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자 행성_2장 정통 견해에 맞서다
공생자 행성
린 마굴리스
2장 정통 견해에 맞서다
나는 유전학이 인간보다 앞서 등장한 초기 생명체들의 이야기, 즉 진화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아들 도리언과 함께 『마이크로 코스모스(Micro Cosmos)』를 쓰고 있을 때, 아들의 요청에 따라 보스턴 지하철 매사추세츠 에버뉴 역으로 가서 낡은 지하철 노선도에 그려진 낙서들을 본 기억이 난다. 검은색으로 커다랗게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다. "무질서한 아메바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을 보고 나는 깔깔 웃어댔다. 어두운 지하철역의 때묻은 벽에, 내 생명 탐구의 핵심이, 내 연구의 목표가 적혀 있었다.
지금도 나는 먼 옛날 생명이 출현하던 때를 생각한다. 그 초창기에 지구의 생명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첫 강의를 들은 뒤, 나는 '돌연변이 부하', '적응도', '선택 계수' 같 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신다윈주의 개념들에 집착하는 집단 유전학이 실제 생물들이 유전자를 전달하고 진화하는 규칙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종교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유전자가 각 식물 세포와 동물 세포의 핵에 들어 있으면서, 대개 변화하지 않은 채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상세한 질의 응답과 크로의 탁월한 강의를 통해 유전자들이 자손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아니 사실상 지배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핵가족에서 내조하는 아내 역할이나 편집광처럼 세포핵에 만 초점을 맞춰 연구하는 것은 내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많은 아내들이 그렇듯이 내 관심사도 분열되어 있었다. 친구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Mary Catherine Bateson)은 현대 여성을 "주변인"이라고 표현한다. 여성은 살아남으려면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베이트슨은 한 팔로 아기를 안고, 다른 팔로 냄비를 저으면서, 눈으로는 기어다니는 다른 아기를 지켜본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가든 여성 운동가든 이런 다중적인 스트레스를 없애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연구는 처음부터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남들이 무시하던 핵 바깥에 있는 세포 구조물(세포 소기관)에 자리한 유전 체계를 연구했다. '세포질 유전자'는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나를 매료시켰다. 세포질은 세포의 액상 부분이며, 거기에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를 비롯한 세포 소기관들이 들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유전자는 핵에 집중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세포질 유전자는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실험들은 불완전하게 서술되고는 했다. 세포질 유전자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 사실 세포 유전학, 혹은 당시 불리던 명칭인 '세포질 유전'을 연구하던 많은 초창기 연구자들은 이 유전자들이 있다고 보았다. 현재 토론토 근처 요크 대학교 교수로 있는 잰 샘(Jan Sapp)은 『연합을 통한 진화(Evolution by Association)』에서 유전학의 이 하위 분야의 발달사를 탁월하게 서술했다. 세포질 유전학은 20세기 초반 처음 10년, 세포핵 유전학 연구가 시작된 것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두 탐구 계통은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의 연구가 재발 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멘델의 연구는 세포핵 유전자만을 다룬 것이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던 보헤미아 지방 수도사 멘델은 완두의 여러 형질들이 유전되는 양상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고서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추론했고, 그것을 '인자(factor)'라고 불렀다. 그의 연구는 1860년대에 이루어졌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한참 뒤인 1900년에야 세 명의 과학자가 재발견했다. 멘델은 '유전학의 아버지'라고 불림으로써 전형적인 방식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멘델의 세포핵 인자들(나중에 세포핵 유전자로 불리게 된)을 발견하고 기뻐했던 초기 유전학 연구자들은 비핵(즉 세포질) 유전 체계가 있음이 밝혀지자 당혹스러워했다.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효모 유전학자 보리스 에프루시(Boris Ephrussi)는 "핵과 불명확함(nuclear and unclear), 두 종류의 유전 체계가 있다." 라고 비꼬았다. 물론 '불명확함'은 세포질을 가리킨 것이었다.
세포라는 미시 세계의 변두리에서 시작된 것이 지금은 중심 무대로 더 가까이 이동했다. 진화에서 공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동물들의 유혈 투쟁이라는 이전의 핵 중심 진화관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이 개체의 고통에 무심한 채 '이빨과 발톱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생명체들의 불편한 동맹으로 시작된 공생이 주요 진화적 새로움의 기원이라는 사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아름다움과 복잡성은 공진화하는 아주 작은 세균 조상들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 특성들이다. 인간의 그 어떤 성적 측면보다도 훨씬 더 심오한 세포들의 얽힘, 침투, 동화가 봄의 녹조류 대발생과 따뜻 하고 습한 포유류의 몸, 지구 전체의 생물 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 30년이 흐른 지금 공생 발생은 세포질 유전학을 변두리에서 유전자 연구의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수도원장인 멘델은 '인자'가 있다고 가정했다. 나중에 그것은 세포핵 유전자라고 불리게 된다. 멘델은 수도원 채마밭에서 키운 완두씨들이 색깔이 다르고(노랑과 초록) 모양도 다른(주름진 것과 매끄러운 것) 이유가 이 인자들 때문이라는 가정 아래 이론을 세웠다.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멘델의 목적은 유전이 절대 불변임을 보여 줌으로써, 모든 종의 가변성이라는 찰스 다윈의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바하마 제도 나소 섬 출신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아마추어 과학사가의 탁월한 미발표 원고에 따르면, 멘델은 종이 변하고 진화한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붉은 수꽃과 흰 암꽃은 분홍 꽃을 피울 씨를 맺었다. 하지만 그 분홍 암꽃과 분홍 수꽃을 교배해서 나온 꽃들은 조부모 세대와 똑같이 붉은 꽃이거나 흰 꽃이었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멘델의 인자들은 변하지 않는 특징들이 유전되는 현상과 관계가 있었다. 게다가 그 가상의 인자들은 오로지 핵막 안에 들어 있는 붉은색으로 염색되는 염색체들의 행동과 관계가 있었다. 내 동료인 잰 셉은 결코 빛을 보지 못할 다년간의 연구 결과가 담긴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쭈뼛거리며 내 사무실로 들어왔던 미지의 여성들과 비슷한 태도로, 멘델의 연구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동물 세포와 식물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작은 구조물들인 염색체는 1953년 디옥시리보핵산(DNA)의 구조가 발견되기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내가 과학계에 발을 디딜 무렵에는 이미 유전의 염색체 이론이 진리라고 인정을 받은 상태였다. '이론'이라는 칭호는 버려지고 사실이라고 가르쳤다. 즉 유전자는 '염색체에 있다'고 말이다. 세포의 핵 속에 꾸려 넣은 가상의 유전자들이 염색체에 있다는 증거는 명백했다. 이 유전자들은 멘델의 이론상의 인자들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것들은 규칙에 따라 행동했고, 식물의 붉은 꽃, 흰 꽃, 분홍 꽃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동물의 유전적 특징들을 결정했다. 형질 결정 유전자들이 핵에 들어 있다는 증거는 새로 밝혀진 유전 지식을 '유전의 염색체 원리'라고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다고 여겨졌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주류 생물학자들, 당시의 명칭에 따르면 '생화학적 및 생물리학적 세포학자들'은 멘델 인자를 구성하는 실제 물질, 즉 구체적인 '물질적 토대'를 탐구하면서 흥분에 휩싸였다. 붉게 염색되는 염색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유전의 화학은 무엇일까? 고딕 소설이나 과학 소설에서처럼 과학이 생명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을 당시에는, 그런 탐구를 하면서 거의 파우스트적 전율을 느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출발은 잘못되었지만 세포와 핵의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결국 그들은 장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쉴새없이 활동하는 세포의 기본 화학이 밝혀졌다. 음식 분자로부터 단백질이 합성되고 핵산이 복제되었다. 이런 화학 활동들이 모든 생명의 물질 대사의 토대였다.
하지만 난자는 유전자로 가득한 핵을 담은 주머니가 아니었다. 발생학자들과 식물학자들이 계속 지적해 온 것처럼, 식물과 동물의 난자 세포에서는 핵에 있지 않은 세포질 유전자들, 즉 세포질 인자들도 형질에 통제력을 발휘했다. 핵 바깥의 인자들이 산소 호흡과 잎의 색깔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다시 말해 유전자가 반드시 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과 동물의 세포 유전 인자들 중에는 흩어져 있는 것들도 있다. 초창기에 독일과 영국에서 생화학 연구가 이루어진 1930년대 이래로, 효모를 비롯한 균류의 미토콘드리아가 자체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은 세포 소기관은 공기의 산소 기체와 먹이 분자가 반응하여 화학 에너지가 생성되는 곳이다. 녹조류와 식물 세포에는 초록색을 띤 엽록체라는 구조물이 들어 있다. 엽록체는 햇빛을 유용한 화학 에 너지와 식량으로 바꾸는 광합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엽록체도 자체 유전자를 지닌다. 엽록체는 20세기에 들어섰을 때 멘델의 유전자를 각각 독자적으로 재발견한 두 식물학자 휘고 드브리 스(Hugo. De Vries)와 카를 코렌스(Carl Correns)가 발견했다. 엽록체는 부모 중 한쪽, 대개 모계로부터 물려받으며, 식물을 초록색을 띠게 만든다. 엽록체의 유전은 비핵 유전이다.
"유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포의 세포질은 무시해도 별 문제가 없다."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유전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이 1945년 자신 있게 쓴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이 오만에서 비롯된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했다. 세포 전체, 생물 전체를 다룰 때 에는 늘 핵과 세포질을 더한 세포 유전을 생각해야 한다.
칼이 청춘기에 나를 과학으로 전향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시카고 대학교라는 '그 대학'일 것이다. 내가 받은 과학 교육에서 중요한 첫 단계는 '자연과학 2'라는 1년짜리 강의였다. 자연과학 2에서 생물학 반에 속한 학생들은 교과서 대신 위대한 과학자들이 직접 쓴 글을 읽었다. 찰스 다윈, 그레고어 멘델, 20세기 초 20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한 독일 발생학자 한스 슈페만(Hans Spemann)과 수정 현상의 공동 발견자이자 '생식질의 연속성'을 가정한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 등. 또 우리는 영국의 수학자 겸 유전 학자 고드프리 하디(Godfrey H. Hardy), 존 홀데인(John S. Haldane), 로널드 피셔(Ronald A. Fisher) 같은 영어권 신다윈주의자들의 글도 읽었다. 하디. 홀데인, 피셔 등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신 다윈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기둥 중 하나인 집단 유전학의 수학 원리들을 개발했다. 자연과학 2는 집단 유전학, 발생학을 비롯 한 다양한 개념들을 생각하도록 자극했다. 유전이란 무엇인가? 세대를 잇는 것은 무엇일까? 난자와 정자가 융합할 때 물질들이 어떻게 온전한 동물로의 발달을 자극할까? 자연과학 2에서 배웠듯이, 과학은 교양 학문, 하나의 사유 방식이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중요한 철학적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연과학 2 수업 때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심오한 유전 문제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생각을 자극한다.
시카고 대학교가 자랑하던 최고의 과학, 즉 정직하고 개방 적이고 접근이 쉽고 열정적인 방법들의 집합은 현대의 '기술 중심' 사고방식에서는 아예 존재할 수 없을 듯하다. 그곳의 과학 은 끊임없이 철학과 과학이 융합하는 지점에 있는 심오한 의문들을 던지도록 자극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주와 우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움직일까? 이런 '색다른' 교육 풍토가 내가 과학자의 길을 선택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연과학 2강의 자료를 읽을 때, 나는 마음의 귀로 위대한 생물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섬모충'인 나팔벌레를 해부하는 밴스 타타(Vance Tartar), 핵의 우월성을 확립한 토머스 헌트 모건, 생명을 '돌연변이, 번식, 돌연변이의 번식'으로 정의 한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 초파리를 대상으로 유전자, 염색체, 환경, 진화사의 연관성을 끝없이 탐구한 테오도시우스 도브 잔스키, 컬럼비아 대학교의 이른바 '파리방'에서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다양한 초파리들의 특징들을 결정하는 인자를 찾아 내기 위해 염색체의 염기들을 분석하던 앨프리드 스터터번트(Alfred H. Sturtevant), 유전학과 진화, 유전학자들과 진화학자들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글에 시선을 가져 가는 순간 내게 주문을 걸었다. 20세기 전반의 미국 유전학파들이 일구어 낸 잘짜인 과학 체계를 접하고 난 후 나는 생물학 특히 유전학 사상의 역사가 어떠한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화학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진화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도 자연과학 2를 통해서였다.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내가 처음 그의 글을 읽었을 당시에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생물학은 진화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썼다. 단순히 말해 시간에 따른 변화라고 정의되는 진화는 살아 있는 유산인 우리의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진화학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 우리의 몸과 기술 뿐만 아니라 우주와 별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것이다. 진화는 그저 모든 것의 역사다.
대학생일 때에도 나는 핵에 있는 유전자들이 식물과 동물의 모든 특징들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환원 주의적이고, 너무 제한적이라고 느꼈다. 무작위 유전자 돌연변이가 어떻게 꽃과 눈의 진화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칼을 따라 위스콘신으로 가서 매디슨에서 생물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나는 그런 회의주의가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포를 갈아서 그 안의 화학(대사)을 살펴보는 것보다 살아 있는 세포를 직접 살펴보는 쪽을 선호했던 나는 세포 내의 염색체와 기타 유전되는 세포 소기관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유전 양상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1963년이 되자 난자의 세포질 인자들에 관한 논문들이 많 이 나왔다. 그 논문들을 통해 핵 바깥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유전자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초록 암크루와 흰 수크루를 교배하면 초록 자손만 나온다. 하지만 같은 종에서 흰 암크루와 초록 수크루를 교배하면 흰 자손만 나온다. 왜 그럴까? 핵 유전자의 유전에서는 암수의 기여도가 똑같으며, 어느 쪽이 암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자나 식물 세포가 단지 중요한 유전자들이 담긴 핵을 지닌 주머니가 아니라는 것이 내게는 명확했다. 내가 읽었던 글을 쓴 선배 유전학자들에게도 그러했듯이 말이다. 세포질을 무시하라고 충고한 토머스 헌트 모건의 말은 당시에도 내게는 옳지 않아 보였다.
유전학과 화학의 연계성을 강조하다 보면 과학자들의 시야가 불필요하게 너무 좁아진다는 것, 핵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깨달음이 내 도약점이 되었다. 나는 루스 세이저(Ruth Sager)와 프랜시스 라이언(Francis Ryan)의 세포질 유전자 연구와 이탈리아 연구자 지노 폰테코르보(Gino Pontecorvo)가 수집한 점 균류에 관한 기이한 유전적 사례들을 연구했다. 이들은 두 가지 세포 소기관, 즉 세포 내부에 있으나 핵 바깥에 있는 막으로 둘러싸인 구조물인 색소체와 미토콘드리아가 유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 주었다. 그들의 책에 실린 참고 문헌들을 통해 나는 에드먼드 윌슨(Edmund B. Wilson)이 1928년에 쓴 걸작 『발달과 유전에서의 세포(The Cell in Development and Heredity)』를 접하게 되었다. 윌슨의 책은 색소체와 미토콘드리아 두 세포 소기관과 자유 생활을 하는 미생물들의 유사성을 다룬 초기 문헌들을 검토한 것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공생 문헌들에 언급된 미생물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자연에 공생하는 생물들이 많다는 것. 특히 곤충이나 연충의 세포 안이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세균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윌슨이 언급한 초기 연구자들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I. E. 윌린(I.E. Wallin), K. S. 메레슈코프스키(K. S. Merezhkovsky), A. S. 파민친 (A. S. Famintsyn)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이야기는 러시아 식물학자 리아 니콜라예프나 카키나(Liia Nikolaevna Khakhina)의 걸작에 언급되어 있다. 나는 자체 유전되는 비핵 세포 부분이 한때 자유 생활을 하는 세균의 잔재라는 가설을 세운 그들이 옳다고 직감했다. 세포에 이중의 유전 체계가 있다는 것이 내게는 명백해 보였다. 나중에 나는 메레슈코프스키도 같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나는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유전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22세였고 잠시도 가만 있으려 하지 않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어 있었지만, 세포 유전학과 진화를 공부하겠다는 열정이 가정주부로만 있겠다는 생각을 압도했다. 남편보다 내가 더 아이를 원했다. 부모님과 달리, 나는 위스키와 시가, 포커와 브리지, 모임과 술수, 잡담과 골프 같은 것들에 참기 어려울 정도의 따분함을 느꼈다. 나는 심한 책벌레에다가 진지했고 학구적이었으며, 정상적인 어른들의 세계보다 아기, 진흙, 나무, 화석, 강아지, 미생물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좋아한 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버클리에서는 진화를 연구하는 고생물학과와 진화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 유전학과 사이에 인적 왕래가 전혀 없었다. 세포의 진화사를 상세히 조망하기 위해 진화, 고생물학, 유전학의 모든 측면들을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처음에 이 학계의 극심한 분리주의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각 학과는 자기 테두리 너머에는 사람들이나 학문 분야가 아예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게다가 교정 동편에 자리한 세균-바이러스 연구소(BVL)의 세균 유전학자들은 거의 모두 화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식 물과 동물 세포의 유전학은 아예 몰랐다. 세포에 핵과 함께 있는 세포 소기관들이나 세포질 유전에 관해 들어본 사람조차 드물었다. 교정 끝자락에 있는 그곳의 세균 유전학자, 미생물학자, 바이러스학자 중에서 조류 세포질의 유전 체계에 관해 조금 이라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바이러스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핵이 있는 세포 특유의 세포 분열 방식인 체세포 분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멘델 유전 법칙의 토대이자 특수하게 변형된 체세포 분열인 감수 분열을 생각해 본 적도 가르쳐 본 적도 없는 것이 확실했다. 핵을 지닌 생물에만 적용되는 유전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했다가 나중에 생물학자로 변신한 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한 나머지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많은 교수들이 화학적으로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무지했고, 대학원생들에게 거만했다. 세균-바이러스 연구소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심지어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유전학 분야인 섬모충 유전학에서 세포질 유전이라는 흥미진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교정 서쪽 끝에 있는 유전학과 사람들조차 내가 무척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섬모충 유전학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무관심과 무지에 놀랐지만, 그래도 의욕을 겪지 않았다. 나는 섬모충의 일종인 짚신벌레의 유전학과 그 분야 를 이끌고 있던 트레이시 소녀본(Tracy Sonnebom, 1895~1970년)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였다. 소너본과 그의 프랑스 동료인 자닌 배송(Jannine Beisson)은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교리에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인디애나 대학교의 유전학 교수로 있던 소너본과 배송은 짚신벌레의 섬모들을 한 뭉텅이 밑동까지 도려 내어 180도 돌려서 다시 붙이면, 아주 오랜 세대까지 자손들에게 그렇게 뒤집힌 형태의 섬모들이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서 섬모는 복제되고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일으킨 변화도 유전되었다. 적어도 200세대 동안은 계속 유전되었다. 정통 견해가 라마르크주의라고 치부했던 이른바 획득 형질의 유전이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사례였다.
때가 때였던지라 그런 세세한 사항들을 연구하는 일은 고독한 지적 탐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사회가 점점 더 정치적 성향을 띔에 따라, 학계에서도 지적 탐구의 결과를 인간의 복지와 관련지어서 평가해야 한다는 '관련성(relevance)' 이야 기가 점점 더 많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세포 유전 양상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반사회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교수들과 대부분의 동료 학생의 눈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비쳤다.
버클리의 세균 유전학자들에게 실망하긴 했어도, 유전학은 내게 여전히 진화사의 열쇠처럼 여겨졌다. 나는 다양한 종들에서 비(非)멘델(비핵) 유전의 사례들을 더 많이 수집했다. 등골나물, 옥수수, 분꽃, 달맞이꽃 같은 식물들, 클라미도모나스 같은 조류들, '아담한 것들'이라고 불리던 산소 호흡을 할 수 없는 비핵 돌연변이 효모들도 연구했다. 그것들은 성장 속도가 느리고 작은 군체를 형성한다. 또 짚신벌레의 카피킬러 Gappa-killer) 유전 양상도 연구했다. 이 놀라운 현상은 트레이시 소녀본의 책에 설명되어 있었다. 그는 일부 짚신벌레들이 유전적으로 다른 개체들을 죽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는 '비핵' 유전이 '불명확하다'고 느낀 적이 결코 없었다. 엑스선이 유전적 변화(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과정을 밝혀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유전학자 허먼 멀러(Herman J. Muller, 1890-1967 년)는 적어도 원리상 생명의 중심에 벌거벗은 유전자들이 존재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매우 탁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식물이나 동물 세포의 핵 바깥에 벌거벗은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나는 프랑스 해양 생물학자인 에두아르 샤통 (Edouard Chatton, 1883-1947년)과 하버드 교수인 레뮤얼 로스코 클 리블랜드(Lemuel Roscoe Cleveland, 1892~1969년)의 좀 오래되었지만 뛰어난 연구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트레이스 소너본의 많은 논문들도 읽었다. 소너본은 글을 아주 잘 썼고 일할 때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인습 타파주의자이자 헌신적 인 교수인 위스콘신 대학교의 한스 리스(Hans Kis)가 매디슨에서 전자 현미경으로 찍은 고해상도 세포 소기관 사진들을 열심히 찾아서 복사했다.
이런 갖가지 자료들은 내 직감이 옳았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벌거벗은 유전자는 아니었지만, 일부 원생생물, 효모, 심지어 식물과 동물의 세포에서도 핵 바깥에 세균들이 살고 있었다. 세포질 유전학 문헌들을 검토하면 할수록, 막에 둘러싸 인 세포 소기관이 적어도 세 종류가 있었고(색소체, 미토콘드리아, 설모), 모두 핵 바깥에 있으며, 행동이나 대사를 볼 때 세균과 비슷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실제로 세포에 갇힌 세균과 세포의 일부로서 유전되는 세포 소기관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식물 세포의 세포질에 자리잡고 살기 위해 세포벽을 벗어던진 시아노박테리아는 사람들이 엽록체라고 부르는 세포 소기관과 똑같아 보였다.
이렇게 세포 소기관의 유전학 문헌들을 뒤지는 지적 탐구를 계속하다가 대담해진 나는 갇힌 세균의 후신인 색소체에 틀림없이 세균 DNA가 일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유전학과에서 도서관을 뒤지면서 시작된 그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미생물 공생자와 막에 둘러싸인 세포 소기관에 관한 과학논문들을 탐욕스럽게 긁어모으고 있다. 학생들과 나는 지금도 그 핵심 개념을 연구한다. 공생하는 세균들이 진화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진핵세포가 기원했다는 개념 말이다.
내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이 처음으로 완성된 형태로 발표된 것은 갖가지 이유로 논문이 15번쯤 거부당하고 난 뒤었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대단히 난삽하고 거친 원고는 대폭 수정되 있다. 체세포 분열하는 세포들의 기원(Origin of Mitosing Cella) 라는 그 논문은 (이론 생물학회지(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 편집자인 제임스 대니얼리(James F. Danielli)의 개인적 노력 덕분에 1966년 마침내 게재 승낙을 받았다. 물론 1967년 말 그 논문 이 마침내 인쇄되어 나왔을 때 저자 이름은 결혼 후에 바뀐 성을 써서 린 세이건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 이론은 한 원생 생물 애호가 덕분에 SET(Serial Endosymbiosis Theory)라는 약자로 불렀다(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를 뜻하는 SETI와 혼동하지 말도록), 그는 밴 쿠버에 있는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 맥스 테일러(Max Taylor)였다.
1969년 재혼을 하고 딸 제니퍼를 임신하자. 어쩔 수 없이 장기간 집에 틀어박혀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있게 되자 방해받지 않고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그 결과 네 부분으로 된 SET 체계를 더 명확한 형태로 수정하여 확장할 수 있었다. 세포의 기원 이야기는 1967년 논문으로 시작되어 확대를 거듭하다가 결국 책 분량의 원고로 늘어났다. 나는 계약한 마감 날짜에 맞추기 위해 숱한 밤을 늦게까지 타자를 치고는 했다. 나는 거의 무명이었기에 많은 사진들을 제공했지만 계약금도 대가도 받지 못했다. 모든 도움은 집에서 받았다. 마침내 생각했던 것을 최종 원고로 완성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채 들리기 전에 일찍 일어나 원고를 잘 포장한 뒤, 그림들이 곳곳에 삽입된 무거운 원고를 계약한 출판사에 부쳤다. 뉴욕의 아카데믹프레스였다. 소포를 받았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기다렸다. 무작정 기다렸다. 어느덧 다섯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내 소포가 곁에 우편 요금 지불 딱지가 붙은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내 우편함에 들어와 있었다. 훨씬 뒤에야 나는 편집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서, 동료 심사(peer review) 결과가 대단히 부정적이어서 출판사가 원고를 몇 달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 출판사로부터 정식으로 거절 통지서가 왔다. 설명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정식 거절 통지서에 으레 따라불게 마련인 편집장이 서명한 편지조차도 없었다. 1년 넘게 더 지난 뒤, 제니를 돌볼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긴 노력 끝에, 멋지게 편집된 책이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왔다. 맥스 테일러를 비롯한 관대한 동료들의 서평과 비평 덕분에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은 널리 알려졌고, 마침내 아카데믹프레스로부터 거절을 받았을 때의 상처가 아물었다.
SET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내가 잘 모르는 많은 과학자들과 대학원생들의 실험 의욕을 자극했다. 그들은 분자생물학, 유전학, 고해상도 현미경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식물과 동물뿐만 아니라 곰팡이와 핵이 있는 세포로 이루어진 모든 생물들의 세포가 서로 다른 종류의 세균들이 특정한 순서로 융합 됨으로써 유래했다는, 한때 급진적으로 여겨졌던 19세기의 개념을 입증하는 결과들을 내놓았다. 공동 거주를 보여 주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졌고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내 SET의 가장 최신판은 그림 2에 나와 있다. 지금 나는 SET를 좀 온건하게 수정한 이론이 고등학교와 대학 교과서에 밝혀진 진리라고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다. 놀라지 않았다면 당혹 스러웠을 것이다. 그 설명은 너무 교조적이고,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논리적이지 않고, 솔직히 말해 잘못 적힌 부분도 있다. 과학 자체와 달리, SET는 지금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SET는 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이 융합한다는 이론, 하나됨의 이론이다. SET 이전에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 같은 세포 융합 성(cell-fusion sex)을 다룬 이론이 없었다. SET는 융합 성을 가능하게 했다. 성도 역사와 능력이 서로 다른 세포들이 융합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4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