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백_일홍 2024. 6. 25. 07:26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부제, 성장이 멈춘 시대, 행복할 가능성은 없는가

 

신승철

1부 정동의 약속, 공동체라는 미지의 대륙

피가되고 살이 되는 밥은 하늘이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해 먹지?" 하는 질문은 저에게는 아 주 커다란 문제, 생명의 자기생산이 갖고 있는 영성적이고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문제로 다가옵니다. 밥은 여전히 하늘이기 때문에. 60


남편은 남의 편인가?

우리에게는 정동노동이라는 개념보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합니다. 사실 돌봄은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등과 함께 정동노동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지요. 어느 협동조합에 서 돌봄노동을 강의할 때입니다. 저는 가사노동이 사랑할수 록 사랑이 증폭되는 정동노동이냐, 아니면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감정노동이냐를 물었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주 부들은 주저하지 않고 감정노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주부들의 불만이 폭발했 습니다. 왜 정동노동을 여성만이 해야 하는 것이죠? 돌봄과 정동노동은 여성 불평등의 상징 아닌가요? 등등으로 말이지 요. 다시 말해 가사노동은 여성 불평등의 근원이고, 감정노동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주부는 남편이 '남의 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의 한 여성 페미니스트가 주장한 '가사노동에 힘 금 지급을!'이라는 테제는 가사노동을 극단적인 감정노동이 자 자본주의의 재생산노동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가사노동 에 대한 미지급분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비밀이라는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돌봄 노동으로 공동체를 자기생산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보다 돌봄노동이 더 유구한 역사를 갖습니다. 오래 전부터 정동노동은 지속되어 왔으니까요. 즉, 타자생산으로 서의 자본주의 재생산이 아닌 자기생산으로서의 공동체의 돌봄도 공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성에게만 이러 한 돌봄노동, 정동노동, 살림을 책임지우는 사회구조에 문제 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돌봄의 사회화는 새로운 사회적 어젠다가 되고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노인을 돌보고, 장애인을 돌보 는 모든 돌봄노동을 여성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64


텔레비전은 고장 한 번 나지 않았고,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지요. 아버지에게서 텔레비전의 소유권을 넘겨받았지만, 텔레비전 주위와 곁, 가장자리에는 어머니의 정동노동이 숨어 있던 셈입니다. 물론 남성의 시각에서는 사물의 본질인 소유권을 남성이 갖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성의 시각 에서는 사물의 곁에서 서식하는 정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 하겠지요, 사실 세상의 궁극과 본질, 존재 이유를 묻던 철학, 즉 형이상학은 지극히 남성적인 철학입니다. 대신 본질이 아닌 작동,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서식하는 사랑, 욕망, 정동, 신체, 감각에 대한 논의는 여성과 소수자의 철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본질과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이것은 내 거다' 하고 규정(definition)하는 상품 질서의 남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사물의 다소 모호한 곁에 있는 정동과 사랑에 주목하면서 '네 것일 수도, 내 것일 수도'라는 흐름(flux)의 논리를 갖는 증여와 호혜, 돌봄의 여성적인 논의에 주목할 필 요가 있습니다. 66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사물의 결과 가장자리에 들러붙어 있는 마음, 다시 말해 정동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 다. 저는 그것을 '엄마표 사물명상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물의 곁을 닦고, 쓸고, 어루만지고, 정리하고, 정돈하는 과정에서 어떤 마음이, 즉 정동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변기를 닦을 때는 더러운 때나 자국 같은 마음이 정화되는 정동을 가질 것이고, 식기를 닦을 때는 생명살림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책을 정리할 때 지혜를 만드는 정동을 갖게 될 것이며, 빨래를 갤 때 조화와 균형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세면대를 닦을 때 위생과 섭생의 정동을 갖게 될 것이고, 물건을 정리할 때 나의 주변을 늘 정리해 두는 정동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7


삶의 이유는 정동에 있다!

사실 철학에서도 정동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안경 세공일을 하던 철학자 스피 노자입니다.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affect)를 얘기하면서 정동의 비밀을 처음으로 파헤쳤지요. 그가 바라 본 정서 혹은 정동은 지극히 관계 속에서 자기원인을 갖는 감정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정신과 육체 능력을 고양한다면 기쁨일 것이고, 무능력과 예속에 사로잡 히는 관계라면 슬픔일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는 정서는 감정 이나 기분과 달리 자기원인이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이유를 말합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삶의 이유는 자연과 우주, 생명의 진실인 생명력과 활력이 불 러일으키는 사랑과 욕망, 정동 자체입니다. 즉, 우리가 사는 진정한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욕망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과 자신의 돌봄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과 생명의 본성과 자기원인과도 일치한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삶의 이유를 굉장히 이상적인 질서나 혁명, 해방된 사회 등으로 멀리 저기 저편의 목적으로 바라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의 사랑이, 아내의 돌봄과 정동이, 저의 돌봄과 정동이 살아가는 자기원인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일상의 반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을 뻔하고 비루하게 보면서 저기 저편을 여전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자기원인이자 삶을 만드는 원천이 정동, 사랑,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 서부터는 하루하루 매 순간을 절실하게 사랑과 정동의 자기원인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인터넷이나 매체 를 통해 유명인이나 연예인 등의 화려한 삶을 들여다보고 선 망하면서 저기 저편을 바라볼 수도 있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만들 혁명을 통해서 저기 저편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 한 사람만이 저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제가 사는 이유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동과 사랑, 욕망 이 던지는 지금-여기-가까이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70


비폭력 공감 대화 속으로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2011, 한국NVC센터)에서는 대 화 상대를 비교하거나 평가하거나 폭력을 부추기거나 깔보 거나 하는 일상 대화법의 문제점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공감하는 태 도 속에서 권유와 청유, 부탁, 배려, 감사, 교감, 돌봄, 사랑, 수용, 신뢰, 정서적 안정 등의 대화법이 가능하다고 진단합 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저 자신이 굉장히 부끄러웠습 니다. 일상의 대화에 숨어 있는 권력담화나 폭력과 증오의 논리, 경쟁심리, 혐오발화(嫌惡發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남을 대상으로 보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의 일부로 보고 상대방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니까요. "너의 자리는 없어! 너는 틀렸고 옳지 않아!" 하고 내뱉는 순간, 그것을 듣는 사람은 심리적인 궁 지에 몰리고 결국 폭력과 증오는 스멀스멀 종양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87

비폭력공감대화는 공동체를 미리 전제한 혜겔주의도 아니고, 공동체를 와해하는 포스트모던 사상도 아닌, 공동체를 구성하는 실천적인 과정에 주목하는 대화법입니다. 물론 대화방법으로 공동체가 구성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향해 눈과 코, 귀, 피부 등 감각을 열고 언어사용의 문제 에 국한하지 않는 전반적인 교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비폭력공감대화는 상대방의 자리를 내 안에 만 들어 놓고, 공동체가 늘 구성되는 과정을 설정하고, 공동체 에서 많은 문제의 해법을 찾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92



2부 가난, 저성장 시대의 또 하나의 선택

소비를 줄이면 욕망도 줄어들까
제로 소비의 삶, 충만한 욕망

그런데 저에게 소비란 멈추는 것, 고정되는 것, 기득권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우리의 삶과 욕망, 정동은 흐르는 것, 순환하는 것, 도주하는 것이지요. 110


욕망을 유죄하던 기존 운동들

"자본주의가 성장한 것에는 너의 욕망도 책임이 있다."

어느 선생님이 세미나에서 한 발언은 저를 경직시켰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갑자기 젊은 사람들이 세미나에서 슬금슬금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욕망을 유죄 하는 방식은 1980~90년대 생태주의자들에게 유행처럼 번 졌던 화두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욕망=자본주의적 욕망'이 라는 등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저는 당시 굉장히 심각한 의문 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유죄하고 위기의 원인을 개인 책임으로 만드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욕망은 절제 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당시 제가 "욕망, 욕망, 그래도 욕망"이라고 말하고 다녀서 후배들은 저를 욕망주의자라고 도 불렀습니다. 저에게 욕망은 라이히 박사가 말한 대로 신체에서 기원한 생명 에너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저는 절대 계몽적이고 금욕적인 생태주의자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하기도 했지요. 115


우리는 모두 도주자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소비 없는 욕망의 영역도 분명 존 재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유행하는 미니멀리즘도 소비 없 이 충만하고 풍부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입니다. 만약 소비를 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고, 스토리가 있으며, 대안적인 소비만을 채택한다면 그때는 말이 달라집니다. 욕망은 도주하면서 여러 스토리를 만들어 냅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도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하자!"고 했다지요. 욕망의 도주선은 생산적이고, 풍부하고 충만한 삶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원하는 분자적 욕망을 물적인 소비로 환원하려는 책략을 넘어서 욕망은 생명과 자연, 우주를 향한 도주선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면 욕망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욕망이 충만하고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셈입니다. 120


큰일보다 작은 일에 행복을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다 보면 작은 행복을 느낄 만 한 일들이 많습니다. 저희는 범위한정기술이라는 방법에 따라 삶의 영토를 극도로 축소하고, 외부의 소식이나 영향을최소화했습니다. 범위한정기술은 현상학에서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도 나타나는데, 앎과 지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일단은 삶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인식의 기 법입니다. 52

어떤 사람은 작은 행복이 찾아오는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삶이 비루하고 뻔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 여러 시간 앉아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삶에서 느낀 부분은 우리의 작은 욕망이 우주, 생명, 자연의 방향성과 일치하는 순간에 느끼는 것이 바로 행복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근대철학자 스피노자에게는 '영원성'이라는 개념이 그것이지요. 즉, 자신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어우러 질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의 욕망이 생명의 욕망과 합일되고, 자신의 신체변용과 욕망이 우주와 자연의 변용 과정과 일치함을 느낄 때 영원성이라는 합일의 순간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말한 지복, 즉 행복이 찾아오지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것이 작은 행복이냐 큰 행복이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고양이가 울어 대서 찾아가 물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화장 실을 비워 주고 그런 다음 고양이가 배를 보이고 발라당하 면서 좋아하면 작은 행복이 슬며시 찾아옵니다. 고양이의 욕 망과 저의 배려와 욕망이 합일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154

작은 행복은 각박하고 바쁜 일상 중에 시원한 사이다처럼 쿨한 만남으로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삶의 작은 영토에서 이루어지는 내 안의 생명과 자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를테면 식물과 동물, 자연과 어우러져 자신 안의 생명과 자연인 욕망이 합일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전망해 봅니다.   156



3부 생명,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

생태계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

 저는 자연이 문명의 외부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내부에 들어와 있어서 파괴되지 않도록 돌보고 보호 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엄밀히 말해 현 시점에 서 자연주의는 생태주의가 아닙니다. 177


개체인가, 연결망인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무 50그루가 이룬 숲이 항상성이 강할까? 따로 떨어진 가로수 100그루가 항상성이 강할까?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50그루 나무로 된 숲이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렇습니다. 생태계는 부드러운 내부 환경을 조성하여 외부 환경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요. 그런데 생명 역시도 외부와는 닫힌 내부 환경을 조성하여 항상성을 띱니다. 칠레의 인지생물학자 바렐라는 이것을 작업적 폐쇄성이라고 말합니다. 작업적 폐쇄성은 외부의 투입과 산출에서 독립된 자기생산(autonopoieis)의 내부 작동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역시 일정하게 닫힌 내부 관계망과 배치를 갖고 있어서 외부와 선택적으로 관계하는 내부 작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의 내부 작동을 순환과 재생, 반복으로 설명하는데 저도 그런 구도에 동의합니다. 공동체는 사람이 숲과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내부에 자원-부-에너지를 순환하고, 사랑-정동-욕망을 재생하고, 삶과 일상을 반복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태, 생명, 생활의 작동원리는 각기 차원 을 달리 하지만 유사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 182

우주선 유형의 삶, 분리의 정당화

이러한 생태, 생명, 생활의 일정한 닫힘, 즉 작업적 폐쇄성과는 전혀 다른 분리와 닫힘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의 기원은 형이상학의 전통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세계, 영혼, 신에 대한 궁극에 대해서 왜 그런지를 묻다 보면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상적인 질서를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왜(why)라는 본질과 이유를 묻는 것이 남성적이라면, 어떻게(How)라는 작동을 묻는 질문은 여성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물, 상황, 인물의 본질에 대한 대답은 가부장제 질서가 가진 고정관념과 궤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완성됩니다. 즉, 원형이며 이상적인 원본이 현실과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있는 감각, 몸, 욕망, 정동, 돌봄이라는 여성적인 질서와 분리된 남성만의 이성과 논증, 추론, 관념, 소유의 질서입니다. 특히 이러한 남성적 세계관은 현실과의 분리를 추구하며, 이상화된 질서를 현실과 따로 설정하려고 합니다. 즉, 진리란 현실과의 접촉과 감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추론능력을 가진 엘리트의 머릿속에 분리되어있는 것입니다. 183

그러나 개인이 라는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화석연료라는 에너지권력이 있습니다. 과거라면 말 20필, 노예 20명이 해낼 일을 화석연료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와 그것으로 작동하는 전자제품이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개인이 에너 지와 자원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때, 공동체와 자연생태계와 같은 연결망에서 벗어난 개인만의 분리된 공간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186

생태민주주의를 위하여

생태민주주의는 지구, 자연, 생명, 공동체, 사회를 연결망 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문명의 외부에 자연과 생명이 존재하던 시절이 끝난 것은 분명합니다. 동물과 식물과 자연은 인류문명의 생태보존구역, 야생동물보호 구역, 자연보호구역 등으로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외부에서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자연과 생명의 우연성이 중요한 시기는 거의 끝났습니다. 자연과 생명의 경우의 수는 최소화하여 문명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 대신 문명 스스로 내부에 있는 자연과 생명인 욕망, 정동, 사랑을 통해서 특이점(singularity)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해졌 습니다. 즉, 예전에는 그대로 놔두면 다 잘되던 시기가 있었 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판짜기를 하고, 부드러운 정동을 부여하고 돌보고 살림을 하는 등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으면깡그리 죽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특이점이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배제하고 괄호치고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모든 논의는 생태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최근에 불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논의에서 포스트휴먼 담론 등은 생태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사상과 정반대편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태민주주의의 화두로 특강이나 세미나, 저술 등을 기획 하고 있는 저로서는 앞으로 더 바빠질 모양입니다. 생명 위 기 시대가 코앞까지 와 있음에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슬기롭게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작은 아이디어와 단서 등을 전혀 구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분리 주의라는 파시즘이 발호하고 권력을 점취하는 상황까지 왔 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구와 생명과 공동체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 한사람의 특이점은 새로운 작업과 실천의 토대가 되리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친절하게 구체화하려고 연구와 기획에 더 적극적으로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저의 연구가 연결 되어 있는 공동체와 사회, 지구촌을 도미노처럼 전환할 하나의 마중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꿈꾸는 여름날 오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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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 주간 지 <슈칸포스트>(2011.4.) 인터뷰에서 "후쿠시마 지진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이 죽은 2만 개의 사 건이 벌어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196

여기서 한 사람의 삶과 실존의 의미를 누구도 침해할 수 없고 가장 존엄한 권리로 여길 필요가 생깁니다. 그것은 인간만의 삶과 실존만이 아니라 신체와 삶을 가진 모든 존재, 즉 동물, 식물, 벌레, 미생물, 자연 등의 영역으로까지 확장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른바 생명권 시대의 개막이 바로 이런 점에서 도래한 셈이지요. 생명권 시대의 개막은 통속적인 문명의 비루하고 똑딱거리는 시간에서 벗어나 삶과 생명의 창조발화의 시간, 즉 실존의 시간을 재건할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한순간의 찰나가 우주적 시간에서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순간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권은 단조로운 일상을 구성하는 자본주의 문명을 종식시키고, 모든 찰나마다 경탄과 경외, 행복이 찾아 올 수 있는 시간의 수평선을 그릴 것입니다. 그것을 들뢰즈는 차이 나는 반복의 시간, 그래서 후렴구의 화음으로 가득 찬 시간으로도 묘사했지요. 결국 생명권 시대의 개막은 우리 의 삶의 의미와 실존적인 차원을 재건하고 부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197


생명평화의 시간, 실존의 작동에 주목하자!

하이데거는 “될 대로 살지, 뭐" 하는 속인(Das Man)의 삶을 벗어나 현존재(dasein)리는 끝과 유한성을 깨닫는 삶의 중요 성을 역설했다지요. 그래서 흔히 '내려놓지 못한 사람'과 '내 려놓은 사람'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려놓은 사람 이라고 불리는 실존에 대한 응시와 자각을 갖고 있다는 것 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고 프랑스 심리치 료사 펠릭스 가타리는 말합니다. 즉, 실존을 깨닫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자각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작동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존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려놓 은 사람들이 나서서 '뜻과 지혜와 아이디어와 실천력을 가 진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만드는 것, 즉 '주체성 생산'의 밑거름이자 판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의 작동은 판짜는 사람, 공동체를 재건하는 사람, 주체성 생산을 도모하는 사람으로 더 전진 배치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 존의 참의미에서 머물던 실존주의적인 맥락을 이제야 넘어 서게 됩니다. 201


고대 애니미즘으로 복귀?

생태계에서는 모든 것이 순환합니다. 지구의 세 가지 순환이 질소순환, 산소순환, 탄소순환이듯이 생태계에서는 순환에 따라 흘러가는 과정 이외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순환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정동, 욕망의 순환도 물질-자원-에너지의 순환을 따라 함께 움직입니다. 그러 한 생각은 고대 애니미즘 사회에서의 사물이 살아 움직인다 는 사상, 즉 애니미즘과도 통합니다. 사물이 죽어 있거나 텅비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순환과정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합리적인 사상은 사물 주위와 경계에 희뿌옇게 어려 있는 탈경계적인 사랑, 정동, 돌봄, 욕망 등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지 이도저도 아닌 것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지요. 근대이성의 영 향 아래에서 사물은 고정되고 확실한 실체라고 생각되었고 경계도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다음 사물은 증여와 호혜, 사 랑과 돌봄 등의 흐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등 가교환에 따라 명확한 양적 척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되 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물을 경계가 확실하고 지 독히 고정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순환적 세계관을 말하면, 일부 종교인은 발끈합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인생과 의미와 영성과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불교인은 해탈을 말하며 발끈하고, 기독교인은 사랑을 말하며 발끈합니다. 그리고 애니미즘적 세계관, 순환의 세계관은 낡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부엌에 조왕신이 살고, 오래된 물건에 도깨비가 어려 있으며, 깊은 숲에 정령과 요정이 놀고 있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은 세속 종교와는 지극히 다른 노선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순환사회의 애니미즘은 현존 종교와 자본주의 질서가 탈주술화, 근대화, 합리성의 사회 등을 명목으로 기를 쓰고 내쫓고자 했던 '신비'임에는 분명합니다. 224



5부 생태적 지혜, 연결망이 주는 선물

생태적 지혜, 연결망의 지혜 

반면 생태적 지혜는 접촉하고, 연결되고, 감응하고, 변용되는 과정에서 취득하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요리할 때 사용하는 '적당히'라는 단어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느낌, 감수성, 감각이 무척 중요하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근대의 탈주술화 과정은 생태적 지혜와 함께 작동한 미신, 신화, 주술, 애니미즘, 생태영성 등을 탈색하고 추방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극히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 특이하고 체계화할 수 없는 지혜에 대해서 헤게모니를 행사하거나 퇴출시켜 왔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문명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운 비밀을 해부해서 드러내고 뻔한 것으로 단정하면서 기계적인 것으로 규정해 버렸고, 급기야 문명을 유지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기후변화라는 문명의 아킬레스건이 할머니들에게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생태적 지혜마저도 무력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위기요, 농업의 위기요, 문명의 위기입니다. 293


몸과 마음의 평행선 달리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사랑과 변용이 우리에게 지혜를 선사할 것이라는 얘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입니다. 그의 구도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사랑과 신체변용은 되기(becoming)라고도 불립니다. 마부의 지혜를 가지려면 말을 사랑해야 하고, 운전자의 지혜를 가지려면 자동차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지요. 그것을 좀 어렵게 쓴다면, 신체가 말-되기, 자동차-되기, 자전거-되기 등으로 변용 될 때, 공통관념이라는 마음에서는 승마법, 운전법, 경륜법이라
는 지혜가 평행선을 그리며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 
에서 몸과 무관한 지식이나 정보는 진정 안다는 것과 무관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랑으로 몸이 변용될수록, 몸으 
로 더 많이 느끼고 감각할수록 많은 지혜와 개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즉,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고 감각한 앎만이 
진정한 앎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295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 

저는 사랑과 신체변용의 순간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때는 내 안에 있던 자연과 생명이 움직이는 때이고, 그래서 우주와 자연, 생명과 합일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스피노자는 영원성이라고 설명하지요. 스피노자는 인간이 유한하지만, 우주와 자연, 생명은 합일되는 순간순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구도를 그립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면 무척 기쁘고, 아내를 바라볼 때 부드러운 사랑의 느낌이 생겨나면 무척 기쁩니다. 그 기쁨의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영원성은 모든 순간순간이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연과 생명의 합일을
보여 줄 때 도래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 안의 자연 과 생명의 능력, 즉 욕망과 사랑의 능력이 긍정되고 발휘되는 상황에는 영원한 기쁨의 상태로 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원성의 순간을 느낄 때는 간혹 사건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삶의 과정에서 천천히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떤 순간 아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젓가락이 같은 반찬으로 향할 때, 같은 노래 같은 구절을 동시에 부르거나 들 을 때, 아내와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수다를 떨 때 등이 그런 영원성의 시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내가 생명과 함께하는 시간, 즉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골 골골 소리를 듣다 보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아질 때나, 고양이가 밥을 먹고 나서 같이 놀자고 몸을 부빌 때 등등도 역시 영원성의 시간에 들어간 느낌입니다. 더불어 꽃과 나비, 들과 산과 바다에 가서 바람과 태양과 물길과 풀벌레 소리와 하나 될 때의 느낌도 영원성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주, 자연, 생명과 하나되는 사랑과 변용은 지혜의 원천 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보와 지식으로 구조화되고 분류되어 있지 않더라도 우리 몸의 느낌, 감수성, 감각 등에 서 살아 움직이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체득하고 느끼고 감각하는 순간이 바로 영원성을 향한 관문을 통과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성이 보편성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보편어법의 지식구조물과 영원성의 시간에서 얻어 지는 지혜는 완전히 상이한 것입니다. 즉, 분류, 분석, 분리, 범주화, 개념화 등으로 이루어진 보편성과 감각, 감성, 느낌, 변용, 욕망, 무의식, 사랑으로 이루어진 영원성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감각으로 감수성으로 많은 것을 알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상적인 정보와 지식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잠재성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지혜의 원천을 삼게 됩니다. 298 


'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구성주의가 말하는 '한 사람'에 대하여 

앞서 '생명은 유일무이한 존재일까'를 논하는 자리에서 언급 했지만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가 일본 주간지 <슈칸포스트>와 인터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후쿠시마 지진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얼핏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의 발언은 산술적 합으로서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존재로 이루어진 수많은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들은 재난방송의 사상자 수는 그 사건의 엄청난 의미와 피해규모를 드러내는 근거로 사용되지만, 그 한 명 한 명에게는 한 생生의 파괴이며 그 한 사람의 사연만으로도 우리는 책 한 권 혹은 영화 한 편 분량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놀랍게도 구성주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구성주의는 진리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앎=함=삶의 구도에 따라 구성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입니 다. 최초의 구성주의는 칸트의 인식론적 구성주의입니다. 그는 물자체는 알 수 없지만 현상은 알 수 있고, 인식의 도식 (schema)이라는 그물망에 걸려든 것만을 알 수 있다고 보았 지요. 이후 피아제, 비고츠키 등의 교육학에서의 구성주의,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명의 자기생산 개념, 펠릭스 가타리의 기계의 자기생산 개념, 라투르의 과학철학에서의 사회 구성주의 등으로 나타났지요. 특히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고 말했다 지요. 들뢰즈의 생각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뻔한 세계 상이 아닌 무수한 존재들 각각이 세계에 필적할 지위를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생명권에 대한 깊고 심오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 하나하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이들이 구성한 생활세계와 삶의 이야기는 사실상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천 명이 모이면 몇 개의 공동체가 생기나?" 

사람들은 대부분 간단하게 "하나의 공동체가 생긴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성주의에 입각해 보면, 천 명이 모이면 천개 혹은 천 개 이상의 공동체가 생긴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구성원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상과 이미지, 스토리는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여러 사람이 마주치면서 생긴 공동체 내부의 작은 관계들 하나하나도 모두 각각의 구성력을 갖기 때문에 천 명이 모인 공동체는 천 개 이상의 여럿, 다양, 복수인 셈입니다. 또한 천 명이 서로 연결되고 교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한한 경우의 수로 이루어진 구성적 실천의 지평도 열립니다. 

유일무이한 생명으로서의 한 사람 

기후변화와 생명 위기의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현존 문명의 작동원리는 사실상 공리주의에 입각해 있습니다. 공리주의 는 '최대 다수 최대행복'이라는 일반원칙을 갖고 있는 한편 소수자의 희생과 배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머 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아킬레스건이 극단화하면 바로 파시즘으로 이행합니다. 파시즘은 소수자, 생명, 제 3세계 민중에 대한 배제와 분리, 차별, 혐오발화 등을 정당화합니다. 기후변화와 근본주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난민이 유럽으로 유입하면서 유럽 각국에서는 분리주의, 폐쇄경제, 고립주의라는 색다른 모습의 파시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난민을 배제하겠다는 얘기지요. 앞으로의 생명 위기 상황에서 문명은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요?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해결방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소수자를 배제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수자가 민중 하나하나와 접속하여 그들에 대해서 돌봄과 환대, 사랑의 순간을 만들 때 문명 자체의 지속가능성과 탄력성을 결정하는 특이점(singularity) 하 나하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즉, 소수자 되기와 같은 사랑의 행동은 문명이 선택할 하나의 경우의 수를 늘린다는 점 에서 사실상 문명의 전환과 이행을 위한 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소수자는 양적 소수나 피해자가 아닌 공동체와 사회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효모와 감초, 촉매제로서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를 배제하고 분리하는 파시즘경제-트럼프 행정부나 유럽에 발호하는 분리 주의가 갖는 극악한 논리가 아닌 소수자라는 각각의 특이점을 통해 다양성과 차이를 구성하는 획기적인 생각이 필 요한 상황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눈치 채셨겠지만, 소수자, 제3세계 민중, 생명을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사상이 구성주의에 숨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해서 원자화된 개인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지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오히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유일무이한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판조차도 다시 짜야 할 상황입니다. 민주주의가 권력을 구성하는 절차와 대리표상의 역할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하나하나의 특이점이 갖는 차이와 다양성으로 더욱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는 민주주의가 필요 합니다. 우리는 연대할수록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을 생태민 주주의라고 했던가요? 

객관적인 진리인가, 한 사람의 지혜인가 

한 사람이 뭔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느끼고 
지각하고 감성적 실천과 신체 변용에 따라 구성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객관적 진리가 세계에 미리 주어진다는 것일까 
요? 교육학에서 구성주의는 일방적인 계몽을 추구하는 교육 
이 아닌 각각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교육으로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유행어를 남겼습니다. 즉,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한사 람마다의 대답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구성주의 교육관입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앎=삶=함'이 라는 간단한 구도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즉, 안 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체득하는 것이고, 행동으로 습득한 것 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스마트폰에서 피상적으로 접한 정보로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것을 접촉하며 지혜를 얻습니다.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을 관조하고 관찰하는 객관적 진리와는 차이가 있는 지식유형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공유지인 삼림, 하천, 바다에서 습득한 발효, 종자, 요리, 식생, 보관, 살림 등의 지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 접촉의 지혜이며, 범위한정기술로 자신의 삶의 영토와 구획 속에서 취득한 지혜입니다. 반면 여성의 지혜와 달리 남성만의 객관적 진리모델이 모태가 된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세상입니다. 이데아론은 분리와 격리, 블랙박스화, 범주화의 논리에 따라 분리하고 쪼개고 구획 짓습니다. 결국 우리가 쓰는 전자제품, 기계류는 대부분 전문가만이 작동방식을 알고 우리는 전혀 모르는 블랙박스화한 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제품의 on/off 버튼만을 눌러 작동시킬 뿐 고장이 났을 때 뚜껑을 열어 기기판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분리방법론, 즉 이데아론은 바로 현존 아카데미의 질서와 현존 문명의 원형이 됩니다. 

여성의 앎, 즉 지혜의 노선은 느끼고 감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지고, 연결하고, 접촉하고, 배치를 바꾸고, 실험하고 이리저리 해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본질을 알기 위한 WHY,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 HOW,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왜'라는 본질을 알고자 했던 것이 형이상학의 전통이라면, 삶의 내재성과 생활세계, 실존 등에 주목하여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지혜의 노선이겠지요. 객관적 진리론의 입장에서는 본질을 적시하는 '~은 ~이다'라는 대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지혜의 입장에서는 '오늘 점심 때 뭐해 먹지?'라는 삶의 곁에서의 '어떻게'라는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혜의 노선은 대답을 세련되게 하는 전문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각각의 차이 나고 다양한 삶이 던지는 색다른 문제제기의 영역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합니 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물음표가 많아집니다. 더불어 감각 하고 접촉하고 사랑할수록 우리는 지혜로워집니다. 

한 사람이 구성되기까지 정동의 역할 

"여러분의 생애최초기억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 받아 본 적 있으신지요? 다양한 기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릴적 엄마를 잃어버려 울던 기억,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 친구와 싸우던 장면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생애 최초 기억 이전, 즉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더 먼 과거의 시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윤회의 심연이나 영성적인 대지. 원자아原自我의 기억이 있을까요? 다만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지, 일상적으로 아이에게 베풀던 어머니의 돌봄, 살림, 보살핌, 모심, 섬김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의 시간의 윤곽선 위로, 반복의 부분충동 위로, 흐름(flux)의 사유 위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돌봄이며 정동입니다. 정동노동이라 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들지요. 정동노동은 실로 생명 살림이며, 서로살림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재생과 순환에 필수적인 행동양식입니다. 

그런데 정동노동을 유지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과연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감정소모가 엄청나게 수반되는 감정노동일까요? 사실 둘다 의 요소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정동노동과 감정노동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무엇일까요? 타자생산, 재생산을 위한 것이 감정노동이라면, 자기생산과 살림을 위한 것이 정동노동이 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다 우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행동, 이를테면 현관문에 들어와서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것조차도 정동입니다. 공동체는 정동의 부드러운 흐름에 의해서 성숙하고 유지되고 풍부해칠 수 있습니다. 정동에는 우아함과 미학, 윤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먹는 음식물은 다 어디로 갈까요? 어떤 사람은 똥이 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된다. 고 말하고,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영혼의 무게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대부분 우리의 살과 피, 간, 피부, 장 등의 세포를 재생하는 데 사용됩니다. 피부는 한 달이면 다 교체되고 간은 두 달이면 다 바뀌는 식입니다. 공동체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정성을 들여 진행한 사업이 만족스러운 성과와 결과를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실천을 했던 바로 그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공동체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여러 아이디어가 나오지 만 실행으로 옮겨진 것은 그중 몇 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회의가 중요한 이유는 실행에 옮겨진 사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채택되지 못한 아이디어가 흥미롭게 논의되다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에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바로 그런 생각과 아이디어를 만든 바로 그 사람, 한 사람을 만들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 생명, 한 사람을 만드는 작동원리는 바로 자기생산(autopoiesis) 입니다. 

정동(affect)은 사물의 본질에 있지 않고, 사물의 곁에 서식 합니다. 본질과 곁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소유권이지요. 어떤 지주가 등기부상으로 땅을 가졌다면, 그 땅을 돌보고 관리하고 부드럽게 살리는 소작농이 동시에 있을 수있 습니다. 땅의 소유권이라는 본질은 지주에게 있지만, 정동은 땅의 곁에 있는 소작농에게 있는 셈이지요. 정동, 사랑, 욕망 과 같은 영역은 사물, 상황, 인물, 장소 등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가장자리에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정동의 영역이 세상을 살리고 재창조하고 돌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질이 아닌 곁, 가장 자리, 주변을 살펴 그것을 닦고 돌보고 살려낸 보이지 않는 주체성을 알게 됩니다. 

지금-여기-가까이에 바로 한 사람이 필요하다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의 잠재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발견주 의적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어쩌면 초월적인 제3의 눈을 갖 는 것도 발견주의를 위한 방법론일 수 있습니다. "너는 늘 그 렇잖아!" 하고 뻔히 보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이런 면도 있네!" 하고 잠재성을 발견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세상을 뻔하게 보는 것으로 자본주의는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등가교환에 동원되는 고정관념의 토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방의 잠재성과 깊이를 응시하는 것은 상대방의 삶의 내재성과 생활세계, 일상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칸트의 비판철학』(2006, 민음사)에 서 칸트의 선험적 경험론과 대비되는 '초월적 경험론'을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입니다. 

구성주의와 발견주의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만남처럼 앙상블을 이룬다고 합니다. 세계 재창조를 위한 특이점으로서 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 즉 구성주의와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을 가진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 즉 발견주의는 생태민주주의의 대칭적인 두 개의 머리입니다. 머리 두 개 달린 뱀은 공동체와 시민, 확률론과 함수론, 결사체와 사업체, 구성주의의 '주체성 생산의 실천과제'와 발견주의의 '잠재성으로서의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을 갖는 것' 등의 앙상 블로 이루어진 대칭형 질서를 구성해 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륜적 공동체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 구성주의는 판을 짜는 것, 구성적 실천으로 관계망을 조성하 는 것, 더불어 그 일을 해 낼 주체성을 생산해 내는 것 등의 실천과제를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지울스님은 100일 단식 이후 "한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홀연히 남겼다고 합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한 사람을 만들어 내고, 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참 어렵고도 힘들지만 이는 구성주의가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여기-가까이에서 우리의 강렬도가 높아질 때 홀연히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내재성에, 생활세계에, 범위한경이 된 영토 위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고, 만들고, 판 짜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 다시 말해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위해. 311


여성은 거실이라는 공유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성의 지혜와 공유지의 신비

16~17세기 영국 사회에서 방직산업이 막 산업적 형태 를 띠고 있을 때 양모 생산을 위해 그것의 원재료가 되는 양을 대규모로 목축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습니다. 그 결과 야산, 벌판, 삼림 등 공유지를 약탈하고 착취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enclosure운동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을 공유지에서 떼어 놓고 분리하기 위한 음험한 음모와 학살 (genocide)의 행동이 나타났지요. 그중 하나가 바로 여러분 도 잘 알고 있는 '마녀사냥'입니다.

예를 들어 의학 전문가와 생태적 지혜를 갖고 있는 산파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산파는 경험과 관계 속에서 지혜를 획득하고 축적했으며 약초요법을 깊이 통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생태적 지혜를 마녀의 괴상한 의례나 행동으로 몰아붙이고, 여성의 공유지가 갖는 비밀과 신비의 생명력을 마녀의 마술이 신의 신비로움을 범하는 것이라고 오도하 
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피터 라인보우가 인용한 아드리엔 리치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둡게 뒤얽힌 숲이 표시가 없는 밝은 곳과 만나는 곳

나는 당신에게 그곳이 어딘지 말하지 않으련다

유령이 출몰하는 교차로, 부엽토의 낙원

나는 누가 그곳을 사고, 팔고, 사라지게 하고자 하는지 이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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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이라는 공유지를 파괴하는 17세기 유럽의 상황은 여성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낙원과 같은 여성의 영토는 점차 지배와 소유에 훼손되고, 여성의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공간은 지배의 강권으로 가시적이고 시각화하는데, 이는 격자 모양으로 구획되고 계산되고 노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스러운 대지의 여신은 초기 자본주의 시기의 사업가가 설치한 울타리에 갈기갈기 찢겨 져야하는 고통의 영토가 됩니다.

공유지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공유지가 갖는 신비로움의 비밀을 파헤치다 보면, 그것의 기 원이 여성성으로 표현되는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이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성의 공유지에 대한 공격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가부장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지만 지금 은 우리의 마음을 예속시키는 더 강력한 것으로 출현합니다. 여성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과 가족공동체의 수다스러움을 단번에 개인의 고립된 환상을 분비하는 이미지-영상의 흐 름과 미디어의 수다스러움으로 전도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텔레비전입니다. 텔레비전은 지극히 남성적인 매체입 니다. 일방적이고 시각중심적이며 중앙집중적이지요. 332

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재 우리의 장례문화는 상업화 되어 있어서, 남은 가족을 위로하고 떠나는 사람을 편안히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각종 리베이트와 폭리와 불합리가 판친 다는 상황입니다. 가족공동체가 더불어 사는 공간인 거실이 본래의 기능을 한다면, 가족공동체가 자신의 끝, 즉 유한성 을 홀연히 깨닫고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책임질 것입니다.

거실의 기능과 유래, 현실을 말하다 보니 거실이 이제 많 은 잠재성을 품고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거실의 재발견은 삶의 재발견입니다. 여성이 거실의 사용이나 용도, 기능 등에 개입하는 것은 여성이 공유지의 사용권을 유지하기 위한 커머너commoner의 기본적인 행동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실에서 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을 피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에 매달리는 청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에서 가족공동체의 색다른 공간 연출과 풍부한 소통의 가능성과 잠재성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버섯, 약초, 벌레, 꽃, 나무, 덩이줄기식물, 새, 원숭이, 모기와 거미 등이 가득한 숲이라는 공유지에서 생태적 지혜를 발휘했던 17세기의 마녀라고 불린 여성의 세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거실이 그러한 공간일 겁니다. 그래서 신비롭고 비 밀스러움이 가득한 거실에서 축제와 어울림의 향연이 가능 하지 않을까요?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