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당신이 옳다 _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 정해신, <당신이 옳다>를 읽고
: 고통에 관하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을 읽고 생각이 좀 복잡해져 글로 써본다. 글을 쓰면서 선명해지는 게 아니라 되려 얽히는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써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 그야말로 삶 자체가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겪고 죽음의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을 오랫동안 상담해오면서 그런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편이 바로 공감이라고 말한다. 이 공감이라는 방편은 저자가 오랫동안 고통의 현장에서 실험하고 검증한 것이기에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어갔다. 이 책은 고문피해자, 5.18, 세월호 유가족 등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뿐 아라 크고 작은 고통과 상처가 일상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을 위해, 공감이란 심리적 심폐소생술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한 자가치유 메뉴얼이다.
책을 읽고, 고통에 관해 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에 관해 생각해본다. 정혜신님은 치유의 작업은 상처받은 존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감정과 느낌(마음)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오해와 갈등, 폭력과 분노, 우울이 일상이된 지금 그럼에도 평온한? 일상을 살 수 있으려면 고통스런 경험-상처-감정(느낌)-공감-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를 위해 수시로 이 책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닿은 구절들을 옮겨 본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띈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59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멀어진 삶이다.
그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투명한 인간취급을 당하며 존재가 거의 희미해진 종착역은 어디일까. 소리 안 나는 총을 맟은 사람처럼 조용히 허물어지는 일이다. 청년고독사가 그 극단적인 결과다. 57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예상치 않은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리적 CPR은 꼭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살리게 된다. 58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92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느낌과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105
"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노느니 장독 깬다고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이라도 날려보는 것이다. 그러니 끼니처럼 찾아오는 일상의 갈등과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 만약 그의 대답이 없어도, 그가 대답을 피하거나 못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107
자기 존재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순간은 당사자가 누구보다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생명의 본능이다. ... 내 눈길이나 숨결, 신음 같은 한숨 등 이 말보다 더 또렷한 말이 된다. 나는 눈길, 숨길로 그녀를 이불처럼 감쌌다. ....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군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참혹함 속에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전부 잃은 사람도 그 '한 사람'을 만나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 전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이상한 연결처럼 느낄 수도 있다. 논리적, 수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현상인데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한 사람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110
슬퍼하는 걸 나쁘게 보지만 않아도 누군가의 상처를 말하고 듣는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유적인 경험이 된다. 내 경우 고통스런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나면 나도 정화되는 느낌을 갖는다.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던 사람의 소리를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주파수가 일치하면서 잡음이 사라지고 또렷한 소리가 들리는 합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명징해지는 평화를 느낀다.
그때부터는 힘이 들지 않는다. 상대와 함께 같은 서핑 보드 위에 올라서 같은 파도를 맞으며 함께 출렁이며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든다. 공감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날렵한 힘인 것 같다고 나는 매순간 느낀다. 221
사랑 욕구가 일생 동안 쉬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피폐해지지 않고 살 수 있다. 차의 성능이 좋아져도 휘발유나 전기 등의 동력없이 일미터도 움직일 수 없다. 몸이 산소와 음식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듯 마음은 사랑 욕구가 채워져야 움직인다. 사랑과 인정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나이, 지식, 경륜, 성찰이 아무리 깊은 사람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뒤들린다. 그가 가진 경륜이나, 지식, 성찰도 무용지물이 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종의 법칙이다. 223 "
----------
한편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에 관해 생각해본다. 고집멸도의 그 길과 정혜신님이 말하는 존재의 핵인 감정(느낌)을 붙들고 찾아가는 치유 즉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우선 붓다는 일체개고라 했고, 이 가르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즉 욕망의 세계(욕계)의 삶에서 고통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붓다를 찾아와 아이를 살려달라 애원하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여인에게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을 집집 마다 다니며 가족 중 누군가의 죽음을 겪어 보지 못한 집이 있으면 그 집에서 겨자씨 한줌을 얻어오라고, 그러면 네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집집을 돌아다녔으나 겨자씨를 얻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여인은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죽음은 나만이 겪는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데 여기까지다. 내게 드는 의문은 죽음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누구나 겪는 보편적 사건이고 삶의 이치라는 사실을 비로소 명확히 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생떼 같은 내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애달픈 고통이 사라지는 것일까? 세월호 단원고 피해 학생의 어머니와 상담을 꾸준히 해 온 정혜신님이 말하길, 어머니들은 평소와 같이 집을 나간 내 아이가 하루 아침에 차디찬 물 속에 수장되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사고를 당한 이후에,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수시로 떠올라 몇 시간이고 내장이 쏟아지듯 통곡한다고 한다. 어머니들의 시간은 사고 당일 의 그 시간에 멈추어 있다고. 단원고 피해힉생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 여인 또한 부처님을 만난 이후에도 애간장 끊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사는게 사는게 아닌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만약 자살하지 않고 살았다면.
거칠게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고집멸도의 길, 곧 업을 소멸하여 욕계를 벗어나 해탈하는 길은 나 홀로 스스로 깨치는 수행의 길인데 반해, 정혜신님이 말하는 공감은 나 아닌 타자와 함께 하는 것이고 내가 아닌 타자, '그 한사람'을 통해 비로서 가능한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상처입은 사람이 어찌 혼자 수행이라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고 치유까지 얻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 온존히 살 수 있는 완결적인 존재인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통해 비로소 온전해지는 존재,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할 때 결핍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는 아닌가?
생명의 본능인 삶까지 버리게 만드는 고통스런 경험과 상처는 내가 아닌 타인(체제와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반면 내가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 살아 볼 의지를 갖게 되는 것 또한 타인의 도움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내가 마음이 아파 죽고 싶은 것도, 죽을 것 같지만 살고 싶은 것도 모두 나 아닌 너,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고 너 때문에 울고 때론 웃는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너와 함께 있는 욕계가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 욕계를 떠나는 것이 진정한 해탈과 자유의 길이라면 그것이 진정 내게 어떠한 구원이 된단 말인가?
두서 없이 적어 놓은 이 의문들을 차근히 생각해보면서 정리되는 실마리들이 떠오르면 이어서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