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백_일홍 2022. 7. 31. 11:23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_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수업

 

심강현

 

 

1부. 욕망, 껍질 속의 진정한 당신

 

1. 당신을 과거에 잡아두는 쇠사슬, 후회

 

~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과 관계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 지금의 행동의 원인이 되어 벌어질 앞으로의 결과들 말임. 이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은 우리 영혼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인 '이성'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음. 스피노자가 말한 이성의 힘이란 필연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라 볼수 있음. 이런 이해를 통해 더 큰 역량을 가지게 될수록, 우리는 더 새롭고 더 바람직하며 더 강한 욕망들을 늘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임. 36

 

스피노자에게 역량이란 욕망, 즉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임. 이제 여기에 새로운 의미 하나가 더 추가됨. 그것은 바로 '이성에 의한 인식'.  다시 말해 우리의 역량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이성에 의한 인식 능력 모두를 말하는 것. 이성은 욕망의 새로운 싹을 키워 내면서 욕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37

 

그때의 상황이 당신의 미약한 역량과 맞물려 그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형성했고, 거기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필연적 과정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했던 것. 후회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때는 모지 못한 것을 지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 차이의 증거임. 따라서 당신은 과거에는 가질 수 없었던 좀 더 성숙한 혜안과 용기를 이제 가지기 시작한 것임. 

 

과거 어쩔 수 없었던 '선택'에 대한 미련이 후회라면 과거 당신이 미약했던 '역량'을 관조의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성찰임. 깊었던 원한을 풀어 남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함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죄책감을 없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는 것임. 40

 

악인의 악행, 그리고 관용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해롭지 않다는 말은 아님.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측은히 여겨야만 하지만, 처벌은 불가피함. 마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뱀일지라도 공격해 온다면 죽일수 밖에 없듯이. 왜냐면 영혼의 용서와 현실적 처벌은 같은 범주의 것이 아니니까요". 42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처벌할지라도 그이 행동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필연적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 속 깊이 그를 용서할 수 있다는 숭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 

 

관용의 필요성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관용의 자연스러운 도출 과정을 일깨워 줌. 

고결한 것은 항상 '자연스러운 탄생의 계보'임. 43 은 

스피노자의 관용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 혹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던 날 그를 조롱하던 많은 군중들을 향해 되뇌였던 말과 그 맥락에서 많은 부분 일치함. 

"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44

 

2.우리는 모두 신의 한 조각

스피노자는 니체처럼 표호하는 사자가 아니었슴. 대신 완벽에 가까운 논리와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정밀함을 조곤조곤 조리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 주는 내정적 철학자였음. 

,<에티카>, 일견 자가워 보이는 기하학적 증명의 뒤에는 표현하기 힘든 그의 따뜻함이 숨어 있음. 그런 따뜻함을 느겼던 프랑스 철학자 한 말, 

"모든 철학자에게는 두 가지 철학지 있으니, 하나는 자신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49

 

스피노자의 삶에 그려진 문턱, 파문

이렇게 파문을 통해 스피노자가 받은 충격은 파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쏟아 낸 저들의 태도였음. 

 

스피노자의 철학은,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이들이 스스로 슬픔을 치유해 내고 끝내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고심했던 사유의 흔적들일 것. 스피노자 역시 당신과 거의 똑같은 경험을 몸소 체험했고 힙겹게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51

 

그를 파문에 이르게 했던 스피노자의 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숭고함, 우주의 거대한 힘. 거대한 우주는 이 세상 전체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만물들과 그것을 낳은 에너지는 한데 어루러져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슴. 스피노자는 이런 대 우주를 신이라 여겼음.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만물을 일러 '생산되어진 자연' 그러니까 '소산적 자연'이라 불름. 또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우주의 무한한 힘을 '생산하는 자연' 즉 '능산적 자연'이라 명명함. 능산적 자연이란 우주의 거대한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의 원리가 곧 자연적 법칙임. 54

 

대우주는 누군가 미리 정ㅇ해 둔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법칙에 의거한 인과 관계 흐름에 따라 스스로 모습을 바꿔 가며 지금도 자신을 생성하고 있음. 이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한 그의 신이다. 그의 신은 '신 즉 자연', 다시 말해 대우주, 대자연 그 자체임.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우주의 얼굴을 가진 신.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신이 스스로 모습을 조금씩 변화시킨 신의 일부임. 우리는 모두 대우주가 만들어 낸 소산적 자연의 일부로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의 거대한 에너지인 능산적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의 정신과 힘을 가지고 있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가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연약한 들풀이라도 신의 고귀한 일부니까. 신의 한 조작. 이렇듯 시피노자의 눈에는 분명 신성은 어디에나 깃들어 있음. 

 

"실재성은 곧 완전성이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미 완전하다.

 

생명에 촛점을 맞추고 있음. 

생명이 깆든 모든 것은 각자 삶을 만들어 감. 자연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삶을 창조해 나감. 따라서 모든 삶은 스스로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생명에게 완전성은 그런 삶의 힘을 말함. 그리고 그런 삶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하다는 이야기임. "더 할 나위 없다" 

 

거미의 완전성, 사람만의 완전성이 따로 있을 뿐..생명에게는 각자에 맞는 고유한 완전성이 있음. 

 

이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자신의 삶을 유지해 가며 스스로 찿게 될 내적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임. 63

 

3.뒷골목에 버려진 몸

 

"욕망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 영혼의 두 마리 말.

 

소크라테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플라톤, 두 마리의 말과 이성이라는 마부. 우리의 영혼을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비유함. 한 마리 말은 '욕망'이고, 다른 한 마리 말은 '의지'. 마차 위에서 '이성'이 고삐를 꽉 잡고 있음. 이성이 보기에 자유로운 욕망은 미치광이나 마찬가지. 이성은 의지의 말에게 명령을 내려 의지로 하여금 욕망을 조절하게 만들어야 함. 그래야만 마차는 정해진 길을 따라 아무 탈 없이 달릴 수 있게 됨. 69 욕망은 천박스러운 몸에 의해 생긴 것이고, 이성은 영혼의 순수한 결정체임. 그리고 의지는 욕망과 이성의 중간 레벨에 해당함. 이렇게 형성된 '이성 중심주의'는 플라톤 이후 철학사의 전통으로 자리잡는다. 

 

스피노자의 공로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읍니다. 하나는 철학사에 버려져 오랜 기간 방치된 우리 '몸'을 부활시켰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악의 화신쯤으로 여겨지던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급부상시켰다는 점입니다. 70

 

"정신과 육체는 하나입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그 둘은 하나입나다." 

 

구원을 위해 감내해왔던 현실에 대한 체념은 서서히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음. 시대는 변화고 있었으니. 수렁에서 건져 낸 육체의 가치는 영혼불멸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중세 천 년을 이어온 그들의 믿음에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함. 게다가 17세기를 휩쓸었던 과학혁명은 중세적 거상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함. 이해할 수 없었던 신의 섭리를 이해 가능한 자연법칙으로 변화시켰슴. 76

 

중세를 벗어나면서 도래한 르네상스는 예술과 인문학적 자유의 작은 시작이었음. 초월적 신이 아닌 현실의 인간에 주목한 것이며, 이것은 훗날 계몽사상과 자연과학 혁명으로 연결됨. 

 

근대의 위대한 가시적 업적 아래에는, 어쩌면 스피노자가 주목했던 육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고귀한 양분으로 작용하고 있었는지 몰라. 이 내세가 아닌 이 세상이야말로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임을 말해 준것. 

<에티카>,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게 함. 

 

4. 고귀한 너의 이름, 코나투스여!

 

우리의 영혼은 이성과 감정과 욕망으로 이루어져있음. 이성을 가장 중요시했던 플라톤과 달리 스피노자는 욕망을 우리 영혼의 본질로 생각함. 이로써 이성은 이제 마부의 자리에서 내려와 한 마리의 말이 되어야 했고, 대신 욕망이 마부의 자리를 차지함. 한송이 장미, 욕망은 보이지 않는 흙속의 뿌리에 해당함. 이성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꽃, 감정은 나머지, 줄기와 잎과 가시가 될 것임.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근원적인 것으로 욕망을 생각함. 이성은 단지 욕망이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작동하는 우리 영혼의 브레인이며, 감정은 욕망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나타내는 눈금에 해당할 뿐. 이성은 욕망의 조력자이며, 감정은 욕망의 표현임. 82

 

욕망이 우리 영혼의 근원적인 뿌리라면, 욕망 자체의 뿌리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욕망. "그것은 자신이 자신 안에서 유지되길 원하는 욕망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살고자 하는 욕망임. 스피노자는 이런 근원적 욕망, 즉 '삶에 대한 욕망'을 '코나투스'라고 명명함. '관성'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려는 생명의 힘을 코나투스라고 부른 것임. 

 

우리에겐 유혹적인 '파괴적 힘'도 엄연히 존재한다. 매일 같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파괴하고, 자신도 파괴당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코나투스는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요동칠 수 밖에 없다. 삶의 의지는 파괴의 힘과 삶의 힘이 겨루는 천칭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힘겨운 곡예를 넘는다. 그리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로서 표현되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기도 함. 85

 

스피노자는 프로이트와 반대로 죽음 충동 같은 것은 절대로 인간 보유의 본성일 수 없다고 생각함. 자기파괴의 욕구는 자신 내부의 원인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본 것. 

"예를 들어 자살하는 사람은 마음이 무력하며 자기의 본성과 모순되는 외적 원인에 전적으로 정복당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익과 해로움.

서로에게 이익이 되며 상생할 수 있는 관계를 일러 '결합'이라, 서로에게 해가 되며 삶의 의욕마저 저하시키는 파괴적 관계를 일러 '해체'라 명명함. 

 

칼의 좋고 나쁨은 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관계'에 있음. "이 세상에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그 자체로 악한 것도 없습니다."

" 이 대자연 속에서는 원래 선한 것도 원래 악한 것도 없습니다.... 그 관계가 '결합'이라면 그것은 그에게 선이며, 관계가 '해체'라면 그것은 그에게 악입니다. "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