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제 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지라야 아는 바이지 다른 경계 아니네
나와 너의 분별을 넘어서 전체가
하나의 지로 나타나는 순간이 증지입니다.
능소가 한 삶으로 있는 것,
나와 너가 일법계가 되어 열린 마음의 활동이
증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성이
그대로 나타난 진여의 모습입니다.
(법계의 노래)
마음마다 몸이 되고
몸짓마다 생각되니
몸과 마음을 함께 쉴 때
몸짓은 법계의 몸짓이요
마음은 법계의 앎이러니
증득해서 안다는 것은
몸 그대로 마음이 되고
마음 그대로 몸이 되는
법계의 몸짓을 나투는 것
이미 몸짓마다
법계의 몸짓으로
그 밖에 다른 경계 있을 수 없으니
깨닫고서
부처경계와 중생경계가 다르다 하면
그 몸짓은 아직
법계의 몸짓이 되지 못한
어긋난 몸짓으로
스스로 깨달음과 그 밖의 경계를 만드니
깨달음이라고 하는 깨달음이 이미
깨달음을 등지는 중생의 세계
그래서 깨달음이 몸짓이 되고
그 몸짓이 법계의 몸짓이 될 때라야
증득해서 아는 것이면서
중생계를 떠나
부처세계를 따로 사는 것이 아닌
중생계 그대로 이미 증득한 부처의 세계
(해설)
"증득된 깨달음의 노래"
분별을 떠나 있는 삶은 대상과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 대상이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대상이 된 나눔 이전의 삶입니다.
이 삶은 이름과 모양으로 알 수 없고 고정된 동일성을 대상으로 하는 지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의식을 넘서는 순간, 곧 삼매에 드는 순간 체험된 세계입니다. 이를 증지라고 합니다.
나와 너의 분별은 넘어서 전체가 하나의 지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아는 자(능)와 알려지는 것(소)이 없이 그저 앎으로 하나된 장면입니다.
여기서 부득이 증지라야 아는 바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지에 이르게 되면 알 수 있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열린 마음의 지혜에서 한 삶으로 사는 자비가 실천될 뿐입니다.
능소가 한 삶으로 있는 것, 나와 너가 한법계가 된 열린 마음의 활동이 증지인 부문별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며 진여의 모습입니다. 106
반야의 지혜가 실재의 삶에서 드러났다고 해서 반야의 모습, 공과 진여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반야가 반야가 아닌 것을 반야라고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생멸이 불생불멸에서 생멸이었으며 동정이 부동부정에서 동정이었듯이, 반야도 반야 아닌 데서 반야입니다. 이 모두가 이름과 모양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데서 제 모습을 나투고 있을 뿐입니다.
반야, 공, 진여 등의 말로 표현하고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은 어느 순간을 고정하여 동일하게 파악할 수 없고, 더구나 연기관계의 중첩된 모습을 하나의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지만 방편으로 말과 모양을 사용하여 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과 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분명히 알아야 말이 방편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07
* 네게 인상적인 말:
법계의 몸짓
일법계
경계
무분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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