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공생자 행성_머리말

백_일홍 2025. 5. 29. 06:46

 

머리말

40억 년 역사의 초대형 실험실, 지구

 

"엄마, 가이아 개념이 엄마의 공생 이론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직장에서 돌아온 열일곱 살의 아들 자크가 내게 물었다. 한때 정치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불태우다가 보스턴의 한 주의원 보좌관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정치가에 환멸을 느낀 자크는 얼굴 보기 힘든 두 고용주 중 한 명을 위해 노인 주택법 초안을 작성하느라 진을 다 뺀 뒤 집으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전혀." 나는 즉시 대답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전혀 관련이 없어." 하지만 그 뒤로 나는 그 질문을 곰곰이 곱씹어 보고는 했다. 나는 당신이 손에 든 이 책에서 그 질문에 답해 보려고 한다. 내가 과학자의 삶을 살아오는 내내 연구했던 과학 개념을 두 가지 꼽으라면,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T serial endosymbiosis theory)과 가이아(Gaia)를 들 수 있다. 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이 책의 핵심 주제다.

 

공생이 가이아와 어떤 관계냐는 자크의 질문에 대해서는 현재 사우스다트머스의 매사추세츠 대학교 교수로 있는 뛰어난 내 제자 그레그 힌클(Greg Hinkle)이 재치 있는 말로 산뜻하게 답한 바 있다. 박사 학위를 받기 전만 해도 그레그는, 공생이 그저 서로 다른 종의 생물들이 물리적으로 접촉한 상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공생의 당사자들, 즉 동료 공생자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말 그대로 서로 접촉하면서, 심지어는 상대의 몸속에서 살아간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을 딴 가이아는 지구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영국 화학자 게 임스 러블록(James E. Lovelock)이 처음 주장한 가이아 가설은 대기 기체들과 암석 표면과 물이 생물들의 성장, 죽음, 신진대사 기타 활동 들을 통해 조절된다고 본다. 그레그는 이렇게 재치 있게 말한다. "가이아는 그저 우주에서 본 공생일 뿐이다. 모든 생물들은 같은 공기와 같은 물(액체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당연히 서로 접촉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내가 그레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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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행성의 생명, 행성의 진화,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 보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다룬다. 또 인간의 지적 탐구, 특히 과학적 탐구와 그것을 장려하거나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입장과 상황을 살펴본다. 과학적 발견들, 특 히 우리 사회가 신성시하는 규범을 불편하게 하는 발견들을 제 소리를 못내도록 침묵시키려는 음모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종 수준에서 인류는, 익숙하고 편안한 주류에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관습은 우리가 대개 인정하는 것보다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설령 적당한 이름도 없고 철학이나 사상의 역사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안전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사실이나 진리라고 여기는 관념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우리의 사고방식을 형성한다. 우리는 보통 그림을 의식하지 못한다. '길들여진 무능력', '생각 집합, '현실의 사회적 구성물' 같은 문화적 제약들을 생각해 보라. 매사에 우리의 관점을 결정하는 지배적 억압을 생각해 보라. 그런 것들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과학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언어, 국가, 지역, 시대는 우리의 인식에 한계를 설정한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과학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가정들도 자신도 모 르게 그들의 사유를 한정지음으로써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흔히 말하는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라는 관념도 은연중에 깔려 있는 그런 가정 중 하나다. 신부터 돌까지 이어지는 존재의 사슬 한가운데, 우주의 중심에 있는 존엄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인간 중심주의적 관념은 종교적 사유를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종교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 과학적 세계관을 갖다 놓는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지배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맨 위에 여러 신들이 있고, 그 밑으로 남자, 여자, 노예, 동물, 식물의 순으로 이어지는 사슬이 있다고 가정했다. 돌과 광물은 가장 낮은 자리에 놓였다. 유대-기독교는 그 사슬을 약간 변형시켰다. 인간이 동물 바로 위, 천사보다 약간 낮은 자리에 있다고 보았다. 물론 가장 존엄한 존재가 인간 대신 전능한 하 느님으로 바뀐 것은 당연했다.

 

과학적 세계관은 이런 관념들을 낡은 헛소리라고 치부한다. 오늘날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똑같이 진화를 거쳤다. 모두 공통의 세균 조상으로부터 30억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진화하여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고등한 존재'도, '하등한 동물'도, 천사도, 신도 없다. 산타클로스와 마찬가지로 악마도 나름대로 유용한 전설일 뿐이다. '고등한' 영장류인 원숭이와 유인원도 그 명칭이 어떻든 간에(영장류의 영어 명칭인 primate는 첫째를 뜻하는 라틴어 primus에서 유래했다.) 남보다 더 고등하지 않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영장류 친척들 역시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화라는 무대에 최근에야 등장한 신참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훨씬 더 많다. 기나긴 지질 시대를 거치며 맺어 온 깊은 관계를 생각 할 때, 우리는 다른 생물들에게 혐오감이 아니라 경외심을 보 여야 마땅하다.

 

인간이라는 종은 여전히 자신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 화학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과 사회가 충돌할 때, 이기는 쪽은 언제나 사회니까. 진화학은 훨씬 더 깊이 이해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 인간은 분명히 진화했다. 그러나 유인원보다. 아니 포유류보다 약간 더 진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랜 기간 수많은 조상들을 거쳐 진화했고, 그 계보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세균이 나온다.

 

진화는 대부분 우리가 '미생물'이라고 치부하는 존재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들은 모두 세균이라는 가장 작은 존재들로부터 진화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굳이 기뻐할 필요는 없다. 미생물, 특히 세균은 우리의 적이라고 간주되며, 병원균이라고 멸시받는다. 사실 미생물은 맨눈으로는 오물이나 더껑이로 보이지만 현미경을 들이대면 상세한 모습을 드러내는 조류, 세균, 효모 같은 다양한 생물들을 일컫는다. 나는 다른 모든 영장류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매순간 반응하는 미생물들이 수십억 년에 걸쳐 상호 작용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에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과학이 내놓는 소식을 두려워하며, 과학을 거부해야 할 정보의 공급원이라고 본다. 하지만 과학은 나를 매료시킨다. 더 많은 것을 배우라고 끊임없이 나를 자극 한다.

 

린 마굴리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