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1부_4장.인간 본성의 이해. 공과 불성

백_일홍 2017. 10. 23. 10:46

1.인간 본성에의 물음
 
"중생 안에 불성이 있다"라는 말 처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은 또 없을 것.
 
사법인 :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 적정열반
불성론은 공사상의 자연스러운 전개
 
1) 욕망으로부터의 무규정성
욕망 자체는 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욕망만을 따르는 행위가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욕망만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인간이 본질적으로 욕망에 의해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욕망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욕망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2) 도덕성으로부터의 무규정성
인간의 본성을 욕망으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경우, 그런 능력은 흔히 이성 또는 도덕성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성 또는 인의예지' 등으로 규정된다.
 
우리가 악과 분별하여 선으로서 이해하는 도덕성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의 분별의 소산이며 우리 자신을 그 업보를 치르기 위해 윤회로 얽어매는 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인간 자신의 분별결과인 도덕성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존재이다. (이점에서는 도가사상과 유사하나, 도가는 개체화된 덕의 근거로서 보편적 도, 자연을 상정하고 있으므로 그 점에서는 불교와 다르다)

인간너머에 절대가치로서 존재하며 인간을 규정하는 절대선, 천리, 신, 브라만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고대희랍에서 생각했듯이 선의 이데아가 인간 너머 절대선으로서 존재하고 인간은 단지 그것에 참여함으르써 선하게 된다거나, 동양 유가나 도가에서 처럼 절대선의 천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인간 안에 내재화되어 인성이 선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듯 절대자인 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 신의 형상을 닮아 선하다거나, 인도 전통 브라만교가 말하듯 절대진리의 브라만이 있고 인간은 아트만으로서 그것과 하나가 됨으로써 우주질서를 갖추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인간을 규정하는 다른 가치를 설정하지 않고, 인간 자신을 다른 어떤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무규정적 존재로 해명하는 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인성의 공성이다.
 
인간의 본질은 악으로 규정되지도 선으로 규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규정성을 넘어선다는 것, 선도 악도 넘어선 선악 피안의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선택에 앞서 그 선택을 강제할만한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 이점에서 불교는 일체의 객관적 가치를 부정하고 일체의 체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통한다.)
 
인간 안에 규정된 본성이 없다는 것, 즉 나를 규정하는 본성 그리고 내가 완성하고 이룩해야 할 바의 본성이 없다는 것,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욕망도 아니고 인의예지의 도덕성도 아니다. 그것은 규정된 어떤 것도 아니다. 즉 공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분별의 피안, 선악의 피안, 무기이다.
 
4.공과 불성


1) 불성과 비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무규정성, 무자성 내지 공성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욕망, 도덕성, 색수상행식과 동일시 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순수 부정성의 존재인 것이다. 나는 무엇 무엇이 아닌 것으로서만, 나 아닌 다른 것의 부정으로서만 밝혀질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 진정한 정신적 해탈은 이미 확립되고 규정되어 있는 도덕성 안에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 무엇에 의해서도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자신의 무규정성 내지 공성의 자각에 놓여 있다.
 
인간의 본질의 무규정성, 공성이 바로 인간의 초월성 내지 자유로서의 불성을 의미하며, 이러한 공성을 모르는 무명이 바로 자신을 규정된 어느 하나와 동일시하여 아와 아소의 집착에 메이게 하는 근본장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성 내지 공은 내 안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가진다. 첫째. 나를 규정하는 본질, 내가 되어야 할 바의 본질이 없다는 공은 곧 자아의 무근거성을 의미한다. 거기서 오는 불안의 느낌.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절재적 근거나 가치나 의미 등은 모두 일체가 궁극적으로 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명 속에서 상정된 우리 자신의 우상들일 뿐이다. 그것은 무근거성에서 오는 불안의 느낌을 지우기 위해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거점을 갖기 위해 우리 스스로 설정한 우상들인 것이다.
 
둘째. 자아의 공의 자각은 인연화합의 지평을 뛰어 넘는 초월성 내지 자유의 자각을 의미. 내가 규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순수 부정성 내지 공의 의식, 자신의 공성의 자각은 그것이 우상에 의해 가려지지 않는 한, 바로 초월성과 자유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초월성과 자유, 자신의 순수 부정성의 진정한 느낌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규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아니다의 느낌, 부정의 느낌. 비의 느낌. 비의 심. 비悲 이다.
 
* 비 悲
자신의 공성에서 비롯되는 느낌, 공의 깨달음이 일으키는 느낌이 바로 비.
 
공의 깨달음인 지혜와 공의 느낌인 자비는 불교에 있어 항상 한 쌍으로 이해되고, 그 둘은 존재하는 일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열반과 생사, 부처와 중생이라는 양 극단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덕인 것이다. 반야에 의해 열반을 버리지 않고 대비에 의해 생사를 버리지 않으며...지혜와 자비는 공에 근거한 부정과 다시 부정을 거친 긍정으로서 우리 사유의 이중적 운동성을 잘 보여누고 있다.
 
자비는 공에 의해 부정된 일체의 것을 다시 그 순수 부정성 안에서 긍정하는 정신이다. 어느 하나에 집착하여 머무름이 없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정신이다. 공의 통찰로서의 지혜가 일상적 집착을 벗어나게 하는 부정의 정신이라면, 그 철저한 부정은 다시 긍정으로 이어진다. 지혜가 집착을 버리면서 공으로 들어가는 공의 통찰이라면, 그러한 지혜가 일으키는 느낌, 공의 느낌은 바로 일체를 다시 포용하기 위해 공으로부터 현상으로 나아가는 자비인 것이다.
 
2) 불성의 4덕
 
상락아정의 4도(전도몽상) => 무상 고 무아 무정의 4 무도 => 상락아정의 4 바라밀
 
사덕으로서 상락아정은 공과 무집착에 근거한 긍정이기 때문에 매임이 없고 머무름이 없다는 것 자유의 행위라는 것임. 비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긍정임.
 
인간의 본질은 이미 규정된 것, 이미 실현된 것 안에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현실적인 규정성을 넘어서는 무규정성, 초월성, 바로 공성에 인간의 본질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 생각하는 불성이란 바로 인간 자신의 공성 이외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공을 통해 우리는 부처와 하나이며 다른 모든 중생과 하나이다.
 
만일 천인합일이라는 우리의 오래된 형이상학적 사유가 이러 저러한 인의 본질은 이러 저러한 천의 본질에 합치한다 또는 합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유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공이라는 것, 아공을 철저히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사유다.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모든 사고는 언제나 천을 통해 인을 규정하려 하고, 그러면서 또 실제로는 언제나 인을 통해 천을 규정해 왔는데 바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인도 천도 우리 자신의 사유의 산물을 통해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도 천도 그 본질은 공이다.
 
천의 본질이 공이기에 인으로서 그 성을 삼고, 인의 본질이 공이기에 천으로서 그 성을 삼기에 둘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일체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그 무자성, 공성에 의해 다른 것과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은 공을 통한 하나됨의 느낌, 그것이 바로 자비이다. 내가 내가 아니기에 너와 다르지 않고, 네가 네가 아니기에 나와 다르지 않으므로 , 나에도 너에도 매이지 않으면서 나도 너도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정신이 바로 자비이다. 일체의 공성을 통해 인성이 곧 불성이 되고 지혜가 곧 자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