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_일홍 2020. 1. 29. 09:46

18. 대중적 혐오감을 아름다움으로 순치시키는 세속의 힘

 

일회용 생릳의 당대적 흔적인 그 '대중적 혐오감'은 나날이 예쁜 모습으로 재생산되는 생리대의 아름다운 아우라와 다르지 않다. 세속이란, 꼭 그런 것이다. 183

 

19. 윤리와 도덕, 그리고 세속

'있다'고 강조한 그 역설이 곧 역설에 처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그 모든 도덕의 운명이다.

'있는 척 하는 것'의 역설적 일관성이 낳은 삶의 무늬, 실존적 의지의 반복, 그것을 윤리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윤리는 도덕에서 가장 멀리 있다.

 

이 시대의 세속이 우리에게 허여한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윤리로써 도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20. 알면서 모른 체하기

세속을 뚫고 나가는 방식은 그 이데올로기들을 피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숯처럼 정화된, 혹은 너무 잘 닦아 속이 훤히 비치는 이데올로기를 선택함으로서 그 세속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알면서 모른 체하기'는 곧 그런 것이다. 185

 

21. 차이가 나는 반복을 통한 복수

반복되지 않는 행동을 일러 용서할 수 있는 '실수'라고 하는데, 반복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고장된 기계를 '용서'하지 않고 '수리'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종교나 도덕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음의 알속을 기생충처럼 지니고 있는 게 바로 종교와 도덕이라는 사유의 경직이다.

 

어리석음은 반복의 형식을 띠게 마련이고, 따라서 실천적 현명은 우선 반복되는 행동에 유의하는 감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모를 체하기'는 재론할 것도 없는 그 전제다.

 

'좋은 버릇'이란 없다. 무릇 반복되는 버릇이란 체계이며, 의심하지 않는 체계는 필경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의 일부는 기억의 체계와 벌이는 사후적 타협의 제스처다. 4월의 사꾸라 꽃잎처럼 이리석음을 흩뿌리고 다니는 그 짐승 같은 상처의 체계와 만나노라면, '상처는 어리석음'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새삼 절감할 수밖에 없다.

 

라캉의 지적처럼 증상은 구제의 신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 탐닉과 정체성의 체계를 이룬다. 자아가 상처의 체계에 탐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체계의 일부이지 체계를 변명하기 위한 구실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처럼 '타협'에 방점을 찍는다면, 어리석음의 반복은 제한적, 점진적이나마 치료적 효과를 갖는다. 아이는 놀이 속의 반복을 통해 애초에 그 행위가 지녔든 인상/충격의 강도를 소산시키고, 아울러 피해자였던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켜 그 상황을 사후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 놀이의 동기를 '복수'일지도 모른다고 언명한 대목.

 

과거를 구제하려는 사적 시도는, 그 자체로 '집요함 품기', 잊기 않기', 그리고 '분노와 복수'의 정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반복을 통한 반복의 내파가 문제다. 혁명은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을 그것들의 '가능성' 속에서 그것들을 반복함으로써 구출한다. '반복으로서의 복수'

 

내 학생 중의 하나는 성장과정 중에 부녀 갈등이 극심했지만 근년 그녀의 부친을 꼭 빼닮은 남자친구를 사귄다. 상처의 기억을 반복하는 것은 대체로 무의식적이지만, 그녀의 선택은 꽤 의도적이다. 구조화된 상처와 실존적 결단 사이에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여성(주의)적 결기. '아빠를 닮은 남자를 사귀면서 아빠와 다르게 대하기'라는 공식은 물론 복수다.

 

복수가 아닌 것은 동어반복이다.

 

사이코 드라마의 환자-배우들은 '차이나는 반복'을 통해 유사한 상황/관계 속의 불안을 능동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 과거의 실패한 시도들을 그 '가능성' 속에서 그것들을 반복함으로써 구출하는 것.

 

연극이 영원히 계속되면서 인류는 그 전체로서-그리고-개개인이 치료받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연극학'의 기본테제다.

 

기도교가 설계한 인생은 영화의 촬영과 같은 유일회적 사건이고, 윤회라는 재공연을 통해 업장의 소멸과 해탈을 노리는 불교적 인생관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자서전은 불가능'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의도와 결과를 섞고 소외를 오히려 이입(empathy)으로 메우려는 자서전적 태도는 그 자체로 자가당착이면서, 반연극적, 그러므로 반사실적이다.

 

연극을 거부한 채, 인생의 본질을 캐는 체하는 자서전적 태도는 마치 내부에서 그 내부의 완결성을 증명하려는 체계적 불가능에 가깝다.

 

'자서전의 외부는 없다'

 

삶의 진상은 자서전적 회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연극적 실천의 재건축 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사건으로서의 미래적 실천 속에 새롭게 구성될 가능성의 씨앗, 그 씨앗이 얻는 구성적 조망권을 통해서만 우리 삶의 진실은 (새롭게/언제나처럼) 번득인다. 193

 

22.어리석음이 실재로 변화하는 변신의 우화

세속이란, 어리석음을 매개로 하는 인간들의 관계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오직 오리석음을 매개로 할 대에만 가능해지는 관계망이다. 세속은 어리석음이라는 그 매개가 실재로 변화하는 변신의 우화인 것.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