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백_일홍 2024. 2. 19. 23:22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페터 비에리

 

목차

서문: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

1장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주체 되기/존재 자체로 목적 되기/도축장/그러나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무력감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굴욕 주기/내면의 요새로의 도피/권리 갖기/후견인 노릇/진심 어린 개입/타인과 그들의 개입에 대한 존중/종속: 부탁과 구걸/감정 구걸/내적 독립: 생각하기/내적 독립: 의지와 결정/내적 독립: 감정적 동요/내적 독립: 자아상과 검열/예속을 통한 굴욕/자아 인식을 통한 독립/치료가 필요할 때/일을 통한 존엄/돈

2장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주체끼리의 만남/개입하기와 거리 두기/인정/평등/전시/욕정의 대상/인간이라는 상품/무시/나랑 말 좀 하세요!/비웃음/알 권리조차 없을 때/조종/속임수/유혹/압도/치료/동정은 싫소!/독립된 주체가 서로 만날 때/상대방에게 미래를 열어주기/존엄성을 지키는 이별

3장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은밀함의 두 얼굴/타인의 시선/결함이란 무엇인가?/수치심의 논리학/수치심에서 굴욕으로/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사적 영역/내면 가장 깊숙한 곳/품위 있게 드러내기/품위 없게 드러내기/친밀함의 공유/배신으로 인한 존엄성의 상실/용기가 결여된 은밀함

4장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타인에게 거짓말하기/자신에게 거짓말하기/정직과 그 한계/사물을 이름으로 부르기/체면 지키기/어리석은 허언

5장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한계 짓기로서의 존엄성/변화하는 자아상/파괴된 자아 존중/희생된 자아 존중/분열된 자아 존중/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6장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자립적 도덕성/도덕적 존엄성/죄와 용서에서의 존엄성/벌: 파괴가 아닌 발전/절대적으로 넘어선 안 될 도덕적 경계가 있는가?

7장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삶의 의미/스스로의 목소리/균형을 유지하는 침착함/끝에서부터 거꾸로 보기

8장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타인이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탈출/스스로가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거부/스스로가 소멸해감을 바라볼 때: 날이 저물어감을 인정하기/죽음/죽을 수 있게 놔두기/삶에 종지부를 찍다/고인을 대할 때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서문 

내가 삶을 살아가며 경험을 쌓아갈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있었다. 왜 우리는 존엄성이라고 하는 삶의 형태를 만들어냈을까? 존엄성은 과연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걸까? 그러면서 서서히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사고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삶은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 그 원인은 안에도 있을 수 있고 밖에도 있을 수 있다. 존엄을 지키는 삶의 형태는 이런 위험을 견제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네 삶을 지탱해준다. 처참한 일이 일어났을 때도 단순히 거기에 찢겨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에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맞설 수 있는 특정한 태도를 부여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엄성 있는 삶은 그냥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아라, 하는 지침이 아니라 위험을 겪은 실존적 경험에 주어지는 실존적 대답이다. 15


1장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주체
. 경험의 중심체
. 경험의 주체
. 지각활동의 주체
. 법적 주체, 권리 

결정의 자유는 존엄성의 필요 조건이다. 그렇다면 충분조건도 될 수 있을까? 난쟁이 던지기 대회에 대해 판결을 내린 최고법원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결정의 자유는 그 하나만으로 존엄성을 이루지는 못한다. 비록 결정이 자발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그 결정에서 비롯된 행위는 인간 존엄성에 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법원은 여기서 자유에 선을 그은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보면,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그의 자유를 제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는 존엄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해가 깔려 있다. 존엄이란 각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존엄은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개개인에 관한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한층 더 광대하고 객관적인 것으로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즉, 삶의 전반적 형태라는 특성을 띤다. 난쟁이를 던질 때 위태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 전체적인 삶이다. 인간은 물질화·수단화되면서 굴욕을 당한다. 그래서 존엄성은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된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 36 

무력감
굴욕 

진심어린 개입
어린이는 존중받아야 할 권위나 의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경우 가 많다. 노인성 인지증이나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그러한 의 지나 권위를 상실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럴 때는 가도 되는 곳과 가서는 안 되는 곳, 먹어야 하는 음식, 복용해야 하는 약 등등에 대해 다른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다. 아직 권위가 형성되지 않은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것들이 존엄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아직 자라 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령으로 권위가 사라질 때에는 당 사자나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모두 가슴이 아프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분들과 상대할 때 최대한 조심하며 존엄성을 보존하도록 애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성에 기반을 둔 존엄과는 이미 다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선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다루기로 하겠다. 50 

종속: 부탁과 구걸 

부탁
도움을 받는 상황
의지, 의존
자존심이 상하는, 자존감과 긍지에 금이 간
구걸
자신의 존엄성을 내던지는 위험
감정구걸 

생각의 자립성, 독립적인 사고 

내적 독립: 생각하기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고하고 믿는 것들을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가치 있는 사상의 겉싸개를 두른 것이 때때로 싸구려 표어 에 불과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독립적이란 것은 공허한 말과 듣기 좋은 격언에 의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78 

고문의 피해자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제일로 끔찍했 던 것은 고통도, 몸이 찢기는 것도 아니었다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존엄이 공격받는 것이었다고. 그럴 때 구원은 단 하나, 말뿐인 자백을 뱉어내는 것이다. 81 

의지와 결정
감정에의 권의
자아상과 검열 

예속을 통한 굴욕
굴욕은 내 종속성을 악용하며 그 행위에 기쁨을 느끼는 타인이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굴욕이 된다. 마약 판매상이 약값을 전보다 높 게 부른 후, 흰 가루가 든 봉지를 손에 들고서 내게 내밀다가 내가 그것 을 향해 손을 뻗자 히죽 웃으며 재빨리 손을 거둔다. 90 

일을 통한 존엄
노동은 또 다른 의미로 내게서 소외된다. 내 자아상에 상반되거 나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일을 해야 할 때다. 무기를 만들거나 마약, 위험한 약물을 만들도록 강요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이 약물이 수많은 인 간의 목숨을 파괴할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강제로 생체 실험에 참여 한다든지 오직 이익만을 위해 멀쩡한 숲을 벌목한다든지 한심하고 위 험하기까지 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해야 될 때도 있다. 이런 일들은 내 존엄성을 망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그림을 동시에 그려볼 수 있 다. 누군가에게 예속되어 싫어도 할 수 없이 생체 실험을 강행해야하는 흰 가운의 의사와 스스로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학생들에 게 가르쳐야만 하는 교사가 있다. 근무가 끝난 후 그들은 편안하고 잘 꾸며진 집으로 돌아간다. 그와는 반대편에 화장실 청소부 아주머니가 있다. 그녀는 시끄럽고 눅눅한 단칸방에 산다. 이들 모두는 소외된 일 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 한 경우는 거기서 더 나아가 존엄성을 무너 뜨린다. 104


2장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타인은 동기를 배경으로 한 사건들을 경험하는 주체이며 이런 경험들은 결국 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이 보고서가 사실보다는 자아상을 표현하는 것임을 차차 알게 된다. 즉, 내적 검열을 거쳤으며 다른 사람이 볼 때 특정한 면이 부각되도록 고안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 안에는 윤색의 요소가 있으 며, 모든 자아상은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진정성의 구조를로 가득 찬 자기 설득과 자기기만이 들어 있는 것이다. 113 

친밀성
거리두기 

인정
평등 

전시
어린 시절, 어떤 장터에 기형적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전시되는 천막이 있었다. 도저히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몸통 둘레를 가진 뚱뚱이 여인 베르타, 손가락이 여섯 개인 남자, 샴쌍둥이 등이었다. 천 막 안에는 이상한 침묵과 정적이 감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중에게
서 말을 앗아간 것은 두 가지 요소였던 것 같다. 하나는 혐오감을 주는 기형 자체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기형적 신체가 돈의 대가로 전시된다. 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 을 할 수 있을까!” 그 말에 내가 대꾸했다. "우리도 들어가서 구경했잖 아요" 130 

욕정의 대상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품어볼 수 있다. 포르노 영화에 나오는 배우의 경우는 어떠한가? 피프쇼의 댄서보다 나은가, 못한가? 딱히 예술적이라고 할 수 없어도 어쨌든 어떤 연기를 하니까 낫다고 할 수 있을 까, 아니면 실제 욕망이든 거짓 욕망이든 자신의 욕망까지 노출한 채 나체를 보이니 더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133 

인간이라는 상품
암스테르담 홍등가 유리진열장 안의 여성 

동정은 싫소 

상대방에게 미래를 열어주기 

마찬가지로 사람 간의 만남에 있어서도 열린 미래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행위와 경험의 범위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권리다
누군가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면 고정된 기대 안에 그를 가두지 말아야 한다. 그에 대해 고착된 모습을 미리  고정 정해놓는다면 숨 막히는 부담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 누구나 마라톤 경기에서 물통을 지고 나르는 존재,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므로 이것은 당연한 권리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예측할 수 없고 일관성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힘든 것은 오래된 인간관계에서 레코드판을 돌리는 바늘이 한곳에 멈춰서 한 대목을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옛날에 하던 대로 언제나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 또한 관계를 해체시키는, 비존엄적 형태이다. 

존엄성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와, 필요하다면 그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는 각오를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허락하고 나 자신에게도 요구하는 열린 미래와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에 필수 불가결한 상대에 대한 충실성,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한다. 언제나 상대방의 영혼 편에 서는 충실성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실성과 열린 미래,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177


3장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은밀함의 두 얼굴
이 경험을 한층 폭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일부 분을 침묵 속에 숨겨놓고자 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욕망을 구분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 번째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무엇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약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예를 들면 신체적 기형이나 위험한 질병, 특정한 무능력, 과실, 부담, 엽기적 욕망, 세상으로부터 경멸받는 신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많은 엉뚱한 공상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공개될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폭로라고 부른다. 폭로에 수반되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폭로의 결과로 체면이 떨어지거나 인심을 잃을 수도 있고 경멸이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벽을 쌓아 사적 영역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이 들어오지 못하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만들려고하는 욕구에는 위에 나온 약점의 은페리는 면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가 또 하나더 숨어 있다. 이 동기를 별도로 이해하는 것은 존엄성의 인지와 상실이라는 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타인과 구분 지으려는 욕구이다. 스스로를 독립적인 개인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유리처럼 다 들여다보이는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감정의 변화를 항상 누구에게나 내보이고 싶지 않다. 약점이 잡힐까 봐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렇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체험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경험의 중심체다. 만일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이 봉인이 뜯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경계가 허물어 지면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결과적으로 존엄성도 타격을 입는다. 185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지금,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현존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방식도 총체적으로 다르다. 나는 나를 의식하며 나 자신을 가로지른다. 나는 나를 타인의 눈으로 본다. 186 

결함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단순히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결합이 될 수 없다. 신체적 기형, 말더듬, 중독, 기이한 습벽, 쓰레기 더미를 뒤져 야 할 정도의 비참한 삶,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 자살 기도의 경험, 배신한 경험 같은 것들은 단지 사실이 그렇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결 함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함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들의 범주에 속 하지 않는다. 결합은 가치가 개입된 것으로, 부정적이고 거부적인 판정 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결합은 악이다. 그러므로 결함은 있으면 안 되 고 보여서도 안 된다. 어떤 것을 결합으로 만드는 것은 검열에 의해서 다. 검열이 없다면 결함도 없다. 188 

수치심의 논리학
갑자기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다. 

내 결함이 다른 이에게 공개되는 것이 왜 그토록 두려운 걸까? 폭로에 대한 두려움의 정확한 대상은 무엇이며 당장의 수치심이 유발하는 강력한 정신적 붕괴 상태의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이다. 우리 자신의 체면과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신망을 상실하는 것이다. 결함이 드러나기 전에 나는 판단 능력과 가치관을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중대한 기만이 드러난 그날 이후, 또는 밀고자나 적의 끄나풀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192 

수치심이 왜 이렇게까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인가? 우리는 결함이 타인 앞에 한번 까발려진 이상, 타인의 시선 앞에 힘없이 널브러진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웃 사람들의 시선이든 법정 방청객의 시선이든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시선이든 다를 건 없다. 창피함 때문에 말로든 행동으로든 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칠 자신이 없다. 194 

수치심 체험의 파괴적 힘은 타인이 나의 과오를 단죄한다는 사실에 기인하 지만은 않는다. 정말로 파괴력을 가진 것은 내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굴복한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판결을 나 자신의 시선과 자립적 판단 능 력으로 맞서는 대신에 외부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 자신의 것으 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시각을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나는 나를 타인 의 눈으로 바라본다. 195 

수치심을 극복함으로써 존엄성 지키기 

타인의 시선이라는 압박과 위협적인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엄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로먼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좀더 일반화시킨다면 이렇다. 만일 자신에게 숨기고 싶거나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어떤 부끄러운 결합이 있다고 생각될 경우, 이 부끄러움은 타인의 판단 또는 자신의 판단, 둘 중의 하나에 기인한 것이다. 결점을 숨기고자 하는 동기는 남의 비난 또는 나 자신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현재 느끼고 있거나 앞으로 느낄지도 모르는 수치심과 관련해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는 투쟁은 바로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름을 똑바로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데서 출발 한다. 남들이 볼 때 결합이다. 수치다. 치욕이다 하는데 그 관점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내게 있는가? 201 

앞서 보았던 가상의 스토리에서 로먼이 걸었던 내적 행보는 실제로 동성애자나 극빈자, 병자, 장애인 등 많은 이들이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실천하고 있는 행보이기도 하다. 이들의 논리는 흑인들이 수치심과 굴욕을 떨쳐버리기 위해 외친 구호인 "블랙 이즈 뷰티풀!"과 일맥상룡 한다. "당신네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우리는 절대 부끄러워할 생각이 없거든! 그건 약점이 아니야!" 201 

사적 영역
타인이 사적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경계를 점점 안으로 좁혀 사적 공간의 반경을 줄여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은 남이 알게 되어도 어쩔 수 없겠군. 하지만 이거랑 이거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거야' 하고 마음먹는 수밖에 없다. 강렬한 불빛이 내게 쏟아지고 집요한 손들이 나를 그러쥐려고 달려들 때 나는 내면의 요새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나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요새 안은 좋다. 좁은 공간에 억지로 몸을 끼우고 자물쇠로 잠그고 나니 나는 조금밖에 보고 들을 수가 없다. 

육체를 욕정의 대상으로 팔아야 할 때, 즉 매춘을 하거나 포르노성 사진 또는 영화를 씌어야 할 때 이렇게 내면의 요새 속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은밀함의 경계가 무너질 때마다 매번 충격을 받지 않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다. 원래 몸은 사적 영역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 한 것이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줄어든 사적 공간의 성문 밖으로 내 육체를 내어놓아야 한다. 타인이 내 몸에 손을 대는 데 그치지 않고 내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마다 이런 묘기를 쓴다. 나는 육체가 놓인 곳과는 반대 방향인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를 규정하는 경계는 어느 누구도 육체를 통해 침범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간에 다시 긋는다. 그곳 안에서 나는 누구도 나에게 손을 댈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없다. 나 자신에 관한 한 내가 당사자고 내 존엄성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육체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내 몸 안에 없다. 도둑이 주인 없는 집에 침입하는 격이다. 내가 파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껍데기다. 그렇게 되면 그리 비참할 것도 없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나는 몸 에서 도망친다. 몸은 텅 빈다. 심지어 육체적 감각까지도 영혼이 없는 것처럼 잠잠하다. 누가 와서 내 존엄성을 빼앗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에게 "참 운도 없네, 나는 벌씨 집에서 나왔는데." 하고 말해줄 것이 다. 그들은 모두가 떠난 빈 보루로 쳐들어온 것이다. 요란하게 북을 울리며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진격해온 군대처럼 우습기 짝이 없다. 208


품위 없게 드러내기
한 가지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경우가 있다. 어떤 사실을 밝히고 믿게 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공개하는 경우다. 이때 사적 비밀에 대한 존중심은 계몽하고자 하는 의지, 다른 말로 하자면 올바른 세계관과 진실의 천명을 계도하려는 의지 앞에서 그 강도가 한풀 꺾인다. 옷이 다 벗겨진 채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철조망 뒤에 서 있는 인간들의 모습, 그 밖의 온갖 잔인함과 고통을 드러내는 장면들, 사지가 잘러나가거나 훼손된 몸이나 시신의 사진들. 자신이 당하는 처참함을 알리고 싶은 당사자들은 사진 찍히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사형당하는 장면이다. 너무나 인간 존엄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분노와 혐오감만 일어날 뿐이다. 알 권리와 계몽이라는 구실은 너무나 속이 보이는 알팍한 변명이다. 센세이션을 일으키겠다는 단순한 논리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존엄성을 상실하는 사람은 엿보는 자들이다. 이들은 타인의 생에서 흘러나온 비밀스러운 사건을 재미로 소비하며 상품으로 판매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박탈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지켜본 바 있다. 마찬가 지 예로, 허락 없이 남의 사적 공간에 살금살금 침입하는 자도 예외가 아니다. 사적 공간에 불쑥불쑥 처들어오는 품위 없는 해적질을 일삼는 막무가내 파파라치들이 그렇다. 망원렌즈로 무장한 그들은 천박한 행위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뿐만 아니다. 대중지의 1면을 장식하는, 누군가의 가장 사적인 장면을 찍은 사진들은 정말로 깊고 깊은 혐오스러움을 일으킨다. 그들은 사적 영역에 난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돈을 버는 방법 중 가장 치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것일 것이다. 224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을 아낌으로써 타인과의 사이에서 유지되는 간격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간격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의 경도를 조금 무르게 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 이다. 우리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좁혀야 할 거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다 알고, 그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결국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밖에 될 수 없다. 친밀성이 자아내는 신비한 마법도, 마법이 만들어내 는 행복도 없다." 245


4장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에마뉘엘 카레르의 책, 《적》 장클로드 로망 

기만 

타인에게 거짓말하기
로망의 거짓말이 존엄성을 해친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짓말 때문에 독립성이 무너졌고 진실한 만남의 가능성을 망쳐버렸다고. 그렇게 본다면 진실의 결여가 존엄성에 단지 간접적인 해만 입힌 것, 즉 결과에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어떨까.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총체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하나로, 진실과 너무나도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이미 존엄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것은 실수나 착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존엄성을 진실에의 의지와 함께 묶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이 느끼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진짜이게 하는 의지 말이다. 거기에 한 인간의 참됨이 놓여 있다고도 덧붙일 수 있다. 이 참됨을 이루는 것은 사실을 견디어내는 용기이다. 로망 이 존엄성을 상실한 것은 바로 이 용기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253 

진실에의 의지 
사실을 견디어내는 용기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자기 기만과 왜곡된 자아상 
자신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또 사실대로가 아닌 자신을 평가한다. 

우리는 아무리 옆에서 막강한 현실이 덮쳐와도 자신에게 익숙한 자아상에 끈질기게 매달린다. 진실을 알고 싶지않은 것이다. 

로먼, 성공하고 인기 많은 세일즈맨이라는 거짓말로 금방 복귀한다. 256 

로망에게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던 것을 두고 우리는 그가 자신의 참됨을 버림으로써 존엄성도 상실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아마 바로 그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삶을 기만하는 거짓말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엄성을 부식시킨다. 어떤 행위와 경험을 겪을 때 우리 자신이 진정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중 하나는 내가 내 인생을 살지 못하고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교적이고 친구도 많으며 경제적으로도 능력이 출중한 사람 으로 나를 보는 한 고집 센 독불장군으로서의 나를 볼 기회는 영영 없다. 한때 혈기 왕성할 때 혁명을 꿈꾸었던 성난 청춘으로서의 자아상을 버리지 못하는 동안 조용하고 안정된 삶을 향한 내면의 욕구는 무시된다. 나는, 내가 아닌 나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고 싶었던 인생의 길을 가지 못한다. 이처럼 삶의 기만은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살아갈 기회를 망쳐버린다.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를 가장 충격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257 

삶을 기만하는 거짓은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니고 단편적으로 기분에 따라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기만의 배후에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 무엇을 인정하기가 두려운 마음 특히 단절, 무능력, 실책, 외로움, 혹은 복수심이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같은 강력한 소망, 무엇이 옳고 그르며 악하거나 금지된 것인지 관련한 가치관 같은 것들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동기들은 거짓을 테마로 삼거나 점검해보는 시도가 있을 때 사력을 다해 격하게 저항하는 원인이 된다. 만일 내 안에 그러한 방어를 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생각해보아 야할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성은 내게 어떤 것을 바라는가? 그 사람에게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원칙이 아직 유효한가? 263 

베른하르트 빈터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엄격한 종교에 배여 살았던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효심 때문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놓치거나 실패한 인간이라고 가정할 때, 예를 들면 타인과 자신을 능동적으로 분리하는 태도라든가 성적 욕망의 실현 또는 자신의 욕구에 떳
떳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을 배양하는 데 실패했고 이러한 것들이 그의 직업 선택이나 배우자 선택,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의 면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자라와의 관계에서 쓰이는 말투와 관계의 온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얼마 전부터 자라에게는 분명히 정리되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을 꺼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강한 부정뿐이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베른하르트 부모님의 성격과 도덕적 무결성, 그들이 아들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의 희생양인 베른하르트, 이런 것들에 대해 중대한 거짓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베른하르트에게선 자신기만의 징후가 눈에 띄게 짙어갔다. 그것은 자기 능력의 과신, 자기만이 옳다는 과도하고 공격적인 신념,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특히 자기들 부부 사이에 대한 잘못된 해석 등이었다. 자라는 집을 잠시 떠나서 베른하르트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복잡한 감정들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것이 존엄을 지키기 위한 방법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64 

체면 지키기
(페로소나)
이런 식으로 체면을 지키는 데 일조하는 거짓말은 놀라울 정도다. 너무 속이 편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측과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즉, 양측 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용되는 것이다. 거짓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취급된다. 왜냐, 누군가 수모를 당한다면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가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거짓에 기반을 두었으며 국제법에 위반되는 전쟁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의 수하들이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댔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심지어 비판적 성향의 신문들마저도 거짓말 이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하기를 꺼렸다. 대신 'L.word'라는 말을 썼다. 시간이 지나 정말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거짓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시 전쟁에 반대했던 현 정부가 부시가 일으킨 전쟁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규명해주기 바랐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 또한 금기였던 것이다.274


5장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정체성
본인 이야기
자아상 

한계 짓기로서의 존엄성
자아 존중의 측면에서 본 인간의 존엄성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줄 안다는 것과 관련을 가진다. 이 존엄성을 가진 사람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큰 이익을 가져온다고 해도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 자신 을 존중하기 위해 이 한계 안에서 머무른다. 만일 선을 넘으면 자아 존중감을 잃게 된다. 자아상은 이 한계선을 포함한다. 그가 어떤 특정한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상과 맞지 않고 또 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아 존중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삶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일치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다. 어느날 자아 존중감이 지속되도록 하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의 존엄성은 균형을 잃게 된다. 2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상은 그저 자아상에 불과할 뿐이다. 즉, 특정한 배경과 문화적 조건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언제든지 변화 가 가능한 내적 기준이다. 자아상에 연결되어 있는 존엄성의 기준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이 당사자가 처한 문화적 환경에 매우 의존한 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염두에 두어야만 타인의 자아존중심과 그에 따르는 존엄성을 비난하며 자신의 사고를 강요하는 우를 피할 수 있다. 291 

희생된 자아존중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


조지 오웰의 작품에 나오는 윈스턴은 처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줄리아를 배반하고 자신을 배반한다.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경우는 소피의 경우와 다르다. 소피의 동기는 자기가 아니라 자식이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자아 존중을 희생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구하려는 가치가 크면 회생의 크기와 희생하려는 의지가 상실의 크기를 상쇄한다. 즉, 존엄성의 희생은 존엄성의 상실이 아니라 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도 들 수 있다. 이미 잃어버린 존 엄성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통해 새로운 존엄성을 찾을 수 있을까? 아 니면 애초부터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것일까? 이러한 고려도 없이 자 기자신을 구할 목적으로 경계선을 넘을 때 존엄성은 상실된다. 윈스 턴의 경우처럼 아무리 최후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실 은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경우이기 도 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피처럼 자기희생이 동반된 경우는 의지 의 또 다른 형태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내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어볼 수도 있겠다. 존엄성의 문제는 이제 다른 차원으로 이동되었으므로 나는 새 롭게 등장한 동기의 이타적 성격을 통해서 존엄성을 보장받으며 이전 에 존엄성이라고 지칭되었던 것을 더 이상 돌볼 필요가 없는 것인가? 심지어는 이런 질문까지 가능하다. 새로운 이타적 의지가 등장함으로 써 이전에 유효하던 존엄성에 관한 물음들은 효력을 잃을뿐더러 존엄 성의 상실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303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서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자기의 건강과 능력을 돌보는 것, 내적 강박에서 벗어나서 더 큰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삶이 가진 논리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 그리고 그 삶에 의미와 방향을 찾아주는 것 등이 있다. 실패를 한다고 해도 자아 존중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위의 것들이 가진 중요성을 더 이상 인지하지 않을 때, 그리고 결국 손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비로소 위협이 된다. 거기에는 그 어떤 불 변의 잣대도 없다. 그러므로 설사 어떤 일로 인해서 병이 든다거나 생명의 위협이 다가온다고 해도 누군가는 나는 이렇게 살 것이며 다른 삶은 원치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아 존중은 자신의 결정권을 인지하는 데 있다. 309


6장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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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병이 들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을 위해서 내 삶 을 한발 양보하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여행을 포기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거나 사랑을 단념한다. 이런 경우 내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평소와 같이 내 욕구가 아니라 타인의 욕구이다. 나는 그의 욕구와 필요 를 내 것으로 만들었고 내 욕구보다 우선에 둔다. 이것은 도덕적 행위의 표지이며 도덕적 인식과 배려의 핵심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이익이 내가 어떤 행위를 직접하거나 용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 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또 한 축이다. 317 

자립적 도덕성
자신의 욕구가 휘두르든 대로 힘없이 굴복하지 않으며 욕구의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즉 자신의 욕구 중 어느 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도덕적 결정의 경험.
거리 유지와 통제의 경험 
내적 자유 

도덕적 감수성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그것은 도덕적 친밀성이다. 이것은 각 주체들이 서로 조우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만남을 바탕에 깔고 있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만남에서는 각 당사자들이 내면적으로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다. 그들의 사고와 감정은 상대방의 사고와 감정을 인정하며 그들의 소망과 욕구에는 상대방의 소망과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주체들 이 서로 교차점을 만드는 데에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상대방의 경험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상대방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내가 만일 그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감정이입 능력을 활용하고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상대방의 처지를 상상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스스로의 경험과 행동에 대한 물음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대답은 또 다른 대답의 전신이 된다. 이제 우리는 타인의 삶에 연루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속된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관계, 즉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내포하는 관계가 되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320 

도덕적 존엄성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면 자신의 존엄성도 따라서 해를 입는 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방식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도덕적 진실성은 이런 의미 에서 볼 때 존엄성의 원천 중 하나이다. 타인과 더불어 그의 욕구를 존중하고 내 행동을 그에 맞춤으로써 도덕적 존엄성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형태의 존엄성을 취득한다는 뜻이다. 322 

241 

국가가 국민의 존엄성, 도덕적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률이 있다. 일체의 고문을 금지하는 것이나 난쟁이 던지기, 피프쇼의 금지 등이 그 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항공안전법의 조항 즉 여객기가 테러에 이용되어 빌딩으로 돌진할 경우에도 미리 쏘아서 격추시키는 행위를 위헌이라고 판결했을 때 바로 이런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판사들은 여객기 안 승객의 목숨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 을 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판결의 이유로 들었다. '존엄성과 양도 불가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논지였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해온 방향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여객기를 격추시켜야만 하는 사람의 도덕적 존엄성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에 출격했던 전투기 조종사에게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324 



1장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무력감을 즐기는 것을 굴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약상이 중독자의 애걸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을 때, 관중이 기형이나 수치스러운 약점을 가진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웃으며 야유를 퍼붓기까지 할 때,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 덕적 존엄성을 잃는다. 325 

죄와 용서에서의 존엄성 

그렇다면 나 스스로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잊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존엄성은 죄의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 는 상태가 되는 것, 오직 그 생각으로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앞 장에서 다뤘던 존엄성, 즉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엄성이 될 수 있도록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것,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기존의 우선순위를 점검해보는 것이 존엄성 있는 태도에 더 가깝다. 330 

넬슨 만델라는 정치범으로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반평생을 앗아간 백인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가 고통받았으니 너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포기가 행동뿐 아니라 감정 차원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화해하려고 하는 그의 의지가 지닌 존엄성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을 둔다. 그것은 지나간 부조리를 그대로 놔두려는 힘과 의지였다. 그에게 그런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한 개인의 갈등이나 고통보다 더 큰 무언가가, 즉 국가의 평화적 미래가 만델라에게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감옥에서 지낸 반평생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중대한 이유였다. 이와 같은 원리가 좀 더 작은 의미로 용서에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미래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과거의 부조리가 드리우는 그늘을 뛰어넘는 것이다. 계산과 정산을 일단 놔두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균형 감각이라는 관점에서의 존엄성을 다룰 텐데, 그 균형에서 관대함이 탄생하며, 앞에서 말한 용서는 관대함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배신을 당했다면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소중한 미래를 위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여는 앞으로의 한 걸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말에 동감할 때 존엄성이 바로 설 수 있다. 337 

벌: 파괴가 아닌 발전
벌에는 어떤 동기가 숨어 있을까? 벌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존엄성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피해자 고통의 상쇄
복수 혹은 보복, 가해자에게도 같은 고통을 주기
피해자의 직접적 보복
법의 심판과 구형을 통한 대리적 보복
강제적 교육, 교화 

이 마지막 동기(강제적 교육)는 존엄성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 단죄받은 이가 열린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에게 가해지는 교화는 결핍과 강제를 내용으로 하지만 주된 목적은 분별없던 지난날로부터 범법자 를 분리시켜서 자신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태도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비록 범법자이지만 그의 존재 자체도 목적으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교화가 얼마나 성공하고 실패하는지는 중요한 것 이 아니다. 우리는 냉소적 태도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정말 결정적 인 것은 범법자의 존엄성이 존재하도록 지켜주는 인격적 만남이 이 동기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복이 동기가 되어 지배적으로 작용할 때 이야기는 달 라진다. 고통의 상쇄에 대한 바람이 범법자의 존엄성을 망가뜨린다. 아마도 사형이 그럴 것이다. 수감자는 공포 속에서 아무 미래도 없이 돌멩이처럼 살아가며 국가에 의해 정해진 죽음을 기다린다. 가변적인 열린 미래가 주는 존엄성을 포함한 모든 존엄성을 그에게서 빼앗았다. 캘 리포니아에서는 어느 살인자가 선고받은 지 20년 만에 사형되었다. 그는 모든 폭력적 행위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고 동화책도 썼으며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찾아 노력했다. 주지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면하지 않았다. 실로 얼굴을 화끈거 리게 만드는 도덕적 존엄성 상실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340 

보복이라는 동기와 교화라는 동기 간에 일어나는 각축전은 모든 교도소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곳에서는 매일 그리고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서 재소자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있다. 

3장에서 한 번 등장했던, 낭시 교도소에서 수년간 재소자를 가르 쳤던 작가 필립 클로델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교도소는 공장 같았다. 갈아내고 잘게 쪼개지고 축소된 시간, 질식한 목숨, 제한된 움직임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생산하지 않는 커다란 공장 말이다." 그리고 교도소가 얼마나 지옥 같을 수 있는지 설명한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목욕하고 다른 사람이 눈 뜨고 있는 앞에서 똥을 싸고 다른 사람 앞에서 살아가고 세 명이나 네 명이 10평방미터도 되지 않는 공간을 나누어 써야 한다. 14인실에 세면대가 단 하나 있고 그나마 찬물만 나 오는 경우도 있다. 옆 사람의 잠꼬대를 들어야 하고 가위 눌림을 보아 야 하며 방귀와 울음과 욕설과 그 밖의 다른 것들을 견뎌야 하고 꼼짝 없이 강간당해야 한다." 341 

열쇠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인간이 조금씩 파괴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십니까? 피해자때문이 아닌, 국가에 의한 순수한 인간 파괴가 공무원의 손을 통해 행해지고 있습니다. 훗날 연금 을 받을 거면서도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들 아닙니까? 344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방금 몇몇 재소자들에게서 느꼈던 거칠과 잔인성을 잊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게 보장되어야 할 존엄성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들을 대면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대면할 때와 똑같이 대면하며, 그들을 그들이 행한 과거의 특정한 행위에 규정되고 그 행위 하나로 모든 것이 판단되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 존엄성의 뜻이라는 것을 우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것은 그들을 끔찍한 범 죄 이후에도 어쩌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앞날을 기 대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346 

"저도 압니다. 그렇게 떠드는 인간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들은 매일, 매해를 이 안에서 보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상상하지 못합 니다. 바깥세상과 아무런 소통이 없을 때 사람이 질식하고 썩어가고 퇴 화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무리 감방 안이라고 해도 한번쯤은 소리 내 어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잔혹 행위의 많은 부분이 상상력의 부족으로 저질러집니다. 상상력을 가로막는 것은 보복을 향한 무조건 적인 갈망입니다. 사형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그중 하나입니다. 국가는 이러한 원초적이고 지각없는 요구에 대항하고 사람을 공개적으로 단 죄하려는 이 같은 욕망으로부터 도덕적 존엄성을 지켜낼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 전체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질 때 그것이 가능해지겠지요. 최가 있는 사람의 존엄성이라 할지라도 존엄성이 사회적 관심사가 될 때, 보복의 범주와 격리와 징계의 범주 안에서만 사고하는 사회에서 벗어날 때 말입니다." 351 

절대적으로 넘어선 안 될 도덕적 경계가 있는가? 

사례,
경찰이 체포한 아이 납치법을 고문해서라도 아이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이의 부모. 

어쩌면 고통과 존엄성에 우열을 매기는 것이 옳지 않을뿐더러 난센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존엄성의 개념, 그리고 존엄 성에의 요구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하늘에서 뚝 떨 어진 개념이 아니잖아요. 신이 부여했다고 외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요. 존엄성은 누가 내리거나 부여한 게 아니에요. 그걸 만들어낸 사람 도그 요구로 발전시켜온 사람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에요, 삶이 포함 하는 위협과 힘든 기대를 더 잘 견디게 하기 위해서죠. 즉, 특정한 종류의 불행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잣대, 기준이 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지요. 그 불행이란 우리가 존엄성의 상실이라고 부르는 것, 하지만 물론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 전부터 존재 해오던 것이죠. 우리는 존엄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우리가 그것을 만든 이유는 사물의 평범한 궤도라고 부르는 것을 위해서였어요. 다시 말해 누구나 다 알고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상황과 사건이죠. 삶에는 정말 평범하거나 아무 어려움도 없는 그런 일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상실이나 고독, 질병, 죽음과 같은 것 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사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모두 '인간의 조건(condition humaine)'을 이루죠. 

하지만 때로는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해요. 전쟁, 테러, 자연재해 같은 것들을 통해서요, 그러면 그동안 익숙했던 존엄성의 잣대와 행위를 한정 짓던 경계가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 까.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죠. 한마디로 부적절하게 되는 거 예요.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잣대를 잊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절체절명의 난제에 빠진 상황하에서 잠시 정직 처분을 받은, 말하자면 뒤로 잠깐 제쳐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367 

베른하르트가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것이겠군. 막대한 고통과 자신의 도덕적 존엄성을 근거로 한다면 재난이 어느 정도로 심각해야 타인 존엄성 수호의 엄격한 원칙을 무효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아니면 다른 말로 해볼까? 장애물을 뛰어넘는 자의 도덕적 위기는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 하나가 납치될 정도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비행기나 핵 발전소처럼 수많은 생명이 걸려 있어야 되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과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요" 

"그건 바로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결정해요.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물론 모두의 의견을 사전에 미리 물어보거나 투표를 하 지는 못하겠지요. 당연히 점차적으로 우리의 목소리가 수렴되겠죠. 하지만 결국은 어떤 한쪽으로 공공의 판단이 형성될 테고 앞으로의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겠지요. 그것 말고도 법원의 판례도 존재해요, 우리, 여기서 우리란 이렇게 모여서 토론하는 몇몇 사람이 아니고요, 실제로 일어났거나 있을 법한 존엄성의 침해 사례에 대해 사고의 깊이가 있고 현명한 사람들이 뜨겁게 토론하는 폭넓은 논쟁을 말하는 거예요. 도덕적 위기에 근거한 존엄성 침해의 한계, 그것은 최대한도로 좁게 설정되어 야 해요." 368


7장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인생을 살다 보면 다른 것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은 인간 존엄성의 한 면을 이룬다.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게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일에 시간과 힘을 바치는 것은 자기가 누군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는 기준이 형성되기도 한다. 중 요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과 겉으로 보기에는 심각해 보이지만 곧 지나갈 중요성을 지닌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즉, 균형과 조화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인간 존엄성을 표현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371 

스스로의 목소리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


균형을 유지하는 침착함
대학에 있는 내 연구실 책상에는 액자에 든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푸석한 빰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흐르는 한 아프리카 남성의 고통받는 얼굴이다. 그 사진은 인간을 위협하는 온갖 것들, 더위와 흙먼지, 상처와 고통, 상실과 환멸, 슬픔과 죽음 같은 것들을 상기하게 해준다. 아 무것도 들지 않은 배를 움켜쥐고 따가운 더위와 자욱한 흙먼지를 마시며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것, 그리고 기후와 빈곤과 질병으로 인해 책을 읽을 가망도, 연주를 듣거나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도 허락되지 않은 단순한 한 덩어리의 육체로 한정 지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곰곰 생각해보게 한다.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기존의 언어로는 이 남자 의 고통을 완벽하게 표현할 길이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사진은 일상의 크고 작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내 자신을 잃어 버리지 말자고 다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386 

평상심,
이 말 안에서 두 가지 개념이 만난다. 첫 번째는 자신의 감정에 이리저리 튕겨 지는 공이 아니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아무것에나 감정이 상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도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우 리 스스로 결정할 권위를 가지기 바란다. 그런가 하면 또 그 반면에 무감동의 스토아적 이상이 뜨거운 감정을 억눌러 언제 어디서나 항상 평온하고 똑같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침착함을 '나랑은 상관없어' 식의 무신경이나 무관심과 혼동해서는 안된 다.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을 알아보는 안정된 판단력과 감성,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균형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어떤 일의 노예가 되지 않고도 그것에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능력, 즉 깊은 감정을 경험하지만 그 일이 가진 의미를 무한대로 키우지 않고 어느 일정 선에서 그치게 하 는 능력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걱정 근심에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들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깁니다. 지금 당장 우리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중대한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을 알고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런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389


8장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노화, 질병, 죽음
독립성의 상실, 친밀한 인간관계의 상실(친밀감과 애정 감각의 상실)
이 두가지는 존엄성을 위험에 빠트린다. 
죽음은 존엄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이 소멸해감을 바라볼때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자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밀어내어서도 안 되고 인간으로 인식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된다.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들올 독립적 인간으로 대하며 스스로의 삶을 운영할 수 있도록 능력을 자극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단 몇 시간이나 며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비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의 독립성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스스로의 자립성에 대한 감각이 결코 완전히 없어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상실의 정도가 많이 진행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기를 대할 때처럼 말한다거나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다. 그들의 존엄을 지켜준다는 것은 그러한 취급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맞선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들이 말이 어눌하고 이상하다고 해도 그 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는 말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빠뜨리면 안 된다. 반대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과 마음을 함께한다는 것, 유한한 인간들끼리의 연대감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친 일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403 

죽음 

이 책을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이 나온다. '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주제로서의 자립성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자신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이러한 능력을 존중 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한 인간의 독립성이 상실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자립성을 자립적으로 잃어버린다는 것, 자기결정권이 상실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해 여전히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모순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경험을 느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지금 이 순간 상실하고 있으면서 그 상실의 매순 간을 느낀다고 할 때만이 모순이 성립되는 건 아닐까? 즉, 최후의 순간 까지 포함한 상실의 매 순간을 느낄 때마다 나의 완전한 독립성이 수행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한마디로 모순이다. 이렇게 해서는 죽음과 관련된 존엄성을 영영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내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때 훗날 내 독립성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스스로 결정 한다고 해야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나머지 존엄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돌 연사나 사고사가 아닌 자연적인 죽음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죽음이 어떤 모습을 하길 바라는가? 418 

물론 죽음에 연관된 것은 익숙한 환경 하나뿐만은 아니다. 죽음은 사람과도 관련이 있다.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생의 전반을 살아가는 데 같이 힘쓴 사람들이다. 죽을 때 그들이 옆에 있었으면 하 고 바랄 수도, 또는 마지막 순간에 홀로 있고 싶을 수도 있다. 어떻든 간에, 그들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을 인생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작별 ㆍ인사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면 존엄성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작별을 고하는 것에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행위가 포함된다. 내가 그들과 함께 경험했던 일, 같이 해냈던 일, 잘되고 잘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용서를 구하고 싶거 나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제 곧 끝나는 삶 전체에 대해 명확함과 명쾌함을 얻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임종하는 자의 존엄성은 우리가 앞서 4장에서 이야기했던 진실성이라는 존엄성을 품고 있다. 421 

죽을 수 있게 나두기
불치병
의사의 의무
모든 치료법은 환자의 최종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환자의 존엄성과 법을 연결시켜주는 조치다.  

"하지만 당신의 생명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의사가 이렇게 항변한다. 환자가 말한다. "네.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고 내 죽음이죠. 어떻게 죽을지는 나 혼자 결정할 일입니다. 선생님이 의사로서 느끼는 생명 연장의 윤리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이 윤리 를 환자의 안녕보다 우위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의사의 윤리는 환자의 자유 결정권 앞에서 그 한계에 다다르기 때문이죠. 환자 스스로가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법적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더 중요한 것은 그 동기가 환자의 존엄성 존중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의 의지를 무시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명백한 간섭과 월권행위 가 됩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도덕성도 추락하는 결과를 낳겠죠.” 424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마친 의사인 저에게는 인간의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는 없습니다." 

"최고이자 불가침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에요. 이 존엄성의 핵심은 생명의 보호가 아니라 자유 결정권입니다. 선생님은 제 남편의 자연적 죽음을 막으려고 하지만 지금의 상태를 스스로 원한 사람은 제 남편입니다. 428 

"그럼 존엄성이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것도 뜻한다는 걸 그에게 일깨워야겠지요. 한정 없는 생명의 연장이 그런 의미에서 존엄성에 상충되는 것이라는 것도 말이오. 경험의 주체로서의 누군가가 소멸되면 그를 죽을 수 있게 놓아두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고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에 존엄성이 존 재하지. 누군가의 내부에 완전히 불이 꺼졌는데도 죽지 못하게 하는 것 은 부자연스럽고 비존엄적이오." 430 

삶에 종지부를 찍다 

어떤 사람, 
이제 충분히 살았다. 더 오래 끌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다른 동기가 있다. 미래가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431 

자신은 우울증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 하는 종교적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런 행위는 신성모독이고 죄악이었 다. 그러나 그는 그 사고를 이해한 적도 없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자기가 아니면 과연 그 누가 자기 삶의 주인이란 말인가? 목숨에 관한 이처럼 중대한 질문을 놓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대제 다른 무엇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433 

삶을 그토록 힘겹게 만드는, 그래서 인생을 더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를 없애는 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고통일까? 그것은 또 우리의 존 엄성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갑작스러운 충동에서 비롯된 자살이 존재한다. 

세네카의 예를 좀 더 다양하게 상상해보자. 고문을 피하고 줄리 아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감옥에서 목을 매는 윈스턴, 나치의 강제수 용소에서 전기 담장에 스스로를 던지는 수감자, 자본주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피고인 이는 모두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행한 자살이다. 때로는 존엄이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때도 있다.435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며, 그의 존엄성과 우리의 존엄성을 다 같 이 지키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그가 독자적인 의지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마지막이자 생을 마무리하는 의지가 독자 적인 의지가 될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의 말에 솔깃하거나 떠드는 소리 에 휩쓸리거나 교묘한 선동에 조종되지 않을 때만이 그의 존엄성이 보존될 수 있다. 437


베른하르트. 
알겠습니다. 최소한 개념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 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내 자유 결정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군요. '당신의 개인적 존엄성은 내가 믿고 있는 신이 주신 존 엄성에 비해 큰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자문해봅니다. '저 사람 은 자신이 저지르는 일을 이해하고 있을까?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 앞 으로도 절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뭔지, 게다가 시력까지 잃 어 이제 다시는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뭔가를 읽을 수도 없다는 게 뭔 지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그 무력감의 지옥 이 얼마나 지독한지 확실히 알고 있을까? 신이 주신 존엄성이라는 게 있으니 당신의 고통이 얼마나 크든 내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라는 그 의 말이 어느 정도로 가혹한지 상상이나 할까?' 하고 말입니다.441 

첫번째 의사
좋아요, 그럼 아까 말한 입장에서 백보 후퇴해보겠 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 신의 삶을 끝내는 것이 당신의 의지라는 것을 십분 이해한다고 칩시다. 또한 그런 당신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정도, 일말의 공감 능력도 결여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한다고 합시다. 한술 더 떠서 당신 의 고통을 차마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내 경우와는 달리 특정한 종교 적 신념을 가지지 않은 누군가가 당신을 도와주려는 상황을 다 이해한 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 자신은 절대로 맨 마지막 과정 당 신에게 독이 든 주사를 놓는 일을 손수 실행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없 다고 해도 차마 그 일만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445 

베른하르트 
왜 꼭 그래야만 합니까? 생명 유지가 고통을 의미할 때도 그래야 합니까?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