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 Ethics: An Ecofeminist Perspective
Kheel, Marti
북리뷰,by Lynda Birke
널리 퍼진 가정 : 어떤 종을 유지할 만한 충분한 개체 수가 있다면 개체 하나 하나의 상실은 문제가 않된다. 또 다른 메세지는 실험실의 쥐에 대한 나의 슬픔이나 여우 새끼에 대한 어떤 여성의 슬픔과 같은 감정적 대응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종의 생존이나 생태계의 생존이다.
환경윤리에 관한 저작의 관점과 동물해방에 관한 관심 사이에 분명 갈등이 존재한다. 동물해방의 측면에서 개체의 고통과 죽음은 큰 문제이며 대의의 명목아래 동물을 죽이는 일을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책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작가인 마티 킬은 환경주의 사상가의 저작 속에 나타난 자연에 관한 사상을 고찰하는데, 개별적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는 가정에 도전한다. 그녀의 작업은 자연일반과 개별적 동물과 그의 고통 양자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는 윤리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작은 인간이 다른 동물을 어떻게 취급하는 가에 관해 검토함. 그리고 환경주의자와 동물해방 철학 모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함. 양자 모두 너무나 추상적인 생각 즉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싱어와 리건) 싱어와 리건, 동물권 관련 저작의 주요 인물 둘은 공감의 느낌feeling of empathy을 윤리적 사고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가치절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물을 향한 공감은 동물옹호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동기화시키는 요인이다.
에코페미니스트 저자들이 킬의 절망에 도움을 주지는 못함. 동물문제가 부재하기 때문. 동물의 누락이 서구 자연철학의 우연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의 핵심적 측면일 것이라 의심하게 됨. 유명한 환경주의 저자들이 자연을 어떻게 재현하며 개별적 동물에 대한 관심을 손상시키는지에 관한 탐구를 시작함. 환경에 관한 사고의 진화에서 holist 철학을 대표하는 4명의 저자에 초점을 둠.
Theodore Roosevelt,
Aldo Leopold,
Holmes Rolston III,
and Warwick Fox.
북미의 보호운동의 이야기는 식민화의 역사와 불가피하게 연결된다. 목축은 사냥(원주민의 활동과 연관된)보다 선호되었다. 19세기 사냥활동은 윤리적 담론 안에서 재구성되어, 스포츠 사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스포츠(총이나 활로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형태)와 모험은 점점 "자연을 경험"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런 생각이 뿌리를 내리자 자연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한다는 개념이 따라 왔다. 왜냐하면 "야생의" 자연이 없다면 인간이 경험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
이러한 발전은 남성적 가치에 심층적으로 고취된 것. 애착과 탈착과 남성적 정체성의 심리에 관한 페미니스트 논쟁에서 시작하여, 남성성에 관한 현대적 사고가 어떻게 자연과의 분리(때로는 자연에 대한 폭력)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고한다. 스포츠 사냥은 "진짜 남성"이 야생성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의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보존은 그들의 (딸이 아닌)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두는 일을 확실히 하는 일이다.
사냥이 윤리적인 일, 자연을 향한 남성의 "사랑"의 표현으로 자리매김되자 살생자는 정당화되어야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에 매우 익숙하다. 즉 유정의 동물을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문제와 그들의 고통과 죽음에 우아한 명분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논쟁 말이다. 사냥 모험의 논리가 도덕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담론 내 어느 곳에 틀지워지든지 무관하게 그것은 항상 보다 큰 도덕적 틀에 동물의 살해를 종속시킨다.
특히 루즈벨트와 레오폴드에게 사냥은 그들의 보존에 관한 주장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다. 다윈의 영향을 받고 내기 사냥을 추구하는 루즈벨트는 동물에 관한 동화책의 장점에 관한 논쟁에 참여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동무을 감상화하며 사냥꾼을 나쁘게 그림으로써 자연역사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주지 못한다. 루즈벨트에게 사냥은 남성적인 영웅적 성취의 정점으로서 초기 선구자들의 삶(백인종의 위대함을 땀과 피로 이루어낸)을 놀이적으로 재실천하는 일이다.
현대의 보존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도 레오폴드는 "선구자되기 놀이"에 비슷한 강조점을 둔다. 그의 저작은 자연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산과 그 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선 "산처럼 생각하기"를 배울 것을 촉구한다. 여우 한 마리를 죽인 후 이러한 통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 경험에 충격을 받아 그는 고밀도의 사슴을 유지하길 원하는 사람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늑대와 산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아마도 그는 무서운 경험을 통해 약탈자 또한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 경험이 그가 사냥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 있는 내내 죽 사냥을 했다.
레오폴드는 보존에 관한 주장때문에 환경주의 저작에서 계속 추앙을 받았다는 점, 그의 사냥총에 의해 목숨을 잃은 개별 동물에 대한 그의 무신경한 묵살에 관해서는 비판받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냥의 기회는 청년에게 모험과 영웅주의의 기회가 될 뿐아니라 자연에서의 경외감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 킬은 주장하길, 레오폴드가 초기의 자연에 관한 도구적 관점과 단절한 이러한 관점은 도전받아야 한다. 그는 땅을 하나의 산 처럼 생각하는 것과 동일시
했을 지 모르나 그의 철학은 지속적으로 개별적 생명체를 "대의적 선"에 종속시킨다.
Holmes Rolston III,
그는 현대 자연윤리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특히 그는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의 접근은 공격적인 파괴에 대항한 지적 방어를 제공하므로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유용했다. 그의 저작들은 자연이 어느 정도는 인간의 의식에 의한 "fertilisation"없이는 불완전하다고 암시한다. 인간의 우월성이 유지된다.
Warwick Fox.
초개인적 심리학과 우리 주위의 자연적 세계와의 심층적 동일화에 대한 강조.
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자연의 펼쳐지지 않은 실재의 부분이며 펼쳐짐에 참여하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이 "자기실현"은 심층생태학의 중심이며 이것이 공유된 연결과 정체성의 감각을 통해 다른 생명체에 대해 커다란 자비에 이른다.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아직 이것은 남성적인 영웅적 투쟁의 흔적이 남아있고 우리가 어떻게 개별 생명체와 관계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네 사람 모두 다른 접근을 하고 있으나 사냥의 은유가 저변에 흐르고 있다. 자연과 윤리에 관한 대부분의 저자들은 심리학의 결정적인 문제 즉 남성 정체성의 심리학을 다루지 않는다. 네 사람 서로 다른 은유를 사용하지만, 땅, 고도화된 의식 등. 거기에는 분리와 초월의 서사, 남성적 영웅주의의 서사가 남아있고, 거기에서 "자연철학은 하나의 스포츠로 생각되어지며 자연철학자는 승자와 패자를 선포하면서 자연세계의 경쟁적 가치에 대해 심판한다"
스포츠 은유는 자연과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항상 패자일 것이다. 이 서사에서 패자는 항상 개별 동물이다. 자연이론가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나 소 한마리 한마리의 요구와 고통을 조롱할 때 자연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지 못한다. 동물권 옹호자들이 페미니즘이나 더 큰 인구의 요구와 같은 다른 문제들을 다루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억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에코페미니즘을 껴앉다.
에코페미니스트 저작들 또한 개별 존재의 고통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별존재와 생태계의 요구를 통합할 가능성이 있다. 에코페미니스트 저자들은 보존운동을 비판해왔다, 특히 심층생태학을 그것의 남성중심적 입장과 "권리"와 같은 문제적 개념에 대한 의존에 관해. 에코페미니즘은 holist 철학을 채택하며, 합리성에 기반한 윤리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에코페미니스트 저작의 강점은 지배의 여러 형태의 복잡한 상호교차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자연 만이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 여성을 포함해서. 이러한 서로 얼켜있는 지배체계는 부분적으로는 감정을 불러오는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지지된다. 약탈자의 자연에 대한 남용에 대한 논리적 주장은 그 쓸모가 제한적이다. 만일 사냥과 동물실험 그리고 다른 형태의 자연 남용이 남성의 소외감과 (폭력적으로) 연결을 구축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에서 연원한다면 폭력을 멈추게 하기 위해선 이러한 과정이 확인되고 이에 도전해야 한다.
감정은 이성 만큼이나 중요하며, 주장에 따르는 심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핵심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권리"수사의 한계를 잘 안다. 그것이 사람이나 동물에게 적용되었든 무관하게. 페미니즘의 접근이 갖는 중요한 통찰은 어떻게 자연을(그리고 타자들을) 향한 공격적 실천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수 있고 따라서 예방의 조치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킬은 돌봄과 관계성의 윤리의 발전을 강조한 페미니스트 작업을 끌어온다. 다른 이에 대한 돌봄은 감정적 작업이며(서구 문화에서 종종 여성에게 할당된) .다른 사람의 요구에의 집중을 배워야 함을 요구한다.
물론 돌봄/관계성에 기반한 윤리를 개발하는데 있어 문제들이 있다. 즉 때로는 본질주의적으로 보일 것이며 돌봄관계에서 분명 남용, 학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돌봄의 이원적 개념화(ㅁ가 ㅎ를 돌보다)를 넘어서서 보다 맥락적인 돌봄의 사상을 향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 개별동물 양자를 위한 돌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연윤리학자들이 자연의 돌봄에 관해 쓸때 그 돌봄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라고 물어봐야 한다. 여우라는 종인가? 아니면 개별적 여우 또한 문제로 삼는 것인지?
자연 일반과 자연 내 특정한 존재 양자를 포괄해서 사고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이책의 강점중 하나이다. 네명의 저자들의 저작에서 가축은 배제되었다. Rolston에게 가축은 "식용가능하도록 길러진" 경우에만 부분적으로 자연적이다. 그들에 대한 잘못된 취급을 정당화하고 자연윤리의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자연은 "바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실험실, 공장식 사육장 안에서 있다.
우리 또한 자연이다. 네명의 저자들은 한편, 진화의 과정을 인식한다. 진화를 통해 인간을 자연 안에 놓는다. 다른 편으로는, 자연을 "바깥"에 두고 "경험할 것"이라고 둔다. 이런 분열이 서구세계에서 자연에 관한 저작들의 특징인데, "야생성"을 eulogises하는 특정한 입장에 의해 이 분열이 강화된다. 요염되지 않은 소위 "야생성"이라는 추상성에 대한 믿음은 유럽보다 북미의 환경주의에 보다 강하다. 서구유럽에는 많은 "야생성"이 남아 있지 않다.
Personal Politics: Attending To How We Live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여성해방운동의 만트라.
육식이 도덕적 위치. 육고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이 살해를 포함한다. 유정 동물의 엄청난 고통을 포함하고 있어. 하지만 이에 관해 자연 윤리학자의 수사에서 다루어 지지 않음.
One of the strengths of feminist critiques has been the disavowal of unitary narratives, in favour of looking at what has been called “situated knowledges” - the specificities of different beings in time, place and culture (Haraway, 1991; also see Haraway, 2007). Thus, Kheel draws on a metaphor of quiltmaking: traditional quilts are a combination of many, eclectic, pieces, brought together in a whole.
There are many, individual, stories in those truncated narratives, and, she urges, we must
listen - attentively - to those stories. We must learn to weave them together to create many-
coloured tapestries. Every mouse, every spider, every earthworm, has a story to tell. We should care enough to lis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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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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