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 2장. 체계와 무지
만히임이 허위의식이라고 불렀던 이 환상의 '체계'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무지'가 우리의 양식이자 우리의 평화가 될 수 있다는 부정적 묵시록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심지어, '무지'가 우리의 존재론적 기반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섬뜩한 현실과 마주하는 체험이다. '쳬계 바깥은 없다'는 선언에서 간취할 수 있듯이, '무지'는 이처럼 '체계'와 비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허위의식의 보편성, 기계성, 무의식성, 그리고 의사 자연성을 분석하는 이론가들의 생각은 이미 고물상을 이루고 있다.
체계와 무지가 만나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음. 이를테면 전두환 '체계'에서처럼 우민화 정책 같은 방식을 통해 '무지'의 장막이 비로소 드리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 오히려 지성과 계몽이 이데올로기로 변질하는 이른바 계몽의 역설적 변증법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는 것.
'알면 다쳐'라는 시쳇말은 인류사에 명멸한 모든 '체계'가 생존하는 방식을 요약한다. 실은 신학과 형이상학조차도 동일한 이치 위에 추축된 건축이다. "신을 보는 자는 죽는다'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바로 이 건축적 '체계'의 구성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층층켜켜에 똬리를 튼 그 모든 부권적 '체계'들 역시 어떤 '무지'에 근거해 있다. 상징저거 지배의 '체계'는 그 지배의 효과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 모든 제의적 반복의 '체계'는 초석적 폭력이라는 원체험에 대한 '무지'에서 반복강박적으로 연역된다. 문명의 '체계'는 억압과 '무지'를 그 값으로 요구할 지도 모르는 일.
뭇 '체계'들의 생존은 우리들의 '무지'에 의지한다. 그렇다. 알면 다친다. 그러나, 모르면 썩는다. 그래서 알면서 모른 체 하기인 것!
약호의 거리 59
우리들은 이미 약호의 체제와 질서를 내면화시켰으며, 그 기질과 성향을 육체화시켰고, 그 폭력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익혔다. 체제의 큰 평화 아래에는 작은 폭력의 체질화라는 시대의 상처가 복류하고 있다.
필시 이후의 인문학은 약호화된 거리들을 묘사하는 글들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약호 체계의 묘사와 기술이 은폐한 서사와 영혼의 내력을 역추적하고 예시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명절, 혹은 소집의 무의식 63
귀향자 의식, 그리고 그 의식을 접속-지배하는 매체의 반복적 보고는 명절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그 비판적 부정성을 거세당한 채 매체의 물질적 단말기로 바뀐 개인의 의식 속으로부터 진실이 추방당한 게 이른바 '신매체 시대'의 인문적 풍경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자연화'된 사이비 정보들의 대해 속에서 인식의 생수는 더더욱 쓰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체계는 은폐된 맹점을 축으로 순환하는데, 체계가 체계를 보도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다. 대체로 우리는 뒷덜미르르 끍지 못하며, 자신의 항문을 보지 않고 살아간다. 체계의 맹점은 체계에 대한 환상이 지피는 곳인데, 명절 역시 체계화된 국가가 민족의 옛 추억에 얹혀 스스로를 공고히 하는 환상의 중요한 일부다.
우리는 개인으로 귀향한다기보다 떼로 소집당한다는게 조금 더 정확할 것. 그것이 귀향이 아니라 소집인 이유는 우선 그 계절적 반복이 별스런 사회적 차이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이 상한선은 민속의 소비를 재포장, 재분배하는 상업주의적 함수일 뿐. 이른바 '차이없는 반복'일 셈.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 차이를 짓지 못하는 반복이 귀향자 개인들의 무능력이나 어리석은 선택 탓이 아니라 구조젖ㄱ으로 차이를 배제하고 반복을 기율화하는 명절의 역사적 무의식 탓이라는 것이다.
명절과 그 전국적 귀향의식은 민족이라는 국가의 원초적 알리바이를 일거에 강변한다. 그것은 국가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허위의식의 전시장 처럼 보인다.
이데올로기 = 그 생성의 역사가 망각된 채 경직화된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