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6장. 인문학의 무능, 무능의 인문학

백_일홍 2020. 2. 6. 10:01

그러나, 삶은 실용에 머물지 않고 희생된 가치는 시대의 진통으로 되돌아온다. 지는 방식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상처없는 철학, 철학없는 상처 190

 

모든 길은 걸음의 흔적이다. 그리고, 흔적은 말 그대로 발귀꿈치의 상처, 헌데를 가리킨다. 사실 동서양을 무론하고 '길'은 철학적 탐색의 은유로 남용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의 이력이 한결같이 은폐된 사정은 몹시 기이하다. 길은 무엇보다 걷기의 지난한 흔적이되, '걷기'가 잊혀진 채 상속받거나 수입된 '길'(들)의 이치에 순치된 한국의 철학자들이 상처를 알 리 없으니 말이다.

 

인생의 8할이 바람이라거나 대지가 심성을 조형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철학 이론 속에서는 바람의 흔적도, 흙의 자국도 깨긋이 지워지고 말았다. '걸음'이 없는 '길'들만이 종횡으로 엄숙하고, 또 한편 발랄할 뿐이다. 근대화, 도시화라는 것이 실은 흙과 바람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포장과 건축의 공시화에 다름 아니었고, 우리의 현대 철학 역시 더 이상 '흙-바람(풍토)'과 걷기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써 스스로의 사이비 현대성을 완결지었기 때문이다.

 

'길'에 못지않게 '집' 역시 철학이 상습적으로 애용한 메타포인데, 기실 문명의 풍경이나 그 공간적 구조를 묘사하는데 '건축'만큼 효과적인 은유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이 상처를 숨김으로써 스스로의 몸을 관념화, 심지어 식민화한다는 데 있다. 과연, 흙과 바람을 막고, 인간의 땀과 피의 이력을 숨기는 건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건축은 '추상화'의 본뜻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건축이 사건을 은폐하는 구조는 한국의 현대 철학과 인문학의 역사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수입일변도로 급조된 한국 현대철학의 건축술적 골격과 그 속성은 '걷기'의 상처를 체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가능해진 근엄하고 우스운 풍경에 다름 아닌 것이다. 풍토를 차단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공간이 이미 터가 아니듯이, 상처가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은 이미 사이비일 것.

 

그렇다고, 철거나 해체가 길과 건축이 은폐한 상처를 정당하게 대접하는 것도 아니다. 철거를 통해 건축의 독재와 일률에서 탈주하고 해방되는 이면에는 , 오히려 건축의 생성사 속에 층층 켜켜이 쌓여 있는 상처와 주름이 영원히 사장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생성의 상처'를 견결하게 따지고 섬세하게 헤아리는 재역사화인 것이다.

 

한국의 현대 철학의 길은 흙과 바람, 걷기와 그 상처를 체계적으로 배제, 망각함으로써 가능해진 제국의 신작로와 같은 것이다.

물론, 상처만으로는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없는 철학 역시 우리의 철학이 아닌 것.

 

사랑의 철학, 철학의 사랑 194

 

내 책 <사랑, 그 환상의 물매>는 서양철학사가 마침내 상도한 사유의 끄트머리와 우리 통속의 사랑이 어떻게 어울리고 부칮치는지를 다각도로 실핀 것.

 

현대의 에로스학이 제시하는 그 주제적 중요성은 통속의 사랑과 그 유형이 당대의 철학과 종요 그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내면화하고 있다는 데있다.

 

통속의 사랑은 정신분석학적 사유에도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재래의 반성 없는 심리주의 속에 여태 온존하고 있다. 말리노프스키(모권제 상회), 지라르(모방적 경쟁) 고지(교통공간), 들뢰즈(생산적 무의식) 등은 외디푸스적 표상에 붙박혀 있는 정신분석적 에로스의 구조를 깨고 나가면서 욕망의 창의성과 미래적 사랑의 가능성을 한껏 드러낸다. 이것은 물론 근대철학의 내성주의를 해체하는 사상사적 첨단의 지형과 동연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나 푸코 등과 같이, 내면의 출발이라는 역사적 도착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노작은 사랑의 도착과 그 역설적 불모성에 대한 가장 탁월한 방증이다.

 

사랑이 애 (사상적으로) 문제인가? 그것은, 사랑이라는 통속의 유형학이 당대의 철학적 지체 현상을 고스란히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과 선택이라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도착, 순정과 운명이라는 도덕적/기독교적 도착, 그리고 직접성과 전체성이라는 낭만주의적 도착을 고스란히 붙안고 연명하는 것이 곧 우리 일상 속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이 바뀐다고 사랑의 미래를 새롭게 조형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을 쉽게 내비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생리와 그 유형학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시대의 철학이 정체하리라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비평, 혹은 위기론 200


내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어본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치마를 걸치는 순간은 몹시 불안정하고 돌연한 허전함의 느낌이 전부였지만, 곧 그것은 어떤 논리적인 문제로 직감되었다. 치마는, 특히 치마가 지닌 그 텅비고 열린 개방성은, 옷이라는 관심과 관행의 풍경을 지배하던 남성적 이치가 고스란히 허물어지는 체험의 공간이었다. 이른바 그것은 위기의(critical) 공간이면서, 스무살의 한국 남자가 습관적으로 조회하고 귀속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비평적(critical) 공간이기도 했다.

역시 스무살 무렵의 여름, 어느 섬에서 교회의 대학부 봉사활동을 벌이는 중에 이른바 '노방전도'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조장으로 동료 두명과 팀을 이뤄 어촌 마을을 잠시 배회하다가 마침 노인 한 분이 대청에 나와앉아 있는 집에 찾아들었다. 여든은 족히 넘어보였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품이 마치 세속을 달관한 듯했다. 인사를 건넨 뒤, 두서없이 '예수교'의 '진리'를 끄집어내려는 차, 그 노인은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음성으로 담박 나를 제지했다. 요컨대, 먼저 수수께기 하나를 내겠으니 내가 맞히면 교회에 나오겠지만, 아니면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태초에 짐승이 한 마리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게 그 수수께끼였고, 나의 어색한 묵묵부답 앞에 노인은 '소(牛)!'라고 뜬금없지만 단호하게 외쳤다. 어느 종교의 진리를 설파하려는 스무살의 젊은! 이에게 던진 팔십 노인의 '소(牛)!'는, '소오오오!'라는 그 황당한 기표의 물질성은, 당시 내 내면의 풍경을 지배하던 종교적 관행과 이치, 그리고 그 사적 열정의 규칙이 고스란히 허물어지는 외상적 체험의 공간이었다. 물론 그것은 상상의 임계(critical) 공간이면서, 판박이처럼 복제되던 종교적 태도와 담론의 외부로 내던져지는 새로운 비평적(critical) 공간이기도 했다.

수년 전의 어느날 오후, 아파트 구내를 바삐 지나가던 내게 열살 남짓의 여아 셋이 바투 다가섰다. 그 중 한 애가 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아저씨, 미국사람이에요?"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한국사람이라고 다짐을 두자, 애들은 미리 내기라도 한 듯 서로 천원짜리 지폐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보지 못하며, 자아의 그 상식적 암연 속에서 타자들은 자아의 일차원적 풍경 속으로 내재화된다. 자아라는 구심으로 동화하는 지식의 체계 역시 그 체계 속의 지식으로 복무하면서 그 한살이를 마감한다. 지식은 자아와 더불어 생기지만, 바로 그 자아와 더불어 지식은 타자를 지우는 절망의 이름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Je est un autre)'라는 랭보식의 명제는 현대 인문학의 기본이 될만하고, 내가 '벌레'(카프카)나 미국인으로 둔갑하는 그 타자의 위기(critical) 체험 속에서 낡은 자아의 거울상(mirror-image)을 부수고 나오는 미래의 윤리, 그 비평적(critical) 공간의 묵시가 발설된다.

바디우(A. Badiou)의 말처럼, 타자는 필경 '좋은 타자'로 변질하면서 자아 속으로 회수된다. 마찬가지로, 스펙타클 사회의 현란한 문화적 다양성은, '거울사회(mirror-society)의 나르시시즘이 제 몸피를 불리면서 얻는 최후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타자가 드러나는 계기는 다양성이 아니다. 일찍이 TV의 황홀한 다양성을 '깡통'에 비겼던 시인 곽재구의 통찰처럼, 일률성과 私通하는 다양성이 오히려 우리의 일상이다. 그 다양성은 문화 시대의 마지막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으로, 타자들을 내치는 공교한 자기차이화의 뱃살일 따름이다.

다양성은 외부성이 아니며, 過食으로 배살이 터지지 않는다. 배는 그 뱃속의 다양성을 고스란히 안은 채 쳐질 뿐이다. 썩어도 그 배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 진정한 위기의 실체가 있다. 무릇, 비평(critique)은 위기론(criticology)이다.

사랑도 없고 매도 없다 208


사람들은 체벌의 표상으로 '사랑의 매'를 말한다. 교육적 가치나 그 불가피성을 부각시키려는 표어이지만, 그 자가당차은 여전하다. 이 논의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표상이 갖는 광범위한 이미지 효과인데, 불행히도 이것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개념이 이미지에 의해서 조형되거나 구조화된다고 말한다. 심층심리 속에 내장된 이미지의 모델이 우리의 사고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개념보다 빠르고 깊으며 또 지속적이라는 뜻이다. 예를들어, 반공과 냉전 체제를 통해 체질화되다시피 한 레드 콤플렉스의 이미지 효과가 우리의 정치적 사고와 판단을 예단한 역사를 흝어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사랑의 매'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 이미 왜곡된 이미지다. 이 이미지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물론 '사랑'이지 '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최고의 합리화는 이 이미지가 지닌 왜곡, 즉 '사랑'이 '매'를 잡아먹어 버리는 효과인 것. 이로써 매의 배후에 스며들어 있는 상처의 그림자는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고 만다. 


'사랑의 매'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거나 강변하는 이들은 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사랑의 불가피성을 매의 불가피성과 혼동하고, 심리적 강박을 교육적 지침과 분별없이 섞는다. 그러나, 부재하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매를 정당화하려는 논리 속에서 내가 읽는 것은 무지와 강박, 그리고 공리로 포장된 이기심뿐이다. 교육이 관료주의화될 때, 그 허위의식까지도 교육된다. 


현실적인 제도와 현명한 실천에 기반한 교육이라면, '사랑'이라는 환상의 증가를 알리바이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매'라는 상처의 감소를 구체적인 대안으로 고민해야 한다. 사랑, 그것도 교육적 사랑이라는 환상과 이데올로기로써 '매'라는 물질과 상처, 그리고 그 사회적 함의를 미화하려는 태도는 야만을 품고 다니는 무지와 무책임에 다름 아니다. 


'사랑의 매'라는 표상은 속 보이는 거짓이며, 관료주의적 무기력과 타성이며, 삼류의 이데올로기다. '사랑'에 방점이 찍히는 한, 그 표상은 다만 기득권자들의 로고일 뿐이다. 왜, 사랑의 매 뿐이랴? 애국의 매, 효도의 매는 어떤가? 진리의 매, 자유의 매, 박애의 매는 또 어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