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7장. 건달인간론

백_일홍 2020. 2. 6. 15:27

건달인간론 212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사치외 결부되었다; 이성적 동물도 '존재의 목자'도 아닌 인간은 낭비와 잉여에서 스스로의 취향을 티내고 권력의지를 과시하고 노동과 축적의 세계에 결락한 존재감을 보충한다. 건달도 꼭 그런 것이다. 건달 역시 사치와 낭비의 특별한 방식이며, 특히 노동의 부재에 얹힌 집단적 환상의 이미지를 키우는 대중 욕망의 대상이다. 건달은 누구나 처럼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지만, 다만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인 것이다. 


도시-시스템의 세계는 노동과 축제, 질서와 폭력, 생산과 휴식, 세속과 신성, 전문성과 카리스카를 엄격히 구획한 탈공동체적 순환공간에 다름 아닌 것. 건달의 중세성은 이 이항대립의 근대적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삶의 양식 속에서 도드라진다. 이 '깡패'들은 놀면서 벌고, 휴식이 곧 생산이며, 그 전문성과 카리스마는 뒤썩여 있다. 


소통의 딜레마와 주체의 미래 220


'나는 다르게 생각합니다'라는 발화의 가치가 마침내 물신의 지점을 통과했다. '달라요'라는 말만으로 물건이 팔리는 세상, 그럿은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물신성의 또 다른 버전임에 틀림없다. 


차이의 가치는 대체 어디에서 발원하고 어디로 수렴되고 있는 것일까? 차이들의 표현은 구조의 외부를 기약할 수 있을까? 그 변화를 자기조절하는 체계로서의 구조에 대해서도 여전히 변화일 수 있을까? 차이의 다양성이 그 자체로 목적인 정치가 실천적으로 현명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차이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그 차이들은 자기차이화의 사이비 변증법 속으로 되먹임 되는 나르시스의 활갯짖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다치들은 스스로의 몸을 끄-을-며 타자의 지평으로 넘어가 새로운 지식의 활로를 열 수 있는 것일까?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 <지식인의 다른 글들> 등은 거대/메타 담론의 몰락 이후에 작은 이야기들의 차이와 그 틈새가 현대의 일상과 학문을 새롭게 채울수 있다는 증거인셈.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그렇게 가능해진다. 


담론의 구조적 핵심이 이야기적 사소함과 결부되어 있다는 이 지식의 외밀성은 바로 우리의 현실 속에서 나날이 체감된다.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지식이 내가 모르는 타인들의 이야기(무의식)에 의해서 쉼 없이 삼투당하고 있다. 대체로 나의 진실은 내 생각과 의도라는 '속'에 저당 잡 힌듯해 보이지만, 실은 예상/의도하지 못한 어느 '바깥'과 외상적으로 밀통하는 법. 


일상과 이야기의 복권은 지식의 생산과 교통, 그리고 그 정당화의 문제에 심각한 변화를 초래한다. 정보의 바다 속에 마실 물이 없다로 하듯이, 이야기의 홍수 속에 대화와 지식의 공론장이 오히려 위축되거나 왜곡되는 현상은 각별히 주목을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다. 


인문학적 위기의 실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동에 따른 경제사회적 재분배의 문제와 더불어 억압된 것들(작은 이야기들과 욕망의 이미지들)의 폭발적인 확산과 소비가 적절하고 생산적인 대화와 소통의 형식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작은 이야기들의 복권과 그 비판적/외설적/해방적 효과 속에서 인문적 대화와 소통의 지형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이 쉼 없이 반복해서 주절거리고 있는 주체의 해체와 그 모순적 재구성의 담론 속에서 인문적 대화와 실천의 주체는 어디로 퇴각하고 있는가? 자본제적 삶의 벼랑에 내몰린 인문주의의 현실 속에서 무분별한 반인간주의가 능사가 아니라면, 그 죽어가는 인간의 미래적 새 형식(=주체)은 무엇일까? 


인문적 주체의 빈곤화와 비판적 해체는 오히려 사상사적 아방가르드의 표징 쯤으로 여겨지는 추세다. 그 사이, 문어발식으로 세계회된 대기업체들은 그 근본에서 노동자인 도시의 개인들을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추려낸다. 관료주의적 체계는 개인 주체의 대화적, 비판적 자율성을 조직적, 효과적으로 저당 잡힌다. 


한편 자본제적 모순과의 기나긴 투쟁 속에서 늙은 좌파들은 죽거나 잊혀져가고 신좌파적 문화/생활 투쟁마저 강단화, 국지화되는 사이, 중산층 개개인들의 다수는 그 형식만을 땜질한 종교적 물결에 휩쓸려 가는 나머지 그나마 조금씩 쟁여두었던 주체마저 송두리째 비울 것을 종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년 자본의 외부를 찾는 이들의 상상력과 그 실천이 한결같이 넓은 의미의 신비주의, 자연주의로 채색되어간다는 사실은 특히 비판적 인문학자들의 준열한 관심과 대응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주체는 곧 타자와의 교환 방식이자 그 내용이며, 그 어긋남과 결락에 대한 자아의 상징적 대응방식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라는 물신적 형식에 대한 추수와 자본의 피상적 외부(신비주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하는 삶의 양식으로는 '자본을 넘어'갈 도리가 없으며, 그에 알맞는 관계, 교환(소통), 주체의 생성도 구체화시킬 수가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작은 이야기들/이미지들의 차이들을 포함한 억압된 것들의 전방위적 발출과 파급 역시 기성의 소비자본주의적 코드 속으로 재배치되어 상품화되거나 혹은 신비주의적으로 착색되어 의사유토파아적 공론 속으로 삼투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신도 신비주의도 인문적 소통의 미래 형식에 이르지 못한다. 


주체가 '아니'라는 존재론적 결핍의식과 부정성에 의해 생성, 유지되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긍정의 반복이 물화의 입구라는 사실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한층 더 중요한 사실은, 자본제적/기술주의적/실용주의적 긍정의 문화와 그 이데올로기적 주체만이 아니라, 이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종교적 탈세간주의와 유토피아적 주체 역시 변증법적 부정성의 긴장이나 도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다른 체제 긍정서어에 빠진다는 것이다. 


가령 반복되는 아멘은 과학(물화)이자 종교(영성)이지만, 최소한 인문적 주체들 사이의 타자지향적 대화는 아닌 것이다. 인문주의의 대화적 지평, 그리고 이를 견인할 인문적 주체는 자본과 자연, 기술과 종교, 전문성과 영성, 긍정과 극단적 부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양식 속에서 생성되는 게 아니다. 자본과 기술에 대한 일차원적 긍정이나 자기차이화는 아예 타락이지만, 마찬가지로 그 반동적 퇴행의 종교 신비주의 역시 대안이 아니다. 


체계의 시대, 신매채와 전자망의 시대, 정보화와 세계화의 시대, 유정공학과 사이버네특스의 시대, 주체의 해체와 개인의 목락의 시대, 인묹ㄱ 주체와 개인의 물음은 갱신되어 되물어져야 한다. 


자아의 내부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충분히 어리석었지만, 자아가 타자, 혹은 타자들의 세상과 맺는 관계의 형식(=주체)은 아직/늘 어리석은 물음일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희망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개인'은 모든 개인주의적 생산 방식처럼 기술의 발달 수준에 뒤쳐져 있고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 되었지만, 패자의 위치에 떨어진 자로서ㅓ 개인은 다시금 진리의 파수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