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_정화

제22구.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백_일홍 2020. 1. 13. 09:08

(법성게)제22구.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

 

닫힘 마음의 중생업을 버릴 때,

해인삼매 가운데서 동일시공과 무한시공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이 제 모습대로

삼계에 살면서 삼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인삼매의 끝없이 열린 시공에서 한없는

공덕으로 서로 열린 세계의 빛을 나누고 있는 것,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익입니다.

 

(법계의 노래)

 

우주 법계는

바람없이 나누는 베풂으로

근원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으니

 

법계와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서있는 듯한 착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을 사는 이유로 삼고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은

법계의 삶을 등지고

스스로 중생의 삶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본래부터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소유된 욕망이 사회적 허구가 아닌지를

절실하게 되돌아 보지 않는다면

허망이 진실이 된 욕망이 도리어

자신을 가두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허구가 욕망의 대상이 되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많은 이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들여다 보면 볼수록

더욱더 작아져 있는 삶이 되지요.

 

그렇지만 뭇 생명들의 생명활동은

생각에 갇힌 소유가 아니라

법계의 생명 나눔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으니

 

중생이면서 법계인

온 생명들의

바람없는 나눔의 만족이 오히려

온전한 삶이며

 

필요한 만큼

나누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것이

뭇 생명들의 참된 모습일지니

 

자신의 그릇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다름이 법계가 되는

나눔으로서의 생명활동이 도리어

중생들이 본래부터 얻고 있는

법계의 이익

보배비이지요.

 

(강설)

상호 열린 세계의 빛

 

모든 존재는 관계의 그물망으로 하나되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독립된 실체로서의 개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관계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계 그 자체는 나눌 수 없지만 개체란, 관계 안에서 더욱 찬연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체를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연기실상인 생명의 장에서 낱낱은 연속적인 불변의 존재자로 존재하거나 단지 일회적인 존재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장과 관계없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독립된 개체로 실존을 한정시킬 때는 유론이나 무론 또는 상주론과 단멸론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허위의 견해 속에 자신을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습을 있는 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생각으로 만든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세계에 사는 것을 닫힌 업의 시공에 사는 것이라 하는데, 중생의 삶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반면 무아의 삼매 속에 사는 부처님의 세계란 열린 시공의 삶으로,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시공을 사는 것입니다. 화엄의 중중무진으로 겹친 시공에서 보면 시공이란 하나의 단일한 시공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공이 동일시공에 겹쳐 있습니다. 203

 

여기에서 보면 삼계의 중생이란 무한시공의 다른 모습도 생각할 수 있지만 동일시공에 무한히 겹쳐 있는 시공에서의 다른 모습, 곧 우리 눈과 귀로는 파악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닫힌 마음의 중생업을 버릴 때, 해인삼매 가운데 동일시공과 무한시공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이 제 모습대로 삼계에 살면서 삼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인삼매의 무안히 열린 시공에서 한없는 공덕으로 상호 열린 세계의 빛을 나투고 있고, 이 빛을 자신의 모습 그대로 받아서 생명이 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생명의 찬연한 불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열린 개달음의 세계에 생명의 빛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이익입니다. 유위로 조작된 생각이 열리면서 나타난 온갖 중생들의 참 생명의 연기인 비로자나 부처님의 빛을 나누는 것이지요.

 

스스로 비로자나 부처님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으로 상호 무한히 침투하면서 법계의 보배 구슬을 단 그물의 모습으로 함께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데에서만이 부처님의 빛으로 있는 것이고 개체의 별상은 이 부처님의 모습에서의 별상일 뿐 이 관계를 떠나서 다른 부처님의 별상이 아닙니다.

 

중생의 얼굴만큼이나 많은 부처님이지만 낱낱 부처님은 다른 모습의 부처님의 그와 같이 존재하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이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빈 마음의 상호침투입니다. 따라서 무한히 많은 부처님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운 데서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되고 이웃의 무한히 많은 부처님의 얼굴을 갖게도 하고 있습니다. 204

 

이 빈 모습이되 자기 모습을 갖는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중생의 그릇입니다. 단지 닫힌 모습인 업의 나툼만으로 중생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화엄삼매인 해인삼매란 바로 모든 중생의 모습 그대로 열린 세계의 빛으로 있는 것을 알 때 나타난 무아의 삼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인삼매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하나도 바구지 않고도 그대로 부처님이 됩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과 사물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니 모든 중생과 사물이 본디 자아가 없고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 데서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갖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없는 삼매에서 모든 모습의 힘들이 내 모습을 갖게 하여 내가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고 그 가운데 모든 중생의 모습을 답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모여서 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중생으로의 자아를 갖지 않는 데서 법계중생으로 부처님이 되고, 법계중생의 제 모습으로 그릇됨을 갖고 있으나 이것은 아울러 이웃 부처님을 만드는 것이니, 끝없이 펼쳐진 부처님세계를 이룩하게 하는 것이 또한 중생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려고 할 때는 한 톨의 밥도 진정한 의미에서 소화시킬 수 없지만 이웃 부처님을 이루는 베풂은 그대로 온 우주 법계를 소화시킬 수 있으니, 베풂만이 이익인 것이 해인삼매에서 얻은 중생의 이익입니다. 205

 

* 내게 인상적인 말:

무한시공과 동일시공

이익

중생의 그릇

바람없는 나눔

나눔으로서의 생명활동

필요한 만큼 나누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것이 뭇 생명들의 참된 모습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