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백_일홍 2022. 8. 1. 18:15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1장. 호색한과 여성혐오

오쿠모토는 호색한이 여성 혐오적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이 수수께끼를 해석하자면, 남자들이 '남성됨'이라는 성적 주체화를 이루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그들이 민감하게 의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붉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바로 여성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

남자들 마음 속에는 '여자 없이 어떻게 안 될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이성애 중심의 근대인에 비해 소년애를 칭송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여성 혐오가 더욱 철저하게 보이는 것이다. 남성성을 미화하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신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16

안타깝게도 요시유키를 읽어도 여자는 알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였으면 하는가, 에 관한 남성의 성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오리엔탈리즘 이야기와도 같다. 21

세키네는 자신의 논문집에 <'타자'의 소거>라는 의미 심장한 제목을 달았다. 여성을 '타자화'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타자' 범주에 여성을 억지로 집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타자는 매혹과 동시에 모멸의 대상이 된다. '성녀'로 추앙되든 '매춘부'로 업긴여겨지든 모두 한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세키네가 요시유키를 '졸업'하게 된 계기는, 미국인 여성과 사귀고 결혼하게 된 겅험에 의해서였다(고한다.) 이문화의 여성은 '나는 당신의 편리한 '타자'가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타자란 진정한 '타자', 이해하는 것도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한 진짜 타자, 자기와는 전혀 다른 미지의 몬스터인 것이다. 27

여성 작가들은 어떠한가? 자기 내면을 발견하는 자아으로써 그녀들은 '남자'라고 하는 꿈을 꾸었는가? 그 답은 '놀라울 정도로 비대칭적'이다. 남자들은 '여자'라고 하는 꿈을 꾸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의 현실에 일찍 눈을 뜨고 남성 대신 여성, 즉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다. 젠더는 그 성환상의 형성에 있어서조차 이렇게난 비대칭적이다. 28

2장.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혐오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 -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 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호모소셜리티는 여성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37

역사적으로 보면 성의 이중 기준의 성립은 부부 중심 가족인 근대 가족의 형성기에 산업으로서의 매매춘이 성립된 사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제1장에는 '우리들 빅토리아 시대 인간'이라고 하는 풍자적인 제목이 달려 있다. 근대 여명기였던 빅토리아 여왕 통치하 19세기 초두는 일부일처제의 단혼 가족과 매매춘이 동시에 제도로 확립된 시대였으며, 따라서 '빅토리아조'의 '빅토리아 시대의'란 용어는 '위선적'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바퀴벌레를 밝견하면 비명을 지르고 기절할 것 같이 행동하는 품격 높은 '숙녀'를 숭배하는 한편, 홍등가를 들락거리는 '신사'의 존재가 당연시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성의 이중 기준이란 남성 대상의 성도덕과 여성 대상의 성도덕이 서로 다름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남성은 호색할수록 높게 평가되나, 여성은 성적으로 무구하며 무지할 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근대 일부일처제는 형식적으로 '상호 정절'을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남성의 위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의 반칙행위에 짝이 되어 줄 여성이 별도로 필요하게 된다. 52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는 '성녀'와 '창녀'로 분단된 신체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직업 여성'과 '아마추어 여성'의 울타리가 낮아져 아내, 어머니, 딸들이 성적 신체가 되어 성의 자유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불륜 드라마와 원조교제의 등장에 남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아내와 딸이 경게선 안쪽의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고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이 '성적 사용을 금지당한 신체'인 여중생, 여고생에게 높은 가치를 매기는 바람에 '아마추어 여성'이 성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녀들 스스로가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2

4장. 비인기남과 여성 혐오

'성적 약자'론은 이렇게 성의 자유 시장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되어 성의 자유 시장을 조금이라도 전제로 하고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모두 '강자 논리'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성도, 연애도, 결국은 타자의 산체에 접근하기 위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술은 넒은 의미로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의 일부이다. 사회적인 기술이믈 사회적으로 습득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매매춘이란 이 접근 과정을 금전을 매개로 단숨에 단축해버리는 (즉 스킬이 없는 자도 성교섭이 가능한) 강간의 일종인 것이다. 69

성의 자유 시장을 저주하는 사람들은 '규제 완화'되기 이전의 결혼 시장에 향수를 느끼는 경향이 있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도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척 아주머니가 중매 자리를 구해오던 좋은 시절'에는 애써 결혼 활동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덕에 거의 모든 남녀가 결혼 상대를 찾아 짝을 맺는 '전혼 결혼 사회'가 출현했다. 계층차가 큰 신분 사회에서는 상위 계급 남성이 다수의 여성을 독점하는 탓에 하층 계급 남성에게까지 여성이 분배되지 않는다. 독신자의 도시였던 에도에는 그들을 위한 유곽(사창가)가 발달되어 있었다. 근대가 되어도 중혼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본처를 둘 이상 가지지 않은 경우에도 '능력 있는' 남자들은 첩이나 애인을 여럿 두고 있었다. 고도 성장기일본에서 처음으로 거의 100퍼센트의 남성에게 여성이 돌아가게 된다. 이것을 '재생산 평등주의(즉 여성과 아이의 평등분배)'라고

이러한 '전원 결혼 사회'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그것은 결혼이 강제였던 사회,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없었던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시대 결혼은 여성의 '평생 직장'이라 불렀다. 70

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최대 역할은 자존심의 수호 역할이다.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결이 있다. 그건 바로 남자의 프라이드를 절대로 상처 입치지 않으며 수백 번 반복해서 듣는 자랑 이야기에도 싫증 내지 않고 귀를 기월이고 대각선 45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라고 자장가를 부르듯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77

남성과 여성의 균형은 끝까지 남성 우위를 지킴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임을.. 이렇게나 무르고 불안한 것이 남성의 아이덴티티이다. 79

그 호모소셜한 남성 집단에서는 페킹 오더(닭들이 모이를 쪼는 순서 즉 위계질서)에 따라 저절로 여성이 분배된다. 남성의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 집단 내의 지위 획득을 위한 것이었다. 83

그러나 부부나 연인도 점차 정형화된 틀을 잃어가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성적 관계 속에서 상대가 얼마나 이형의 타자가 되는가는 수많은 문학 작품이 묘사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달콤한 공감 같은 것이 아니다. 자아를 판돈으로 내건 필사의 줄다리기이다. 그게 싫으면 관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84

5장. 아동 성학대자와 여성 혐오

'소년애'나 '성애'와 같이 오해를 부르는 용어 사용은 가급적 피하기로 하자. 성은 욕망의 언어이고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다. 성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나는 오늘날, '성애'와 같이 혼란을 부르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잇는 성이 사랑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분명한 경험적 사살이다. 나아가 성은 증오나 모욕을 수반하기도 한다. 바로 '욕망 문제'인 것이다. 88

성욕과 성행위와 성관계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성욕은 개인의 내부에서 완결되는 대뇌 작용의 현상이다. '성적 욕망', '섹슈얼리티'는 다리 사이가 아니라 귀 사이 즉 대뇌 안에 있다. 때문에 섹슈얼리티 연구는 사실 하반신 연구가 아니다. 무엇이 성욕의 장치가 되는가는 개인이나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사물이나 기호에 반응하는 즉물적 경우도 있을 것이고 특정 판타지를 무대장치로 요구하는 복잡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성행위는 욕망이 행동화한 것이다. 그 행동에는 타자(신체)를 필요로 하는 것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전자를 '성관계'로 한정한다면, '관계 부재"의 성행위란 자기 신체와의 에로스적 관계 즉 마스터베이션을 말한다. 사람은 타자의 신체와 에로스적인 관계를 맺기 전에 자기 신체와의 에로스적인 관계를 먼저 배운다. 참고로 마스테베이션은 훗날 경험하게 될 타인과의 성교를 위한 준비 작업도 아니며 그것의 불완전한 대체물도 아니다. 타자 신체와의 에로스적 관계는 거의 우발적이라 해도 좋을 것. 90

아동 성학대자들은 아이의 지배자로서 행동하고 아이들의 신체를 자기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이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아저씨는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런 형위를 하는거야'이라는 대사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리는 거야'라고 말하는 가정폭력 남편을 떠올리게 한다. 96

슐츠는 이들 남성 대부분이 자기평가가 낮으며 스스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피해자들의 격분을 사면서까지 '수복적 사법'의 중요성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고자 하는 것은 '피해자.가해자 양측 셀프 내러티브'이다. 단 양측은 서로 문관하게 존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쌍방의 내러티브가 '사건의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아동 성학대가 사회 안에서 어떤 식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성, 성적 경향, 성습관이 권력의 수단이 되는 방법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
남자를 남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여자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 '여성의 지배자' 위치에 설 필요가 있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자기 것으로)함'으로써 '남성이 된다'. 이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며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 여자 한 명을 지비하게 두는 것은 '남성됨'의 필수 조건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리에 실패하는 것은 남자의 오점이 된다. 아내가 바람이 나면 남자는 소유물 관리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기르던 개에 손을 물리는 꼴이 되어 '남자의 체면'을 구긴다. 아내의 배신 행위보다도 동성집단에서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 남편은 간통한 남자를 반드시 처벌해야만 한다. 103

푸코가 소개하는 고대 그리스의 소년애 이상이 아동 성학대자의 판타지와 대단히 닮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이가 있을 것이다. '남성됨'이라고 하는 스스로의 성적 주체성을 침범당할 위험을 조금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자를 성적으로 제압하는 것, 그것을 위해 가장 벽이 낮은, 무력하고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고르는 것, 또한 상대가 그것을 바라고 있다고 믿으려 하는 것, 그 피해자가 여아인가 남아인가는 중요한 차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동 성학대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많은 수가 소심하면서 취약한 '남성됨' 아이텐티티의 소유자라는 사실의 이유가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들은 아동 성학대를 통해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같은 사실에 대한 동전의 양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106

6장. 황실과 여성 혐오

태어남과 동시에 성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진다. 이것처럼 알기 쉬운 여성 혐오도 없다. 각종 지면 매체가 게재한 황족 가계도 안에는 황위계승권을 가진 남성만이 별도로 표시되어 있고 여성 황족은 남계 혈통이 통과하는 매체(자궁은 대여물)로 간주되어 왔다. 109

이렇게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가부장제 사회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남아선호다. 111

여성혐오의 정의를 간략하게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이라 하자. 112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1889년 황실전범이 성립됐을 때 근대 '천황제'의 여성혐오는 확립되었다. 이 '황실 개혁'의 최대 초점은 남아에게 계승권을 한정한 것이었다. (애도 시대까지는 여제가 존재했다) 작금의 여제 비용인론은 당시 황실개혁파의 논리였으며 그들이 스스로를 '전통파'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황실개혁은 무가의 계승 규칙에 황실을 끼워맞춘 것이다. 장녀 상속 같은 여계 계승, 양자 결연, 여성 호주제 등 근세 시대까지 서민층에서 행해졌던 관행은 메이지의 남계 중시 민법과 호적법을 거치면서 제거되었다. 113

7장. 춘화와 여성 혐오

'여자는 관계를 추구하고 남자는 소유를 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논해지는 남녀관계의 근본적인 젠더 비대칭성을 이처럼 간결하고 탁월하게 표현한 문장을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치정에 의한 살인 모두 남성의 궁극적 여성 지배 욕구에서 나오는 것. 여자가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대는 면식 없는 타인이 아니라 남편 또는 애인이다. 가정 폭력에 의한 살인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는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아내나 애인이 도망치려 할 때 발생한다. 125

여자의 질투는 남자를 빼앗은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지만 남자의 질투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소유권의 침해, 한 명이 여자가 자신에게 소속됨으로서 유지되었던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있어 질투란 다른 여자를 라비벌로 하는 남자를 둘러싼 경쟁의 게임이지만, 남자에게는 자신의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를 건 게임이 된다. 125

남근중심주의.

폭력에 의한 지배도, 권력에 의한 지배도, 경제력에 의한 지배도 아닌 성에 의한 지배, 게다가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배, 즉 공포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쾌락에 의한 지배야 말로 궁극적 지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론에 따르면 자발적인 종속은 지배의 비용을 줄이고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에는 이러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포르노그래피가 포르노 소비자인 남성에게 모든 사회적 속성을 제거한 뒤 다시금 남성성을 회복시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은 쾌락의 원천으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130

근대 이후의 섹슈얼리티란 성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상과 이상을 정의하고 표준과 일탈을 해부하는 지식이다. 지식의 편성이 달라짐으로 인해 근세 이전의 '에로스'는 근대 이후의 '섹슈얼리티'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근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성에 관한 근대 과학적인 지식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는 정상도, 이상도 없으며 이성애도 동성애도 없다.

근대의 성을 둘러싼 세간의 '상식', 즉 부부 간 성애가 다른 종류의 성애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든가 이성간 성기 성교가 정상적인 성애이며 다른 것은 모두 일탈이라고 하는 등의 명제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다. 132

이 '남근의 승리'는 티끌만큼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이 표상이 무엇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남근의 승리'로 생각하고자 하는 남성의 성환상, 아니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136

자유민 소년과의 사랑이 품위 있는 것이라 한다면 그보다 '천한' 사랑은 노예 소년과의 성애, 그리고 더욱 가치가 낮은 것은 여성과의 이성애였다. 전자는 권력과 강제에 의해 상대를 복종시키는 단순한 지배, 후자는 어리석고 비천하며 '시민'으로서의 자격조차 가지지 못하는, 남자와의 다른 생물을 가축과 같은 식으로 복종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라틴어로 패밀리아는 처자와 노예, 가축을 총칭하는 집합명사였다. 이 사실으 통해서도 고전적 성애에는 호모쇼셜한 사회의 필수 요소인 여성혐오가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40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남근은 여성을 쾌락으로 이끄는 장치'이며 '여성은 남근으로부터 쾌락을 얻어야 하며 남근 이외로부터 쾌락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싶은 남성의 망상이다. 이처럼 남근 중심주의가 포르노의 정석이라면, 춘화의 표상에는 물질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남근 지배(펠로크라시)'가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신체 일부로서의 페니스가 아니라 남성 성환상의 핵심을 차지하는 심벌로서 팰러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속 해부학적 남근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거의 페티시즘의 영역에 도달한 남근숭배에 가깝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발기 장애에 대한 남성의 공포나, 비아그라의 사용이 경구피임약에 비해 획기적인 스피드로 인가된 '수수께기'가 풀린다. 그러나 여성은 이러한 남근 숭배를 띠끌만큼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이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남성이다. 142

제 8장 근대와 여성 혐오

'어머니'라는 문화적 이상
가부장제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낳은 아들로 하여그 자기 자신을 멸시하도록 기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을 멸시하는 것은 가능해도 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은 남성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근본'을 더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향한 최대의 모욕은 '창녀'나 '미혼모'와 같이 호모소셜한 남성 공동체, 즉 가부장제 속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가부장제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과 아이읭 소속을 정하는 룰을 가리킨다. 147

앞서 말한 모욕 표현이 남성을 격앙시키는 이유는 성녀와 창녀라는 이중 기준을 만들어낸 가부장제의 성차별 의식을 본인이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그 자신이 호모소셜한 공동성 속에 소속되어 있기를 바라며 한 명의 '사나이'로서 자기 여자를 정식으로 소유하고자 바라고 있다. 그 자신이 차별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차별적 표현은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148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떤 식으로 여성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 이다. '나는 여성이다'고 자인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범주도 모멸로 뒤덮여 있다. 157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여성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에게는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때때로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고집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는 희미로 해석하는 것이 절절할 것이다. 158

'여성'이라는 강제된 범주를 선택으로 바꾸는 것 그 안에 해방의 열쇠가 있을 지도 모른다. 158

 

9장. 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

어머니는 자신이 지불한 대가를 아이가 대신 갚아주기를 소망한다. 아들의 경우 이야기는 간단하다. 출세하여 아버지의 횡포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고 어머니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할 것. 아들이 집안을 물려받게 한 다음 가부장의 어머니, 즉 황태후 지위에 오르는 것이 가부장제 속 어머니의 최종 목표이자 보수가 된다. 딸의 경우는? 시잡가 '다른 집 사람'이 될 딸에게 하는 투자는 길바닥에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딸에게 한 투자는 회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전 지대까지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요즘 시대 딸은 어머니의 '평생 소유물'이다. 딸이 시집을 갔다고 해서 친정 부모의 수발 의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친정 부모 역시 기왕이면 딸이 수발을 들어주길 바란다.

현실적으로 딸에게 기대면서도 겉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는 골치 아픈 상황도 일어난다. 장남인 남동생 대신 어머니를 모시던 딸에게 "평생 딸 신세만 지는 나도 참 딱하다"고 넋두리는 늘어놓는 어머니가 그렇다. 감사의 말 한 마디 없이 "내 팔자도 참..." 하며 신세타령하는 어머니를 돌보는 딸의 비애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162

저출산이 진행되면서 딸은 '여자 얼굴을 한 아들'이 되었다. 163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기뻐하는가

오랬동안 스테이지마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온 나카야마 치나츠는 어머니와 정면으로 대립했을 당시의 이야기를 에세이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 너를 위해서야"를 반복하는 어머니에게 모든 힘을 짜내어 대항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 어머니 입체서 '그래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라는 대답을 받아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넘어 하나의 인격체 대 인격체의 관계로 끌어 올린 그녀의 태도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 기회를 줄곧 회피해왔으며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약자가 되어 있었다. 약자가 된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건 불가능했고 나는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166

현대에는 어머니의 의존 대상이 아들에서 딸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것은 딸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증거일까? "어머니는 진심으로 나를 질투했다" 평생 동안 어머니를 미워한 맏딸, 사노 요코의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잘난 딸 보다는 허약한 아들을 더 애지중지했다. 그런 오빠가 11살이 되던 해 돌연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빠가 죽었을 때 엄마는 오빠 대신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사노는 끝내 어머니를 좋아할 수 없었고 그리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스스로를 줄곧 책망해왔다. 172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들은 스스로를 탓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자 관계와 모녀 관계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딸은 자신의 비인간적인 심성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억압작인 동시에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어머니를 버린' 노인 시설에서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기가 세고 괄괄하며 딸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던 어머니,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부처님'이 되어버렸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잡은 손을 뿌리친 이래 두번 다시 잡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손을 사노는 처음으로 잡았다. 닿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살에 몸을 갖다 대며 어머니와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잠을 잤다. 어머니가 어머니이지 않게 되고 나서 그녀는 비로소 어머니와 화해할 수 있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입에서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이 나왔을 때 50년 세월 동안 나를 괴롭혔던 자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173

어머니가 '어머니됨'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딸은 비로소 '딸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대에 답하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든지, 어느 쪽이든 딸은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어머니는 딸의 인생을 줄곧 지배한다. 어머니는 사후에도 딸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 혐오로서 나타난다. 딸은 어머니를 좋아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역시 좋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딸의 분신이며 딸은 어머니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딸에게 있어 여성 혐오란 언제나 어머니를 포함하여 스스로에 대한 자기 혐오가 된다. 때문에 처방전은 어머니와 딸이 서로 마주보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고 통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174

10장. '아버지의 딸'과 여성 혐오

딸에게 여성 혐오를 가르치는 것은 어머니라고 앞 장에서 말했다. 그러나 그 전에 어머니에게 여성 혐오를 심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다. 어머니는 여성 혐오적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다. 딸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여성 혐오를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어머니를 통해 내면화한다. 여성 혐오란 남성에게 있어서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 있어서는 자기 혐오의 대명사이다. 176

딸은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 관계를 목격하며 자란다. 그리고 자기의 미래 역시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에게 없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엄마처럼은 절대로 되지 않을 테다라며 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음으로써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둘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력관계 속에 비집고 들어가 아버지를 유혹함으로써 어머니보다 우위에 설 가능성이 있다. 교육을 받은 딸은 무학인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의 지성, 그리고 그것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은 엄마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해줄 수 있다며 아버지와 동맹관계를 맺고 어머니를 무시할 수도 있다. 또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어머니 대신 '저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엄마를 가진 아버지가 불쌍하다'며 아버지 편으로 붙을 수도 있다.

이렇게 딸은 가부장제 속에서 '아버지의 딸'이 된다. 178

딸은 자식으로서 절대적 약자이며 또한 아들보다 더 약자이지만 아들이 아버지와 라이벌 관계에 놓이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를 유혹할 수가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에 의해 유혹하는 이로 만들어질 수가 있다. 아버지에게 있어 딸은 자신의 분신, 가장 사랑하는 이성이면서 동시에 금지된 신체를 가진 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딸으느 금기를 수반하는 유혹의 대상이 된다. 181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남성의 성적 기호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심리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남성은 스스로 만들어낸 이 '매혹'을 대상에 의한 '유혹'으로 사후적으로 재구축한다.

딸은 '유혹하는 이'의 역할을 습득함으로써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딸'을 연기하는 것을 통해 아버지를 모멸하고 조소하고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조차 가능하다. 183

<삶-한페미니스트의 반생>은 '아버지의 딸'이었던 여자가 아버지로부터 세뇌된 여성 혐오를 떨쳐내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휼륭한 텍스트이다. 191

'여성성을 혐오하고 폄하하는 심성은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머니에 의해 계승된다'
아버지를 혐오하고 어머니에게는 비판적임에 틀림없던 딸은 그러나 어른이 된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사판'을 자신의 배우자와 재생산한다. '나를 움직에게 했던 애초의 에너지는 내가 받았던 성차별, 성억압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여성 기피'와 '남자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에 대한 결핍 감정이 나를 증오, 비뚤어진 상승 욕구, 동성에 대한 멸시, 그리고 성행위로 몰아붙였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192

"어머니의 언어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고, 아버지의 언어를 선택한다면 거기에는 거세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의 딸로부터 탈피하는 길은 이 양자택일의 선택지 자체를 거부하는 것 밖에 없다. 아버지됨, 어머니됨 아들됨 딸됨-'가족'이라는 어휘 안에 새겨져 있는 근대 가부장제의 여성 혐오를 벗어나기 위해서 여자는 '어머니됨'과 '딸됨'이로부터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 딸 모두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부여한 지정석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로부터)의 해방'과 딸(로부터)의 해방은 언제나 한 쌍으로 붙어 다닌다. 194

12, 13장. 도쿄 전력 OL과 여성 혐오

여성에게 있어 '현대'란 스스로 달성하는 가치와 타인, 즉 남성에 의해 부여되는 가치 모두가 필요하며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시대이다. 231

많은 논자들이 현대 여성의 분열에 관해 여러 방식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요컨대 위의 두 가지 욕망이다. 균등법 이후, 여성은 개인으로서의 달성과 여성으로서의 달성, 이 두 가지 모두 충족시키지 않으면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춘 가격은 매춘부에게 매겨지는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춘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매춘이다. 남자가 지불하는 돈은 남자가 자기 자신의 매춘에 대하여 매긴 가격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욕에 5천 엔이라고 하는 가격을 매긴 것이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성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남성의 추한 성욕에 대해서 ㄱ씨는 5천엔이라고 하는 가격을 매긴 것이다. 거기에는 성욕의 충족을 여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남자들에 대한 비웃음이 존재한다.

자신의 성을 한 없이 '가격 할인'하는 여자, 결국에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대주는 여자, 이런 여자를 남성 사회는 경멸하면서 동시에 '상처투성이 선녀보살' '블랙 마리아'로 포장해 신성화하기도 한다. 어떤 남자도 거부하지 않는 여자, 축생도를 걸어가면서까지 남자를 구해주는 마리아를 그들은 찬미한다. 이런 종류의 신성화는 남성 성욕으로 인한 '뒤켕김'을 여자에게 투영하는 필수 불가결한 장치하고 할 수 있다.
성처녀 마리아 - 창녀 막달라 마리아.

여성을 '생식 전용 여성'과 '쾌락 전용 여성'으로 분단시킨 남성의 '성의 이중 기준'에 남성 스스록 농락당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37

여자를 성기로 환원하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자신의 성욕을 채울 수 없는 성욕의 자승자박 구조를 누구보다도 저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 자신일 것이다. 이 속에 남성의 여성혐오가 품고 있는 수수께끼의 모든 것 - 여성 혐오란 원래 남성의 것이다 -이 포함되어 있다. 여자에 깊이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그 때문에 여자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그것이 바로 호색한이라는 이름의 여성 혐오적 남성이다. 239

남자들은 그런 자승자박 구조가 내리는 저주를 창녀에게로 돌린다. 239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한 여성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양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고 강제로 매춘을 했던 그녀는 "남자로부터 돈을 받는 이유는 네가 내몸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건 돈을 지불하는 동안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돈을 받는다는 행위를 매개로 그녀는 자기 신체가 나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언했던 것이다. 246

그렇다면 매춘에서 여성은 무엇을 팔고 있는 것일까? 매춘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물건됨'(또는 소유됨)을 팔고 있다. "물건됨'을 통해 물건에 사정하는 남성을 단순한 성욕으로 해체,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 때문에 남성은 매춘부를 증오하게 되며 매춘부는 손님을 경멸하게 된다. 247

'주체적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해 여자는 무엇을 달성하려 하는 것일까? 물론 남성을 단순한 성욕으로, 단순한 성기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하고 있는 바로 그것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그녀는 남자들에게 필사적인 복수를 한다.

매춘을 통해 남성은 여성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매춘을 통해 여성은 남성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249

15장. 권력의 에로스화

부부관계의 에로스화. 부부간 성관계가 특권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이 에로스화되 것.
성을 통제하는 권력이 쾌락을 매개로 작동하는 것 = 권력의 에로스화.

에로스가 젠더 관계와 연결될 필요가 없듯이, 젠더 관계가 에로스적이어야 할 필연성은 전혀 없다. 고래 드리스에서 에로스적인 관계란 동성 간에 성립하는 것이었다.

"평생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이 대사에 얼마나 많은 일본 여자들이 전율을 느겼을까, 만약 당신이 이 대사에 '전율'을 느낀 여성 중 한명이라면 당신 역시 '권력의 에로스화'를 신체화한 여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지키다'라는 것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평생 지배하겠다는 의미이다. 남성의 사랑이 소유와 지배의 형식밖에 취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85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를 단일 개념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권력의 에로스화'이다. 에로스와 권력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른 채 분리해 두고 권력을 원래의 장소에 되돌려 놓고 에로스를 더욱 다양한 형태로 충만시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286

16장.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성애 장치 아래에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한 짝이 될 수 없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성적 욕망의 객체 위치를 차지하며,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이다. 이성애 질서란, 남성은 동성 남자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아닌 자(즉 여성)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라는 '명령'을 가리킨다.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 주체'임을 서로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여성'이란 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오로지 남자들에게 욕망되고 귀속되고 종속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따라서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289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다.

"페미니스트는 여성 혐오자다"라는 오해.
맞아요라고 긍정하면된다. 1. 여성 혐오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여성 혐오를 신체화하지 않은 여성은 없기 때문. 2. 페미니스트란 스스로의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사우려 하는 이들이기 때문. 만약 여성 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싸울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이유도 가지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는 '자기 해방의 사상'이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 혐오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분노와 고통을 느껴온 것이다. 298

남성의 자기 혐오.
모리오카 마사히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남성의 자기혐오라고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요" 모리오카는 남성의 자기 혐오에 '자기 부정'과 '신체 멸시'가 있다고 한다. 남성은 신체를 타자화한 대가를 죽을 때까지 지불한다. 남성의 신체 혐오는 남성임에서 오는 숙환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배후에 있는 것은 근대에 있는 주체의 형이상학, 주체와 객체의 이원로느 정신과 신체의 이항대립이다. 남성이 자기 신체를 단련하거나 고통을 가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유는 신체를 철저하게 타자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체의 욕망은 정신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성욕은 '더러운 욕망'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더욱 열등한 위치에 있는 여성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치에 대한 저주는 더욱 더 깊어지게 될 것이다.

남성 신체에 대한 자기 혐오는 탈신체화,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소망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여성 신체에 대한 동일화 소망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여장남자.

모리오카가 지적하는 '남성의 자기혐오' 속에는 분명 남성성의 근간을 뒤 흔드는 깊이가 있다. 그는 남성성과 폭력의 연결을 이야기하는데, 폭력이란 공포라는 이름의 방어 기제를 해제한 타자 신체와의 과잉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신체와의 관계이기 이전에 우선 첫째로 자시 신체에 대한 폭력적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남성의 자기 혐오는 타자화한 신체가 되돌려주는 응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남성이 여성 혐오를 넘어설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신체이 타자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체 및 신체성의 지배자로서의 정신=주체됨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성과 연결되는 성,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영역'으로 여기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모리오카처럼 남자들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신체를 포함한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만 할 것이다. 신체는 누구에게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이다. 자기 신체의 타자성을 받아들인다면 신체를 매개로 하여 연결되는 타자의 존재를 지배나 통제의 대상, 위협이나 공포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타자'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 즉, 남성 '주체됨'의 핵심에 '여성(과 여자 같은 남자)'의 타자화와 배제를 위치시키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302

여자들이 여성 혐오와 싸워왔듯이 남자들도 자신의 여성 혐오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혐오적이지 않는 남자.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