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신들의 마을

백_일홍 2022. 7. 29. 17:27

신들의 마을

이시무레 미치코

 

▶발제

근대,
. 연금술, 과학 문명
. 폭력. 지배. 살생
. 전쟁

가장 연약한 영혼, 원초적 존재, 원초적 생명, 태아성 환자.

기성 종교들, 침묵한 이름있는 신불들

성의 신비와 타락
생명의 물, 양수와 바다
모성. 해부된 아이를 업고 오는 여성
미나마타병에 걸린 위안부 여성
매춘

근대, 도시와 지방.
도시 자원을 공급하는 전초기지로 전락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피해자 옆에서 함께 싸운다는 것
. 저자, 목소리를 대신 낸 다는 것의 의미, 문학의 역할
. 활동가들

궁극의 출구,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근대가 궁극적으로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고해정토의 의미
고통의 터널을 지난 이들이 갖고 있는 힘, 순도. 가장 연약한 사람들.


 

▶발췌

진보하는 과학문명이란 보다 복잡하고 합법적인 야만세계로 역행하는 폭력지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동양의 덕성이 그 체질에 감추고 있는 전제주의와 서구 근대가 기술의 역사 속에서 관철해온 합리주의의 더 없이 황폐한 결합에 의해 일본 근대 화학산업은 발전하였고, 이 열도의 골수에 파고든 썩은 종양의 한 부분을 미나마타병 사건은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세기에나 인신공양에는 가장 연약한 영혼, 미방비한 생활자들이 선택된다. 죽어가는 영혼의 가련함의 화신이 되어 말고자 하는 자는 그 길에 동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50

일본의 조그만 든바다, 또 그것의 새끼 같은 시라누이 내해를 눈에 띄게 비정서적으로 만들고 있는 염화비닐 조각들은 일본근해에만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 기형의 연금술이 만들어낸 사라지지 않는 거품이 나의 바다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은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것은 '짓소' 미나마타공장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업화한 제품의 하나였다. 51

보이지 않은 자의 영혼을 짊어지고 땅에 앉은 자의 존엄을 지니고, 환자들은 앉아 있었다. 일찍이 인류역사가 들여다본 적도 없는 고난을 겪음으로써 정화되어가고 있는 정신의 고귀함만이 투시할 수 있는 눈초리로.

태초의 신도 토속의 신앙도 모두 잃어버린 경박한 문명을 향해, 환자들은 잠자코 향을 피운다. 향 연기를 따라 환자들은 도쿄를 올려다본다. 조화의 도시를.,,68

회사가 쓰러진다는 것은 미나마타시가 망한다는 거여. 미나마타시민 45,000명의 목숨과 미나마타병 환자 백 여남은 명, 어느 쪽 목숨이 중요혀? 71

미나마타병 사건의 모든 양상은 단순한 중금속중독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공해문제 혹은 환경문제라고 하는 개념만으로는 묶어낼 수 없는 양상을 지니고서 이 나라 근대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연관된다면, 그 사상과 행동은 그 인간의 전 생애를 건, 어떤 결정적인 작업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러한 집단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야만 한다. 168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구치소 담에 박아둘 생각을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영혼의 상태에서 나올까? 170

전장에서, 내리 몇백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만하는 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경험을 한 여성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돌아온 끝에 미나마타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남겨진다고 한다면, 최후의 신비로서 성은 남았을 것이다. 태아성 환자를 낳아야만 했던 어머니들의 경우에도, 태초부터 그랬듯이 물고기를 기르는 바다의 물결같은 양수가 그 태안에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태와 바다가 같은 물결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 충분히 까닫지 못한다. 그곳에 직접 독을 주입한 것과 일본의 성의 현실과는 아마도 깊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위안부의 상흔을 지닌 여성의 몸이라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구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정화해줄 복된 상대를 얻어 원래의 바닷가의 광채에 둘러싸여 끝날 수 있었을걸. 180

15세기 남부 스페인에서 태어난 선교사 라스카사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인디언의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는 기록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겸허하고 참을성 있으며 또한 온후하고 과묵한 사람으로서 말썽이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싸움도 다툼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원망이나 미움, 복수심조차 품지 않는다."

화형당하고 사나운 개에게 물려 찢김을 당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여성도 어린이도 학살을 당했던 민족에 대해서, 이 선교사는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때 자기 내부의 가장 선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 었다. 문명적인 야만 속으로 이때도 우르르 몰려가듯 돌입한 것이다.

라스카사스의 눈에 비친 인디언은 미나마타와 시라누이 바닷가 사람들과 어쩌면 이리 흡사한 것일까? 보다 못한 소수의 지원활동가들의 귄유로 피해자들이 재판을 결심한 것은, 재해 발생 이후 15년.,,20년 혹은 30년이나 지나서였다. 스페인의 학살자들의 신과 우리 지방의 사태를 소멸하고자 했던 자들, 혹은 보고도 못본 척하고 있던 자들의 종교심을 비교해보았을 때 5세기를 지난 지구 이편에서는 이름 있는 신불들은 거의 다 무표정했고 바로 이 무표정이야 말로 현대의 악령을 불러낸 것이 었다. 190

사람들의 발병에 앞서 이미 장기간에 걸쳐 환경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25~1926년부터 어합조합이 짓소에 대해 어업피해 보상을 요구할 만큼 어획고가 급감함. 1953~1954년경부터는 수생생물만 아니라 고양이, 돼지 등의 육상동물, 까마귀, 물새, 족제비 등도 미쳐 죽는 것이 확인됨. 게다가 환자가 공식적으로 발견(1956.5.1)되고 나서도 공장폐수는 방치됨. 1959년 어민들은 정화 장치 설치 등과 어업보상금을 요구하며 공장에 들어가 경찰과 충돌함. 221

햐안붕대루다가 머리끝에서 발끝꺼정 칭칭 감아놨드라구유. 해부를 해놓았응께. 조각조각난 것을 감아둔 것이겄쥬..

가즈코, 힘들었지? 해부니 뭐니 당허게 허구., 엄마가 암것두 모르구 생선을 먹여서, 생선을 토막내듯이 너를 잘라놓았으니. 여기서부터는 엄마가 업고 집에 데리다줄게, 하고 말했지유. 별루 눈물두 안 나오더라구유. 해부라는 것은 어디를 자르는 걸까유? 발이 빠져서 선로 위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배를 옆으로 갈라놓은 것 아닐까, 손이 접히믄 으쩔꺼나, 걱정이 되구, 머리가 또 툭 떨어져버리면 으쩔꺼나 싶기두 허구.

붕대루 칭칭 감아서 눈허구 입술밖에 안 나와 있었거든유. 피라구 해얄지, 국물이라구 해얄지, 스며나와서유. 우리 애기 국물이지유, 그야 내가 낳은 아이니 내 국물이여 싶구. 눈물두 나왔든가 기억이 안 나는 구먼. 229


후기

애초에 머릿속 구조도 몽롱하던 10대 무렵, 대체교사를 하고 있던 2차대전 말기, '국가와 마을과 가정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하기 시작한 나에게, 미나마타병이 출연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열에닐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알 리 없지만, 전쟁 말기 시골마을의 모습은 그런 철학소녀를 길러내기에 충분한 광격이 되어 있었다. 근대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미나마타병이 그 속에 포함되었다. 가장 중요한 축은 '도시 대 지방'이었다.

이 사태가 도쿄만에서 벌어졌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몇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수난자들이 도시민이었더라면, 어떤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근대에 들어오기 전의 일본이라는 풍토가 보이기 시작했다. 풍토에 의해 길러지고 있던 민족. 목가적이고 풍요로운 정취, 아직 편찬되지 않은 신화 속에 있는 듯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학교교욱이라는 시스템 속에 꿰맞추어진 적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풍토, 산과 들의 정령들 같은, 존재의 원초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자질의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그곳에 있었다. 어리석은 체하며. 321

분명히 거구로 된 세상이다. 20세기의 종언에 들씌어 있던 세월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사람들은 '또하나의 이 세상'의 유민이었다. 극단의 수난을 겪는 이분들이 손을 뻗어 구원해주고 계신 것은 이쪽일지도 모른다. 322

작품해설
이 책은 <고해정토> 제 2임. 1970.9월 ~1989년, 계간지 <벤쿄>에 연재됨.

2004년 <고해정토> 1, 2부 합본으로 간행됨.
1974년 <고해정토> 3부에 해당하는 <하늘 물고기> 간행됨.


역자후기

조상들이 하던 대로, 날 새면 바다에 나가 자연이 재어주는 보화들을 거두어 자신과 가족들을 먹이고 기르던 이들의 평화 속에 느닷없이 찾아든 '괴질'과 투병, 이웃과의 갈등, 끝나지 않는 재판, 끔찍한 죽음들에 작가는 온 맘 다해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길들여지지 않은 그녀의 생생한 입말은 그들의 원환과 억울함, 고통, 슬픔과 절망을 우리 앞에 쏟아놓습니다. 시라누이바다는 고해입니다. 332

하지만 이 고통의 바다는 태고의 환상처럼 맑고 아름다운 목가적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신들은 저 멀리 있는 초월자가 아니고 뒷산의 여우였다가 꿀벌, 강아지였다가 너구리, 어쩌면 인간일 수도 있고, 죽은 이는 나비가 되어 날아들기도 하니 이 세계에서 모든 존재들은 한 생명으로 이어진 '신들의 마을' 주민이고 고해와 정토는 하나입니다. 이 참혹한 이야기가 내내 환하고 따스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해를 정토가 되게 하는 것은 함께 버려진 이웃들, 나와 함게 울고 나를 대신해서 울고 있는 이웃이라 해야겠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이들, '스스로는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하여 작가는 이 작품을 썻습니다.

"나의 펜은 그녀들의 깊은 한숨과 한밤중에 떨구는 눈물 한 방울의 순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고, 끝내 그이는 겸허하지만, 바로 이 펜이 고해를 정토로 만들고,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해야 하는지를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