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김영옥
철들지 않는 남자들
- 돌보지 않고 철들 수 있을까
57 한국학자 김열규는 죽음을 오롯이 품지 않으면, 즉 삶의 한가운데 죽음을 두지 않으면 삶에 철이 들지 않는다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에서 말한다. 나는 김훈, 임권택의 <화장>을 보면서 '삶에 철들지 않은/않는' 남성 주체들의 에고를 느낀다.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그 상호 스며듦을 성찰한다면서 정작 이 남성 주체들은 (작가든 감독이든, 혹은 텍스트의 주인공인 오 상무든) 죽음을/타자를 품지 않은 자기만의 남성성에 몰입한다. 활자 텍스트와 이미지 텍스트로서 <화장>은 각자가 다른 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타자 모독적인데, 이미지 텍스트 <화장>에서의 모독은 다방면에서 심각하다.
<화장>은 또한 동물권을 훼손한다. 거의 유일하게 즐거움의 원천이었던 개 '보리'를 "어쩌겠어. 주인의 운명이 그려면 할 수 없이 따라 죽어야지"라며 안락사를 시키라고 유언으로 부탁하는 여자나, "개가 아주 건강한데요? 키우시기 힘들다면 분양시킬 곳을 알아봐 드릴 수 있는데요"라는 수의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사를 시키고 '홀가분하게' 병원 문을 나서는 남자나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60 삶에 철들지 않은 채 나이가 들고, 삶에 철들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의 위치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삶으로 선 절대적 타자인 죽음과 대면하면서 씨줄, 날줄로 뒤엉켜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수록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절대적 타자인 죽음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소설 <화장>을 읽으며, 영화 <화장>을 보며 삶에 철들지 않는 '작가'와 '거장'의 초상을 확인한다. 그리고 병들거나 늙거나 너무 어려서 또는 인간이 아니어서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는 몸들을 돌보는 일이 삶에 철드는 일임을 어떻게 보편적 지식이나 지혜로 만들 수 있을까 질문한다. 돌봄 위기가 보편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돌봄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시대정신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돌봄을 중심으로 대전환을 구상할 수 있을까.
내 안의 할머니
- 야나기 미와의 <우리 할머니들>
미래의 내가 나에게
내가 오히려 만나고 싶은 누군가는 내안에 '울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할머니'였다. 일본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야나기 미와의 <우리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강한 공명을 느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할머니' 시리즈에는 작가 자신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이 '우리 아이들'이다. 작가 야나기 미와는 여려서부터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 아디들' 이미지에서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할머니가 어떤 할머니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내다본 50년 후의 세상은 활량 한 디스토피아다. 그는 그곳에서 10년 넘게 지구 곳곳에서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데려와 키우고 있다. 이 아이들, '우리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는 아무리 멀고 험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길을 나선다. 어디엔가 새로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미와와 아이들 모두는 그 한 명의 아이를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제시를 통해 혈연 중심 가족주의를 벗어난, 품 넓은 모계적 공동체의 비전이 열린다.
현실 속에서는 조부모 '세대'와 손자녀 '세대' 간에 부름과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상호 책임 관계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텍스트상으로는 드물지 않다. 영화, <계춘할망>
젠더를 해체하는 할머니
야나기 미와의 <우리 할머니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할머니 이미지들이 이성애 혈연 중심의 재새산 노동이나 역할과 무관하든 것, 이것이야말로 이 이미지들을 문화 정치적으로 주목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년의 평화와 행복, 기쁨을 부모에게 부과된 훈육의 책임에서 벗어나 '손주들을 마음껏 우쭈주 해줘도 되는 '삶에서 찾고 있다면, 야나기 미와는 그런 일반적인 노년 이미지를 탈혈연적으로 전환하거나 아예 그와는 전혀 무관한 할머니들을 소개한다. '여성'이라는 젠더를 미학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그의 작업에서 '할머니' 정체성은 계속해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엘리베이터 걸>에서 <우리 할머니들>로, 그리고 다시 <동화>에서 <바람 여자들>로 이어지는 야나기 미와의 작업은 의도와 배경,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가 어떻게 구성되고 소비되는지 질문한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바람 여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통괘한 답변일지 모른다. 무수한 산과 대지를 발밑에 두고 거센 바람이 회오리치는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머리카락을 휘말리며 춤을 추고 있는 사진 속 거대한 여성 형상들은 이제 막 천지를 창조하고서 터질 듯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85 가부장제 사회 규범과 자본주의 성문화가 손쉽게 포획라거나 관리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하거나, 무섭도록 제멋대로이거나, 치명적으로 잉여적이다. 한 마디로 젠더 규범이나 규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다른 세상을 여는 여자들
이 '환상의 아틀란티스'를 구성하고 있는 25명의 할머니들이 삶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대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의 세계에서 살아 남은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일구는 유형, 이성애를 벗어난 욕망의 거침없는 친밀성을 드러내는 유형, 그리고 외로움이 아닌 고독한 몰입으로서 홀로 존재함을 표현하는 유형이 그것이다.
첫번째 유형의 인물, 미에와 마카.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난 사포를 연상시킴.
두 번째 유형, 욕망하는 노년 에리코와 유카
192 세 번째 유형, 외로움과 고독 사이, 카호리, 츠구미, 콰니
스스로 용기 있게 선택한 '시간'을 살아낼 것인지, 아니면 원치 않는 홀로 됨에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인지가 결정되는 시기가 노년. 전자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전면적으로 만나는 삶이고, 후자는 외로움 속에서 자기와 소원해지는 삶이다. 외로움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멀어짐은 순환 관계에 있다. 외로움은 희로애락을 나눌 타자의 물리적 부재, 관계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결핍된 감정이다. 그러나 '외톨이'라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고립의 감정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의미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능력의 부재와 관련된다. 타자와 의미 있는 소통의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로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타자자 물리적으로 부재해도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다. 전면적으로 만나는 자기 안에서 타자에 대한 앎 역시 확장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연결되어 있음'이 반드시 물리적인 '함께'를 전제로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니 더 잘 연결되기 위해서라도 홀로 있음의 시간은 필요하다. 이 시간은 더는 외로움이 아닌 고독의 시간이다. 고요한 이 홀로의 상태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삶의 의미, 삶의 목적이다.
카호리.
그는 평소에 꿈꿔 오던 대로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숲 한가운데 자신만의 작은 집을 짓는다.
츠구미. 늦은 겨울 아무도 없는 숲에서 고토를 연주하고 있다.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닌, 봄을 맞이하기 위한 연주다. 고토 현을 뜯자 떨리며 울려 나온 소리가 땅을 흔들고 숲을 깨운다.
콰니. 콰니가 머무는 곳은 책으로 가득한 방이다. 바닥 여기저기에 쌓여 있거나 펼쳐져 있는 책들, 그 사이에 좌식 책상 하나가 놓여 있다. 한 손에 연필을 든 콰니는 책 상 앞에 앉아 상 위헤 펼쳐진 크고 두꺼운 책 위로 한껏 몸을 굽히고 있다. 책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다. 그의 다른 한 손은 곁에서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는 고양이 등에 얹혀 있다. 이 이미지에서 시선을 확 잡아채는 것은 다름 아닌 콰니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그 빛은 충분히 밝고 강해서, 방 안이 어두워도 따로 불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다.
"여자들은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하려고 외모를 바꾼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고 붓글씨 쓰는 것을, 그리고 비 온 뒤의 산을 더 좋아한다.
이제 나는 진리를 알아보는 내 자신의 눈을(my own dharma eyes) 얻게 되었다.
훌륭한 책 위로 몸을 굽히고 활자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날카로운 눈을 가진 노파’라고 부른다.
평생에 단 한번 있는 뜻밖의 발견이라면
좋은 책들과 좋은 친구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리.
살면서 누리는 행복이라면
손에 든 한 잔의 차, 그리고 화로에서 타오르는 향이 유일하리."
나는 개인적으로 콰니가 꾸는 이 노년의 꿈에 감정 이입을 한다. 책과 (책을 매개로 삼아 발견하는) 친구와 비 온 뒤의 산, 그리고 반려묘. 게다가 진리를 알아보는 깨달음의 눈을 갖게 되었다니! 자신의 다르마(dharma, 이치 혹은 법도)가 이끄는 대로 이 책과 저 책을 옮겨 다니며 지혜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참으로 멋진 ‘지금 여기’의 삶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밤중 전등을 켜지 않고 깨달음이 형형한 자신의 눈빛으로 활자들의 숲을 노닌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196
사진 : 바람의 여자들, 츠구미, 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