식할 수 있다. 이를 의식의 프라이버시라고 부르자.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의 의식에 대한 의식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92

 

일인칭 관점에서 보면, 마치 우리가 제각각 자신의 의식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금새 든다. 데카르트, <성찰>에서 정신의 자기인식 능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 정신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진리들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93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주의 깊게 조명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는 누군가, 그런 누군가를 철학에서 <호문쿨루스 Homunculus>라고 부른다. 

 

호문쿨루스-오류의 핵심은 우리의 의식을 순전히 사적인 무대로 상정하고 그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는 관찰하지만 타인이 외부 관점에서 관찰할 수는 없다고 상상하는 것에 있다. 

 

우리 시대의 신경과학은 호문쿨루스 혹은 거미줄 중앙에 자리 잡은 거미의 새로운 아바타들을 고안했다. 신경과학 문헌에서 종종 접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떠올려 보라. 우리가 외부 세계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대신에 우리는 항상 정신적 그림들만 구성하는데, 그것들은 뇌에서 발생하고 <저 바깥의> 사물들과 거의 또는 전혀 무관하다. 비판의 이유는, 누군가가 그 정신적 그림들을 보고 이를테면 외부 세계의 모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이 견해가 전제한다는 점에 있다. 97

 

나는 당신이 의식하는 불상과 동일한 불상을 의식하지 않을 것이며, 개나 고양이, 금붕어가 의식하는 사태와 전혀 다른 사태를 의식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바깥>은 대체 무엇일까? 

 

토머스 네이글, <박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 인간들 중 일부가 불상으로 간주하는 그것을 뱀과 박쥐가 들끓는 동굴 속에 놓는다고 해보자. 뱀의 의식과 박쥐의 의식에는 불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무엇이 나타날까? 우리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낯선 의식에 내면 관점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말이다. 99

 

우리 의식은 무대이며, 누구나 각자 자신의 의식에만 접근할 수 있고 내밀히 친숙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닌 문제점은,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 세계으이 사물을 직접 지각한다는 주장을 더는 할 수 없게 된다는데 있다.우리는 <저 바깥의> 사물들이 우리의 사적인 영사막에 나타나는 그것들의 모습과 하다못해 비슷하기라도 한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심지어, 아무튼 <저 바깥에>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에게 불상으로, 뱀에게는 X로, 박쥐에게 Y로 나타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럼 그 무언가는 대체 무엇일까? 신경 구성주의의 대답은 이러하다. <저 바깥에는 물리적 대상, 혹은 물리적 대상들의 거대한 무리가 있다. 말하자면, 입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전자기파가 출렁 거린다. 그런 바깥을 우리는 우리의 감각 수용기를 통해서, 다른 동물들은 그놈들의 감각 수용기를 통해서 각자의 정신적 사용자 인터페이스, 곧 의식으로 업로드한다.>103

 

만일 의식이 말 그대로 우리 두개골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신경화학적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외부 세계를 모사한다고 추정되는) 영화가 상영된다면, 우리의 의식적 이미지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계된 무언가가 아무튼 <저 바깥에> 실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알까? 우리가 그것을 자연과학적 실험들을 통해 알아냈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실험들도 우리의 의식 영화 안에서 수행했을 테니까 말이다. 104

 

우리가 오로지 사적인 의식 에피소드들만 의식할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린 전제들에서 비롯된다. 105

 

칸트는 신경 구조주의가 항상 빠져있는 모순을 꿰뚫어 보았다. <순수이성비판>의 한 가지 목표는, 우리 사유 과정의 담당자를 모종의 사물(비물질적 영혼이건, 뇌건 간에)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 추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105

 

칸트 철학에서 압도적으로 핵심적인 주장은 우리는 사물 자체 혹은 사물 자체들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상만 인식할 수 있고 사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요 주장을 일컬어 초월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107

 

특히 공간과 시간이 우리 직관의 형식들이며 어쩌면 사물 자체들이 어떠한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견해에 이른다. 칸트의 충격적인 주장을 첨예화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우리 인간의 의식 영화의 틀일 뿐이다. 공간과 시간은 <저 바깥>의 실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운영 시스템에 속한다. 109

 

신경 칸트주의의 물결 위에서

칸트가 신경 구성주의의 선구자라는 그릇된 생각은 19세기 이래로 오늘날가지 교과서들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110

 

칸트의 견해는, 우리 안에서 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생각하는지를 우리가 원리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11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뇌를 동일시할 수 있다는 명제는 우리가 비물질적인 영혼을 가졌고 그 영혼이 우리 안에서 생각한다는 명제와 마찬가지고 배제된다. 112

 

뇌들이 제각각 다른 의식 표면을 구성하고, 다라서 우리는 외부 세계의 존재조차 이런저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을 뿐 절대로 직접 알아낼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떤 자연과학적 진보로도 제거할 수 없는 오류 추론에서 나온다. 만일 의식의 본질이 정신적 호문쿨루스와 그의 사적인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연극 사이의 관계에 있을 따름이라면, 자연과학에의 호소는 궁지를 벗어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과학도 개별 과학자의 사적인 극장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할 따름일 테니까 말이다. 113

 

자기 경험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경험주의, 우리의 앎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이라는 - 이 맥락에서는 특히 감각 경험이라는 - 주장이다. 미국의 대중적인 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 크라우스가 말하는 <경험>은 감각 경험과 측정 기술, 그리고 이것들에 기초한 이론 구성의 조합인 듯하다. 우리가 이론에 기초를 둔 예측을 내놓고 실험을 통해 입증함으로서 실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세계 종교들에 맞서 벌이는 전쟁을 정당화한다. 현재 그의 주요 아군은 리처드 도킨스다. 크라우스와 도킨스는 <종교>를 고작 비합리적 미신으로, 자연의 작동 방식과 관련하여 명백히 틀린 주장들을 고수하면서 더 나은 지식을 모조리 배척하는 미신으로 이해한다. 철학자로서 나는 미신에 맞선 싸움에 당연히 일단 호의를 느낀다. 그러나 매우 부실하게 정당화된 철학적 입장,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자체로 미신인 철학적 입장에 기초해서 싸움을 벌이면, 미신을 그리 효과적으로 무찌를 수 없기 마련이다. 115

 

도킨스, 모든 종교의 핵심은 <신>이며 이 단어는 <<<우리가 숭배해야 마땅한>> 초자연적 창조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여긴다. 

 

세계 종교들은 근대적인 자연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에 발생했다는 점을 도킨스는 간과한다. 단지 도킨스는 시대착오적으로 자연 개념을 과거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적 사건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과 초자연적 설명을 시대착오적으로 맞세우는 것은 도킨스가 지휘하는, 역사를 잘 모르는 신무신론의 일관된 특징이다. 115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면,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 경험이 우리에게 항상 더 나은 지식을 줄 수 있을 터이므로 - 확정적인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컨대 아이들을 고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나 정치적 평등을 민주 정치의 한 목표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1+2=3이라는 것도 확정적으로 알 수 없을 것이다. 116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에서 나온다는 지식을 우리는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는가?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지식 주장은 감각 경험을 통해 수정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요컨대 경험주의는 자연과학적 가설이 아니다. 

 

내가 수 1을 세 번 적는다면, 곧 1,1,1을 표시한다면, 이 세 개의 표시는 모두 정확히 동일한 수 1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표시들은 제각각 다를뿐더러 수1이 아니다. 

 

또한 사물들의 다름과 같음도 그 자체로 보거나 측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철학자들은 선험적인 것A priori를 거론한다. 선험적이라 함은 모든 경험에 대해여 독립적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지식에 선험적 요소가 있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경험적 앎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이론적 개념들 - 이를테면 원인, 자연법칙, 동일성, 대상, 사물, 의식 - 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0

 

우리 자신이 의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안다는 경험주의적인 생각은 병적인 면모를 지녔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우리 자신이 의식이 있다는 우리의 앎이 틀렸을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포용하며, 따라서 그 생각에 따르면, 실은 우리가 전혀 의식이 없다는 것이 언제라도 밝혀질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적어도 내가 과연 의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아무튼 틀린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통찰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배후 이기도 하다. 

 

크라우스, 미래의 신경 화학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감각 경험을 통해서, 곧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말일까? 우리가 의식있다는 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말일까? 당신이 지금 의식 없다는 것을 실험들이 당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의식 없음이 언젠가 밝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다. 123

 

믿음, 사랑, 희망은 모두 다 환상인가?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실은 전혀 의식이 없다는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을 잃은 것에 대한 공포는 <워킹 데드>와 같은 좀비 영화들과 델레비전 시리즈들 뿐 아니라 1990년에 나온 고전적인 영화 <깨어남Awakening>에서도 표현된다. 124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가 의식이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면 의식이라는 개념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이른바 제거적 유물론이며, 이들(처칠랜드 등)의 기본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신적 상태들은 모두 환상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주 안에는 오로지 물질적 상태들과 과정들만 있기 때문이다. 

 

처칠랜드는 명제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문시한다. 왜냐하면 만일 명제적 태도가 존재한다면, 실재는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물질적 상태들과 과정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도달할 법하기 때문이다. 

* 명제적 태도란 우리가 사실과 관련해서 가질 수 있는 정신적 태도다. 걱정, 바람, 믿음, 앎은 명제적 태도다. 한 개인이 동일한 명제에 대해서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명제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명제에 대해서 의심이라는 명제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처칠랜드의 자기모순이다. 129

 

우리가 자기성찰을 통해서 익히 아는 대로의 인간 의식은, 만약에 바람, 믿음, 의견, 의심, 의도 등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사회학자들은 소통은 일종의 이중조율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의 의미는, 사람들은 항상 타인들의 믿음을 짐작하고 그 믿음과 어울리게 자신의 믿음을 정한다는 것이다. 

 

대체 왜 희망, 믿음, 의견, 의심, 의도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반박하려 들까? 우리 의식의 상당 부분이 환상이라는, 이 진정한 환상의 배후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명제적 태도가, 그러니까 우리 의식의 본질적 면모 하나가 환상이요 일종의 민간전승이어서 멋짓 미래에 신경과학의 증거에 기초한 사유 기법을 통해 제거되리라는 것은 철학적 주장이다. 이 주장은 허술한 전제들에 기초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전제들은 단일한 오류가 아니라 여러 오류들이며, 우리는 이 책에서 그 오류들 중 다수를 논하게 될 것이다. 132

 

하지만 그 오류들은 오늘날 경제가 발달한 산업 국가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자아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오류들이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경중심주의의 오류들이 바로 미신, 예속, 조작이며, 이 사실이 상당한 정도로 은폐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명제적 태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상당히 명백하게 터무니 없는 주장을 위장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위장을 위해 다양한 전략이 동원된다. 널리 쓰이는 한 전략은 간단히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들이대는 것이다. 인간 뇌, 신경 생물학, 예컨대 무엇이 사람들을 사람에 빠뜨리는지, 무엇이 사람들을 머물지 않고 가기로 결정하게 만드는지, 또 무엇이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행위하게 만드는지 연구한다. 134

 

합리적이고 목표 지향적으로 이기적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이미 타인의 관점을 접수한 상태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타인의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도 이용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이기성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며, 이타성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다. 이기성과 이타성은 윤리적 행위의 두 측면이며 서로의 조건이다. ... 우리는 누구나 이 삶을 단 한 번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삶을 우리의 삶으로서 의식 있게 영위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138

 

이 모든 것을 배경에 놓고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의식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편이 속 편하다는 판단이 설 만하다. 그점을 부정하면, 타인들도 아픔을 느낄 능력이 있는 생물이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잔인한 행위와 불의로 인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주관적 관점을 제거하고 순수 객관적 관점으로, 즉 언젠가 도달 가능하다고들 하는 - 인간 정신을 다루는 - 신경 생물학의 관점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인간적 자유의 요구 사항들을 고되게 짊어져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터이다. .. 실재를 그렇게 서술함으로써 우리는, 명제적 태도들을 품은 의식적 삶이 존재한다는 데서 비롯하는 모든 윤리적 요구들을 우리의 세계상에서 말소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139

 

아무튼 인간 사회가 언어화된 명제적 태도를 기반으로 삼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40

 

유기체에게 의식을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려면 유기체의 생물학적 조직성이 어떤 형태 혹은 수준이어야 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의식이 있으려면 당연히 (신경) 생물학적 토대와 여러 필수조건들이 갖춰져야 할 텐데, 그것들을 우리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므로, 어떤 생물이 정말로 의식이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윤리학과 철학을 위해서도 중요한 신경 생물학의 과제이다. 143

 

사춘기를 겪을 능력을 가진 가축이나 반려동물이 있을까? 내가 아는 한, 단 한마리도 없다. 

 

하지만 다른 동물 종들의 윤리적 자격은 그들이 특별히 정교한 명제적 태도들의 연결망을 보유했다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만약에 그런 연결망의 보유가 관건이라면, 우리는 젖먹이, 어린아이, 정신 장애인도 윤리적으로 존중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45

 

퀄리아 Qualia, 순수 주관적인 의식적 체험의 내용이다. 퀠리아의 예로는 색깔 인상, 맛 인상, 열 감각 등이 있다. 

 

의식의 두 측면.

1. 지향적 의식,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향성>이라는 단어는 <펼치다, 쪽 뻗다>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우리가 다른 무언가와 관계 맺는다는 점에 그 본질이 있으며, 외향 관점, 외부 지각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무언가로 향하고 그것을 숙고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을 그 무언가 위로 펼친다. 

 

2. 현상적 의식. 우리의 순수 주관적인 의식적 체험을 말한다. 이 체험의 내용이 바로 퀄리아 혹은 감각이다. 151

 

사람들은 퀄리아를 체험하면서 공개적으로 앞에 놓인 대상의 속성과 관계 맺는다. 무언가를 체험함과 무언가와 관계 맺음(= 무언가를 가리킴)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153

 

우리는 지향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의 차이를 여러 중요한 맥락에서 너무 쉽게 간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형 로봇들이 오직 지향적 의식만 보유했고 현상적 의식은 보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진정으로 의식이 있다고 간주할까? 인간형 로봇들이 지향적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로봇은 방금 거론한 포도주의 화학적 조성을 자기 내부에서 분석함으로서 그 포도주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는 옳은 진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산 성능을 높임으로써 로봇의 지향적 의식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근거로 우리가 로봇들에게 <의식 있다>라고 판정한다면, 그 판정은 정말로 정당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 그 로봇이 현상적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되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의 의식은 단적으로 필수적인 생물학적 전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사실을 의문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현상적 의식을 위해서는 절절한 유기 물질(특히 뉴런들과 그밖에 세포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유기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당히 조잡한 톱니바퀴 장치는 생물학적인 이유에서 현상적 의식의 토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현상적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다만, 이 사실은 인간 정신 전체가 진화적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과 <의식>은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 생물학은 정신에 대한 탐구를 완전히 포괄할 수 없다. 신경 생물학은 의식의 현전을 위한 몇몇 필수조건들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157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불합리한 인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오류가 끼어들기 쉬운 자화상을 제작하고, 그 자화상을 타인들과 함께 장엄하게 실행하고, 발전시키고, 그 자화상의 페해가 드러나면, 변경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교하게 터무니없을 권리, 반어적일 권리, 어떤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환상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어쩌면 그 타인 역시 나름의 환상을 추구할 테고). 158

 

예. 상품 소비에 대한 욕망, 사물에 대한 욕망... 우리는 그 욕망이 환상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환상을 떨쳐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이 환상을 통해서만 누군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지향적이며 이해관심이 없고 단지 지켜보기만 하는 의식이 있다면, 그 의식은 우리의 의식과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주위를 멋진 사물들로 채워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그 사물들에 비춰서 본다. 

 

요약하면 이렇다. <의식>이라는 용어는 지향적 요소와 현상적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가리킨다. 또한 의식을 위한 필요조건들 중 일부는 진화론에 의지하여 알아낼 수 있다. 현상적 의식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지향성을 의식으로 - 곧, 어떤 시스템이 일관되게 참된 보고들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스 시스템이 의식을 가졌다고 - 간주하는 것은 마치 물 분자가 산소와 수소의 적당한 조합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수소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물 분자는 H2O 분자다. 수소와 물 사이에는 아직 커다란 간극이 있다. 160 

 

데이비드 흄, 내적 체험의 형태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인상과 관념을 구분했다. 161

 

칸트,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다른 동물들고 당연히 개념들을 보유하고있다. 비록 그 개념들은 어쩌면 언어적이지 않고 따라서 미세 입자성의 수준이 우리의 개념들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164

 

의식은 오로지 지향적이라는 주장을 의식-합리주의로 명명하자. 이 주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의식-경험주의, 곧 의식은 오로지 현상적이라는 주장이다. 

 

의식-합리주의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순수하게 합리적인 준컴퓨터로 간주하는 반면, 의식-경험주의는우리를 체험 -욕망 - 기계로 여긴다.  이 두 주장의 조합은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서 떠돈다는 오래된 기독교의 가르침의 포스트모던한 버전이다. 165

 

의식-합리주의의 대표적 사례, 데닛 <지향적 태도>

. 퀄리아-제거주의

. 과학주의 ( 오직 자연과학적으로 보증되고 전문용어로 표현된 지식만이 진짜 지식이라는 생각)

 

우리는 인간 의식의 신경 생물학적 토대보다는 인간 의식과 인간 정신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과학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 아우구스티누스, 힐데가르트 폰 빙엔, 부처, 모세, 노자, 사포, 세익스피어가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보다 의식과 정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과학주의자들로서는 그야말로 난감할 테니까 말이다. 

 

인간 정신의 자기인식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의 신경 생물학적 토대에 관한 최고의 연구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사는 아예 거론되지 않거나 아니면 (리처드 도킴스 처럼) 생물학적 진화가 다른 수단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간략하게 재해석된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자연계에서의 유전자 돌연변이나 환경에의 적응이 세익스피어나 미분법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169

 

눈에 보이는 빛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전자기 복사 스펙트럼의 특정 구역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까? 왜 우리는 그 스펙트럼 구역을 다른 구역들과 구분할까?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색깔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색깔을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자연의 일부는 눈에 보이는 빛을 낸다고 서술할 생각조차 하지못했을 것이다. ... 우리는 오직 주관적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만 절대적 객관성이라는 이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174

 

우리는 생활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체 왜 우리는 생활세계를 벗어나기를 바랄까? 

 

수도원에서 발견한 우주.

짜집기 된 역사는 근대 과학, 특히 물리학이 종교적 미신에 맞서 싸웠다고 서술한다. 

 

뉴턴이 우주를 신의 감각 기관으로 간주했다는 사실, 브루노가 도미니크회 수도사였으며 끝내 그 신분을 유지했다는 사실, 브루노는 우주가 무한하다는 자신의 통찰이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사실, 빅뱅 이론이 한 수도사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 칸트도 대단히 종교적이었다는 사실 등은 은폐된다. 미신과 이성은 간단히 구분되지만, 종교와 과학은 그렇게 간단히 구별되지 않는다. 177

 

시간의 방향(시간의 화살)을 엔트로피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도리어 엔트로피 개념이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시간과 시간 의식이 어떤 관계인지는 여전히 시간의 철학이 다뤄야 할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잭슨은 퀄리아가 우주 안에서 인과적 힘을 발취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 이 견해의 배후에는 부수 현상주의가 있다. 일반적으로 부수 현상주의란, 정신적 상태들과 과정들 전체가 우주 안의 과정들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부수현상주의자는 정신적 상태를 순수한 부수 현상으로 간주한다. 정신적 상태들과 과정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자연의 운행에 인과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부수 현상주의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당신의 몸이 여러 내적인 정보 상태들에 처하고 결국 그 귀결로 신경 세포들의 특정 패턴들이 점화하는 것이다. 이 관점을 채택하면, 의식 모드에서 당신에게 퀄리아로 나타나는 모든 인상들은 소거된다.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상관없이, 당신의 몸은 오로지 자연법칙들의 조종에 따라 가게를 향해 운동한다. ... 이 사고방식에서는 기본적으로 온 우한 사건 계열을 발생시킨다. 그 사건 계열은 엄격한 인과율에 따라 한 원인에서 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다시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그 와중에 퀄리아들도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퀄리아는 결과를 야기하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부수적인 느낌의 출렁거림이다. 183

 

부수 현상주의를 둘러싼 이 모든 논쟁의 배후에는 우주가 인과율에 의해 닫혀 있으며 실은 퀄리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연법칙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이 주장을 일컬어 결정론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자유를 다루는 장에서 결정론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86

 

인간적 삶의 (윤리와 정치를 포함한) 큰 부분은 오직 퀄리아의 현실성을 감안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왜 한스가 가게로 갔는지를 내가 설명하려면, 나는 그가 갈증을 느겼다는 언급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는지는 이런 외적 관찰로 알아낼 수 없다. 우주는 <힘들에 의해 빈틈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장치>이고 우리의 퀄리아, 심지어 의식 전체는 우주의 운행에 어떤 인과적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은 실은 부담을 벗기 위한 환상이다. 이 환상의 요점은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회피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자연법칙들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기껏해야 우주에 한해서 타당하다. 이 경우에도 현재의 지식수준에서 우리가 우리 우주만이라도 전체적으로 굽어볼 능력을 확보했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지나치게 신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어 볼 만하다.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