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타자들의 생태학

백_일홍 2024. 3. 30. 08:09

타자들의 생태학

 

필리프 데스콜라 

 

 

 

옮긴이 후기(차은정)

 

2.자연이라는 관념적 구성물


데스콜라는 아마존의 부족 세계를 참여 관찰하면서 '자연'이 인간 외부의 주어진 환경이라기보다 근대유럽의 과학적 사고에 의해 객체화된(objectified) 관념적 구성물임을 깨닫는다. 아마존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자연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서구에서와 달리 인간과 비인간이 분절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인격성 (personality)의 범주 또한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추아르 신화에서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추아르어로 '완전한 사람'을 뜻하는 '펜케 앤츠(penke aents)'로 불린다. 지금도 아추아르 사람들은 동식물이 이러한 인격성을 부분적으로 상실했다해도 인간 동료와 똑같은 사교성(sociability)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집과 숲과 강이 마치 메트로폴리탄의 건물과 도로와 통신망처럼 다양한 부류의 존재들이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시공간적 연결지점으로 기능하는 인공시설로 간주한다. 즉 아마존의 자연적 표상으로서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원시림'은 아마존 부족에게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어진 객체로서의 자연이라는 관념은 근대인의 사고에 국한될 뿐이고, 이것을 잣대로 세계 곳곳의 사고를 재단하거나 그 속의 존재들을 분류할 수는 없다.

 

사실 자연이란 근대인의 고유한 관념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비서구의 부족사회를 연구한 몇몇 인류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그렇지만 영국의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가 논한 것처럼, 인류학자들은 의식하든 안 하든 비서구에 관한 민족지에서 '문화적으로 인식된 자연'과는 별도로 '인식 너머의 진짜 사연'을 논해왔다는 것이다(표 1 참조), 다시 말해 서구 인류학자들은 '문화적으로 인식된 자연'을 문화와 분절에서 자신의 의도적인 세계에 포섭해온 것에 반해 비서구 사회에서는 그러한 분질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 너머의 진짜 자연'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왔다는 것이다(표2 참조).

데스콜라가 보기에 이러한 분석 들은 인류학자 자신이 자연 없는 비서구 사회를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근대 우주론에 침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학문으로서 인류학은 19세기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이 확립된 결과로 등장해서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내내 이원론적 기획에 충실하면서도 그 분열을 봉합하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인류학이 이원론을 상대화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데스콜라는 이원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연구방법론을 개발하려 했고, 인간과 비인간 간의 다양한 관계와 실천의 방식을 존재론적으로 존재의 자질, 역량, 위치 등등의 측면에서 파고들었다. 여기서 비인간은 동식물, 죽은 자, 정령, 광물 등의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데, 비인간 존재를 분류하는 질서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와 그 실천까지도 지시하는 일종의 우주론적 준거 틀로 작용한다. 근대인이 우주론적 준거의 기준을 인간에 둔다면, 비근대인은 그 기준을 인간에 두지 않는다. 이처럼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근대세계까지도 아울러서 인간과 비인간 간의 다양한 관계와 실천을 이해하는 분석 틀을 비교인류학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데스콜라는 서구 인류학에서의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적 사고를 분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러한 사고를 상대화할 수 있는 인류학적 접근방법으로서 인간과 비인간 간의 다양한 관계와 실천을 파고든다. 여기서 비인간은 동식물, 죽은 자, 정령, 광물 등의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데, 비인간 존재를 분류하는 질서 자체는 서구에서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이 구성물은 보이는 세계에 대한 표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의 관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의 실천까지도 지시하는 일종의 우주론적 준거 틀로 작용한다. 또 서구의 자연이 세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준거 틀의 배경에 놓인다면, 비서구의 수많은 인간집단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구성하거나 사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연과 문화를 대립적으로 사고하는 이원론은 서구에 고유한 관념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자연과 문화를 이원론적으로 사고하는 서구까지도 아울러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다양한 방식의 관계와 실천을 이해하는 모델을 비교인류학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제기된다. 167

데스콜라는 1983년 에콰도르 키토(Quito)에 소재한 폰티피시아 가톨릭 대학(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 del Ecuador)에서 처음 대학교편을 잡은 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방문연구원을 거쳐 1987년부터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조교수와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관한 비교인류학을 주제로 매주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실천의 이성: 불편성, 보편성,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연구집단을 조직하여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갔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자연의 인류학' 전공을 개설하여 석좌교수를 역임할 때에도 그의 문제의식은 초지일관 서구의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을 별개의 존재론적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는 이른바 '관계의 생태학 (écologie des relations) '이라고 그 자신이 명명한 실천적 관계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있었다.

3. 관계의 생태학으로서 네 개의 존재론

그리하여 마침내 데스콜라가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에서 제안한 '관계의 생태학'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와 불연속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일원론적 인류학을 지향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 각각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위계화하는 서구의 이원론적 도식을 일원론적 관계성으로 통합하면서 지구상의 모든 존재론을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는 관계의 동일화와 차별화의 기제로서 분석하고 분류한다. 이 속에서 타자의 문제는 타자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의 문제이기에 앞서 자신과 타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속성인 내면성(intériorité)과 신체성(physicalité)의 측면에서 자신과 타자가 연속적이거나 불연속적이라는 데에서 그 경계가 설정된다. 데스콜라는 이렇게 식별된 '관계의 존재론'을 자연주의(naturalism), 유추주의 (analogism), 애니미즘(animism), 토테미즘(totemism)의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168

우선 근대유럽의 존재론으로 규정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살펴보자. 자연주의는 우리가 흔히 과학적 사고방식이라고 간주하는 존재론으로서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의 법칙이나 원리에 의해 스스로 작동하는 자연의 영역을 암묵적으로 전재함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합목적적 필연성의 장인 물리적 세계의 자연은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또 인간의 피부색에 상관없이 자연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신체에 적용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 보편성은 연속성으로 인식된다. 자연주의에서 지구 반대편의 생전 모르는 누군가를 나와 동질적인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은 나와 그가 같은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인간적 세계의 문화와 그 문화의 세계인식은 보편적이지 않다. 문화는 이러한 자연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인간종의 독특한 특질에서 비롯된 인간의 지식과 활동에 의한 결과물을 뜻한다.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나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와 그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나와 내 옆의 반려견은 자연의 법칙에 귀속되는 유기체적 개체라는 점에서 동질적이지만, 반려견은 인간사고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와 다르다. 자연주의가 근대인의 상식과 과학적 원리의 기반을 이루는 한 근대인의 타자 및 세계에 대한 관점은 자연주의가 결정한다. 그렇지만 자연주의는 근대유럽이라는 특정한 역사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연주의를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근대유럽이 세계의 지식패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169

반면 서구 인류학자가 일찍부터 저 진실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도 자연주의가 등용되지 않는 비서구의 수많은
사회를 접촉하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서구 사회에서는 내 옆의 동물을 지구 반대편의 인간보다 나와 더 동질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또 비인간 동물이 인간 사회만큼 사회적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보통 문화적으로 '혼이 있다'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혼이 있는 비인간 동물이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서 비인간과 인간의 신체적 차이는 관계 맺음의 조건일 따름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신체성은 불연속적이지만, 그 내면성은 연속적이며 동질적이다.

데스콜라는 이러한 존재론을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규정한다. 애니미즘은 타자와의 관계식별에서 자연주의와 정확히 대칭적이다. 자연주의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신체성이 같으나 내면성은 다르다. 애니미즘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내면성이 같으나 신체성은 다르다. 한편 비인간도 인간만큼 사회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존재론에는 토테미즘(totemism)이 있다. 토테미즘은 비인간 동식물의 여러 부류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로부터 각각의 인간집단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를 상동적으로 특징짓는다. 다시 말해 동식물 간의 부류-'부류'는 자연주의로 번역하면 '종'-의 차이는 부족, 종족, 하위종족, 씨족 등등의 차이와 상동적이다. 이러한 토테미즘 사회에서는 인간집단과 그 집단에 대한 비인간 동물의 대응물 토템은 내면성과 신체성 모두에서 연속적이며 동질적이다. 토테미즘에서 비인간은 인간집단의 분절적 다양성을 표상한다. 데스콜라가 제시한 마지막은 내면성과 신체성 모두에서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론은 유추주의(analogism)이다. 그러므로 유주주의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불연속적인 관계는 유비와 유추를 통해 이해되며 자연주의보다 더욱 강력한 이원론적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우주론은 세계를 구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각각의 인간 사회가 각각의 우주론에 하나씩 대응된다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 사회 내에서도 복수의 존재론이 가능하며 하나의 존재론이 또 다른 존재론으로의 전환이나 생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데스콜라의 우주론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다양한 존재론 속에서 타자의 범주를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확장할 때에 그렇게 확장된 비인간과의 관계에서 더욱 다양한 실천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고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인간과 친족 관계를 맺듯이 이번에는 비인간의 포식 관계가 인간 사회로 전이된다. 이를테면 아추아르족과 같은 애니미즘 사회에서는 사회적 실천의 기본범주를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통해 사고한다. 여자들은 밭의 작물을 자식처럼 다루고 남자들은 수렵 동물이나 그것의 주재자와의 관계를 혼인에 대응한다.

인간 동료들간 사회성의 형식들이 수직적(위계적) 혹은 수평적(평등적) 관계에 한정된다면, 비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형식들은 훨씬 더 중층적이며 다각적으로 변모한다.

위의 표에서 왼쪽은 등가적 관점 사이에서 어떤 가치의 대칭적이거나 비대칭적인 이동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비등가적 관점 사이에서 비등가적 행위를 통해 관점의 행위자들 간의 유전적, 공간적, 시간적 연결이 창출됨을 나타낸다. 표의 왼쪽에서 교환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상호대가를 요구하는 대칭 관계이며, 포식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부터 가치 있는 어떤 것-생명, 물질,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취하는 비대칭 관계이고, 증여는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호혜성을 통해 통합을 이루는 가장 직접적인 관계 형식이다. 포식이 '빼앗는다'라는 부정적인 비대칭의 관계라면, 증여는 '내어 준다'라는 긍정적인 비대칭의 관계이다. 이처럼 타자의 범주가 비인간 존재까지 아우르면, 관계 형식의 사회성은 더욱 풍부해진다.172

4. 우리의 자연으로 나아가는 인류학

아마도 데스콜라가 서구의 이원론을 하나의 우주론으로 배치하면서 내면성과 신체성이라는 새로운 식별양식을 제시할 때에 우리는 그것이 또 다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비서구의 '야생의 사고'를 그것과는 독자적인 사고방식으로 논한 것에 대해 자크 데리다가 그 논리화의 구조가 서구의 사고방식에 근거한다면 레비스트로스 또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그래서 데스콜라는 이원론을 인식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형식과 실천방식의 문제로 접근하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해 지구상의 다양한 존재들의 관계적 삶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고, 관계적 앎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정령, 죽은 자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존재의 실천을 조직하는 '삶의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존재론은 그 존재론의 존재들이 실천적으로 관여하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고 말한다. 다변화하는 21세기의 지구환경 속에서 자연주의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온 근대유럽 중심의 세계질서는 새로운 중심적 질서로 대체되지 않는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개인과 집단은 이제 물질, 과정, 표상 사이에 흩어진 채 나타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존재론적 지위와 행동 역량이 다변하는 다중적 개체 간 관계의 제도화된 표현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173

지금 우리에게 데스콜라의 존재론적 분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분류 중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구성물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의 첫 관문을 여는 열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화를 통해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에게 자연 자체는 혼종적이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유럽에서 자연은 17세기 이전 신이 인간에게 베푼 '하늘'과 '땅'으로서 신의 권능이 발현되는 모든 곳을 뜻했지만 17세기 이후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영역으로 진입하여 인간에 의한 과학적인 실험과 탐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즉 자연은 인간 이성의 진보가 실현되는 모든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의 자연은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입된 것이다. 본래 '자연(自然)'은 노자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위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뜻했으며,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적인 용법보다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로 정착하면서 한자문화권 본래의 뜻이 아닌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어의를 갖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 '자연'은 주객이 하나를 이룬 상태라는 것인데, 이 말은 처음부터 주(主)와 객(客)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추아르 사람들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지 않듯이 우리의 자연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물과 기계는 마찬가지라는 자연주의를 이제야 넘어서서 동물도 생명이므로 인간과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서구의 환경주의를 우리는 벌써 '인간과 비인간을 구획하지 않는 생명존중 사상' 속에 간직했을는지 모른다. 데스콜라가 인간과 비인간의 가치를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근대유럽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관계의 생태학을 주창하는 것은 서구 인류학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서구의 인류학이 인간 이성이 아닌 혼이 깃든 생명 그 자체의 가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태학적 관점을 제기할 때에 우리는 이미 생명이 생물학적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사고를 우리 스스로 회복하는 것에 우리 자신의 인류학이 있지 않을까?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