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건강의 배신

백_일홍 2022. 7. 29. 23:23

 

건강의 배신 _ 무병장수의 꿈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12장. 자아를 넘어선 진짜 세상

자아의 죽음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철학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생명력 없는 물질세계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20세기 생화학자 자크 모노가 통렬한 승리의 어저로 한 말이다. "마침내 인간은 무정하고 광대한 우주 안에 홀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적어도 한 세기에 걸친 자기애와 자기몰두로 한껏 부풀어 오른, 한없이 매촉적인 '자아'라는 인식에 매달려 있다. 우리는 필연적인 소멸보다 늘 한 걸음 더 앞서가려고 애쓰며 도망자처럼 살고 있다. 한 번이라도 더 맣은 식사,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운동, 더 많은 의료 검진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죽는다. 글세, 어저면 죽을 수 없을지돋 모른다. 자아의 죽음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적 딜레마에 대한 전통적 해결책은, 그저 우리 이외에 신이라는 형태의 의식적 동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종종 강요와 강제였다. 약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오늘날에도 세계 인구의 대다수-이 신이 전능하고 단일한 존재라고 주장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는 척이라도 해왔다. '세계종교'는 그가 전적으로 선하며 전적으로 사랑이 많다고 단언한다. 비록 이러한 약간의 홍보로 인해 신은 앞뒤가 맞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는 혀과가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 그러한 신을 빋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노력을 기울였다. 남은 선택지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국은 한낱 쓰레기 더미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들이 종종 질문을 받는 것처럼, 죽음 뒤에 오는 것이 오로지 무일 뿐이라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거의 보편적으로 현대의 학자들은 인실교의 발흥을 위대한 도덕적, 지적 전진으로 인정했다. 신화 속에서, 일신교로의 이행은 종종 커다란 판테온에 속해 있던 다신교 신의 권능을 빼앗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예를 들어 야훼는 초기 가나안에서 숭배한 신들인 아세라와 바알을 몰아내야 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러한 변화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 히부리의 왕 사울, 그리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처럼 왕의 포고에 따라 갑작스레 일어날 수도 있다. 유일신은 완전한 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지녔고, 이는 다시 왕권을 정당화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왕은 신에게 부여받은 권리로 다수린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깔끔한 시스템이다. 도덕적으로 성가신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건 단 하나뿐인 신이 선을 완성한 것이라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신교로의 전환은 신들을 죽이는 기나긴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믿음'이 필요할 정도로 먼 존재라는 추상적 개념만을 남겨 놓고, 고대의 신들과 정령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태시켜 버린 것이다. '원시' 인류가 그린 그림은 살아 있는 영혼들로 가득 찬 자연계를 담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동물, 소중히 보호받는 자율적 존재이자 인간에게 관심과 존경을 요구하는 산과 강 같은 것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활기 넘치는 이러한 세계관을 "애니미즘'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에도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거대 '세계 종교'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하고 비논리적인 토착 신앙에 대해 애니미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아니 어쩌면 깍아내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으로는 애니미즘에 뒤이어 다신교가 출현했다. .. 최초의 다신교는 힌드교라고 여겨진다. 약 기원전 2500년 생겨난 힌드교는 아직도 코끼리 형상의 가네샤와 원숭이 형상의 하누만 같은 동물 신의 형태로 애니미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고, 바위산으이 사원과 성소에서도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신교 도입에 기꺼이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일신교는 너무나도 친숙한 신들과 동물 신, 정령,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축제들을 모두 포기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은 아크나톤이 죽자마마자 다신교로 돌아갔고, 히브리 왕들은 과거의 가나안 종교로 계속해서 되돌아가려 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신교 내부에서도 다신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었다. 그리스도굥의 신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으로 나뉘었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내에서 성인들의 존재가 급증했다. 한편 애니미즘의 잔재는 불교와 함께 번성했다.

지난 500년 동안 일어난 '개혁' 운동들은 이러한 일탈을 억압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성인 숭배를 탄압했고, 삼위일체설을 경시했으며, 교회에서 향과 장식을 비롯한 특별한 물품들을 제거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와하비즘이 살아 있는 생물의 예술적 묘사와 음악을 금지하면서 수피즘을 탄압했다. (와하비즘은 18세기에 순수한 이슬람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탄생한 와하브파의 교리나 관행을 말하고, 수피즘은 이슬람교도가운데 일부가 신봉하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말함) 종교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특색 없는 것이 되었고, 마치 이 세상에서 인간이 아닌 동인을 그저 상상만 하는 것조차도 단념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아 이외의 물질세계도 생명력을으로 가득 차 있다.

엄숙하게 개량된 일신교는 자연계에서 작인을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근대 환원주의 과학이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과학은 일신교의 신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시카 리스킨이 말했듯, 사실 처음에는 과학이 신에게 더 많은 일을 부여했다. 만일 자연에 작인이 없다면, 만물은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동자 Prime Mover'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다른 힘에 의해 생성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최초이 원인을 말한다. '시동자' 제1운동자' 등으로도 변역됨) 하지만 곧 과학은 신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결국은 그들 아무 상관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1966 <타임>이 표지, "신은 죽었는가?". '우리 인간은 생명 없는 우주 안에 홀로 존재하며, 마지막 남은 의식 있는 존재다' 이것이 '자아' 신격화의 지적 배경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신들과 정령들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는 건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뼈대만 남은 낡은 과학이 쥐고 있는 고삐를 느슨하게 만드기 시작할 수는 있다. 사실 과학적 합리성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역사가 잭슨 리어스가 최근에 썼듯이, 자연계에 사형 선고를 한 환원주의 과학은 "그 자체로 '과학'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연히 생겨난 하나의 과학적 설명일 뿐이다. 이는 자연이란 수동적인 기계 장치이고, 자연의 작동을 관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불활성 물질을 통제하는 법칙 비슷한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관념에 근거한 설명이다"

다만 과학은 세포 수준의 생명에 작인이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미세한 차원에서의 작인에 대한 생각으이 변화는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감정과 추론 능력, 심심지어 의식까지 과학적으로 인정하는 추세와 비슷하다.

내가 처음 제기햇던 질물은 인간이 건강,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것이 더 큰 질문-자연계는 생명력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인가-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여러 다른 지점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자유의지'나 '결정'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초파리나 바이러스, 아니면 전자같은데서 출발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애기다. 우리가 어디를 보든 간에 충분히 엄밀하게 살펴보기만 한다면, 자연은 생명력 없는 불활성 세계라는 개념을 거역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따. 스티븐 호킹, '양자 요동' " 우리는 초기 우주의 양자 요동의 산물이다. 신은 정말 주사위 놀이를 한다"

그러니 아마도 우리의 애니미스트 조상들은 엄격한 일신론, 과학, 계몽주위가 지배한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계는 생명력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활기기로 들끓고 있고, 때로는 스스로 행동할 능력과 의도가지 갖고 있다는 통찰이다. 우리가 고요하고 견고하리라 예상하리도 모르는 물질의중심-양성자나 중성자의 내부-에서도 요동이 일어나고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우주가 '살아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커다란 빈 공간에서부터 아주 작은 틈새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다.

죽음 앞에서 자아를 억제하려는 노력들
이 책에서 나는 생명력 없는 물질이라는 개념을 반박하기 위햏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우리를 딜레마에서 벗어나게 해줄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우리를 다른 존재들과 분리시키고 죽음을 너무나 견디기 힘든 전망으로 만들어 버린, 무시무시한 '자아'를 직면하는 것이다. 마지막 몇 년을 암과 '싸우며' 보냈던 수전 손택은 "'나'를 넘어서지 않는 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라고 쓴 바 있다.

환각성 약물 연구 분야에서 과학 탐구이 놀라운 길이 새롭게 열렸다. 대략 10년 전, 환각성 약물이 우울증, 특히 말기 환자의 불안 및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는 언론 기사.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바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그 약물들이 '자아'에 대한 감각을 억제하거나 일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효과를 발히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폴란 2015 <뉴오커>지에 게재한 글. "The Trip Treatment"
자기 소멸 내지 자아의 죽음 같은 것을 경험하며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심오한 느낌이 뒤따른다. 이와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자아는 언제든 나를 배반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자아는 위대한 성취다. 이 내부 엔진진이 정복고 발견이 없는 인간 역사르 ㄹ상상하기느 ㄴ분명 어렵다. 자아는 우리로 하여금 위협에 대해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 준다. 자아의 자만심조차도 때로는 우리의 뛰어난 업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극도로 경쟁적인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잘 연마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자아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폴란은 이렇게 말했다.
" 자아라는 군주는 언제든 폭군이 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우울증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때 자아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생각이 점차 현실에 그늘을 드리운다"

면역체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따. 철학자이자 면역학자인 앨프리드 토버, 면역체계는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죽은 세상에서 죽을 것인가, 살아 숨쉬는 세상에서 죽을 것인가

나는 몇 시간 혹은 며칠의 수명 연장을 위해 고통을 주는 극단적 의료 개입 없이 비의료적 죽음을 고수한다면,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최소화되거나 아예 제거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삶의 마지막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단을 활용할 수도 있다. 예.호스피스, 진통제, 환각제, 안락사. ...내 경우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의 과학적 발전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는 곧 다가올 것이라고 여겨지는 심오한 패러다임 전환, 즉 그 자체로는 생명력이 없는 물질세계라는 가정에 기초한 과학에서 인간이 아닌 작인드ㄹ이 가득한 자연계를 인정하고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으로의 전환을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죽어 있는 세상 속에서 죽는 것, 은유적으로 말해 죽어 가는 별만이 비추고 있는 사막 위에 뼈가 바래지도록 남겨지는 것과, 우리 인간 외에 작인을 지닌 생명으로 들끓는, 그리고 적어도 무한한 가능성이 소용돌이치는 진짜 세상 속에서 죽는 것은 분명 완전히 다른 일이다. 우리 가운데 이 살아 있는 세상을 일별한 ㅅ람들에게, 약물에 의존하든 종교가 있든 없든 간에, 죽음은 어두운 심연으로의 두렵고 급격한 이행이 아니라 계속되는 생명을 끌어안는 일에 더 가깝다. 1956년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신이 임종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시를 썼다.

"자선병원 하얀 병실에서
아침 무렵 일어나
지빠귀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알았네.
이미 언젠가부터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내가 만약 없어진다면
내게 아무것도 잘못될 것은 없을 테니ㅣ.
이제 나는 즐길 수 있게 되었네
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울려 퍼질 지빠귀의 노래를.

그는 즉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빠귀는 계속 노래할 테니.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