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낯은 공부
김영민
서문
적게, 작게, 낮게
공부의 밑절미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효과적이며, 또 그래야만 공부의 전일성을, 그 불이(不二)의 통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인(因)이 이미 내 것이 아니라면, 생활의 양식을 재구성해서 그 성취에 유익한 연(緣)을 몸에 앉혀야 하는 게지요.
그 생활은 적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대학들이,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얻고자 하는 세상이 길을 잃지요. 분방(奔放)하고 번란해서는 아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집중과 지속성, 혹은 정(精)과 숙(熟)이 없이는 졸부이거나 소비자고 건달이거나 건공잡이에 불과하지요. 적고, 일매 지게 갈래를 잡은 생활 속에서는 비근(卑近)한 일상의 자리들에 얹혀 있는 갖은 갈피를 분별할 수 있고, 거기에 웅성대는 이치들에 새삼스레 주목하게 되며, 이윽고 철학의 눈을 갖게 됩니다. 이 철학은 작은, 제 이름을 가진 사유의 방식이며, 이로써 이른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전망이 생기지요.
담박한 생활과 비근한 사유의 집심과 근기는 오직 낮은 중심에서 생깁니다. 이미 낮은 중심의 공부에 관해서는 여러 글에서 자주 언질하였지만, 부랑조급(浮浪躁急)한 마음과 태도로써는 근실한 생활과 긴 호흡의 사유를 일구어낼 도리가 없지요. 낮아야 비로소 보이고, 낮아야만 멀리 갈 수가 있습니다. 인문학이나 수행의 공부길은 인간됨을 통한 개입의 실 천과 뗄 수 없이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혹 겸허(謙虛)나 빈터(Lichtung), 허정명철(虛靜明徹) 혹은 적정(Abgeschiedenheit)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생활을 줄여서 허영과 쏠림에서 벗어나고, 그제서야 드러나는 미립과 기미와 이치들에 주목해 보세요. 기명(記名)과 실제의 이론들은 이렇게 생성됩니다. 수입상과 유통상이다 못해 아예 표절의 동네 속에서 나번득 이는 짓이 이젠 부끄럽지 않나요. 그래서 낮아지고 낮아지는 게 요령이지요. 그래야만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습니다.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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