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백_일홍 2022. 8. 2. 09:20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_ 길고 느린 죽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이상윤 

 

 

(작가의 말)

나는 고령의 아버지가 당신 삶의 터전과 감정적 유대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당신 집의 당신 이부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게하는 동안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바를 여기에 담았다.

 

이 다큐는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처리하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이니 방법들에 대한 관찰과 성찰, 그리고 생로병사의 극적인 현장에 반응하는 나의 적나라한 내면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에세이가,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 한 실존 생명의 개별 케이스에 대한 나 자신의 극히 실존적인 체험과 관찰 그리고 성찰의 기록으로 읽히기를 원한다.

 

바야흐로 백 세 시대라도들 한다.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이 그리고 더 유별나게 노화와 죽음의 시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친숙해져야 하며, 이 초고령 사회가 장차 어떠할 것이고 또 어떠해야 할 것인지 절실하게 묻고 섬세하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주요인용: 

 

(낮선 우리집)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 아버지를 태운 구급차와 승용차에서, 그리고 나 홀로 택시를 타고 병원을 오가며 바깥을 내다보던 무수한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아픈 아버지가 있는 나의 이쪽 세계가 세상의 중심으로 클로즈업되면서 나머지 세상이 모두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버린 탓이었다.

 

그것은 내 마음의 반영이었다. 일종의 소외감이었는데, 그 감정은 아버지가 병석에 든 이후 줄곧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든 이후 나의 내면은 대체로 그런 풍경이었다. 죽어가는 인간의 상황은 그 자체가 소외된 것이다. 그 곁에서 동행하는 사람의 간접 체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13)

 

마지막 일 년 동안 아버지는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안방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이상한 장소처럼 보였다. 그 이상한 곳에서 아버지의 몸과 정신이 스스로 풍화하고 있었다.(13)

 

(바람 속의 티끌)

눈을 감는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이 빠져나간 뒤의 아버지 얼굴을 생각한다. 평소 들어온 대로 아버지도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평소의 잠든 모습과는 사못 달랐다.

생존시 아버지의 잠든 얼굴에는 오래된 고통과 고뇌가 뒤엉켜있었다. 그 모습은 언제나 나를 무거운 슬픔에 젖게 했다. 태아처럼 다리를 한껏 오므리고 온몸을 웅크린 채 모로 누워 잠들어 있는 피폐한 늙은 얼굴엔 언제나 깊은 피로와 고독과 고통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시신의 얼굴엔 바로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없었다.(19)

 

이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다. 끝없이 흘러서 우리 모두를 데려갈 것이다. 때가 되면 그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삶은 그런 것이다. 흘러가는 것! 머무르려고 발버둥치면 고통만 커질 뿐이다. 나는 눈을 감고 캔자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를 듣는다.

 

그리고 아버지를 땅에 묻으면 그로써 당신은 자연 속으로 소멸되는 마지막 여로에 들어설 것이고, 우리는 좀더 살기 위해 각자 자기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서 다음엔 결단코 바로 우리들 차례가 될 것이다. (22)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고 해서 아쉬울 게 없는 나이라고 해도 죽음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착각하고 있다. 살 만큼 산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잘못생각하는 것이다. 살 만큼 살았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저절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에게 죽음이 공포의 대상인 것 처럼, 늙은 사람에게도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다. 죽음은 다른 일들고 달리, 우리들 각자가 고독하게 홀로 대면해야 하는 맨 처음이자 마지막 삶의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병원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아버지에게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이 모든 것이 처음 겪어보는 낯선 일이다. 탄생 이후 삶의 모든 단계가 그렇지만, 죽음의 과정은 그야말로 처음 걸어보는 특별한 여행길이다. 게다가 이 여행은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홀로 걸어가야 하는 그야말로 첫 경험이자,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단 한번 뿐인 경험이다. (28)

 

(낯선 여로에 들어)

" 나는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한 육체가 긴 생을 살고서 이제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일은 당사자인 아버지에게만이 아니라,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나에게도 철저히 첫 경험이다 "

 

(집에 가고 싶다)

"나는 곧 죽을 거니까 굳이 치료받을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의 그 말이 떠오른다. 고령의 환자는 죄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병원에 갈지, 어떤 치료를 받을지, 혹은 치료를 받지 않을지를 그 자신이 아닌 타인들, 즉 가족과 의사가 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어느 선까지 환자 본인의 뜻을 따라줘야 하는 것일까? 나는 본인의 정신이 온전한 한 전적으로 환자 자신의 뜻을 따라줘야 한다고 보지만, 이런 생각을 과연 실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대부분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목숨에 관한 한 우리는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오래된 타성에 묶여 있는데, 주도권을 쥐고 있는 병원 시스템과 의사들도 이러한 습관적인 흐름에서 벗어날 의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나는 고령의 환자에게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의미한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삶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사람을 강제로 살려서 인공적인 생명의 감옥에 중죄수로 가둬두는 잔인한 짓이 될 수도 있다.(46)

 

(한밤중의 춤)

충분히 살 만큼 살았다고 전제하고, 죽음의 과정은 대체로 네 범주로 나뉘는 것 같다. 병치레 없이 갑자기 홀연히 떠나는 경우(거의 없음), 심장마비 처럼 죽음의 신호가 오고 나서 즉시 혹은 수일, 수주 뒤에 떠나는 경우(극소수), 발병을 하고 몇 달 혹은 일 년 전후로 떠나는 경우(일부), 이런저런 병으로 혹은 이른바 '노환'으로 수년간 지루한 고통을 겪다가 떠나는 경우(상당수). ... 근래 어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평균 병치레 기간은 7년이라고 한다  

 

죽어가는 인간은 육체의 온갖 고통과 더불어 깊은 고독과 두려움도 겪게 된다.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허무한 고독과 공포에 대해서는 별로 약이 없어 보인다. 그저 누군가가 곂에 있어주는 수밖에 없다. 

 

요즘은 늙어서 아프기 시작하면 당연하다는 듯 즉시 자기 삶의 자리에서 분리되어 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그래서 세포 깊숙이 익숙해져 있던 모든 일상의 환경을 갑자기 잃어버리게 된다. 한순간에 발가벗겨져서 한데로 내쫓기는 기분일 것이다. 따라서 고독감은 더 강해지고, 그러니 요양병원에 입원한 모든 노인들이 하나같이 집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그들이 자기 뜻과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정신적 육체적 힘을 상당히 상실했다는 그 약점을 이용해 우리 마음대로 그들을 그곳에 가둬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49~50)

 

" 아이에게는 어른이 자의로 기저귀를 채울 수 있지만, 어른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때가 되면 그렇게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단계도 지나버린다.(58)

 

(그리운 집으로)

"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순간의 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죽음 자체는 순간의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을 살 경우, 우리는 울적하고 고통스러운 일련의 긴 노화과정과 질병의 결과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노화는 한순간의 일이 아니다. 노화는 죽음과 더불어 종료되는 기나긴 과정이다. (65)

 

어찌보면, 병원이 아버지를 망가뜨려놓은 게 아닌지 생각할 만한 측면도 있다. 이 시대의 현대화된 병원은 대개 진료 과목별로 조작조각 나뉘어 있어서 의사들은 오로지 자기분야에만 신경쓴다. 아버지처럼 심신이 전체적으로 망가져가는 노인 환자의 경우는 그야말로 통합적인 관리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67)

 

이제 아버지의 뇌는 자기 자신과 주변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상태의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 정상적인 소통이 되지 않는데 과연 집에서 이러한 아버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71)

 

가능한 한 아버지를 집에서 모실 것이다. 따라서 어버지가 집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게 나의 목표가 될 것이다. 매일 밤 누워서 잠들고 아침에 깨어나 햇살을 맞이하는 자신의 방에서 말이다.... 나는 이 일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로 한다. 적극적으로 느끼고,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을 함께할 것이다. 내 마음은 그렇게 정리된다. (72~73)

 

(위로가 필요하다)

"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두 영역으로 나뉘었다. 내가 최고의 수준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 나의 세계와, 나의 이런 상황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한 그 외의 다른 모든 세계로! 

 

  병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소외의 감정은, 병자 자신에게는 물론 병자와 밀착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 투병과 간병이라는 비일상적이고 힘든 상황 자체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외감은 엄연히 현실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세계밖의 타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 이런저런 자그마한 호의에도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반면, 평소에 늘 겪어온 인간들 사이의 별것 아닌 일상적인 무관심에도 좌절하게 되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모든 가까운 인연들은, 잠재적으로 더욱 친밀해질 후보이거나 다소 소원해질 후보가 된다.(76)

 

지난 몆 주, 나는 죽음에 근접해 급속히 허물어져가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생명체에 대해 강렬한 연민을 느꼇다. 이 연민은 속수무책에 처한 한 실존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의지와, 그 실존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좀더 공감하고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고통받는 본인만큼은 결코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괴로운 일이다. 고통받는 이가 나와 극히 가까운 인연, 즉 가족일 경우에 그 괴로움은 더 커진다. 동시에 슬픔과 좌절감도 그만큼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인간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미움도 함께 자라기 시작한다. 인간의 목숨이 그렇듯, 사랑조차도 그렇듯, 인간의 연민도 자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77) 

 

  나는 아버지에게 느낀 강렬한 연민이,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이 가면서 보기 흉하게 퇴락해 혐오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다가 소멸해가는 생명체 그 자체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그림자처럼 동반하게 되는 것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늙은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거기다 병까지 든 육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상태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78)

 

  나는 삼년 반 동안 고령의 병든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사그라져가는 육체의 추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내 속에 생생하게 자국을 남기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자국들은 아버지가 흙에 묻힌 뒤에도 아무런 신호도 없이 불쑥 재현돼 나를 괴롭히곤 했다 "

유품을 정리하고 모든 뒤처리를 끝내자, 강한 우울감이 내 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그것은 이른바 '대리외상'의 일종이었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육체의 가슴 아픈 퇴락 과정을 수년간 고스란히 지켜본 간접체험이 내 속에 그런 상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슬픔이 증폭되었고 분노가 분출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 썰물처럼 그것들이 빠져나가버리면 이번엔 그 밀도 높았던 마음의 빈자리가 뒤숭숭하고 불쾌한 공허감으로 가득 채워졌다...때로는 가까운 인연들을 향해 강한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했으며, 그럴 때는 나 자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함께 생겨났다.(80)

 

(가족 간의) 체험의 공유, 

집안에 노인환자가 생길 경우 모든 가족 일원이 나서서 간병에 동참하기 바란다. 저마다 역할이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각자의 처지에 맞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면 된다. .... 불가피하게 고통의 현장에서 상당 정도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환자를 주도적으로 맡은 사람에게 수시로 전화라도 하기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고, 연대가 유지될 수 있다. 누구 하나 외면하지 않고 모두 그 고통에 동참해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받는 고통을 보상하는 큰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날 느닷없이 시작되어 고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우울하게 이어진 삼년 반의 세월을 겪고서,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지난 일들을 반추해보는 한편,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이 일을 대처하고 있는지 관찰하고 묻고 알아가면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난 뒤에야 이러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83)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소변 냄새가 떠돌고 있다. 이 냄새는 이후 오랫동안 내 삶의 일부가 된다.(83)

 

(고용한 간병인) 간병은 몸도 고달프지만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고령의 병자를 돌보는 경우에는 정신적인 어려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인 부담을 견디는 일에 비하면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드는 건 쉬울 수도 있다. 그저 병든 노인 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지수가 급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아니어도 아픈 사람 곁에 밀착해 있으면, 마치 이슬비에 옷이 젖듯 그 환자의 고통이 간병인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감정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그걸 피할 수 없다. 반면 환자에게는 병든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준다는 바로 그 사실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85)

 

(모두가 죽는다)

 

<은하철도 999> 영원히 사는 기계인간이 모티브. 여기에는 소멸을 전제로 존재하늗 인간의 슬픔과 두려움이 투영되어 있다, 미야자와 곈지가 인생 말년에 병치레를 하며 쓴 시 한편,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하고

욕심 없이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고

하루에 현미 네 되와

된장국과 약간의 채소를 먹고

어떤 경우에도

내 계산만 하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녘에 소나무 숲 그늘

작은 초가집에 살며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간병해 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북쪽에 싸우거나 송사가 있으면

사소한 일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걱정스레 지내고

모두에게 바보라고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철학서를 더불어 다시 들여다본 천체에 대한 저서들이 나의 사고를 확장시켰고,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나'의 영속에 대한 욕구로서, 즉 우스꽝스러운 망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 우리의 삶은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작은 점에 불과함에도, 우리는 그 검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강력한 렌즈로 확대하여 엄청나게 큰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물론 죽음의 공포에 대한 그러한 방식의 대처는 관념적인 것이었다. 사실 죽음이란 관념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다르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육체의 차원에서는 절대로 죽음에 대한 불안한 질문을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죽음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존재들이다. 죽음은 결코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그렇게 보도록 만들 뿐이다. 우리는 시간을 순차적으로 겪을 수 밖에 때문에 삶과 죽음이 한몸이라는 것을 좀체 깨닫지 못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생명을 주고 나서 바로 그 생명을 빼앗아가기 시작한다. 둘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머리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큼 몸도 그렇게 절감하기는 어렵다. 그러다가 노화와 질병이 찾아오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동시에 죽어온 세월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마어마한 세월이 있었음을 애석해하지 않을 진대, 왜 우리의 죽음 뒤에 올 어마어마한 세월을 가지지 못함을 애통해해야 하는가. (111~112)

 

자신이 소멸할 거라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더구나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식물이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이 죽어야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내세우면서 죽음에서 삶이 탄생한다는 말 따위로 고상하게 스스로를 위로해밨자 그다지 큰 소용이 없다.

 

나는 특정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혹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연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113)

 

... 죽음은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 처럼, "아! 죽기도 힘들구나!"

 

 

우리는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고 양분을 취해야 하는 유기체로서, .... 우리는 외부에서의 유입이 없으면 멈춰버리는 분수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죽음을 다른 한편으로 제처놓을 수 있다. ... 목숨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것은 사유이전의 원초적인 본능이고 의지이다.. 높은 빌딩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그곳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남자가 왜 헬멧을 챙겨 쓰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고 병든 아버지에게는 그런 모든 언어와 관념들이 다 소용없게 돼버렸다. 육체와 더불어 정신도 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태양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중학생 시절 이후 내 사유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던 관념으로서의 죽음과는 확연히 다는 것이다.(115)

 

아버지를 통해서 드러난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생생하고 직접적인 고통의 현장이다. 어떤 웅장한 사상으로도, 어떤 창의적인 관념으로도, 어떤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으로도 그 슬프고 추한 목락의 모습은 가려지지 않는다.(116)

 

(관심과 존엄)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절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되돌아갈 수 없는 터널, 출구가 보이지 않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터널(118)

 

우리는 다른 생명체로부터 양분을 섭취해야만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순수한 관심이란 있을수 없는 관념적 허상이다. (121)

 

고령의 노인 환자들은 회복돼 건강해져서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갈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그런 희망이 사라진 노인에게는 가능한 한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123)

 

변실금. 아버지는 자신의 몸이 그렇게 되어가는 데 대해 절망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도 절망적이긴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은 왜 전체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죽지 않고 이렇게 하나씩 부분적으로 망가지면서 고통을 겪다가 끝나는 것인가(124)

 

성장한 어른이 기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대소변을 스스로 통제하고 처리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이나 장자처럼 위대한 사상을 논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자기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존엄을 느낄 수 있겠는가.(124)

 

간병인 그만두다. 저 왕초보 간병인은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느끼겠구나. ..실제로 지옥의 느낌이 없지 않다. 이런 상태가 조속된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그 모든 것듵을 겪으며 기약 없이 흘러가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선한 의지로 그런 일을 떠맡는다 해서 우리들 마음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늗 부정적 반응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126)

 

왜 노인환자에 대해서는 컨설팅 전문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 없나? 부모님과 그 자식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은 고령의 부모가 발병했을 때, 그 자식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종합적으로 컨설팅해주는 것이다.(127)

 

환자가 자기 존엄을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고 그 가족은 주어진 여건에서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환자의 나이와 질병, 거동 가능 여부, 대소변 해결 능력, 보호자의 상황, 경제력, 거주 환경, 가족들이 원하는 바등을 조사 취합하여 가장 적합한 대응 방식을 제시해주는 것이다.(127)

 

우리사회는 지금 대부분의 경우 노인이 병들어 스스로 삶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면 즉각 요양병원으로 보내버린다. 가족들은 그곳의 시스템에 모든 것을 일임하버리고 관심을 떼버린다.

그러나 그처럼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병든 노인에게서 그의 오래된 감정적 유대를 단번에 절단해버리는 이 방식은 참으로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잔인한 짓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러한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128)

 

(간병, 그 만남과 헤어짐)

새로 간병인이 오다. 우리집과 가족이 낯선 사람에 의해 침해당하는 듯해 거북해진다. 분명히 환자는 우리 아버지인데 낯선 사람이 나타나 아버지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말이다..,환자는 가족들보다 간병인을 더 친밀하고 편하게 여길 수도 있다...환자 가족은 그러한 과정에서 미묘한 심리적 아픔을 체험할 수 있다. 예. 요양병원에 입원한 치매환자의 배우자의 입장.(132)

 

요양병원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힘든 줄 모르고 상처받을 줄도 모르고, 남의 대소변을 거북해하지도 않늗 로봇들이 병수발을 하는 게 아니다.(137)

 

총 8명의 간병인들이 거처감. 만나고 헤어지고 그들과 오랜 세월 함께하다보니 나날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험하고 슬픈 체험들이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상처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순간 순간 그들의 얼굴에서 깊은 피로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육체의 피로가 아니었다. 분명 언젠가늗 이른바 트라우마로 나타날 그런 상처의 그림자였다.(139)

 

간병인을 위한 치유프로그램

 

(다시 한밤중의 춤)

아버지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고 왜 그러느냐고 화를 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힘이 세진 것일까? 형편없던 청력도 갑자기 좋아졌다. 추정컨대 뇌가 이상 작동을 일으킨 탓. 비정상적으로 심한 조증을 일으켜 근육의 힘을 비롯한 모든 그능이 항진됐을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 지체가 정상적인 사람 처럼 보이지 않는다. 눈빛에 광기가 있고 눈섭이 빳빳해 보이늗 걸 비롯해 표정 전체가 비정상적이다.(147)

 

섬망

혈관성 치매

알츠하이머

 

"아아! 아아!"라는 신음 소리가 유아처럼 보호받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구에 기인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아기처럼 보호받고 싶어하는 퇴행심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고령의 병든 노인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160)

 

(개인적 체험)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듯한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늙은 육체와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마음을 해집는 신음 소리가 일상이 된 하루가 가혹하게 반복된다. 무엇보다도 매일 대여섯 번씩 소변을 빼내야 하는 게 참으로 고역이다.(161)

 

소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

 

모든 체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집단이 체험을 할 수는 없다. 마치 인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인생을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오에의 제목은 지극히 사적인 체험으로 그쳐버릴 수도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의 반어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164)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이다. 극심한 고통과 고뇌를 겪는다고 해도, 그를 통해 보편성의 감정과 인식을 가질 수 있으면 견더낼 힘도 생겨난다. 인간은 의미 부여가 되면 목까지 똥통 속에 잠겨서도 계속 살아갈 생각을 하지만, 의미부여가 되지 않으면 궁전의 안락한 침대 위에 누워서도 목숨을 끊을 궁리를 하게 되는 존재다. (165)

 

병든 아버지 옆에서 동행하는 나의 내면은 팽팽한 풍선과 같다. 이 풍선 속에는 분노, 슬픔, 연민, 좌절, 죄책감, 훗날 내가 겪게 될 마지막날들에 대한 상상적 불안,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장수하더라도 종내에는 이런 식으로 육체와 정신이 허물어지면서 마감되게 마련인 인생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모든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끌까지 감당해보겠다는 의지 등등이 고밀도로 가득차 있다. (165)

 

총체적으로 보자면,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에 함께하는 이 동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나 자신의 그런 의미 부여를 확고하게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 자신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기만 할 뿐, 맑은 정신으로 지금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느끼지를 못하니 그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165)

 

가만히 보니 아버지는 인생의 마무리와 죽음에 대해 거의 준비해둔 게 없어 보인다. 나는 그점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낀다.(165)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것은 별다른 게 아니다. 다가올 죽음으로 인해 생의 마감을 앞두고 자기 인생을 결산해야 한다는 애기다. 집안의 현실적인 문제를 정리해 자식들에게 미리 애기해놓거나 혹은 문서로 남기기. 동시에 현실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으로도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뒤에 남게 될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최상일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대면해야 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도 내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따금 죽음에 대해 고요히 생각해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죽음에 관한 명상과 마음의 안정.(165)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지만, 더불어 나의 시간과 환경도 섬처럼 떨어져나와버렸다. 이 세월은 극한 체험이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장기 레이스 같은 것이다. 쇠를 단련하듯 의지를 다지지만, 마음에 피어오르는 울적한 감정들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이 개인적인 어두운 감정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잡다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 그보다 훨씬 큰, 아니 결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허 속으로 순간순간 사라져버린다. 당연한 일이다. 생명은 거대하고 영원할 수 있지만 '나'라는 인간의 시간은 티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공허해지는 한편으로 현실을 초탈한 듯한 평화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을 함께 하는 이 특수한 여행에서, 흔히 생로병사라고 말하는 인간과 생명체의 보편성을 느끼고 읽으려고 애쓴다. 물론 아버지와 나는 함께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편성 자체를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보편성을 맛보고 공유하게 될 것이다.(172)

 

(이 년이 지난 뒤)

늙고 병든 육체와 죽음의 그림자가 일상이 된 하루하루가 여전히 무정하게 반복되고 있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럴 때 보면 보기 안쓰러운 피페한 얼굴에 피곤과 고뇌의 기색이 가득하다. 완전히 펼 수 없는 다리를 한껏 오므려 가슴께에 닿게하고 모로 누워서 자는데 꼭 태아의 모습과 같다. 그런 모습으로 스스로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다.(189)

 

하루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영원히 막이 내려오지 않을 것 같은 무대, 게다가 시작도 끝도 잘려나가고 중간만 있는 무대, 그런 걸 상상하면 된다.(196)

 

어떤 밤에는 화가 치밀고 짜증이 난다. 그러면 나의 손놀림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나는 천사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도 아닌 것을! 선악호오의 온갖 감정을 내속에 가지고 있는 인간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계절 날씨와 같다는 것을 아픈 아버지와 함께하면서 더더욱 깨닫는다. ... 때로 어떤 하나가 대표선수로 나선다. 그렇다고 다른 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그것들은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불과 수십 분 뒤에 비바람을 치며 얼굴을 내밀 수도 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양 상대를 비난하게 된다. 사실은 자기 속에 늘 있었던 것들이 지금 드러난 것일 뿐인데도.(203)

 

(생사의 아이러니)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고,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결단해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조금씩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과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환상일 것이다. 수도자 라면 모를까. 자신의 의지로 자기 몸을 장기간 통제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육체적 능력이 기울어지면 정신적 능력도 기울기 시작한다. 우리의 머럿 속에 그런 생각 자체가 떠오르기 어렵고, 떠오른다고 해도 그 생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며 실행에 옮기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심신이 극도록 쇠약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인간적으로 관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포기하면 우리의 육체는 살아 있는 시체와 같다. 애통한 일이다. 최종 판결 만을 남여둔 채 유예된 시간을 살고 있는 시체. (207)

 

최대한 버티다가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연민과 혐오'의 부조리한 반븍밖에 없구나 싶을 때가 오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208)

 

(고도를 버리다)

아버지의 양복을 정리한 것은, 그 마지막 여로를 따라가는 부분적인 작별 의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며칠 뒤에는 나자신과도 조금 앞당겨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작별하기로 하고 내 운것을 정리하기로 한다.(218)

 

사람들은 내게 가장 힘든게 뭐냐고 묻는다. 나는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희망이 없늗 시간은 고통스럽다. 이 세월은 소멸을 향해 가늗 여로이지 새로운 재생을 향해가는 여로가 아니다. ( 224)

 

고도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고도를 그리고 나의 고도를 그리고 우리의 고도를 없는 것 그래도 우리가 기대는 것,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는 것! 병든 초고령의 아버지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 곁에서 동행하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지만 인생은 마지막에 나타날 결정타를 기다리는 여로가 아니다. 그 마지막 기다림조차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슬며시 사라져가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느끼며 깨달아가고 있다. 고도조차도 버려야 한다.(231)

 

(최고의 선물)

생활용품과 같은 소비재는 끝없이 새로운 것이 개발되고 있느데 반해 노화와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이가 하는 문제는 전혀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무관심을 상업자본이 맹렬히 이용하고 있다. 오랜 삶의 현장에서 분리된 노화와 죽음이 위생적으로 포장되어 가족에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247)

 

빈집을 이용해 노인 돌보기 시스템을 만들고 있늗 일본사례(248)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405232123415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해 급격히 허물어진 아버지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의 시간을 적나라하게 겪어보았다. 나는 죽어가는 한 인간과 밀착해 보살피고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삶과 노화와 질병과 죽음,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많은 객관적 배움과 마음의 가르침을 얻었다.(250)

 

그 배움과 가르침은 늙고 병든 아버지, 즉 그 허물어져가는 정신과 육체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그 질문들에 응답함으로써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모든 질문에 대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 아버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에 깊이 감사한다. (251)

 


 

▶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를 읽고.

이 책을 두번 째로 읽었다. 15년동안 함께 산 시어머니가 분가를 고집하셔, 본래 살던 집 문간방으로 이사를 가셨다. 2년쯤 혼자사시던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이 악화되어 거동이 많이 불편해지셨고, 노인성 치매가 와서, 도저히 혼자 사실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다시 우리집으로 오셨다. 분가를 하시기 전에는 정신도 말짱하고 저녁 식사 후 운동하신다고 아파트 마당을 몇 바퀴씩 거뜬히 돌던 분이, 억지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에, 움직 때 마다 "아구 죽겠다"는 신음 반 투정 반의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천상 무기력한 노인이 되어 돌아오신 것이다. 다시 집에 오신 후 나와 남편이 겪은 일,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감정들, 그 혼란 스러움은 난생 처음의 것이었다.

그래서 노화와 죽음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고, 이상운님의 책이 그중, 내 경험을 잘 설명해주었고 이 책에서 나는 많은 공감과 위로, 지혜를 얻었다. 다시 어머니와 합친지 만 3년이 지났다, 요새는 치매증상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몸이 더욱 더 아프니, 빨리 죽지 않는 자신(의 몸)을 원망하고 하소연 하신다.

1.
먼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공감했던 부분을 적어 본다. 가끔씩 정신줄을 놓아버리시는지 마치 딴 사람같이 싸늘하게 느껴지는,  그리고 사그러져가는 욱체로 힘들어 하는 한 노인을 돌보면서 내가 갖게되는 여러 감정과 상념, 혼란스러움과 아주 유사한 책 내용에 많이 공감했다. 나 또한 아래와 같은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 병든 아버지 옆에서 동행하는 나의 내면은 팽팽한 풍선과 같다. 이 풍선 속에는 분노, 슬픔, 연민, 좌절, 죄책감, 훗날 내가 겪게 될 마지막날들에 대한 상상적 불안,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장수하더라도 종내에는 이런 식으로 육체와 정신이 허물어지면서 마감되게 마련인 인생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모든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끌까지 감당해보겠다는 의지) 등등이 고밀도로 가득차 있다. (165)> *( )속 내용은 획실치 않다.

이런 감정과 애로를 입밖으로 내놓을 기회도 사람도 만나기 어려웠기에 저자가 쓴 "생로병사의 극적인 현장에 반응하는 나의 적나라한 내면의 기록"을 읽으며, 내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은 이유가 있는 것임을 알았다.

어머님이 이전 집으로 이사하던 날, 이사를 마치고 빈집에 어머니를 홀로 두고 나올 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시는 어마니 눈에 글성 글성 눈물이 맺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도 울었다. 당신이 고집하신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나? 병든 어머니를 다시 모시고 올 때 나는 작은 다짐을 했다. 내가 돌보고자 작정한 이 분은 남편의 어머니, 나의 시어머니가 아니라 병든 한 노인, 그러니깐 나와의 특별한 관계를 갖는 특정인(시어머니)에게 의무적인 효도나 자식도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병든 한 인간(보편적 인간)을 한 인간이 돌보고자 하는 것이며, 물론 회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여기에는 나 또한 한계를 가진 한 인간이므로 인간됨의 조건과 한계를 겪어야 하고 겪고 싶다는 책임감과 바램이 있었다.

<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을 함께 하는 이 특수한 여행에서, 흔히 생로병사라고 말하는 인간과 생명체의 보편성을 느끼고 읽으려고 애쓴다. 물론 아버지와 나는 함께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편성 자체를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보편성을 맛보고 공유하게 될 것이다.>"(172)

현실적 여건, 효도, 자식도리, 책임감 등 부차적인 것들을 다 치워버린다면, 그렇니까 한 인간에게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은 눈꼽만큼도 없음에도 남을 돌볼 수 있게 돌보도록 만드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왜 이런 대책없는 작정과 다짐을 했을까? 이 책에서 내가 찾은 답은 '연민'이다.

< 지난 몆 주, 나는 죽음에 근접해 급속히 허물어져가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생명체에 대해 강렬한 연민을 느꼈다. 이 연민은 속수무책에 처한 한 실존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의지와, 그 실존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좀더 공감하고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고통받는 본인만큼은 결코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괴로운 일이다. 고통받는 이가 나와 극히 가까운 인연, 즉 가족일 경우에 그 괴로움은 더 커진다. 동시에 슬픔과 좌절감도 그만큼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햇빛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인간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미움도 함께 자라기 시작한다. 인간의 목숨이 그렇듯, 사랑조차도 그렇듯, 인간의 연민도 자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77) 

" 나는 아버지에게 느낀 강렬한 연민이,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이 가면서 보기 흉하게 퇴락해 혐오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다가 소멸해가는 생명체 그 자체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그림자처럼 동반하게 되는 것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늙은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거기다 병까지 든 육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상태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 (78)

" 노인이 아니어도 아픈 사람 곁에 밀착해 있으면, 마치 이슬비에 옷이 젖듯 그 환자의 고통이 간병인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감정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그걸 피할 수 없다. 반면 환자에게는 병든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준다는 바로 그 사실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85)

저자가 말하길, 연민은 일시적인 동정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함께 겪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과 발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슬비에 옷이 젖듯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 연민의 대상이 겪는 고통에 전염되는 것은 연민이라는 발원과 실천이 치룰 수 밖에 없는 결과이자 비용이다. 그럼에도 이 비용을 감수하는 이유는 환자에게는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 곁에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장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사람의 고통과 나에게 전이된 고통을 통해 나는 내 안에 본래 있던 온갖 감정들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만나고 그러므로 나는 비로소 나를 본격적으로 알게된다는 것, 이와 같은 나를 포함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충실한 이해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 주는 보상(선물)이 아닐까?

<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해 급격히 허물어진 아버지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의 시간을 적나라하게 겪어보았다. 나는 죽어가는 한 인간과 밀착해 보살피고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삶과 노화와 질병과 죽음,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많은 객관적 배움과 마음의 가르침을 얻었다.(250)

그 배움과 가르침은 늙고 병든 아버지, 즉 그 허물어져가는 정신과 육체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그 질문들에 응답함으로써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모든 질문에 대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 아버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에 깊이 감사한다."> (251)

2.
죽음은 모든 언어와 관념을 초월한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몸(정신과 육체)의 문제, 엄중한 현실이다. 가끔 죽을 것 같이 복통이 일어날 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을 상기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 아버지를 통해서 드러난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생생하고 직접적인 고통의 현장이다. 어떤 웅장한 사상으로도, 어떤 창의적인 관념으로도, 어떤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으로도 그 슬프고 추한 목락의 모습은 가려지지 않는다.>(116)

어머니와 나는 "길고 느린 죽음의 과정"에서 어디쯤에 서 있나? 지금 막 시작했을 뿐, 곧

<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되돌아갈 수 없는 터널, 출구가 보이지 않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터널(118)"> 이라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겪을 수 있을까? 처음의 작심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솔찍히 두렵고 걱정스럽다.

<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이다. 극심한 고통과 고뇌를 겪는다고 해도, 그를 통해 보편성의 감정과 인식을 가질 수 있으면 견더낼 힘도 생겨난다. 인간은 의미 부여가 되면 목까지 똥통 속에 잠겨서도 계속 살아갈 생각을 하지만, 의미부여가 되지 않으면 궁전의 안락한 침대 위에 누워서도 목숨을 끊을 궁리를 하게 되는 존재다. (165)

총체적으로 보자면,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날들에 함께하는 이 동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나 자신의 그런 의미 부여를 확고하게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나도 이렇게 내가 겪는 감정과 인식에 보편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심없이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3.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한 점에 도달한 것 같다.

< 그런데 나의 이 개인적인 어두운 감정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잡다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 그보다 훨씬 큰, 아니 결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허 속으로 순간순간 사라져버린다. 당연한 일이다. 생명은 거대하고 영원할 수 있지만 '나'라는 인간의 시간은 티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공허해지는 한편으로 현실을 초탈한 듯한 평화를 느끼기도 한다.

고도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고도를 그리고 나의 고도를 그리고 우리의 고도를. 없는 것 그래도 우리가 기대는 것,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는 것! 병든 초고령의 아버지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 곁에서 동행하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지만 인생은 마지막에 나타날 결정타를 기다리는 여로가 아니다. 그 마지막 기다림조차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슬며시 사라져가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느끼며 깨달아가고 있다. 고도조차도 버려야 한다.>(231)

인간은 시간을 겪는 그러니까 탄생에서 죽음이라는 시한을 갖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의 생은 '나'라는 하나의 유한적 존재가 나를 마침내 완성하기 위해서, '고도'라는 인생의 결정타, 목적, 희망으로 향하는 여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죽음에 임박해서 더 늦게는 죽음의 순간에 (운좋게 그때까지 정신이 멀쩡하다면) 아! 나는, 내 한생은
" 그 마지막 기다림조차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슬며시 사라져가는 것"이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일까 아니면 너무 늦은 것일까?

죽음에 임박해서가 아니라 지금, 죽음에 대한 관념적 이해(유희)를 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글이 또 하나의 죽음에 대한 관념적 이해가 아니길 바래 본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그 고된 작업을 통해, 한 인간의 죽음과, 그 죽음을 대하는 또 다른 한 인간의 예의에 관해 지혜를 주신 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고 이상운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