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동물성애자
부제, 종도 편견도 넘어서 사랑
하마노 지히로
한국어판 추천의 글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로 깨닫게 된 사랑과 폭력을 향한 근원적인 질문, 강상중
저자를 그렇게 위험 요소가 다분한 '참여관찰'로 이끌어갔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폭력이 매개되지 않고도 대등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향한 갈급과, 그러한 인간관계를 향한 눈물겨운 동경이 추진력이었다. 이렇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희구의 배후에는 끔찍한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해왔던 저자의 '트라우마'가 자리했다. 그런 정신적 고통이 그녀가 '동물성애자'의 세계로 뛰어든 원동력이되었던 셈이다. 6
1장 인간과 동물의 부도덕한 관계
'악치온 페어플레이'라는 동물보호단체, 동물성애자를 박멸하는 것이 활동의 주안점이다. 그들이 규탄하는 대상은 동물을 '강간'하는 남자들이다. 35
소름끼쳤던 '지렁이 남자'
그들에게 생명이란 개건, 뱀장어건, 지렁이건, 여성이건간에,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드러기 위해 뱀장어와 지렁이를 사육하고, 행위가 끝나면 거리낌 없이 죽인다.
나는 그들이 섹스에 공포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내가 어려울 만큼 혐오감을 느껴도 이를 근거로 그들의 성적 실천을 간단히 단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섹스를 선악으로 가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욕망하는 섹스의 배경에는 저마다 다양한 욕구가 꿈틀거린다. 맹목적인 혐오감만으로 그들의 섹스를 나의 사고 바깥으로 밀어내버리면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볼 점은,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이 사회와 관련을 맺으며 어떻게 어긋나는가, 그리고 사회의 일부분임이 당연한 나 자신이 어째서 특정한 성적 실천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에 관한 문제다.
나는 왜 그들이 기분 나쁘다고 느끼는가? 악치온 페어플레이 소속 여성이 "비정상이야"라는 외침에 담긴 감정과, 내가 메일을 보내온 남자들에게 느낀 혐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41
유일한 동물성애 옹호 단체, 제타
200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서는 동물보호법에 동물과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동물에게 심리적 애착을 품고 동물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가졌음을 자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섹스가 금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 결과 2000년에 발족한 단체가 제타였다. 50
제타는 설립 때부터 동물과 평화적인 공존을 목표로 삼는 동물성애자의 플랫폼으로서 활동을 전개해왔지만, 아직도 법인은 되지 못했다. ... 제타가 저항해온 개정법안은 결국 2013년 2월 1일 통과되어 같은 해 7월부터 시행되었다.
수간 bestiality
동물성애 zoophilia erotica
현재 정신의학에서는 동물성애를 패러필리아(이상성애, 성적 도착) 즉 성과 관련된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여긴다. 52
동물의 퍼스넬러티
하지만 인간이 '동물의 퍼스넬러티'에 끌려 특정 개체와 파트너십을 이룬다는 주장 역시 인간이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일종의 망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동물은 과연 '인간의 퍼스넬러티'를 인정하고 있을까? 75
쥐와 함께 사는 남자
쟈사, "동물은 나아게 퍼슨'이예요." '퍼슨'에 대한 자샤의 정의는 이랬다. "퍼슨이란 퍼스넬러티를 갖추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해요. 예컨대 쥐들과 함께 지내면서 잘 살펴보면, 각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것의 바탕에 있는 게 퍼스낼러티겠죠" 84
"섹스를 화제로 삼아야 센세이셔널하니까, 대부분 주파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성행위에만 한정해서 다루곤 해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동물이나 세계와 맺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척 어려운 문제지요. 세계나 동물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관한 논의니까요. 주파일을 비판한다는 것은 다른 종을 향한 공감이라는 중요한 감각을 비판하는 셈이죠. 누구를 사랑하는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런 것을 두고 타인에게 간섭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86
훈육이 필요한 대등한 존재
주파일에게 퍼스넬러티는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존재하는 특성이다. 이때 그들은 인간과 동물이 대등한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 퍼스넬러티는 대등성이 지난 하나의 특징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최종 목적인 대등한 관계에 이르러는 이유를 설명할 때도 사용된다.
인간 사회에 살면서 종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종의 차이를 절감하게끔 만드는 일이 '예의범절을 교육해야 하는' 훈육 과정이다. 주파일은 훈육의 옳고 그름이나 올바른 훈육방법이 과연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87
성욕을 케어하다
장애인의 성을 도와주는 섹스 도우미가 있어요. 성은 사람에서 중요한 측면이죠. 그렇다고 장애인을 개와 같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예요. 다만 개의 성도 돌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거죠. 101
동물성애와 소아성애
개의 존재감을 인간 아이와 더 가깝다고 느끼도록 만든 학설도 있다. 다름 아니라 '개는 다섯살 아이 정도이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개를 다섯 살 아이와 비슷한 존재로 느끼게끔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그결과,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약 십 몇년간 개는 영영 '다덧살 어린아이' 처럼 취급받는다. 그 가정에서 개는 영원히 어린아이다.
아이 같은 개에게 성적 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05
3장 원하며 다가오는 동물
묶을까, 묶일까
생각해보면 악치온 페어플레이가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주파일과는 다르다. 그들은 동물을 '아이' 그 자체로 본다. 인간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 그런 견해가 강고하기에 동물과의 섹스는 곧바로 학대로 연결되고 만다. 125
말하기 곤란함과 떳떳지 못함
말과 인간의 성기를 비교하여 크기에 차이가 있으므로 성적 학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신체가 큰 여성은 작은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해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듯, 이런 논리가 얼마나 이상한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작은 페니스라면 안전하고 큰 페니스는 그 만큼 위험하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는 페니지 그 자체에서 폭력성을 찾아내려는 시선이 암암리에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남성은 그 자체로 폭력을 히두를 가능성에서 도망갈 수 없다. 이는 매우 유치한 미샌드리misandry(남성혐오)이기도 하다.
페니스 그 자체, 페니스를 삽입한다는 행위에서 폭력성을 찾는 시선이 사회에 만연해 있으므로 아놀트나 드르크는 자신의 섹스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이 입을 다물수록 그 관점에 동의하는 셈이 된다. 157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패시브 파트가 성적인 면까지 포함하여 파트너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근사한 경험을 환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도, 성적 케어 측면을 강조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페니스 삽입을 피하고 폭력성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은 페니스의 폭력성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자기 자신도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158
하지만 성폭력의 본질이 페니스 자체에 있을 리 없다. 성폭력의 본질은 다른 지점에 있으며, 성별이나 성기의 형상과는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159
4장 금지된 욕망
성폭력의 기억
상대를 어르고 달래 그날 밤에 잠들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나는 그 행위에 합의했다. 합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합의, 그때 말은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촉진한다. 그리고 그 '말에 의한 합의'는 그 남자의 폭력적 성행위를 정당화해버린다. 그렇게 섹스에 있어 거짓 대등성이 출현한다.
말에 의한 합의가 있었다면 성폭력이 아니라는 논리가 도대체 어덯게 가능할까?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언어를 중시할수록 덫에 빠진다. 언어는 신체로부터도, 정신으로부터도 떨어진 곳에 있다. 편리한 도구지만, 자신의 모든 순간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언어가 짜내고 만들어낸 거친 그물코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이 빠져나온다. 언어에 익숙해진 나는 언어를 닫아버린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둔하고 표현력을 결여한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171
터부의 배반
인간은 동물과의 사이에 경계를 긋고 난 후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의 섹스는 그런 경계를 교란한다. 그러므로 주파일들이 제게하는 문제는 '섹스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한다. 188
5장 나눠가진 비빌
주파일이 된다는 선택
론야는 섹스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그 사실을 통감했다. 섹스에서 비롯한 역할이 그런 생각을 명확하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론야는 폭력을 행사하는 입장에서 물러나기를 선택하여 '레즈비언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때도 그녀는 스스로 섹슈얼리티를 선택한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196
장애를 지녔다는 것
론야에게 신체 장애자 보조견으로서 아누크를 기르느느 일은 개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함께 있기위한 시스템이다. 종류도 신체 크기도, 성별도 제각각인 친구들과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아누크를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정말로 멋진 일이예요. 그가 온 몸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내 행복이예요. 그가 즐겁게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 기쁨이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돈이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지면 나도 아누크의 사료를 벅을 거예요. 모든 게 다 사라져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204
몸을 맡기다
론야와 아누크는 모든 의미에서 상호의존적 관계다. 그들은 모든 시간과 경험을 공유한다. 론야는 아누크와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 주파일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스스로 레즈비언이 되기로 선택했듯, 주파일을 선택한 일 역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을 서너택한 셈이다. 207
커밍아웃
쿠르트를 통해 나는 '섹스는 본능적이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섹스의 본능이 먼저 있고, 섹슈얼리티가 발생한다고 한정할 수는 없다. 섹슈얼리티를 생각할 때 섹스와 섹슈얼리티의 위치를 역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즉 "이런 섹슈얼리티 때문에 이러한 섹스를 선택한다"라고 선언할 수도 있다. 이런 사고는 바로 론야나 티나의 경우와도 중첩된다. 232
이렇게 쿠르트의 커밍아웃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개인적인 욕구를 넘어서, 주파일이라는 존재는 '선택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라는 확장된 인식을 사회에 가져다 준다. 주파일이 되어가는 사람들. 233
6장 로맨틱한 주파일들
성폭력의 본질
그들과 만나고 나서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내가 간직해온 섹스의 상처가 그들과 보낸 나날로 치유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한 단계를 끝냈다고 생각한다. 분노와 괴로움에서 눈을 돌리고 감아버리는 나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지금 성폭력의 경험자로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현재에서 미래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상처는 상처로서 여전히 남아 있음으로써 타자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기에. 252
한국어판 해제
"섹슈얼리티, 종보다 관계성, 정희진
동물과의 성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들, 주파일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연구방법 면에서도 빼어난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공부 궁극의 목적인 인간을 성장시키고 공동체의 정의에 기여한다는 점에서도 모델이 될 만하다. ... 글쓰기는 글쓰기의 대상에 대해 쓰는 일이 아니다. 쓰는 사람과 그가 사는 공동체의 역량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글쓰기는 결국 사물을 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행위다. 272
이 책은 우리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에로틱의 의미는 언제나 재정의되어야 한다. 사랑이나 성애의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동등함, 관계성, 인격적 관계가 에로틱한 것이며 이러한 상태(사랑)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파일은 인간의 사랑 행위 중 일부일 뿐, '동물과 섹스하는 사람'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가 아니라 동물의 삶을 성의 측면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되기로 '선택'한 여성들, 아니, 모든 인간들처럼 주파일을 선택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선택한다는 것은 성적 지향에 머무는 일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일부다.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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