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성의 글쓰기

백_일홍 2022. 8. 1. 17:29

여성의 글쓰기 _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

 

이고은

1. 자아를 찾아가는 글쓰기
. 자신과 대화하십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치다 다쓰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25

따라서 자기 이야기를 쓰려면 자신을 잘 알고 객관화하는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 곳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글감을 찾되, 개인의 이야기가 보다 큰 거시적 맥락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발견하는 연습은 분명히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그러려면 자기 삶을 낱낱이 뜯어보고 그 구체성을 맥락화해야 한다. 나를 낱낱이 해체하고 관찰하고 비판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 속 내 좌표를 확인해야한다. 스스로에 대해 속속들이 탐구한 이가 쓴 글은 그만큼 논리적이고 선명해질 가능성이 높다. 31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대단한 모험을 하지 않더라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방법은 또 있다. 그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다른 이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다. 타인이 쓴 책 속 문장에 빠져드는 일일 수도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독서를 편집적으로 하는 편인데, 이는 몰입의 다른 양상이다. 어떤 한 가지 생각과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관련 영역의 레퍼런스를 탐독하고는 한다. 37

크고 작은 모험이든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든,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그 결과를 나만의 것으로 소화하는 일이다. 바로 기록이다. 기록은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규정한다. 인생을 눌려 담아 쓰는 글에는 확장된 나의 세계가 담긴다. 꾸준한 성찰의 결과가 쌓이면서 내 삶의 반경이 넒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넒어진 시야 속에서 사고는 더욱 깊어지고, 글감은 더욱 풍부하게 발견된다. 결국 글은 삶으로, 삶은 글로 선순환된다. 38

나만의 특별함을 찾아서
보통의 세계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글로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 어떤 현상을 관찰할 것인가, 그중 무엇을 골라낼 것인가, 그것은 어떤 이야기의 한 단면인가,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 이 모두가 쓰는 이가 홀로 감담해야 할 외로운 숙제가 된다. 하지만 이 과제의 무게를 견뎌내는 방법이 있다. 혼자서만 감당하지 않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을 해 온 앞선 이들의 글을 탐독하고, 같은 숙제를 안은 이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는 일이다. .... 나의 고뇌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하는 요구가 있다는 사실. 실존하는 수요를 확인하고 나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보다 확고해진다. 이 과정이 없다면 글 속에 허세와 관념이 가득 찰 위험이 크다. 49

자신의 글이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은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읽는 이가 나의 글을 통해 새로운 새로운 정보와 관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확고해지면 글을 쓸 용기가 샘솟는다. 그은 결국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구체적 서사가 니지는 힘을 믿는다면, 그것이 독자에게 가닿을 방법이 무엇인지 끝까지 고민하면 된다. 특별한 이야기란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결실이다. 52

2. 진실을 찾는 글쓰기
. 질문하지 않는 사회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아무도 묻지 않으면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다면 이미 존재하는 문제를 인식하기 조차 어렵다. ... 우리 사회가 마주한 수많은 문제들은 어쩌면 누구도 질문하지 않기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에 해법을 찾지 못하고 곪아버린 일들은 아닌까. 글을 쓰는 일 역시 질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사실에 대해 묻고 답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글쓰기의 의지가 발현된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일, 타인에게 묻고 객관적인 답을 구하는 일, 그 결과를 오롯이 기록하는 것이 결국 글쓰기다. 그렇기에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시인할 용기와 궁금한 것을 질문할 의지를 키워야 한다. 81

뉴스를 일고 시대를 읽다
좋은 책을 읽고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만들어진 뉴스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뉴스를 읽고 시류를 짚어내는 것은 글쓰기에 꼭 필요한 일이다. 92

미디어 리터러시, 그 핵심은 주체적인 태도다. 스스로 질문을 갖고 이슈의 맥락을 찾아 탐험하는 것이다. 95


#2.어떻게 쓸 것인가:호흡과 리듬


글을 쓸 때도 자신이 쓴 글을 계속 소리 내 읽어볼 것을 권한다. 묵혀두었다가 읽고 또 읽을수록 좋다. 새로운 독자의 입장으로, 다른 눈으로 반복해서 읽다 보면 몰랐던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 여러 번 읽어도 어색함이 별고 없다면, 성공한 글쓰기일 가능성이 높다. 107

3.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태어난 여성, 길러진 여성

'알파걸' 세대인 나는 스스로 알파걸이라고 생각했고, 차별과 억압, 그로 인한 결핍의 경험은 내 삶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빋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력 있고 뛰어난 여성에게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보다 도전과 성취의 시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 다짐했다. 물론 어리석은 착가이었다. 남성 중심적인 질서 아래 오랬동안 작동해온 이 사회가 마지못해 변화이 물결에 떠밀려 여성, 그것도 젊고 새로운 세대의 여성만을 위해 털끝만큼 겨우 내어준 몫임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질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지만 결국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무너졌다. 여성이라는 정체성때문에 겪는 소외와 배제, 차별로 인한 고통을 그제야 피부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성임에도 책으로, 머리로만 알았던 여성의 문제를 드디어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완전한 성찰을 얻을 수 없는 한계적 존재라는 사실도 이미 깨달았다. 115

노동과 성취라는 삶의 기본 작동 기제가 무의해지면서, 나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이는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로 이어졌다.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제야 나보다 앞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온 다른 여성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이제껏 내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음을 깨달았다. 117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경험에 대한 사유는 그저 머릿속에서, 입속에서 맴돌기에는 부족했다.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기사를 수집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된 후로 만난 이들과의 대화, 공격적으로 흡수한 수많은 텍스트는 여성으로서 내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은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규정되며, 사회가 정한 틀과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범위 역시 제한적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 구조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 나는 어느새 이 두 간극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119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내게 유일한 해방은 글 쓰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집중하는 순간 찾아오는 희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카타르시스였다. ... 주로 엄마가 된 후 바뀐 삶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 해법에 대해 고민하는 글을 쓰는 데 집중했다. 현재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좌표를 명료하게 인지해 삶을 객관화하고픈 본능이 작용해서였다. 생각을 가다듬으며 삶의 방식, 이유, 목적에 대해 정리하고 나면 많은 것이 분명해지면서 충족감이 차올랐다. 문제는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요건들이었다. 121

그(버지니아 울프)가 돈과 방을 논하던 때로부터 9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여성이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사색과 집중에 필요한 물질적 자유와 공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통찰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낯선 이야기가 되었을까. 여성을 옥죄는 수많은 겹겹의 장벽들은 얼마나 걷어졌을까. 125

소외된 자의 낮은 눈높이
기자로서 아이와 함께 세상에 나가면 '일도하고 육아도 하는 워킹망'으로 칭찬받았지만, 무명의 엄마로서 아이를 동반하면 '남편이 벌어준 돈으로 무전취식하는 무능한 아줌마'로 천대받았다. 나의 존재를 그대로인데, 외피가 바뀌자 세상은 나를 다르게 대했다. ....이런 경험은 내가 껵어보지 못한 다른 존재, 다른 계층, 다른 집단의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게 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얼마나 굳은 자세로, 얼나마 뻣뻣한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았던가. 133

간절함에서 꽃피다
이런 현대 여성을 구원하기 시작한 것은 "여성을 해방하겠다"고 앞장선 어느 영웅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으로 상징되는 온라인의 연결된,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정 안에 갇힌 채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가상의 세계를 통해 바깥 세상으로 통하게 된 셈이다.

(가상공간에서) 서로 말을 걸고, 화답하던 이들은 차츰 밖으로 걸어 나왔고, 만나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에게도 나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공명하고, 바로 옆집에 사는 이와도 공감의 전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했다. 우리는 또 다른 나 자신임을, 이 사회 속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들임을 깨달았다. 가정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일들은 결코 사적인 일이 아니며, 사회의 거대한 구조와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공적인 의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인식을 분명하게 하게 된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달은 무렵부터였다. 나는 애타게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껶는 혼란과 뿌리 뽑힌 정체성의 실체,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닥치는 대로 읽고, 사고의 줄기를 찾았다 싶으면 그 뿌리를 파내는 심정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다 나름대로 생각이 정돈되면 글로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삶의 방황, 생활의 혼란에서 출발한 질문의 해답은 결국 페미니즘으로부터 찾았다. 그 도구는 쓰고 읽는 글이었다. 138

낮에 아이들을 돌보다가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조금 더 나아간 정돈된 이야기나 에피소드는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기록했다. 여러 상면이 모이고 모여 긴 호홉의 글을 쓰고 싶어지면 새벽녘에 노트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셨다. 그러다 잠결에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다시 재우고 침대 한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려 누워 모바일에서 글쓰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퇴고와 윤문 등 반복해서 새롭게 읽는 작업이 필요할 때면 PC와 모발이라는 여러 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무척 유용하게 느껴졌다. 139

세상과 단절된 여성에게, 세상에 말을 걸고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일이 또 있을까. 140

글쓰는 여성의 힘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끓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 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은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너미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박경리, <반항 정신의 소산> 145

자신의 언어는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에 대해 쓰다 보면 스스로의 처지가 뚜렷해지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바구어야 하는지 알게된다. 여성은 삶에서 경험한 차별과 소외, 배제를 통해 사회의 부당한 질서를 인지하고 꿈꾸던 이상과의 격차를 느끼며 인지 부조화를 껶는다. 이를 결딜 수 없어 사회 변화를 추동히야 하는 당위를 얻고, 자신을 설득해서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여성의 글쓰기란 새로운 자신과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한 주문 의식과도 같다. 146

남성에게 언어는 절실한 문제가 아니다. 남성의 질서를 토대로 굴러가는 이 사회의 언어는 이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신의 생각, 논리, 문제의식에 대해 일일이 표현할 필요도 남성으로서의 삶에 의문을 가질 이로 지금도다 더 나은 질서를 모색할 이유도 별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한다. 남성의 언어를 가득한 이 사회에서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찾아헤매는 숙명에 놓인다. 그 언어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지워진 존재로서 경험의 기록이며, 자신을 배제하는 체제에 던지는 질문이다. 147

분노하고 울고 일어서다
김용균 씨의 소식. 이 뉴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식 가운데 가장 처절하고 아픈 삶을 조명한다. 무수히 쏟아지는 뉴스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 뉴스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그의 죽음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더 가까이, 누군가는 더 멀리 있다고 느꼈겠지만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와의 거리감을 재보았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50

<정치하는 엄마들>
최근 우리 사회가 품은 혐오의 정서는 여성을 넘어 모성에까지 이르렀고, 페미니즘이 유례없이 주목받는 상황에서 모성은 한층 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 단체다.
이야기의 힘, 개인 서사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 155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들
숨 가쁘게 흘러온 지난 몇 년간, 여성들은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남성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질서 속에서 여성의 몸이란 사고, 팔고, 유린되고, 난도질당할 수 있는 한낱 물건으로 전략할 수 있다는 비릿한 현실을. 여성들은 '내가 강남역 화장실에 있었다면', '내가 서지현이고 내가 김지은이었다면' '내가 버닝썬에 갔었다면'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무너지는 자신을 깨닫는다. 자신은 운이 좋았기때문에, '다행스럽게도' 경찰서에 신고하기까지는 애매한 사소한 희롱과 추행의 기억들만 가지고 있기에, 그나마 이 사회에서 이제껏 겉보기에 '멀쩡한'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음을 체감한다. 159

4. 사회, 연대, 글쓰기
자본주의 사회의 글쓰기 노동

우석훈은 책을 "사회의 최전선"이라고 했다. 한권의 책으로 응축된 사회 진단은 개인과 사회를 단단하게 연결하는 매개물 역할을 한다. 책은 당장 우리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듯한,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들의 해법을 찾는 묵직한 작업을 해낸다. 개인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고통, 과제, 도전의 무게를 객관화하고 기꺼이 응전하도록 내면의 공간을 넗힐 수 있다. 우리가 사회를 다루는 글을 읽어내는 수고부터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175

개인과 사회 그리고 목소리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181

소외된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늘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 The 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명제가 애체오 급진적 페미니즘의 구호였던 데는 이유가 있다. 남성 권력을 중심으로 한 오래된 가부장제 질서의 증거가 바로 여성 개개인의 삶이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는 소외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구조의 균열과 삶의 해방을 원하는 여성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여성은 개인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꺼내놓고 투쟁함으로써, 그것이 사적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사회 의제이자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183


정치적 글쓰기가 아름다운 이유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하는 정치란 통치와 지배의 협소한 의미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의 정치란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기 위한 모든 사회적 행위다. 그가 말한 정치적 목적 역시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구려는 욕구"였다. 타인의 생각을 움직이고자 쓰는 글은 뚜렷한 지향을 품는다. 그 때문에 글에 힘이 있고 색이 선명하다. 오웰은 "내 작업을 돌이켜 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고 고백했다. 185

정치적 글쓰기는 결국 나의 좌표 위에서 내가 바라는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다. 오늘의 나를 규정하고 내일의 세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같은 사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그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어쩐 좌표 위에 서 있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글들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각자의 좌표 위에서 투명하고 선명하게 내는 정치적 목소리는 제각각 타당하다. 우리는 타인의 글에서 나와는 조금씩 다른 시각, 입장, 이상을 읽어내면서 새로운 나를 갱신한다. 쓰기와 읽기가 흥미로운 이유다. 188

이루지 못한 것만 같은 머나먼 꿈을 향해 정진하게끔 만드는 싸움의 도구는 변화에 대한 의지다. 나의 현실과 꿈꾸는 이상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의지. 현실과 꿈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지나온 선배들이 남긴 글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그 정치적 글쓰기의 흔적 속에서 세상이 조금씩 변해왔음을 배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글을 써야 할까? 이는 곧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나아가는 삶, 싸우는 글. 정치적 글쓰기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곧 삶을 향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190

글쓰기로 짓는 연대의 그물망
글을 쓰는 매 순간, 나는 고독에 시달렸다. ... 나의 목소리가 거센 파도 소리에 묻혀 의미 없이 흩어지는 것만 같은 공포에 짓눌렸다.
"작가는 직업 특성상 고립되며,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가끔 재능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201

용산구 주민센터에서 만난(저자의 강의에 참석한) 20대 여성에게 나는 황홀한 연대감을 느꼈다. 내 있는 그대로의 고통, 외로움, 문젱의식을 털어놓는 일은 상대에게 공감과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의 고민과 사고,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내게 위로와 깨달음을 선물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변화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체감하는 감정의 연결고리가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 연대감은 서로가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각자의 몫으로 작동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솔닛, 204

우리 모두의 존엄을 찾아서

지지부진하고 더디게만 보이는, 디로는 거꾸로 퇴보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는 세상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그 동력은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다. 대단한 혁명을 꿈꾸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크고 작은 질문들 앞에 서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