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우에노 지즈코
1장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차별의 근원을 찾다
저는 여성의 문제를 '아저씨 언어'로 번역했을 뿐입니다. 학문은 아저씨의 언어로 되어 있으니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인 여성은 아저씨의 언어를 습득할 수밖에 없죠. 그러다 아저씨의 세계에 동화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아저씨의 언어로 아저씨의 아킬레스건을 꿰뚫을 수도 있습니다. 가야트리 스피박 이라는 인도 출신 페미니스트가 이것을 '적의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일'이라고 훌륭하게 표현했지요..
우리는 아저씨 언어와 여성 언어를 동시에 쓰는 '이중 언어 구사자'로 활동해 왔어요. 서로 말이 통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저씨의 언어로 '당신들은 이런 구조에 편승해 왔어, 그걸 간과한 거 아니야?' '이래도 모르겠어?'라고 논증하고 데이터를 제시하며 '이것 봤지?'라고 확인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학문으로서 여성학의 역할입니다. 26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마지막 문단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 다.
'마지막은 (중략) 왜 인간의 생명을 낳고 기르고 그 죽음을 돌보는 노동(재생산 노동 또는 돌봄 노동)이 다른 모든 노동의 하위로 취급되는가 하는 근원적 문제다. 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페미니즘의 과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왜 '돌보는 성'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게 되면 여성 문제의 상당 부분이 풀릴 것입니다(100%까지는 아니어도). 우리가 여성학, 젠더 연구 분야의 학자로서 주목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여성학은 여성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이론화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사를 '부불 노동'으로 정의해 일본 여성학의 발전에 일조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부불 노동은 영어로 'Unpaid Work' 즉 '무상 노동'이지만 그 개념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가사도 노동이다', 그리고 '가사는 부당하게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이다'라는 것입니다. 27
정치사상 연구자인 오카노 야요씨는 이것을 '망각의 정치'라 고 불렀습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대상을 잘 잊습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 자립하지 못 한 모든 존재를 품어주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대 자유주의 법학의 기반이 된 '자립적 개인'이라는 개념도 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젠더 연구자들은 그러한 근대 자유주의에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41
가사 노동이 시장 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가사 노동에는 여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높은 금액이 매겨지기 어렵습니다. 요양 종사자의 평균 월 급여가 전체 산업 평균보다 약 7만엔(약 64만 원) 적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심지어 보육 종사자의 월 평균 임금은 그보다도 약 3만 엔(약 27만 원) 적다고 합니다. 즉 육아든 요양이든 아주 낮은 평가밖에 받 지 못하는 거죠. 이처럼 가사 노동을 유상화하면서도 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게 만드는 시스템을 '사적 가부장제'에 대 비해 '공적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이 연구는 결국 이런 의문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육아나 요양 같은 돌봄 노동의 비용은 왜 계속 저렴하게 인식되는 걸까?' 55
2장 여성 혼자 가사, 육아, 요양을 전부 짊어지는 사회
요즘 '가족의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가족의 위기를 지적하는 사람은 근대 초기부터 많았습니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죠.
예전에 제가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마사 A. 파인먼의 『가족, 과적 방주』를 감수·번역한 적이 있어요. 미국 법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저자가 그 책에서 펼쳤던 과격한 주장을 지금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 과격한 주장은 '결혼 이라는 법적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단 '불륜'이라는 개념부터 사라지겠군요. 이렇게 좋 을 수가!(웃음)
저자의 강연도 들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프리섹스를 지지하십니 까?" 그야말로 웃긴 질문이지만 저자의 대답이 더 기가 막혔 습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일처제든 프리섹스든 취향의 문제이니 마음대로 하면 되죠. 일부일처제가 마음에 든다면 그것도 취향대로 하면 되고요."
성인 남녀의 성관계는 취향 차원의 일이니, 법적으로 구속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부 별성을 허용해야 하느냐' 논쟁도 무의미해집니다. 다양한 성관계 중에서도 특정 성관계(이성애 단혼제)만 특권화하여 법적 보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국가가 성인의 성관계에 관여할 필요도 없겠지 요. 그 대신 '돌봄 유대'를 법적 보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돌봄 유대'란 자녀라는 의존적 존재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지속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얼핏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매우 현실적인 제안입니다. 이혼이 특히 많은 미국에서는 혼인 관계 대부분이 평생 유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평생을 기약할 수 없다면 성관계와 돌봄 관계 중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보호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죠. 섹스로 이어진 관계는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에 비해 유지 기간이 짧습니다. 따라서 가족의 기반을 남녀 관계에 두기보다 돌봄 유대에 두어야 하고, 그 유대의 권리 및 의무 관계를 법적 보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상당히 쉽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에요.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소수파라서 지지자가 별로 없다며 웃더군요. 62
저자는 '근대 가족은 의존을 민간화(Privatization)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가족은 혼자 살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를 품어 기른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 집단과 많이 다릅니다. 아기는 전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24시간만 내버려 두어도 죽고 마는 존재니까요. 가정 안에서는 민법이 적용되는 성인들의 계약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성 또한 혼자일 때는 의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존적인 존재를 품는 순간 자발적으로 의존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일차적 의존'과 '이차적 의존'으로 구분합니다. 여성은 구조로 인해 '돌보는 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차적 의존성'을 띄게 된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 책의 제목을 원제(The Neutered Mother, The Sexual Family(거세된 엄마, 성적인 가족))와 달리 『가족, 과적 방주』로 번역했습니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 우리 사회는 시장 외부의 돌봄 부담을 전부 가족에게 떠맡겨 버렸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라고 해도 옛날 같은 대가족이 아니라 부부와 아이로 이뤄진 핵가족이니 그 일을 맡을 성인 여자는 집에서 한 명뿐이죠. 이처럼 여자 한 명이 모든 돌봄 부담을 짊어진 모습을 '무게가 초과된 배'로 표현했어요. 어쩌면 근대 가족은 시작할 때부터 곧 좌초할 운명에 처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64
3장 돌봄은 무엇이고 누구의 책임일까?
- '연구대상'으로 '요양'을 선택하다
저는 요양 보험이 시행된 2000년에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요양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요양 보험 시행이라는 미증유의 사회 변혁을 정통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양을 연구하는 동안 제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전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성이 집에서 했던 노동의 가치는 왜 이렇게 낮은 걸까?' '같은 일을 집 밖에서 했을 때 낮은 평가밖에 받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돌봄이 사회에 필수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부담하는 게 공평할까?'라는 문제였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재생산 부담의 공정한 분배'라는 의문에 변함없이 도전해 왔던 셈입니다. 80
일본은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채택했을까요?
여성 인력 활성화를 추진한 나라들은 여성을 가정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최근 30년 동안 돌봄의 아웃소싱을 추진했습니다. 제시한 도표를 보면 남녀평등을 상대적으로 잘 달성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죠.
첫 번째는 부부가 함께 일하면서 가계를 지탱하고 나라가 돌봄을 맡는 모델입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이 '돌봄의 공공화 모델'을 채택했어요.
두 번째는 부부가 함께 일하고 돌봄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하는 모델입니다. 미국, 영국 등 앵글로 색슨 국가들이 이 '돌봄의 시장화 모델'을 주로 채택했지만 아시아에도 이 모델을 채택한 나라가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홍콩입니다. 이 두 나라의 고소득 전문직 여성에게는 일·가정 양립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육아 도우미와 가사 도우미가 있기 때문이죠.
세 번째는 돌봄의 가족화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해, 돌봄이 '가정의 책임'으로 남아 있는 모델입니다. 이때 '가정의 책임'은 오로지 여성이 담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남성 가장 모델'(Male Breadwinner Model)이라 합니다. 일본은 이 모델 을 고수하고 있어요. 유럽의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 유럽 국가들과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했듯 '누가 돌봄을 담당하느냐?'라는 질문은 재생산 비용 분배 방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재생산 비용이 잘 분배되고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출생률입니다.
각 나라의 합계 출생률(한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맞벌이 + 돌봄의 공공화 모델'을 채택한 나라의 출생률이 가장 높고 '맞벌이 + 돌봄의 시장화 모델'을 채택한 나라가 그 다음이고 '남성 가장 모델'을 채택한 나라의 출생률이 가장 낮게 나타납니다.
선진국은 출생률이 대체로 떨어지는 추세지만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 보통인 나라, 낮은 나라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 낮은 나라에 해당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삼국 동맹이었던 이 나라들은 모두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문화가 강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이가 적게 태어 난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87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본 결과, 일본은 현재 '돌봄의 공공화'도 '돌봄의 시장화'도 채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 서 돌봄 부담이 여성에게 전부 쏠린 끝에 여성이 노동 시장의 제일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죠.
노동 돌봄의 배분 방식과 그 실현 조건:
돌봄의 공공화 = 높은 국민 부담률
돌봄의 시장화 = 저렴한 이민 노동력의 존재
아시아형 해결 = 할머니에게 의존
→ 현재 일본에는 어떤 선택지도 없다!
여성에게 부담 집중
→ 성별이 인종, 계급의 기능적 등가물로 작용
외국인이 '일본은 여성의 지위가 왜 이렇게 낮은 건가요?'라고 질문할 때 아래와 같이 설명하면 금세 알아들을 거예요.
"일본에서는 성별이 인종, 계급의 기능적 등가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가 달라지지 않는 한 일본의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일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돌봄을 담당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지요. 92
코로나 때 분통 터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의료 현장과 요양 현장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호소하자 정부가 '의료 현장의 인력은 퇴직한 간호사나 보건사, 간호사 자격이 있는 대학원생으로 보강하라'라는 지침을 내렸 어요.. 그런데 요양 현장에는 다른 지침이 내려와요. 요양 인력이 모자라면 '무자격자를 써도 된다'라고 한 것이죠. 의료 현장에는 자격 있는 사람을 쓰라고 하고 요양 현장에는 무자 격자를 써도 된다고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들은 요양 보험이 생긴 지 20년이나 됐는데도 '요양은 여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미숙련 노동이다'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제도 설계자나 정책 결정자에게 '당신이 한번 해 보라'라고 항의하고 싶었습니다. '요양 보험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돌봄 노동에 관한 생각이 전혀 바뀌지 않았 구나' 싶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돌봄의 가격은 왜 이렇게 저렴한 걸까요? 가정 밖에서 요양 노동자가 받는 임금도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적어요. 그 금액이 어떻게 정해졌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 았지만 떠오르는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돌봄은 그동안 여자가 집에서 공짜로 해온 일이기 때문이에요. 다들 그런 일에 돈을 많이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이지요. 96
4장 약자가 약자인 채,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는 이론, 페미니즘
우리는 누구나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태어났다가 다시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죽습니다. 노화란 모든 사람이 후천적 장애인이 되는 과정이죠. 나이를 먹으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마음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후천적 장애가 일부 또는 전부 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노화입니다.
향후 일본의 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고령자의 비중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함께 약자가 되어 서로 의지하며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하는 거죠.
한편 여성들이 맡았던 돌봄이란 어떤 일이었을까요?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를 이루며 상호 작용을 합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의 위치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렇게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하에서도 돌봄을 통해 권력 남용을 억제해 왔습니다. 99
그러므로 돌봄은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장기적 과정'이 아닐까요? 권력 남용은 가해자에게 쾌감을 줍니다. 권력 의식은 더없이 달콤하기 때문이죠. 한편 돌봄은 그 유혹에 장기적으로 저항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돌봄을 '비폭력을 배우는 일'로 정의한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비폭력은 학습된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반대로 폭력도 학습됩니다. 10대 소년들이 음침한 폭력 사건을 일으 키는 것도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을 학습했기 때문일 거예요. DNA나 호르몬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폭력과 비폭력이 학습되는 것이라면 남성들도 비폭력을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돌봄의 경험으로 남성을 초대하여 비폭력을 배우게 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 라고 생각합니다. 101
'약자가 약자인 채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 는 사상이 페미니즘입니다. 103
페미니즘은 약자를 강자로 만들겠다는 사상이 아닙니 다. 약자가 되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사 상입니다. 104
우리가 앞으로 만들려는 사회는 안심하고 약자가 될 수 있는 사회, 요양이 필요한 사람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노쇠 기간을 최소화하겠다며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 혼자 건강하게 살겠다'라고 애쓰기보다 모두 안심 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같은 이유로 저는 '치매 예방'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합니다. 우리는 아직 치매의 원인도 예방법도 치료법도 모릅니다. 치매는 병이라기보다 노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치매가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예방하지 않아서 치매가 생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치매가 생긴 게 혹시 환자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좋아서 치매 환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환자들에게 '본인 책임이다' '예방하지 않은 당신 잘못이다'라며 '자조 노력'을 요구하는 사회만큼 끔찍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치매가 생겨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 장애인이 되어도 살해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105
10년 전 도쿄 대학에서 은퇴할 때 제가 진짜로 했던 마지막 강의 제목이 '살아남기 위한 사상'이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직후여서 연구실에서 주최하는 최종 강의가 무산되었는데 다행히 제자들이 강연회를 특별히 열어주었어요. 저는 그 강 연희의 발표 자료 표지에 저의 저서 『살아남기 위한 사상』의 표지를 담았습니다.
왜 굳이 '살아남기 위한 사상'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요? 이전의 모든 사상 즉 남자에게 맞춘 사상은 '죽기 위한 사상'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죽음에는 의미가 필요하지만 삶에는 의미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탓에 살기 위한 사상을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