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백_일홍 2022. 8. 1. 16:54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_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

 

타라 브랙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 강연회에서 받은 질문.
"받아들임(저자의 전작의 책)과 행동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지요?"
착하고 너그러운 늑대에게만 먹이를 준다면 우리는 세상의 범죄행위를 외면하게 되지 않을까요? 분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의에 저항하고 진실을 외치고 종전을 촉구하기로 결심하겠어요?

이 질문에 대하나 저자의 경험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얼마 전에 나는 신문을 읽으며 불안감이 커지는 것을 느겼다. 미국 정부수뇌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폭력을 전 세계로 확대시킬 것이 틀림없는 행위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다. 신문에서 그들의 사진을 보기만 해도 분노와 적의가 폭풍우처럼 몰려오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내 마음이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문명상을 하기로 결심했다. 헤드라인을 보고 기사를 조금 읽은 후, 멈추었다. 이렇게 멈춘 동안, 나의 생각을 주시하고 점차 커지는 분노를 인식하고 인정했다. 이어서 그 감정을 조사한 후, 그것이 남김없이 표현되게 내벼려 두었다. 거의 매일, 내가 분노를 받아들이고 그 강렬한 힘을 고스란히 느끼자 그 감정은 두려움 - 이 세상을 위한 걱정 - 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직접 경험하자 그 감정은 크나큰 슬픔 - 모든 괴로움과 상실에 대한 비통 -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슬픔은 미국의 전쟁 행위로 인해 고통을 겪을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곤 했다. 내 조국은 공격적인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이 진실은 가슴을 찟는 고통이었다.

신문 명상 중에 일어나는 감정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나는 순수하고 다정했다. 이 현존은 나의 분노와 두려움 밑에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이 놓여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행동을 취하게 동기를 부여했다. 나를 행동하게 한 것은 적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이었다. 333-334

질문. 개인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잠재된 연민을 깨울 수 있느냐? 누군가가 나를 또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위협하거나 경멸하거나 공격한다면요? 그러면 어떻게 용서하지요?

예수회 수사인 그레고리 보일Gregory Boyle의 저서 <마음에 새긴 문신Tattoos on the Heart>, 갱단의 폭력으로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 솔대드의 이야기

몇 달 후 솔대드는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에 갔다. 그곳에 누워 있는데 총을 여러 발 맞은 어떤 아잉가 들것에 실려 들어와서 그녀의 옆자리에 뉘어졌다.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갱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 애가 죽으라고 기도해" 하지만 솔대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저 애는 가망이 없어" 의사들의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 안의 뭔가가 깨져 열렸다. "나는 여태껏 울어본 적이 없는 것 처럼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제발 저 아이를 살려달라고, 내가 겪은 일을 그 아이의 엄마가 똑같이 겪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 아이는 살아났다. 솔대드의 사랑하는 능력도 살아났다. 처절하게 슬퍼함으로써 그녀는 용서의 길로 들어섰고, 삶과 다시 이어졌다." 336-337

용서에 대한 가르침. 영화 <The Interpreter>의 주인공이 들려준 이야기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복수하길 원해요. 그 누군가를 찾을 수 없다면 신에게 복수하려고 하죠. 하지만 아프리카 마토보의 쿠 족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명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어요. 누군가가 살해되면 그들은 일 년 동안 애도한 다음에 '물에 빠진 자에 대한 재판'이라는 마지막 의식을 지러요. 강가에서 밤새 잔치를 벌이지요. 새벽녘에 살인자를 배에 태워요. 그리고 그를 강으로 끌고 가서 물에 빠뜨려요. 그는 묶여 있어서 헤엄칠 수 없어요. 이때 유가족은 선택을 해야 해요. 그가 빠져 죽게 나두든지. 아니면 강으로 헤엄쳐 들어가 그를 구해주든지. 만일 살인자가 익사하게 둔다면 정의는 실현되겠지만 유가족은 여생을 슬픔으로 보낼거라고 쿠 족은 믿어요. 하지만 그들이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준다면, 삶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면 바로 그 행위가 그들의 슬픔을 거둬가요."

주인공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복수는 일종의 게으른 슬픔이에요" 복수는 게으른 슬픔이다. 복수는 게으른 두려움, 게으른 수치심이다. 복수는 그릇된 귀의처다. 자신의 아픔과 상실, 무력함을 고스란히 느끼기 보다는 서로는 비난하고 마음에서 몰아내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솔대드는 이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 아들을 복수에 잃었다. 처절하게 슬퍼하는 행위는 복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에 이르는, 사랑을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다.338

 


'게으른 슬픔'을 넘어서기 :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을 읽고


이 책은 이제것 마음챙김과 명상에 관해 읽었던 것들과 비슷한 내용이라 특별한 것이 없다고 느끼며, 쭉 읽어갔다. 그런데 거의 다 읽어갈 쯤 내가 이 책을 만나게된 이유일 것 같은 대목을 만났다. 물론 이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잡게 된다면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겠지만. 그건 바로 "연민"에 관한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저자가 느낀 수뇌부를 향한 분노, 그 분노에 그치지 않고 반전운동에의 참여를 이끈 연민, 또한 갱단에게 죽임을 당한 두 아들의 어머니 솔대드와 아프리카의 쿠족 이야기는 내게 중요한 질문과 답을 던져준다.

1.
첫 번째 질문은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 저자가  강연회에서 받은 질문이다. 저자의 전작인 <받아들임>을 읽은 독자가 물었다,  "받아들임과 행동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지요?" 착하고 너그러운 늑대에게만 먹이를 준다면 우리는 세계의 범죄행위를 외면하게 되지 않을까요? 분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의에 저항하고 진실을 외치고 종전을 촉구하기로 결심하겠어요?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얼마 전에 나는 신문을 읽으며 불안감이 커지는 것을 느겼다. 미국 정부수뇌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폭력을 전 세계로 확대시킬 것이 틀림없는 행위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다. 신문에서 그들의 사진을 보기만 해도 분노와 적의가 폭풍우처럼 몰려오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내 마음이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문명상을 하기로 결심했다. 헤드라인을 보고 기사를 조금 읽은 후, 멈추었다. 이렇게 멈춘 동안, 나의 생각을 주시하고 점차 커지는 분노를 인식하고 인정했다. 이어서 그 감정을 조사한 후, 그것이 남김없이 표현되게 내벼려 두었다. 거의 매일, 내가 분노를 받아들이고 그 강렬한 힘을 고스란히 느끼자 그 감정은 두려움 - 이 세상을 위한 걱정 - 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직접 경험하자 그 감정은 크나큰 슬픔 - 모든 괴로움과 상실에 대한 비통 -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슬픔은 미국의 전쟁 행위로 인해 고통을 겪을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곤 했다. 내 조국은 공격적인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이 진실은 가슴을 찟는 고통이었다.

신문 명상 중에 일어나는 감정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나는 순수하고 다정했다. 이 현존은 나의 분노와 두려움 밑에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이 놓여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행동을 취하게 동기를 부여했다. 나를 행동하게 한 것은 적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이었다. 333-334

2.
두 번째 질문은 개인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잠재된 연민을 깨울 수 있느냐? 누군가가 나를 또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위협하거나 경멸하거나 공격한다면요? 그러면 어떻게 용서하지요?

저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갱단의 폭력으로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 솔대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두 아들이 갱단에게 살해당한 후, 솔대드는 몇 달 후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에 갔다. 그곳에 누워 있는데 총을 여러 발 맞은 어떤 아이가 들것에 실려 들어와서 그녀의 옆자리에 뉘어졌다.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갱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 애가 죽으라고 기도해" 하지만 솔대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저 애는 가망이 없어"라는 의사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녀 안의 뭔가가 깨져 열렸다. "나는 여태껏 울어본 적이 없는 것 처럼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제발 저 아이를 살려달라고, 내가 겪은 일을 그 아이의 엄마가 똑같이 겪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 아이는 살아났다. 솔대드의 사랑하는 능력도 살아났다. 처절하게 슬퍼함으로써 그녀는 용서의 길로 들어섰고, 삶과 다시 이어졌다." 336-337

저자는 또한 영화 <The Interpreter>의 주인공이 들려준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복수하길 원해요. 그 누군가를 찾을 수 없다면 신에게 복수하려고 하죠. 하지만 아프리카 마토보의 쿠 족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명을 구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어요. 누군가가 살해되면 그들은 일 년 동안 애도한 다음에 '물에 빠진 자에 대한 재판'이라는 마지막 의식을 치러요. 강가에서 밤새 잔치를 벌이지요. 새벽녘에 살인자를 배에 태워요. 그리고 그를 강으로 끌고 가서 물에 빠뜨려요. 그는 묶여 있어서 헤엄칠 수 없어요. 이때 유가족은 선택을 해야 해요. 그가 빠져 죽게 나두든지. 아니면 강으로 헤엄쳐 들어가 그를 구해주든지. 만일 살인자가 익사하게 둔다면 정의는 실현되겠지만 유가족은 여생을 슬픔으로 보낼거라고 쿠 족은 믿어요. 하지만 그들이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준다면, 삶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면 바로 그 행위가 그들의 슬픔을 거둬가요."

주인공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복수는 일종의 게으른 슬픔이에요" 복수는 게으른 슬픔이다. 복수는 게으른 두려움, 게으른 수치심이다. 복수는 그릇된 귀의처다. 자신의 아픔과 상실, 무력함을 고스란히 느끼기 보다는 서로를 비난하고 마음에서 몰아내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솔대드는 이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 아들을 복수에 잃었다. 처절하게 슬퍼하는 행위는 복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에 이르는, 사랑을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338

3.
나 또한 저자처럼 신문을 읽으며 분노할 때가  종종있는데, 그 분노의 가장 밑바닥에는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었음을 알았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조사하는 과정을 따라  분노 -> 두려움 -> 슬픔 ->연민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참 흥미롭고 유익하다.

상실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처절히 겪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상실과 고통이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한다면 비록 그 사람이 벌을 받는다해도 아니면 내가 직접 복수를 한다고 해도 슬픔은 그대로 안은 채 증오심을 떨치기 어려울 것 같다.  솔래드와 같이, 사람이란 상실의 슬픔 그 밑바닥에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 비록 그가 내 원수일지라도 그 사람의 생명마저도 살리고 마는 심성이 깃들어있는 존재가 아닐까?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의 최종심급을 불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이 연민의 마음에 다다를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은 무엇일까? 진정한 치유는 정의가 실현되어야 비로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게으른 슬픔에 그치는 일이고, 충분히 처절히 겪지 못한 나머지 슬픔이 어딘가 남아 쌓일 것이다, 사회에도 개인에게도. 이 세상에서 그나마 정의가 실현되기 까지 너무나 지난하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목소리 마저 낼 수 없는 수 없이 많은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정의를 넘어 충분한 슬픔, 연민, 그리고 치유에 까지 이르기 위해 가야할 길은 참 먼 것 같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