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탈코르셋선언

백_일홍 2022. 7. 31. 11:20

탈코르셋선언

 

윤지선, 윤김지영 

 

 

3강. 여성의 몸, 대상이 아닌 역량

 

탈코르셋 운동: 10대, 20대의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주축으로 실천되고 있으며, 이는 비혼-비연애-비출산-비섹스라는 4B 운동의 선언과 면밀히 연결된 운동

 

이 선언을 통해서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더 이상 가부장제 사회의 결혼제도나 이성애적 연애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남성들이 지닌 '보슬아치' 환상의 가능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분쇄해 버립니다. 

 

나아가 이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매력을 통해서 남성들의 자원과 부를 잠식하려는 이성애자 여성으로서의 사회, 경제, 심리적 의존상태'라는 여성 신체자원의 기본값 항목들을 모두 제로로 설정한 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신체가 지닌 역량의 강도와 위상의 방향성을 온전히 새로이 주파하기를 기획합니다.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한정적이고 안온한 여성성의 규준 안으로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매트릭스 자체를 파괴하며, 감히 그 너머의 세계를 욕망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물질적, 사회적 항을 둘러싼 기존 담론의 문제설정의 축 자체를 이동시켜 버립니다. 

 

이때껏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방향성은 어떤 방식으로 수렴되었나요? 여성성은 남성 주체(A) 보편적 인간성, 객관성, 강인한 신체, 근력, 공격성, 독립성들의 반대항(-A), 즉 남성성의 결핍소로서 인지되었으며, 이는 모성애, 주관성, 가녀린 신체, 아름다움, 의존성 등과 같은 고정된 성역할과 여성다움의 획일적 규준들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이에 반해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과 구별되는 외형과 속성들로 구성되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여성들이 어떠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여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문제의 축 자체를 이동시켜 버립니다. 

 

여성을 옥죄며 가동되던 식별의 코르셋(남성 보다 가녀린 신체, 선이 곱고 예쁜 이목구비, 볼륨감 있는 몸매, 사근사근함, 애교 등)으로부터 스스로의 신체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역량과 감각을 발굴하며 더 이상 남들에게 예쁜인형이 아닌, 다양한 역량의 다발체로서의 자신을 조우하고 탐험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51-53

 

코르셋 억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째서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강요하는 그러한 여성성의 규준들에 자신의 신체를 맞춰 나가게 되는 것일까요? 외모 꾸미기나 꾸밈노동이 마치 여성들 자신의 요구나 욕망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 어떠한 각과 정서와 관념이 여성들로 하여금 마치 '자발적으로' 여성성을 수행하는 데 적극 참여하도록 이끄는 것일까요? 

 

여성 신체에 대한 코르셋의 억압은 단지 사회와 타인들로부터, 즉 외부 집단들로부터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강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님. 또한 그러한 코르셋 억압은 여성들 자신의 신체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특정한 감각과 정서, 관념들에 의해 여성들 스스로가 행하지 않으면 안될 어떤 '감정적', '물질적', 질서의 형태로 주어짐. 이로 인해 여성들은 꾸밈노동이나 외무 꾸미기를 수행하지 않을 때 스스로 어떤 부족함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됨. 

 

따라서 우리는 여성 신체에 대한 코르셋의 억압을 지속적으로 가동시키는 특정한 '정동역학'의 메커니즘부터 하나 하나 분석해 나갈 필요가 있슴. 

* 정동역학 : 특정한 방식으로 구축되어 신체에 작용하는 특수한 정서체계의 역동적 질서. 

코르셋 억압은 정서적이고 감각적이며 내밀하고 물질적인 질서로 여성들의 신체에 작용함. 코르셋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인 정서적, 감정적, 물질적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슴.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감각적, 정서적, 물질적 질서를 폭로하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려는 운동임. 

 

여성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이를 둘러싼 다각적 요소들(성역할, 성적 매력, 화장, 여성다움 등)에 대하여 1차적으로 어떠한 '감응력'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임. 나아가 이것들이 어떠한 '정동'과 '역량'들을 이끌어내며 실천을 추동시키는지 고찰해보고자 함. 

.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개념 : 감응력, 정동, 역량

. 신물질주의 이론의 개념 

 

내 몸은 과연 내것인가? 

여성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신체를 둘러싼 다각적 요소들과 조우하고 관계를 맺으며 이에 대한 특정한 감응력을 형성함. 

. 감응력: 하나의 신체가 외부세계의 물체나 신체들과의 조우와 만남을 통해 그 외부자극을는 수용하며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복합적 작용. 이 세상에서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와 마주치며 일으키는 특정한 감각적 지각들의 상이나 다양한 정서적, 인지적 관념들의 상들의 연쇄적 사슬들을 형성시킴. 

 

예. 여성 + 다이어트

이때 그 여성은 다이어트가 자신의 신체와 정신 전반에 일으키는 복합적이며 모순적인 특정 감응력들의 연쇄사살을 하나의 지도처럼 읽어낼 줄 알아야 함. 그래야 이를 통해 다이어트 요소가 좋합적 차원에서 스스로의 존재와 행위역량을 드높이는 기쁨의 정동을 일으키는지, 반대로 역량을 축소시키고 추락시키는 슬픔의 정동을 일으키는지를 깨닫고 이를 지속할지 혹은 그만둘지를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 

 

그런데 문제는 이 여성의 신체라는 '물질'이 여성성, 성역할, 아름다움과 같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코드와 접속.합성되는 방식이 가부장제라는 수직적 질서의 자장에 의해 위계적이며 불균등하게 개편, 배열되어 있다는 것임. 이는 정상적 규범성이라는 사회적, 관념적 요소들에 의해 포진되고 둘러싸여진 여성의 물리적 신체에 '억압'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킴. 

 

예, 급격한 체중감량을 위해 식욕억제제와 이뇨성분의 다이어트 약을 섭취하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해당 약품의 합성 작용이 일으키는 탈수 증상과 복통, 기력쇠진과 두통, 생리불순이라는 부정적인 감각증상(-)에 대해 자신의 존재 및 신체역량의 축소와 하락의 상태를 느끼며 슬픔의 정동에 놓임. 하지만 그 여성은 부정적인 감각증상들을 가녀린 몸매와 아름다움, 인기와 찬사 등과 같은 틀정 사회문화적 관념 및 경험들의 상들과 접속시킴으로써 여성 신체에 가해지는 명백히 유해한 합성 반응이라는 이전의 슬픔의 정동 상태를 '체중감량'이라는 곧 도래할 미래적 상태를 촉진시키는 긍정적 작용(+)의 일환으로 변환하여 해석해 버림. 그리하여 슬픔의 정동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역량 - "아름다운 여성만이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강령 - 을 상승시키는 기쁨의 정동으로 변환하여 수용한 뒤 계속 다이어트 약을 복용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것임.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들 부정적 합성을 회피하려 하며 자신의 신체가 보다 더 강해지는 만남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역량을 궁극적으로 축소, 쇠진시키고 고통과 불편함을 유발시키는 행위들을 통해 기쁨의 정동에 다다르게 되는 것일까? 

 

여성 신체에 대한 억압은 어떻게 기쁨의 정동이 되는가? 

 

몸과 물질의 위상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의 지평 아래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음. 

이 

1. 이 사회에는 정신과 신체라는 위계적 이분법에 근거한, 여성의 물질적 신체성에 대한 금욕주의적 부정과 억압이 기저에 깔려 있음. 이는 여성들이 불완전한 신체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이상적 여성'이라는 불가능한 기표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 즉 여성 신체를 향한 일종의 금욕주의적 박해의 환상을 가동시킴. 

 

2. 여성들의 신체 위에 각인되고 부과되는 다양한 규범성의 기준들이 더 미시적으로 분할되고 첨가될수록 여성들은 스스로의 물질적 신체를 자신의 존재와 행위 역량을 축소히키고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질량, 곧 슬픔의 정동의 덩어리로 부정적으로 경험하게 됨. 따라서 그처럼 슬픔의 정동과 결합되어 있는 자신이 신체를 억압하고 규제하고 관리하는 일이 오히려 기쁨의 정동을 불러오게 되는 것임. 

 

만약 이처럼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억압성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단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 수행성의 집합적 표식이나 유희적 실천, 또는 '여성'이라는 기표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여성성에 관한 사회적 코드와 담론들의 가벼운 잔상 효과로만 해석할 때는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여성이란 단지 사회문화적 특정 조건들의 값에 의해 규정되는 기호이자 특정한 성적 규범성 실천의 수동적이며 텅빈 수송관에 불과해짐. 

 

문제는 이로 인해 평생 동안 여성들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과 조우하며 체험하는 물질적인 몸의 실재성 - 생리통과 배란통의 경험, 호르몬 주기에 따른 다양한 신체증상의 발현, 다이어트로 혹사당한 신체의 면역력 저하, 생리주기에 따른 화장품 알레르기 증상 발현, 성차별과 성폭력 이후의 신체적 휴유증, 완경기 이후의 급격한 신체적 변화 등 - 의 측면들이 간과되거나 부인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임. 

 

이러한 부인의 구조는 여성들이 자신의 물질적 신체 전반을 관통하는 내밀하고도 집단적인 고통의 경험들 - 생리통, 배란통, 출산, 임신중절, 성폭력, 성차별의 경험 - 을 사회적으로 발화하는 것을 저지하게 만들고 여성성 수행의 반복적 실천의 부작용과 물리적 억압성을 폭로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듬. 나아가 특정 물질이 여성의 신체에 일으키는 유해한 합성작용 - 각종 다이어트 약의 부작용, 장시간 메이크업과 하이힐 착용의 피해, 브래지어 착용으로 인한 소화기 질병 발생 등 - 의 효과를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성성이란 관념을 완벽히 수행해내기 위해 치러야 할 부수적이며 사소한 요소들로 치부하게 함으로써 여성이 스스로의 몸의 불편한 감각과 증상들에 대해 원천적으로 둔감해지게 만듬. 

 

온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의 몸과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신물질주의 이론과 여성 신체의 물질성.

 

탈코르셋운동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신물질주의 이론의 지평에서 새롭게 해석해 볼수 있을 것. 

 

신물질주의, 여성은 사회구성적 담론의 작용효과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신체라는 역동적 동인으로서의 역량과 자율적 실재성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살과 문화, 인지간의 상호중첩되고 뒤얽힌" 관계성 안에서 탐색됨. 

 

여기서 거론하는 "물질"로서의 신체가 이전의 본질주의나 형이상학적 실체로의 환원이 아니라는 점. 

 

들뢰즈, <스피노자: 실천철학> 

신체(물질, Corps)란 운동성과 속도를 갖춘 무한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각각의 신체들 간에 이루어지는 감응역량과 그들 간의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그 개체성이 구성된다는 점에서 상호 관계적이다. 

 

이제 신체와 물질은 '아상블라주', '행위자-연결망', '물질성'의 개념들에 의해 새롭게 엮어지고 세공되고 있음. 

 

데란다, 

물질이란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위상을 지닐 뿐만 아니라 인간, 물제, 다른 신체들 간의 다각적 조우와 상호작용의 연결망 안에서 특정한 배치와 '조합체'들을 직조해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신체'란 그것 자체의 단독적 본성이나 선험적인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실재성을 지니고 그와 더불어 "관계적 물질성"을 드러내는 것임. 다시 말해 하나의 신체는 다양한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들과 다채롭게 조응하며 일련의 결합과 배치의 관계망을 엮어내는 역량을으 갖고 있는 것임. 이를 통해 '조합체'라는 새로운 성질의 현상이 출현(창발)하게 되며 이는 또한 언제든지 각각의 요소들로 분리 가능하며 새로운 요소들로  가능하며, 새로운 요소들과의 접속 및 연결을 통해 또 다른 조합체를 형성할 수 있음. 65

 

이러한 관점에서 탈코르셋운동은 이때껏 간과되었던 여성이라는 물질적 신체의 자율적이며 역동적 역량들을 다각적 요소들과의 새로운 배치와 조합체의 직조를 통해 나가는 동시에 이성애적 규범성에 의해 구축되어진 이상적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관념의 감옥으로부터 탈주해 나가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음.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를 고통과 슬픔의 정동에 놓이게 하던 다각적 물질들과 관념들과의 만남이 일으키는 부정적 합성작용들을 명료히 지각, 인식하여 원인이 되는 것들과의 관계를 과감히 절연해 나가고 있는 것임. .. 나아가 브래지어에서 니플패치로, 하이힐에서 운동화로, 정자원피스에서 바지로 옮겨가면서 자신들의 신체감각과 활동의 반경이 온전히 새로이 축조되는 것을 경험하며 신체의 운동성과 속도의 변화를 일으키는 근력 운동법을 공유하기도 함. 68

 

탈코르셋 운동은 가부장제에 의해 위계적이며 불균등하게 배치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조건 아래에서, 전혀 다른 물질적 관계 속에서 새롭게 배치하려는 운동임. 따라서 이 운동에서는 여성들의 감각과 욕망, 경제적 요소(돈, 성공, 자립, 소비), 비전과 야망, 비인간 동물과의 공동거주, 온라인 기반 여성운동, 존재역량, 실천, 직업, 인식과 지식, 가치, 여성 공동체, 기술, 의료, 정치, 환경 등과 같은 다각적이며 다층적 요소들이 그 어느 것도 선험적으로 차별되거나 배제되지 않은 채 그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관계와 감응력의 수평적 연결망 안에서 유연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무한결합하고 접속하고 배치됨. 그리하여 탈코르셋 운동은 '역량의 다발체로서의 페미니스트 여성'이라는 새로운 조합체를 생산해 내고자 하는 것임. 70

 

화장과하는 꾸밈노동이라는 아비투스를 거부하는 행위는 단순히 '~하지 않음을 선택함'을 넘어서 여성의 행동양식과 감각, 활동반경과 인식태도, 욕망과 기호가지 온전히 새로이 발굴하고 주조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탐색을 추동시키는 사건이기도 함.

 

페미니스트 다중이란? 

비규정적인 동시에 강렬하고 강도 높은 역량들의 다발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차원의 신체. 

들뢰즈, '역량'이란 한 존재가 실현해 낼 수 있는 양적 능력의 다발체. 이는 그 존재를 다른 이들과 구분해내는 내재적 강도이자 고유성의 지점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이에 선행하는 본질에 의해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실현해 나가는지를 통해 비로소 그 고유성이 드러난다는 것임. 

 

페미니스트 다중들은 "구성 성분들 간의 결합을 도와주는 끈적끈적한 점성의 응집력뿐만 아니라 형태와 비율, 농도가 언제든지 유동적으로 변환 가능한 유연성"과 탄력성을 갖추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신체와 행동양식, 감각, 경제적 요소, 비인간 동물과의 관계, 비전, 정치, 환경, 의료, 인식체계 등과 같은 다각적 요소들과의 유연한 접속과 배치를 엮어 내는 새로운 '조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것. 85

 

아직 코르셋을 차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까요? 외모로 평가받는 세상 속에서 과연 탈 코르셋은 실현 가능할까요?

 

스피노자, <에티가>, 하나의 정동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정동을 삭제할 만큼 더 강력한 반대의 정동이 나와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화장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보다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이 드러내는 존재역량의 상승의 사진들과 경험담들, 이로 인한 새로운 삶의 양식들의 전략과 태도들이 더 많이 사회적으로 발화되고 공유됨으로써 탈 코르셋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가 높아질 때, 많은 여성들은 그 기쁨의 정동의 물결을 스스로 따를 것임. 102

 

조신한 몸, 아름다운 몸의 습속아야말로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의 편안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햐는 구조적 덫이었음. 이제야 비로소 여성들은 이때껏 남성들이 유려왔던 몸의 편안한 감각을 재발견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의 해방과 자기혐오로부터의 탈주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