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_김영민 3

제 생활을 증명하는 일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제 생활을 증명하는 일 한때 내가 아끼고 촉망하던 젊은 학인들이 애인을 얻고 장가를 가고 취업을 한다. (혹은 제 이론 속에 냉소의 따개비가 되기도 하고, 모모한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두더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늙고, 병들고, 종교로 물러난다. 혹은, 역시 가족밖에 없다면서 내심을 다독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바람에 얹히는 구름처럼 서서히 '공부'에서 멀어져 간다. 더러, 멀어져 가는 게 아니라고, 정교한 '변명'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변명의 기회는 결렬(決裂)의 순간임을 옛날옛적에 배웠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혼잣속으로 속삭이며 따뜻하게 축복한다. 그들도 제 나름으로 체계와 불화했던 청춘이었고, 인생이었던 게다. 그렇지만 불화의 느낌은 언제나 체계..

좋은 물음은 없던 길이 드러나게 한다 質問開門

좋은 물음은 없던 길이 드러나게 한다 質問開門 좋은 물음은 없던 길이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그 빛은 부싯불과 같아서 부싯깃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변은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언제나 물음의 현장은 '속도'의 함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물음이 야말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질문은 논의와 탐색이 막혔을 때 시야를 밝히고, 새로운 말의 냄새를 불러온다. 물론 이 시야를 길게 틔우고, 그 말을 붙들어내는 것은 온전히 그 물음에 참여한 인간들의 몫이다. 호흡으로써 기맥(氣脈)을 틔운다고들 하는 것처럼, 좋은 물음으로써 정신의 길, 혹은 말의 길을 틔울 수 있는 것이다. 14

서문 적게, 작게, 낮게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낯은 공부 김영민 서문 적게, 작게, 낮게 공부의 밑절미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효과적이며, 또 그래야만 공부의 전일성을, 그 불이(不二)의 통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인(因)이 이미 내 것이 아니라면, 생활의 양식을 재구성해서 그 성취에 유익한 연(緣)을 몸에 앉혀야 하는 게지요. 그 생활은 적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대학들이,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얻고자 하는 세상이 길을 잃지요. 분방(奔放)하고 번란해서는 아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집중과 지속성, 혹은 정(精)과 숙(熟)이 없이는 졸부이거나 소비자고 건달이거나 건공잡이에 불과하지요. 적고, 일매 지게 갈래를 잡은 생활 속에서는 비근(卑近)한 일상의 자리들에 얹혀 있는 갖은 갈피를 분별할 수 있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