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 _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김상중
한국의 독자들에게
내 가족을 덮친 불행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고, 지금도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이 치유되지 않았다. 극도의 신경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시달린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얼마나 저주했던가...아들은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바랐고, 자신에게 덮친 연옥 안에서 고통 이 끝나기를 바랐다.하지만 세계는 파멸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과 같은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일상이 계속되있고, 그 안에서 견디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세계에는 행복한 자가 있고 불행한 자가 있는가? 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들의 물음에는, 이 세계를 찢을 만큼의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어른은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어딘가에서 "행복을 발견한 최후의 사람들"(니체)의 심경으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의 물음은 그치지 않았고, 이 세계의 부조리의 심연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그야 말로 신에게 질문하는 듯한 격렬함을 키위나갔다. 세계가 망할까? 내가 망할까? 애초에 이 세계는 불평등과 부정으로 가득 차있고, 정직한 자가 오히려 심한 꼴을 당하며, 부정한 사람들이 행복의 향연에 도취해 있고, 한 꺼플만 벗기면 시기와 질투, 선망과 멸시, 적의와 증오가 소용돌이치는 세계가 아닌가. 이런 세계가 살 가치가 있는가. 왜 신은 이렇게 하찮은 세계를 창조한 것일까? 세계에 대한 증오가 커져 가는 가운데 세계의 비참은 자신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계의 비참은 자신들 안에 있다.라고 어느 날 중얼거린 아들의 말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들은 번민하고 고민을 계속한 끝에 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마치 신의 무한한 계획을 안것 처럼 온화하고 부드럽고 무구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세계, 타자,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이었다. 왜 아들이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철학이나 우주론, 생명론을 다룬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사색을 거듭하며, 그렇게 된 것일까?
하지만 아들이 거듭나고 '회심'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 언제까지고 건강하기를,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이 죽고 몆달이 지났을 때 일본의 도호쿠 지방을 덮친 대지진이 일어났고 원전사고라는 미증유의 비참한 사태가 현실이 되었다.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2만명에 가까운 생명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 책이 쓰인 배경에는 이런 슬픈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을 버팀목 삼아 이 책을 썼다.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안에 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비참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죽은 아들과 내가 합작한 기도의 말이다.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
인간의 존엄과 인생과 맞서는 태도라는 의미에서는, 프랑클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박해를 받아 부헨발트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이 가혹한 나날 속에서 만든 노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들은 내일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살면서도 여전히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로 하고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려네라는 노래를 만들어 여기에 희망을 실었던 것. 프랑클은 주장합니다.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 가는 것이라고. 수용소 사람들에게 이 생각을 적용해 ㅂ면, 인생 쪽에서 '너는 견디기 힘든 이 굴욕을 견딜 수 있는가?'라든가 '너는 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하나씩 '예,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 그것도 받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물어오는 것에 대해 계속 대답해 간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도중에 대답하는 것을 그만둔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의 물음 하나하나에 정확히 "예'라고 대답해 가는 것은 결코 낙천적인 선택이 아니라 대단히 무거운 결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이것을 앞에서 본 세가지 가치에 대응시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 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라는 것이고, 운명을 그저 시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184-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