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5장 용서는 없다 2

백_일홍 2020. 2. 6. 09:23

기억을 앓다 160

 

모은 상흔은 양가적이다: 상흔이 망각의 현재며 기억의 과거라는 점에서 그렇고, 치료의 현재며 상처의 과거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프로이트가 '기억 상징'이라고 비유한 이 상흔은 곧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다. 그리고 신경증/정신병 환자들이란 대개 이 다리 위에서 방향 없이 서성이며 생활 속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몸, 혹은 마음 속에는 과거의 외상과 그 상처를 쉼 없이 호출하는 기억의 탑이 솟아 있다는 것. 이 기억의 탑, 혹은 '기억상징'이 특히 병리적인 이유는 에너지의 응집과 집착때문이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보다 열정의 지속가능한 분배에 달려있는 법이기 때문. 외상과 상처의 기억은 정념의 에너지를 한 곳에 붙들어 정신을 병리화한다.

 

인간의 자기정체성은 우선 자의식의 경험적 통일성에 기댄다. 그리고 이 의식의 통일성에서 기억과 그 서사적 일관성의 역할은 중심적이다.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의 문화는 주로 기억에 의지하며, 따라서 그 문황의 주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기억의 장치들이기도 하다.

 

기억은 인간적 성취의 결정적인 징검돌이면서도 동시에 그 병리를 감춘 부분이기도 하다. 정신의 에너지를 한 곳에 고착시키는 종류의 기억들은 지나간 상처의 상징이지 주술이라는 점에서 그 병리를 고스란리 드러낸다. 기억은 단순히 존재의 정체감을 교직하는 정신의 바느질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게 아니다. 기억은 존재를 간섭하며 속이고, 조작하고 재구성하며, 예고 없이 침입하거나 심지어 반복강박적 형태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특히 폭력의 기억은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도덕적 미봉의 제스처를 뚫고 올아와 그 기억의 폭럭을 몸속에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 굳이 병리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무엇보다 기억으 앓는 존재인 것이다.

 

자살의 언어학 167

 

자살을 당사자의 개인 심리 속으로 환원시키는 발상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혹은 종교-도덕주의자들의 협관근식일 뿐, 인상을 지형과 혼동하는 것이다.

 

때때로 개인 심리는 블랙홀 같은 것이어서, 주변의 모든 사실들을 제 스스로의 무게로 인해 함몰시키기 때문이다. 심리학으로 그 원인을 헤아릴 요량이면 그것은 곧 미로에 빠지는 것이다.

 

한편 '자살을 권하는 사회'라는 말의 선정성에 생각없이 얹히는 태도도 매우 위험해 보인다. 이와 같은 술어는 지식의 키치적 유형화의 전형으로서 현실의 이해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른바 자살 신드롬을 심리적으로 헤아리는 태도 속에 볼류하는 기운은 모종의 사적 윤리학이다. 그리고 나는 이 윤리학이 극히 위험한 사고구조이 한 징후라고 본다. '풍경 속에 은폐된 기원, 태도 속에 사라진 장소성, 이 경우 심리학은 컨텍스트를 무시하는 텍스트주의의 아마주어리즘으로 속절없이 전략한다. 사회적 체계와 구조의 몫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죽음을 주변화하고 죽은 자를 제도적으로 몰아내는 문화와 과잉청결의 사회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죽은 자에 대한 대접과 예의가 다시 초점에 놓여야 한다. 특히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와 유교적 전통이 엄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심리학적 아마추어리즘이 생산한 소문들만을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우선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죽은 자에 대한 공정하고 섬세한 대접 속에서 바로 살아있는 우리들이 추구하고 품는 삶의 질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배고파라는 말을 나는 허기를 가지고 이다. 죽다라는 사건을 목숨을 잃다라는 어법 속에 유형화시킨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은 명사주의나 요소론적 사고. 몸, 언어, 그리고 사유재산 등 인간생활의 기초 단위들이 모두 명사적 상상력에 의해서 조형된 터에 이 고래의 구습에서 자유로운 생활문법을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목숨을 경시하는 사회, 무고한 생명을 빼앗다. 는 표현 등등 자살의 보도와 관련해서 습관적으로 교환하는 언표들은 모두 목숩/생명이라는 원형질적 움직임을 명사적 상상 속에 고착시키고 있다. 이 명사주의적 문법은 곧 '인간의 생명'이라는 소유자-소유물의 구도 속에서 생명 현상을 대상화하며, 더 나아가 인간과 생명을 주객의 이항대립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의사 문법적 무의식에 빠지게 한다.

 

자살하기 이전에 인간은 의당 이항대립적 구도와 무관하게 하나의 지속적인 생명의 흐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대개 이 주체성은 전의식적이며, 문법적 관례 이전의 것이다. 가령, '나는 살아있다/살아 간다'고 말하지 '나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나 담론이 이처럼 유형적으로 흘러가면서 바햐흐로 주객이 역전되는 현상이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생명이라는 동사적 현상 그 자체가 곧 사람인데 비해서 죽은자의 경우에는 '생명'만이 홀로 명사적 상상 속에 포획되고 매스컴을 통해 반성없이 소비된다. 이로써 죽은 '사람'은 실종된채, 그 사람의 '생명'이라는 허상만을 두고 왈가왋하는 매스미디어적 글쓰기/말하기가 폭발한다.

 

잃어버린 그 아까운 '생명'을 탄식하는 매스 미디어 윤리학은 그러나 '사람(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생명'을 아까워하는 사후 담론은 문법적 매너리즘에 빠지고, 그 속에서 '망자'에 대한 예의는 분실되는 것. 이런 자가당착의 뒤켠에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시선이 온존한다. 서구의 경우에는 자실이 신의 창조섭리를 어긴 죄이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부모로부터 얻은 것(수지부모)의 훼상시킨 죄라는 것.

 

'자신을 파괴할 권리'의 문제는 그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아 단지 개인적 권리의 맥락에서만 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자신의 인신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고백과 소문 175

 

고백은 소문의 씨앗이며, 소문은 고백의 매트릭스와 같다. 고백은 현전하는 진리의 음성화에 의한 특권적 소통방식이라면, 소문은 결국 그 현전이 무작위로 전염되면서 휘발하는 방식.

 

고백은 반칙이며 사이비 인식론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소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 둘은 타자의 지평과 그 거리를 인정치 않는 자기동일성의 내재화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나의 마음을 말하지 말고 남의 외모를 말하지 마라' 고백은 피하고, 소문을 넘어서라.

 

고백과 소문은 공고한 물질적, 매체적, 제도적 조건 위에서 번창하고, 또 나름의 정당화 장치마저 길러낸다. 고백과 소문 혹은 여론과 사견 사이의 고리를 끊는 일이나, 그 사이에 새로운 대화/공론의 문화를 활성화하는 일은 결심이나 기대보다 쉽지 않다. 고백(마음)도 아니고 소문(스펙타클)도 아닌 발화의 방식으로서의 대화는 음성줌심주의적 특권성도 없고 주술적 전염성도 약할 뿐 아니라 그 유지비용마저 만만하지 않기 때문.

 

인문학과 철학의 공부가 실패하는 지점은 우선 고백과 소문, 심리와 풍경에 의해 그 언어가 포획당하는 지점이다. 실험삼아 고백과 소문, 마음과 스펙타클을 배제한 채 대화를 진행시켜보면, 타자와 팽팽한 긴장과 거리 속에서 교환되는 언어가 얼마나 희귀한 지를 어렵지 않게 납득하게 된다.

 

270억원이 은폐한 것 179

 

이 탈자본주의적 사건을 대하는 매스컴이나 우리들의 시선이 속속들이 자본주의에 찌든 것이었다.

 

한국은 그 생활수준에 비해서 기부문화가 턱없이 낮다.

일회성 거액 기탁의 사례들이 보인 '결단'을 칭송하면서 부의 세습문화를 지목, 비판하는 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세습에 돌리는 것은 책임을 소수의 부호들에게만 돌리는 짓으로 문화적으로 바랍직한 방향이 아니다. 이것은 다수 대중의 사회적 무책임을 은폐하는 짓이며, 기부문화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취지에도 역행한다.

 

오히려 다수 대중이 진득하게 계속할 수 있는 일장적 소액 기부행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단위인구당 세계 최하위의 기부금을 내는 반면, 세계 최고액의 종교헌금을 바치고 있는 이 기이한 사정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같은 종교적 열정의 합리적 재분배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 미담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유통되며, 무엇을 숨기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우리 각자의 남루하고 이기적인 일상을 은폐하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