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자연의 죽음

백_일홍 2022. 7. 29. 22:35

 

자연의 죽음 _ 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혁명

 

캐롤린 머천트

 

 

머리말

 

레이첼 카슨 (1962)

에코페미니즘 전망에 관한 회의, 위 책 출판 25주년 기념 (1987)

 

자연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성별과 젠더 또는 자연의 변함없는 '본질적' 특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자연에 관한, 그리고 자신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게 되는 바, 이러한 개념은 자신이 태어나 사회화되고 교육받는 바로 그 사회의 사상과 규범에서 비롯된다. 

 

질문 :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자연을 어떻게 개념화 해 왔는가? 

 

16~17세기 살아 있는 여성적 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기적 우주라는 이미지는 자연을 죽어있고 수동적이며,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 쯤으로 구성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뒷자리로 밀려났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거대한 전환이 생겨나게된 경제, 문화, 과학적인 변화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새로운 패러다임, '심층생태학'

 

 

 

서론. 여성과 생태론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역사적인 상호연관성

 

이 책에서 본인의 관심은 근대세계의 형성과 관계 맺고 있는 여성 및 자연의 이미지가 대체 어떠한 가치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조사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닌 일종의 기계로 개념화함으로써 결국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를 허락하게 된 세계관 및 과학의 형성 과정을 재조사해야 한다. 

- 프란시스 베이건, 윌리엄 하비, 르네 데카르트, 토마스 홉스, 아이작 뉴턴과 같은 근대 과학 건설의 '아버지'이 공헌한 바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 유기적 세계관으로 형성된, 그리고 점증하는 착취적 정신구조에 반대하는 여타 선택들과 대안적 철학자들, 사회집단들의 운명에 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왜 하필 이 길이 아닌 저길을 택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전환점에선 서구 사회를 둘러싼 자연, 문화적 환경 둘 다를 폭넚게 조합해 보는 작업이 요구된다. 

 

1500년과 1700년 사이에 서구세계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모던하고 진보적인 것 처럼 보이는 모습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 생태주의와 여성운동은 이러한 의견이 기반을 두었던 가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와 미래 사회를 변환, 재통합될지도 모르는 전근대적 세계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여성으로서의 자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유기적 세계였다. 자연질서와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옴. 1,500년대 유럽인, 유기적 공동체.

유기적인 메타포: 16세기 유럽인들에게 자신과 사회 그리고 우주를 서로 묶어냄. 인간 신체 부분들간의 상호의존성,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공통목표에 대한 개인의 종속성, 우주에서부터 가장 낮은 차원의 돌 조각에 이르기까지 스며들어 있는 활력있는 생명성을 강조함.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자연.

 

<양육으로서의 자연 - 지배 이미지>

유기체 이론의 핵심, 자연(특히 지구)과 양육하는 어머니의 동일시. 두 가지 자연(질서 잡히고 계획된 우주 내 인류의 필요사항들을 제공하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여성 / 폭력과 폭풍, 기근, 공황상태를 가져다줄 수 있는 거칠고 통제될 수 없는 자연) 모두 여성과 동일시되어, 이는 인간의 지각을 외부에 투사한 것이다.

 

과학혁명이 세계관을 기계화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서, 양육하는 어머니라는 지구의 메타포가 사라짐. 자연을 무질서로 보는 두번째 이미지는 자연에 대한 권력이라는 중대한 근대적 사고를 불러옴.

-> 기계론과 자연의 지배라는 두 가지 새로운 사상이 근대세계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음.

 

지배의 새로운 이미지들은 자연의 발가벗김을 문화적으로 승인하는 구실을 담당. 지구를 직접 변형시키는 활동(광산, 배수, 벌채, 개간)에 의존하는 상업화와 산업화 과정이 지속되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사회가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자연과 사회에 관한 르네상스 시기의 시각.

1) 신체부위들의 유기적 통합에 상응하는 어떤 기획된 위계질서가 우주와 사회내부에 존재한다는 사고. 자연이라는 용어는 인간과 동물들의 타고난 창조적 개성과 기질, 그리고 물질적인 대상물과 현상 내부에 작동하고 있는 고유한 창조력 둘 다를 포괄한다.

2) 변증법적 긴장 관계에 있는 정반대 것들의 활동적 통일로서의 자연

3)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목가적인 아카디아 내지에서 비롯된 것. 자연을 자비롭고 평온하며 전원적인 것으로 보는 아카디아적 이미지

-> 각각이 사회적 함의를 지님.

1) 현존하는 사회질서 유지의 합리화

2) 새로운 이상을 향한 사회변화의 합리화

3) 도시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들로부터의 도피 합리화

 

<문학적 이미지들>

자연에 대한 초서적이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전형적 이미지

- 친절하고 보살핌 해주는 어머니, 세상의 기획, 계획된 질서를 새겨넣는 신의 현시 바로 그것

각각 유기적 창조물들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자신을 자연의 질서 속에서 표현할 책임을 지녔으며, 전체의 필요한 일부인 것이지 스스로가 전체는 아니었음.

자연은 신의 본의 아닌 대리인, 가시적인 우주의 창조에 있어 신이 채택한 숨겨진 패턴과 가치들의 자비로운 스승이 된다(자연스러운 창조), 창조적인 힘(현세적인 형태들을 생성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닌 하나의 영혼)

 

- 리어왕의 코델리아, 통일성과 전체성 그리고 미덕-인간본성의 유토피아적 표현-을 상징함. 코델리아의 본성은 르네상스 시기의 유토피아이자 사회개선을 시도했으며 영국의 궁극적 내전 기간중 한 종교분파이기도 했던 중세지복천년 운동이 그린 새로운 예루살렘의 인간성 상징이었음. 자연의 변증법적 이미지

-> 사회를 보다 이상적 방향으로 움직여가고자 하는 기동력을 표현함.

3) 르네상스 시기 전원적인 시와 예술, 과거 어머니 같은 자비심으로 도피 후퇴라는 여성으로서의 자연이 지닌 또 다른 이미지를 표현함. 자연이란 더러움 없는 황금시대로의 귀한을 통한 도시생활이 지닌 질병과 근심으로부터의 피난을 가리킴.

정원이나 시골풍경, 평화롭고 비고한 풍경으로 묘사되는 자연은 조용하고 친절하며, 자신이 지닌 것들을 기꺼이 선심쓰는 여성.

-> 경작 개발되었을 때 자연은 상품으로 이용될 수 있고 또한 자원으로서 조작될 수 있다는 함의가 포함되어 있어, 길들이고 제압된 자연은 도시세계의 요구사항과 시장의 스트레스로 인해 어지렵혀진 남성들의 근심을 달래주며 또한 보다 많은 평안을 가져다 줄 일종의 물리적이고 영성적 음식을 제공할 정원으로 변환될 수 있었음. 이는 남성의 행복을 위해 위로하고 양육하며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의 기능인 어머니와 신부로서 자연을 바라는 남성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원 이미지 속에서 여성은 공히 종속적이며,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 -> 비록 자연을 인자한 것으로 보긴 했지만, 전원적 양식을 도시화와 기계화의 압력에 대한 교정 수단으로서 창조된 모형에 해당함. 자연을 긴장 상태에 있는 정반대 것들의 적극적 통일로 보는 변증법적인 이미지와 달리 아카디아적인 이미지는 자연을 수동적이고 조작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림.

 

<철학적 틀 구조>

플라톤, <티마에우스> 여성적인 세계영혼은 우주내 움직임의 원천이었으며, 변함없는 영구적 형식과 그 보다 낮은 그리고 변하고 감각적이며 일시적인 자연 세계간 교량이었다.

 

신플라톤주의, 기독교 철학을 플라톤주의와 통합시킴. 플로티누스Plotinus,

여성적인 영혼을 두개의 구성요소로 나눔. 보다 상위의 부분은 성스러운 뜻으로부터 영혼을 형성함. 보다 하위 부분인 나투라 natura는 현상세계를 생성시킴.

 

성서를 <티마에우스>와 연결시켜 해독했던 12세기 카루투스 기독 가톨릭학파는 나투라를 여신으로 의인화시켜, 신에 대한 그녀의 종속성을 강조함. 자연은 이데아를 물질적 사물들로 옮겨내는 중신어미에 비유. 그뜻은 아버지와, 물질은 어머니와, 그리고 생성된 종자들은 아이와 견주됨.

-> 플라톤, 신플라톤주의적 상징주의에 있어 자연과 물질은 모두 여성적인 반면에 이데아는 남성적인 것. 다만 신의 대리자이면서 물질세계의 창조자 및 생산자로서 그녀에게 주워진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자연은 창의성이나 생산의 손쉬움에 있어 모든 인간 예술가보다 더 뛰어났다. 그녀는 인간보다 더 힘이 컸지만, 여전히 신에게는 종속적임.36

 

르네상스 시기의 나폴레옹주의는 여성적인 영혼에 의해 활성화된 대우주의 이미지를 잘 보여줌. 신플라톤주의 연금술사 로버트 플루드는 세계 영혼을 오른 손에 의해 신과 연결된 한 여성으로 그림. 나투라 또한 어머니 여신, 이지스 Isis로 그려짐. 

 

12세기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 또한 자연안의 내부적인 성장과 발전에 선차적 의미를 두는 유기론에 바탕을 둠. 

-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physis를 "자연적인 사물들 내부에 잠재적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현실로서 존재하는 그 움직임의 원천"으로 규정함. 각각의 사물들은 네 가지 특성을 부여하는 '원인들'로 설명될 수 있다. 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 그는 플라톤이 말한 불완전한 외양과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 사이의 이원론에 반대하면서, 형식은 현실과 분리된 초월적인 차원이 아닌 개별사물 내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함.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개별 존재 내부의 물질과 형식을 통일시키면서, 활동을 남성성과 그리고 수동성을 여성성과 각각 연관시킴. 형식은 죽어 있고 수동적인 물질보다 우월한 것으로 군림함. 영혼이 신체를 다스리듯이 남성의 특질인 이성과 숙고가 여성에게 우세하다고 주장되는 식욕을 지배해야 한다는 유추법을 통해 사회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에 대한 남성지배의 기초를발견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이론, 종의 암컷은 불완전하고 불구화된 숫컷 정도로 간주함. 암컷은 물질이나 수동적 원리를 가져다 준다. 이 물질 위에서 적극적인 수컷의 원칙, 정액은 태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벌인다. 수컷이 후손의 진정한 원인이다. 수컷은 태아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움직임(동력인)과 더불어 그것이 취할 형태(형상인)을 제공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세대이론이 연금술 이론의 토대에 등장함. -> 우주에 투사되기도, 하늘 천국의 움직임이 정액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이슬과 비의 형태로 잘 받아들이는 여성적 지구에 떨어저 내린다. 남성적 천국과 여성적 지구간의 결혼. 이처럼 지구와 여성은 모두 수동적인 접수자가 되어버리는 생물학적 생식에 있어, 암-수 역할에 대한 기본태도는 유기적 문맥이 상업자본주의의 성장에 의해 변화되면서 쉽게 착취를 승인하는 것이 될 수 있었음. 

 

고대 그노시스주의,

일원론, 반대되는 것들의 통일과 암수 원리들의 평등성에 기반함. 생식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관점을 제공함. 여성적인 자연에 관한 보다 긍정적인 함의와 태도를지님. 그러나 이러한 사고들은 서구 기독교 문화 주류 바깥에 깔려 있어. 

* 그노시스주의적 전통 : 초기 기독교의 이단적 형태, 헬레니즘의 영향력아래 알렉산드리아에 중심을 둔 전통. 기독교를,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영적인 가르침들과 접목시킴.  

초월적인 신 내부의 암수 반대되는 것들 간 본래적 통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신과 세속세계, 선과 악, 정신과 물질 사이에 일종의 이원론을 유지함. 방사에 의해 신은 여성적인 생성의 원리를 만들어 냈으며, 이것이 천사와 그후 가시적인 세상을 창조했다. 그노시스주의 신앙의 목표는 지식을 통한 다른 세상으로의 구원이다. 신을 양성적인 것으로 묘사,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기도를 바침. 

 

그노시스 철학 -> 연금술 관련 논문에 반영됨. 

16세기까지 이용가능했던 그노시스주의 교재, 성모 소피아 혹은 여덟번째 존재가 왕과 아버지를 창조했고 이들이 다시 일곱개의 천당을 생성시킴. 어머니는 보다 높은 천상의 요소들이 지닌 패턴을 따라서 네개의 지상의 요소를 만들어 냄. 원형적 아담은 양성으로 창조되었으며, 여덞가지 부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라셀수스(1490-1541), 여덟개의 그로시스주의적 모체들은 모두 어머니였다. 아담의 8부위(4명의 천상 아버지들과 4명의 지상 어머니들)을 통일시켜 현자의 돌을 얻는다. 

 

암수이원론의 연금술 -> 자웅동체:

태양과 달의 연금술적 결혼으로서 그리고 수컷인 광물동인인 수은과 암컷인 일차적 물질의 결합으로서 표상되는 여성과 남성. 원리들의 통일은 암수자웅동체로 귀결됨. 

 

과학혁명이 세계관을 기계화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와 같이 차이나는 이미지들의 운명을 어떻게 되었을까? 

1) 전원예술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모두 여성성을 수동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것으로 봄. 시장이 주는 좌절로부터의 도피처로서 산업적 세계에 의해 쉽사리 포섭됨. 도시화라는 질병에 대한 해독제. 산업혁명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함. 미국 문화에서 야만성의 변환, 계발을 지시하는 이미지로서 중요해짐. 신세계 탐험가, 새로운 '처녀지'의 붕괴와 착취를 촉진하는데 도움을 줌. 

 

2) 물질의 수동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적 개념 또한 활성이 없고 '죽은' 그리고 외부의 힘을 통해 변화가 오게 되는, 새롭고 기계같은 세계의 구성요소가 되는, 분자 형태를 통해 새로운 기계론적 철학 내부로 포섭될 수 있었다. -> 자연에 대한 조작을 쉽게 승인함. 자연내 활동의 내부적 원천인 신플라톤주의의 여성적 세계영혼이 사라지고, 이는 움직임 상태의 미세한 입자들로 짜여진 신중하게 고안된 매커니즘에 의해 대체됨. 

 

3) 암수원리의 양성적 동등성이라는 생각도 관념주의에서 정반대되는 것들의 통일을 의미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정반대되는 것들의 투쟁이라는 의미를 지닌 변증법의 원리로 보다 분명히 다듬어짐. 

 

지구우주 -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지구 

 

자연의 기계화가 지속됨에 따라서 양육하는 지구는 비활성적이고 죽은 물리적 체계로 변모하게 되면서 규범적 억제책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됨.

 

 

6장. 생산, 재생산과 정치

 

17세기 영국은 가정생활에서 여자들의 생산노동, 가정과 지역 시장에서 음식물을 만들어서 내다 파는 가족 산업, 초기 자본주의 산업들(예. 농업, 직물제조업, 소매), 전문적인 고용 등에서 주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변화의 방향은 결혼한 여자들에게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제한하고 축소하는 것이어서,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들에게 보다 더 의존적으로 되었다. 

 

재생산의 영역에서는, 여자 산파들이 출산조력에 대한 독점권을 남자 의사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동시에 외과 의사들과 자연 철학자들은 생물학적 생식에서 여자들의 수동적인 역할을 거듭 주장하고 있었다. 

 

마녀와 그녀의 대응 짝인 산파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에 필수불가결한 물질과 자연에 대한 통제를 위한 투쟁의 상징적 중심에 있었다. 236

 

궁극적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경제적 자원에서 남편을 위한 정신적 자원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시작으로 여자들의 생산 역할이 초기 자본주의 하에서 쇠퇴하는 한편, 여성적 상징들과 원리들로 표방되던 문화적 역할 또한 변화하고 있었다. 더 낮은 구성요소를 지닌 여성적인 세계 혼, 즉 자연과 양육하는 여성적인 지구는 상업 자본주의의 핵심이 되는 채광 기술의 영향을 받은 세계에서는 점점 더 설득 가능성을 잃기 시작했다. 242

 

재생산과 여성

 

1628년 발간된 윌리엄 하비의 혈액의 순환에 대한 발견은 근대 초기 과학의 걸출한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비록 하비의 우주론과 생리학에 여전히 생기론의 정령설의 원리가 들어 있기는 했지만, 심장을 펌프로 보는 하비의 유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데카르트, 독일 의사 보에르하베, 프랑스 의사이자 철학자 메트리 등에 의해 기계론적 생리학에 편입되었다. 외부의 작동자로서 혼을 지닌, 몸과 혼간의 이원론에 기초한 기계론적 은유는, 몸이 생명이 있는 영혼에 의해 생기를 받고 충만해진다는 더 오래된 생기론의 견해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계'는 자연의 치유력에 맡기기보다는, 의학적 개입으로 고쳐야만 한다. 243

 

17세기 동안에 재생산상의 여성-수동성의 이론이 완전히 확립되었다. ... 어버이로서의 남성과 배양그릇으로서 여성이라는 이론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널리 퍼진 성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다. 245

 

여성은 감염에 의해 수태된다! 249

 

성교 동안 자궁에 아버지의 형상이나 계획의 부과를 통하여, "여성은 아버지와 같은 자식을 생산하게 된다. 자궁 안에 존재하는 아버지의 '형상'은 형성 능력의 도움으로 그 자신과 같은 자손을 번식한다. 251

 

문화사에서 전통적으로 민주화 경향과 연결된 원자론자들조차, 남성이 기여한 부분과 여성이 기여한 부분을 구분하였다. 종자 안에 두 종류의 정액의 핵-물질적인 핵과 정신적인 핵-을 가정했다. 이 정액들의 핵은 부모 양계의 모든 부분으로 부터, 즉 남성에게서는 영적인 부분으로부터, 여성에게는 물질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 252

 

여성들을 그들의 자리에 두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과학을 이용하는 것은 고대와 근대 초기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세기 다원주의 이론은 여성에 대하여 사회적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진화론적 진보의 토대인 변이는 수컷에게 있어 더 큰 폭의 육체와 정신적 변이와 상관관계에 있었다. 과학자들은 여성의 지적 열등함과 정서적 기질을 설명할 성별 차이의 존재를 존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남성과 여성의 두개골의 치수와 뇌의 부분들을 비교했다. 253

 

이러한 사례들 각각에서 남성과 여성에 관한 비평은 차이에서 불평등으로의 비약을 전제로 하는 이론과 문화의 가정을 드러내는 한편, 새로운 분야와 새로운 과학의 연구들은 남성-여성의 위계질서에 대한 진부한 가정들을 유지하가 위한 '증거'를 계속 생산했다. 재생산-호르몬, 월경, 임신-은 17세기의 자급적 생계방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기에 생겨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추론하고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자들에게 과학혁명의 이러한 측면은 추정된 지적 계몽과 객관성, 그리고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된 고대의 가정으로부터 자유를 성취하게 하지 않았다. 254

 

 

7장. 자연에 대한 지배 

 

무질서하고 활동적인 자연은 곧 새로운 과학의 질문들과 실험적 방식에 굴복하여만 했다. 저명한 '근대 과학의 아버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가 속한 사회에 이미 현존해 있는 경향들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의 통제를 옹호하는 전체적인 기획안으로 변형시켰다. 자연을 조작하는 기술로서 자연의 마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철학, 채광술과 야금술, 새로 생겨난 진보의 개념과 가부장적 구조의 가족과 국가를 함께 혼합하여, 베이컨은 자연의 착취를 허용하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냈다. 256

 

... 이런 사회적 사건들은 베이컨의 철학과 저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새로운 과학의 목적과 방법을 정확히 서술하는데 사용한 많은 수사적 표현은 법정에서 나왔으며, 자연을 기계적인 고안물을 통해 고문당하는 여성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마녀 재판의 심문과 마녀를 고문하는 데 사용하는 기계적 도구를 강력히 제안했다. 261

 

새로운 과학적인 인간은 '자연의 심문이 어느 부분에서도 저지되거나 금지되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봉사하게 하고' '노예'로 만들고 '속박하여' 기계적 기술로 '조형'해야만 한다. '자연의 탐색자와 밀정들'은 그녀의 계획과 비밀들을 발견해내야 한다. 

 

자연을 여성의 성별로 지시할 때 매우 쉽사리 적용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은 자연을 격하하고 자연 환경의 착취를 가능하게 하였다. 262

 

자연은 세 단계로 존재한다-자유로운 상태, 실수의 상태, 또는 속박 상태

 

첫 번째 예는 내재적 자아-발달,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그녀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자연으로서의 자연관이다. 이것은 살아있고 성장하며, 자기-실현적 존재로서 유기적 자연관이다. 

 

두 번째 상태는 빈번히 나타나기는 하지만 신이나 그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또는 다른 더 높은 권능에서는 기인할 수 없는 악 기능과 기괴함을 설명하는 데 필요했다. 기괴함은 형상이나 영혼의 활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정도를 벗어나서 활동하는 물질의 결과여야만 했다.  플라톤의 <티마에우스>에서 물질은 다루기 어려워서 조물주가 강제적으로 조형해야만 했다. 베이컨은 빈번히 물질을 여성의 이미지인, '공공의 매춘부'로 묘사했다. "물질에게는 세계를 붕괴하고 오래 전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과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제약을 받아야 하며, 널리 퍼진 사물들의 화합에 따라 질서를 지켜야"만 한다. "확실히 예술의 괴롭힘은 프로테우스이 족쇄와 수갑으로서, 그것은 물질의 극한의 투쟁과 노력을 배반한다" 

 

세 번째 예는 예술(기예)의 사례 - 새롭고 인공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해 자연에 작용을 가하는 인간-이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남자)에게 질서를 취하고, 그의 권위 하에서 작업한다. 광부와 대장장이는 자연을 심문하고 바꾸는 새로운 계급의 자연 철학자들의 모형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자연의 비밀을 그녀로부터 캐내는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방식을 발전시켰는데, "그 하나는 자연의 내장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루 위에서 자연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265

 

자연의 심문을 위한 상징으로서 마녀 심문, 심리의 모형으로서 법정, 무질서를 정복하는 도구로서 기계적인 장치를 통한 고문은 권력으로서의 과학적 방법에 토대를 이루었다. 하비의 경우처럼, 베이컨에게 성의 정치학은 외양상으로는 문화와 정치적 가정들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지식과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할 경험적 방법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도왔다. 267

 

뉴 아틀란티스 - 기계론자의 이상향 

 

베이컨의 이상향 사회는 그러므로 당시 기존의 사회적 계층 구분을 수용하였지만, 최고층에 위치한 '과학자'의 경우는 상층 이동을 보여준다. 이런 구조는 캄파넬라와 안드레아의 이상향과 뚜렷이 대조되었다. 태양의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입은 흰색의 헐렁한 겉옷은 동질성이나 수도사의 검박함의 표현이 아니라, 훌륭하고 질 좋은 의복이 나타내는 부와 지위상의 계층구분에 대한 항의로 볼 수 있다. ... 실제 17세기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받쳐준, 위계구조와 가부장제에 대하여 베이컨은 문제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의 이상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는 점은 곧 그의 불평등주의 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 273

 

<뉴 아틀란티스>의 공동체사회인 벤살렘의 진보를 가져오기 위해 고안된 과학 연구소는 살로몬의 집으로 불렸다. 이 이상향 사회의 가부장적 성격은 과학자들 '살로몬의 집의 아버지들'로 설정함으로써 강화되었다. <뉴 아틀란티스>에서는, 과학 행정이 정치를 대신했다. 어떤 실제적인 정치 과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결정은 과학자들이 전체의 선을 위해 내렸으며 이들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신뢰를 받았는데, 왜냐하면 오로지 그들만이 자연의 비밀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279

 

17세기 동안 차츰 발전한 기계론적 방법은 한 문제를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과 분리하고, 환경으로부터 격리시키며 각 부분들을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베이컨의 연구 기관은 광업, 금속, 기상, 담수와 염수 생물 ,경작 식물, 곤충, 등등을 연구하기 위해 개별적인 '실험실들'을 운영하였다. 281

 

베이컨의 기계론적 이상향은 17세기 동안 발달한 기계론적 자연 철학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기계론은 자연을 원자의 작은 조작들, 즉 벤살렘의 일반 시민들처럼 수동적이고 자역으로 활동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 운동과 변화는 외부에서 기인한다. 자연에서 궁극적인 원천은 신, 즉 17세기의 신성한 아버지이자 시계제작자이며, 기술자이다. 286

 

인공 산물의 창조는 자연에 대한 통제와 권력을 향한 베이컨식의 충동의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재단의 목적은 사물의 원인과 비밀스런 움직임에 관한 지식과, 가능한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치도록 인간 제국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계획에 근대의 유전 공학자들은 새로운 목표 - 인공 자궁안에서 인간 생명을 창조할 유전 물질을 조작하고, 복제 시술을 통해 살아 있는 유기체를 복제하며, 고도의 기술 환경에 적응할 수 잇는 새로운 인간 존재를 육종하는 것 - 을 추가시켰다. 287

 

실험을 통해 해부당하고 통제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자연의 새로운 이미지는 자연 자원의 착취를 정당화하였다. 과학혁명 후 자연은 그녀의 모디스트가 남자의 부당한 습격으로 찢겨지는 것을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293

 

 

8장. 기계론의 질서

 

프랑스 내 기계론의 발흥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의 사회와 종교, 우주론에서의 무질서라는 배경에 대항하여, 기계론은 지적 불확실성에 대한 해독제이자 사회 안정을 위한 새로운 합리적 토대로서 발생했다. 

 

교회의 위계구조가 세운 신앙의 낡은 기준이 아닌, 각 개인의 개별 양심의 종교적 진리를 위한 규준이 되었다. 종교적 진리의 규준에 대한 루터의 탐색은 16세기 후반기의 회의론자들에 의해 모든 자연 지식에도 적용되었다. 

 

회의론에 관한 고대 저작들에 대한 관심의 부활에 기초한 회의론 운동은, 그 자체가 종교 개혁에 의해 생겨난 불확실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1620년대 프랑스의 기계론자 마랭 메르센트, 가센디, 데카르트는 최초로 서로를 지지한 사회 집단으로서 최종적으로 확실성과 사회 안정, 개인의 책임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기계론 철학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도덕과 지적인 질서를 복원하는 데 있어, 이들은 고대 원자론자들의 미립자 철학을 부활시켰으나, 기독교의 맥락에 이를 배치하여 지식에서 확실성의 규준을 고안하려고 시도했다. 데카르트에게는 정체성(동일성)의 원리, 즉 플라톤의 불변과 형상과 수학적 공리와 신의 오성, 논리와 합리성의 제일성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적 체계가 지적인 세계에서 기대되는 안정성을 반영할 수 있었다.  가센디에게는 오성보다는 신의 의지가 제일성이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은 단지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299

 

홉스 - 기계론과 사회질서

 

1640년대에 ,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주에 질서와 확실성을 부여한 메르센트, 기센디와 데카르트가 시작했던 작업을 토머스 홉스와 영국의 시민전쟁 당시 의회 당쟁을 피해 도피한 영국의 왕정주의자들이 계승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인 홉스는 물질에 대해 어떤한 천성적인 힘도 부정하고 ,인간의 영혼, 의지, 두뇌, 욕구들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물질로 축소하며, 유기적 사회 모형을 기계론의 구조로 변형함으로써 우주를 더욱 기계화하였다. 

 

<육체에 관하여>

<리바이던>, 홉스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계론적 사회 모형을 발전시켰다. 자연 상태는 경쟁, 지배와 영예를 위해 각 개인의 물질적 욕망이 일으키는 혼돈 ,무정부 상태, 공포의 상태였다. 무질서한 자연처럼, 무질서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며, 비우호적이며 폭력적이었다. 그는 자연적인 불평등성에 기반을 둔 위계적 모형과 자연 자원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적 모형 두 가지 모두의 토대를 공격하였다. 

<시민>, 가족을 '아버지의 관할권 덕택으로 문명 시민으로 성장하고 있는 그의 아들들과 노예들이 딸린 아버지'로 정의했다. 그러므로 자연상태가 논리적으로는 여성에게 완전한 평등을 함축하였으나, 홉스와 로크에서 기인한 민주적 합의 이론에서 여자는 남자의 지배와 권위 하에 머무르게 되었다. 각 개인을 위한 원자론적 평등성에 기반을 둔 17세기의 '민주주의' 이론은 실제로는 중.상층 자산가 남성을 위한 평등을 의미했다. 327

 

 

9장 권력으로서의 기계론-17세기의 과학기술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기계론의 빛나는 업적은, 인간 경험의 두 가지 기본 요소, 즉 질서와 권력을 둘러싼 현실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질서는 수확적 법칙에 따라 나누어지지 않는 부분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것과, 예측불가능한 애니미즘적인 변화의 원천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획득되었다. 또한 권력은 속세의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얻어졌다. 베이컨주의자의 방법체계는 수동 조작과 기술, 실험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권력을 주창했다. 하지만 세계관으로서의 기계론은 하나의 개념적 권력 구조이기도 했다. 330

 

기계기술  

 

서양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위한 구조적 모델로서의 기계

 

실제의 본성에 관한 다섯 가지 가정들

1. 물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존재론적 가정)

2. 우주는 자연적 질서다.(동일성의 법칙)

3. 지식 및 정보는 자연세계에서 추출할 수 있다.(상황 독립의 가정)

4. 문제들은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으로 분해 가능하다(방법론적 가정)

5. 감각 데이터들은 따로따로 구분된다(인식론적 가정)

 

마르틴 하이데거, 데카르트 이하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권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근대 과학 기술의 핵심은 틀을 만드는 것에 있다" 344

 

힘과 지배라는 가치와 연관되어 있는 기계론적 틀은, 자연과 사회 모두의 관리를 용인하였다. 354

 

 

10장. 자연의 관리

 

목재 자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에블린의 관심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리주의적 접근을 나타내는 것. 관리주의적 보호는 기계론을 자연환경에 적용시킨 내재적 합리화의 경향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는 오랜 유기체론 철학이 새로운 기계론에 순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유기적 세계관의 낡은 변종으로부터 형성된 것들은 기계론과의 새로운 제휴를 맺었고, 이것이 마침내 자연보호와 생태학의 기초를 형성했다. 자연주의자들, 파라셀수스식 생기론자 및 천년 왕국의 유토피아론자들의 유기체론적, 코뮨적 지향은 인류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면서 동시에 효율과 생산성을 꾀하는 길을 닦기 위해 한편으로 밀려나야 했다. 본받아야 하고 존경해야 할 교사로서 자연을 지향하는 가치체계는, 의사결정의 기준으로서의 인간적 가치 체계에 길을 양보하게 되었다. 360

 

 

식물로서의 자연

 

왕정복고 시기의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들, 핸리 모어와 랄프 커드워스는 옛날의 유기체 철학을 전 산업 자본주의이 새로운 사회적, 상업적 요청에 적용함으로써 에블린의 관리주의적 접근이 진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 타협안의 기본은 자연이 기본적으로 식물적인 구성을 갖는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기계론자의 죽은 기계론적 우주, 청교도 혁명기 범신론자들(신은 모든 물질에 내재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보는)과 광신자들(모든 형태의 종교적 행위에 열광하는)의 동물과 같은 세계의 중간에 위치했다.(4장 참조) 그들은 데카르트로부터 '죽어서 무감각한' 물질이라는 개념 및 물질과 정신사이의 이원론을 합쳐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의 생기적, 식물적인 성질을 견지하면서, 존재론적인 갭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 이처럼 자연의 근본적인 유기체적 성질이 유지되는 한편, 애니미즘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던 예측 불가능성은 최소화되었다. 우주는 식물ㅡ살아 있지만 지배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것ㅡ으로 단순화 되었다. 367

 

식물이라는 은유는 모어와 커드워스 등 자유주의파의 철학자에 매우 큰 유리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애니미즘적인 자연 철학을 내세우는 청교도 혁명기 광신파와 자연을 맹목적이고 우연적인 운동에 의해 사물을 형성하나는 '무감각하고 죽은 물질'로 구성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홉스주의 기계론자들 두 양극을 절충시킨 것 같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철학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하나의 우주형성적 식물로서 자연은 그 근본적이고 유기적인 성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269

 

만약 데카르트의 체계에서 신의 역할이 제거된다면, 그 결과는 홉스주의자에 기인하는 무신론과 맹목적인 기계론이었다. 세계에서 생기적이고 식물적이며 형성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광신론과 물질주의의 위험성을 모두 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에 있어서 신의 개재와 신의 돌봄을 인정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영 및 관리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370

 

경영과 인간의 관리 직무

 

모어와 커드워스에 의해 전개된 기계론의 유기론적인 조정안은 세계가 식물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수십년동안 발전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리라는 관리주의적 철학의 배경으로서 지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존 레이와 윌리엄 더햄은 형성적인 성질과 생기적인 운동, 그리고 '생태학적인' 원칙을 질서 있게 고안된 우주에서의 상업 발전이라는 사회철학에 적용했다. 

 

레이, <창조 작업 속에 나타난 신의 지혜>

자연 속에서 신의 목적을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배척하고 있고, 일상 속에서 신의 돌봄을 배제하고 있다고 데카르트를 비판함. 

 

레이의 진보철학은 그의 제자 더햄에 의해 자연 세계 전체에 대한 인간관리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더햄 <물리신학>은 오늘날이라면 아마 생태신학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창조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모델화한 '청지기'라는 관리주의적 특 속에서 생태적으로 건전한 다수의 원리를 구체화했다. 궁극적으로 <물리신학>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은 그의 저작은 1711년 보일의 강연을 위해 준비된 것으로, 뉴튼과학에 근거한 자유주의적인 청교도 사회철학을 방어하는 일련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375

 

17세기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관리주의적인 생태학은, 자연을 장기적 계획을 위한 이성적 분석대상으로 간주한다. 식물군을 하나의 생태계로 환원시킴으로써, 집단 내 공유라는 의인화된 함의는 물리학적인 기술 및 정량적인 분석과 관련된 등식에 길을 내어주게 되었다. 에너지 전환의 열역학의 법칙들이 시스템 이론의 수학적 틀 안에서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구성요소들의 행위를 기술하고 있다. 

 

환원주의 생태학

 

전문가에 의존하기 보다 인간적인 정책 결정자와 직접 민주주의에 의존하는 유기체적인 작은 공동체의 접근법이 17세기 기계론을 통해 전개되어 온 관리주의적인 윤리에 대항하는 대안을 보여준다. 알도 레오폴드의 '대지의 윤리', 생태운동 구룹의 '상호의존성 선언' 칼렌바흐의 에코토피안들의 자연종교 등은, 생태계의 관리경영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윤리에 대항해 공동체 지향의 생태중심적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381



11장. 자연을 논한 여자들

 

17세기 후반, 서유럽에서는 데카르트, 가센디, 홉스, 보일 등의 기계론 철학자들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남. 

- 캠프리지의 플라톤주의자와 생기론 등 처럼 자연의 근본적인 유기체적 통일성을 재강조하는 철학. 

- 핸리모어와 랄프 커드워스(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 데카르트가 가정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인 구조를 존속시키고, 유기적 연결고리로서의 형성적 특질 및 자연의 영혼을 재강조함으로써 정신과 물질 간 간극에 다리를 놓고자 함. 

- 생기론자,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물질과 영혼의 일원론적인 통일성으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단언함. 프란시스 길리송, 장 밥티스테 반 홀몬트와 그의 아들, 프란시스 머큐리 반 헬몬트, 앤 콘웨이, 라이프니츠. 

 

일원론적 자연철학으로서 생기론, 원래 자원 착취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 모든 생명은 혼의 점진적 진화임을 강조하는 것, 물질과 정신을 확연히 구분하지 않는 것, 자연에는 내재적 활동성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하는 생리론적 원칙, 지구가 지니고 있는 생육하는 힘을 숭배하는 것 등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본래적인 가치가 있다는 윤리관을 생기론에 부여함. 

 

여성 철학자 앤 콘웨이, 방랑자인 철학자 겸 의사 프란시스 머큐리 반 헬몬트. =>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대안으로 퀘이커교도로 개종. 

 

파라셀수의 4원소의 역학과 살아서 발전하는 물질의 종자에 관한 반 헬몬트의 다원론은 17세기 후반의 생기철학과 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퀘이커들은 마음 속 신의 현존, 즉 각 개인 안에 살아 있는 예수를 강조하였고, ... 반 헬몬트, 조지 키스, 앤 콘웨이 이 세 사람은 퀘이커교의 교의 속에 있는 '내면의 빛' '마음 속의 예수' 및 기독교의 삼위일차가 카발라주의(중세부터 비밀스럽게 전해온 비교와 신비적인 전통에 관한) 사이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388

 

콘웨이 철학체계의 여러 요소들이 라이프니니츠에게 있어 중요한 시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드디어 <모노톨로지> (1714)를 쓰게끔 했다. 

 

앤 콘웨이의 일원론적 생기론

 

그녀의 철학에는 영혼과 육체 사이의 본질적인 구분이 없고, 양자는 상호교환적이다. 육체는 응축된 영혼이고, 영혼은 엷은 휘발성의 육체였다. 양자 사이에는 밀접한 끈과 유기체적 통일성이 존재하였다. 육체와 혼은 그 실체도 성질도 같은데, 혼은 밀접성과 침투성, 그리고 생명과 같은 견지에서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카발라주의는 기계론자들이 죽은 세계에 다시 생명과 정신을 소생시키고 싶어하는 철학자들에게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중대한 근거였다. 콘웨이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통일성과 생명력을 간파하고 있던 고대의 지혜야말로 참 지식이며, 반대로 근대인의 기계적인 죽음의 세계는 옛날의 그노시스파의 원자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에 카발라주의를 이용하였다. 

 

자연은 어디까지나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었다. " 자연과 자연의 작용에 있어 그것들(자연의 작용들)은 단지 매커니즘 혹은 기계적인 운동 등 보다 훨씬 숭고하고 생명도 감각도 갖는 하나의 생명체다" 이처럼 동물은 '단순한 구성물'이나 '죽은 물질'로 돼 있는 기계가 아니고, 그 내부에 영혼을 품고 있으며, '지식, 감각, 사랑, 그리고 그 밖의 영혼의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과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먼지와 모래는, 돌과 땅, 풀, 양, 말, 인간 그리고 가장 고상한 정신으로 계속 전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오랜 시간 뒤 그것들은 가장 고등한 창조물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완벽함, 즉 감정, 감각, 지식, 사랑, 기쁨, 성취 그리고 모든 종류의 힘과 도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395

 

죽은 후 영혼이 새로운 육체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혼이 갖는 형성적 성질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개념은 물질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의 존재를 가정한 것. 

 

라이프니츠, 동물에 있어서의 윤회 전생, 형성적 성질이라는 사고방식에 반대함. 

 

그녀는 신과 그 창조물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자연을 일원론적인 유물론으로 환원하는 홉스, 스피노자와 근본적으로 대립함. 

 

물질의 각 부분에는 피조물의 전세계가 있고 각각의 피조물 안에는 전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던 라이프니츠처럼, 앤 콘웨이도 "그것이 정신이든 육체이든, 모든 피조물 안에는 무한성이 존재하며, 그 각각의 피조물은 또한 무한성을 포함하고 있고, 또 반복되며, 그래서 무한성이 계속된다'라고 쓰고 있다. 

 

"모든 것은 자기의 싹에 포함되어 있는 완전성의 크기만큼 자기의 존재를 열망할 권리가 있다"(라이프니츠)

 

그녀의 철학은 결국 그녀가 연구한 실체철학의 범주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신과 육체의 문제에 관한 그녀의 일원론적 분석은 결국 모든 실재를 영혼이라고 하는 관념주의자의 범주에 환원하는 것이었다. 해석적 범주로서의 육체의 타당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의 철학적 틀은 경험된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녀의 생기론의 중핵을 이루는 것들, 혼의 윤회전생과 '중간적 특질'이라는 개념, 여러 형성적 특질과 생명력 등은 19세기 및 20세기의 생기론자와 전체론자(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등)에게 있어 약점으로 계속 된 문제로서, 엄밀한 논리적 인과성과 확고한 경험적 논거에 기초하지 않았다. 400

 

콘웨이, 반 헬몬트, 그리고 라이프니치의 모나드

 

모든 생명의 기반으로서의 이 분할할 수 없는 모나드는 개개의 실체에 관한 라이프니치의 형이상학적인 입장과 가까운 것이었다. 

 

1714년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모나드론의 학설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이 세계가 잘 만들어진 현상들로 구성된 기계적인 세계와 다른 실제 살아 있는 세계라는 생기론적 형이상학을 자세히 설명함. 유기적인 생명은 무한하게 분할하더라도 그 유기체로서의 살아 있는 특징을 여전히 보유한다.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 속에도 피조물의 세계가 존재하고, 생물과 동물, 생명력과 혼들이 존재한다" 물질의 각 부분은 각종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 혹은 물고기로 가득한 연못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개별 식물의 가지도, 그리고 개별 동물들도, 액체의 방울들도 모두 그와 같은 밭이자 연못이다" 404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생태적 위기가 일정부분 이러한 유기적 가치체계의 상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기계론자들이 생기론자들의 비판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우리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407

 

 

12장 라이프니츠와 뉴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아이작 뉴튼과 빌헬름 본 라이프니츠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20세기에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새롭게 전개되었지만, 서양인의 상식으로 인식되는 현실은 여전히 고전 물리학적인 세계다. 뉴튼이 남긴 것은 갈릴레오의 지구 역학과 코페르니쿠스-케플러의 천문학의 찬란한 종합론이다. 라이프니츠의 유산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는 보편법칙의 기초로서의 역학이었다. 

 

고전 물리학과 그 철학은,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비활성 물체는 일직선상의 진로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물체로부터 힘의 작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물체는 다양한 주파수를 지닌 빛이 반사됨으로써 보이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간직한 색과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여러 문제가 풍부함은 움직이는 물체 때문이라는 것을 믿게 된 우리의 의식을 구조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데카르트와 홉스 이후 세대들에게 세계의 기계화가 일으킨 문제는 바로 '자연의 죽음'이라는 이슈였다. 만약 기계론자 제1세대들에게 있어 궁극적 원리가 물질과 운동이라면 혹은 뉴튼이 생각한 것처럼 물질과 운동, 빈 공간, 그리고 힘이라고 한다면, 이는 죽은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운동을 설명해야 하는 중심 이슈를 여전히 풀지 못한채 그대로 두는 것이다. 

 

뉴튼은, 물질과 운동과 힘, 빈 공간이라는 4원론적인 존재론을 데카르트와 홉스가 가정한 운동하는 물제의 단순한 충만으로 치환함으로써, 기계론적 철학을 기계론적 과학으로 변혁시켰다. 

 

위에 제시된 세계상의 수학화는 물질의 수동성과 힘의 외재성이라는 이원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연에 관한 기계적인 분석의 성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기계론 이전의 유기적인 기술의 중심이 되었던 우주 공간의 위계와 가치, 목적, 조화 또는 질, 형태 등의 자연적 기술을 배제하고, 질량과 동력인 즉 물질과 힘만을 남겼다. 운동이라는 것은 유기적인 과정이 아니라 다른 물제의 운동 또는 정지와 관련된 물체의 임시적 상태다. 

 

이러한 기계론에서 과정의 중요성은 구조의 안정성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1731년 판  그리고 1706년 1717년 판 의 부록인 문답집에 제시된 원자구조에 관한 뉴튼의 고찰은, 기계적, 화학적, 전기적, 역학적인 관찰결과를 중력의 법칙과 같은 단순한 법칙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을 완수하고 싶어하던 18세기 경험론적 철학자들의 기초가 되었다. 게다가 지구과 천체가 모두 똑같이 질서 있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본 '세계 시스템'에 관한 뉴튼의 법칙은 영국사회의 정치 경제적 질서의 우주적 모범으로서 작용하였다. 

 

청교도 혁명의 혼란 후 왕정 복고 시기에 출판되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제 문제의 질서 회복과 온건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더군다나 외부의 힘과 재배열 할 수 있는 성분으로 분할되는 물질의 수동성을 중시하는 그 개념의 틀은, 진행중인 경제발전에 불가결한 자연의 지배와 조작을 은근히 허용하였다. 17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신의 부단한 가회와 인간의 도덕적 성취를 가져다 준 종교적 틀이 제거되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적 오만의 가능성이  강화되었다. 

 

라이프니츠 또한 그 사상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연에 관한 기계론 철학을 전개했다. 그의 형이하학적 현상 세계는 뉴튼 역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창조주에 의해 최초로 부과된 동인과 역학적 법칙들에 따라 지배되는 것이고, 자연의 합리적인 관리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힘'이라는 것은 현상의 이해를 위해서나 정신계의 이해를 위해서나 기본적인 것이었다. 원시적인 자동력, 활동성 또는 미래의 상태로 향하는 노력(나중에 그가 말하는 모나드의 본질로 정의된다)은 하나의 참된 실체인 반면, 형이하학적 물체 간 충돌을 통해 관찰되는 유도력은 완전히 실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원시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형이하학적 물체는 실체가 아니고 혼란한 마음(모나드)의 집합체이며, 범위를 지닌 물체로 지각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외적으로 범위를 가진 물체의 여러 가지 성질은 물체를 구성하는 모나드의 존재양식 속에 '확실히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범위와 운동은 현상체의 단순한 속성에 불과하지만 반면에 힘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데카르트에 있어 하나의 실체였던 범위를 확고한 현상의 세계에 귀착시켰다. 424

 

자연의 기계적 분석을 주된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나 뉴튼이 공통되지만, 기계론적인 우주에 있어 신의 역할과 실체의 기본적 성질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는 크게 달랐다. 라이프니츠에 있어서는 현상적인 세계만이 기게적이고 진짜 실재의 세계는 유기적이었다. 1716 라이프니츠와 뉴튼 사이에 일어난 유명한 논쟁의 사실상 쟁점은 유기적 전통과 기계적 전통의 바탁에 흐르는 신과 물질, 그리고 자연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논쟁을 촉발시킨 쟁점은 자연의 수학적 법칙에 따르는 시계 장치와 같은 우주 속의 신의 역할에 대한 것.  완벽하게 작동하고 잘 유지 관리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이성적 창조자인 것일까/ 아니면 기계는 그 노후화와 궁극적인 붕괴를 피하기 위해 신의 개입과 가호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전자가 라이프니츠, 후자가 뉴튼. 

신의 이성을 강조할 것인가, 힘을 강조할 것인가?  ㅜ분은, 첫째 자연 속에 신의 섭리가 유기적으로 내재하는가? 아니면 창조 과정 위에서 자연법칙을 부과한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둘째, 자연을 지성을 가진 유기체로 보는 이전 관점과 이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과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스의 유기적 비유에 있어 자연계는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자신의 운동을 합리적으로 정하는 데 비해, 기계론적 관점은 세계에 대한 생명도 지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운동은 규칙적이며, 자연법칙이라는 형태로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에 내재하는 이성이라는 그리스적 사고방식과 조물주라는 기독교 개념을 융합해 자연법칙에 준내재주의 quasi-immanenrist의 관점을 전개시켰다. 

 

내재적 법칙은 스토아 학파의 자연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 외부에서 부여한 법칙은 유대교=기독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 종교개혁기에는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창조세계 위에 신의 의지와 법칙이 주어졌다고 하는 유대교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다. 유대교=기독교가 신의 의지 및 힘의 긴요함을 강조한 것은, 기게적인 과학기술의 세력에 의해 일상생활이 점차 조직되면서 성장한 의식, 즉 자연을 힘으로 통제한다는 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가센디와 보일, 뉴튼 등 기계론자 및 과학의 주류파의 관점은, 관계가 아니라 물질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실체이며, 관계는 자연법칙이라는 형태로 신에 의해 바깥에서 부과된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따랐다. 한편 라이프니츠에 있어서는 활동성과 관계는 내적인 것이며, 준내재적인 것으로서의 자연법칙의 원칙에 따른다. 모나드의 내재적 활동성과 신의 법칙의 내재성과의 관계는, 그의 에세이 에 요약되어 있다.  맨 처음, 신이 우주 위에 자연의 법칙을 우선 각인 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 법칙은 모두 모나드가 동시에 취하는 갖가지 상태에 공통적인 고유한 내적 발전 및 내재하는 상호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서 물질의 세계는 실제로 유기적인 것이었다. 살아있는 동물에서 단순한 모나드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살아 있거나 살아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따. 개개의 살아 있는 물질로서 모나드는 내적 변화의 원칙 혹은 노력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개개의 모나드에는 지각작용이 있는데, 이는 옮아지기도 하고 소렴ㄹ하기도 하는 것이다. 모나드는 자신에 내재하는 생명 혹은 지각작용이 전ㄱ될 ㄹ때 오로지 내부로부터 작동한다. 즉 갖가지 모나드는 모두 태초에 일괄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며, 세계의 종말에는 또한 함께 소멸하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태어난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나드적인 제 생명의 내적 상태들 간 관계가 자연의 법칙을 구성한다. 전체에게 최고인 상태를 만들어 낼 개별 행동들간 일치, 그리고 세계 내 완성도의 극대화가 그 종합적 결과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개별적인 방법으로 우주를 반영하고 예정조화 속에서 다른 모나드의 생명과 어울러 스스로의 생명을 전개시킨다.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뉴튼 또한 우주의 기계화에 의해 일어나는 유기적 생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다. 

 

신의 지속적인 작용과 배려를 위한 일정한 양식이, 오로지 수동적인 물질의 법칙만으로 지배되는 것으로 보이는 시계 장치와 같은 우주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세계 시스템의 쇠퇴가 명확하기 때문에, 신이 우주의 활동을 소생시키고 새로운 운동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즉, 자연의 틀을 주기적으로 수리하고 그 살아있는 활동을 끊임없이 보급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기본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과거의 전통에서 찾았다. 연금술과 고대 왕국의 비밀. 

 

발효과정에서 만들어진 잠재적 생장의 정기 vegetative spirit. 

지구상의 발표 및 광물 분해는 공중으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천상으로 올라가는 다량의 부드러운 공기를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거기서 공기는 에테르를 모아 그것을 지상으로 내보내어서는 중력을 발생시키며, '자연의 진행 과정에 매우 걸 맞는'순환을 만들어낸다. 에테르는 살아 있는 생장 정기를 옮기는 매체이며,  육체는 이 양자를 합쳐 들이 마신다. 생명의 지속적인 원천은 바롤 발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생생하게 숨을 쉬던 자연이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생명을 갖지 않은 죽은 화폐에 생명이 주어졌다. .. 자연이라든지 여성, 흑인, 임금노동자라고 하는 것들이 새로운 세계 체제를 위한 '천연의' 인적 자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이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7세기 이래 현실에 대한 역학적 분석이 서양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유기체론의 시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 관점은 중요한 잠재적 긴장으로 남아서 계몽운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응과 미국의 선험철학, 독일의 자연철학, 칼 맑스의 초기 철학, 19세기의 생기론, 빌헬름 라이히의 저서 등 여러 방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20세기들어, 자연에 관한 유기적인 견해의 기본적 교의가 스머츠의 전체론, 알프레드 노스 화아트헤드의 과정론, 1930년대와 40년대 환경보호 운동, 핵물리학에서의 '구두끈 이론' 같은 비주류적인 사고방식, 발달 심리학 등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미래에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유기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온 역사적 가치와 억제책들을 재평가하는 것이 불가결한 것은 아닐까? 437

 

 

에필로그

인간과 자연이 살아남기 위해

 

1979년 3월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근교 스리마일 섬 원자로 사고. 

과학혁명이래 계속 나타난 '자연의 죽음'이라는 문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을 통해 자연을 제어하고 이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핵융합 반응 조작이 기대에 어긋나게 실패함으로써 큰 재난을 가져온 것. 전력회사와 원자로 설계자의 장기적인 이익과 사회적 명성이 주민이 당면한 안전의 문제 및 대지의 건강에 우선하였다. 방사능 방출의 드러나지 않는 영향력이 먹이사슬을 통해 농축됨으로써 수년에 걸쳐 암 발생률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이사실은 원자력의 관리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 의해 처음부터 경시됨. 

 

스리마일섬은 방사능폐기물, 살충제, 플라스틱, 광화학 스모그, 탄화불소 등으로 인해 병들게 된 오늘날의 지구를 상징하는 것. '지구의 가장 순수한 흐름'을 오염시키는 것은, 과학혁명 이래 "자연을 지배한다"고 하는 이데올로기, 원자와 인간의 부분들을 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존재론, 그리고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내부로 '침입한다'고 하는 방법론 등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병든 지구는 오로지 주류의 가치관이 역전되고 경제 제일주의가 개혁됨으로써 장기적으로 건강을 되찿을 수 있을 것.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또다시 천지가 뒤집히는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다. 446


 

▶ <자연의 죽음>을 읽고

 

책 <자연의 죽음>을 이제 내 손에서 마음에서 내려놓는다. 일단은 그렇게 해야 한다. 도서관 반납기한이 지난지도 한창이고, 연체날이 하루 하루 쌓이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는 있지만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알뜰히 읽고 있는 것도 아니니, 오늘은 반납을 하기로 했다. 읽을 수록 방대한 역사적 철학적 사회문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란 걸 알겠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기의 담론사를 파악하는데, 특히 자연과 여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어 살피는데 참 좋은 참고서인 듯 하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여러 철학자들, 사회사상가들, 시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나오게 되는 역사적 맥락들을 충분이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아직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영국, 서양의 르네상스기라고 국한시킬 문제가 아니다. 현재 진리의 제일 기준이 된 기계론, 과학주의는 동양을 비롯한 전세계인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전제로 삼고 있는 세계, 사회. 자연, 인간에 관한 이해는 그래서 다시 의심하고 돌아봐야 할 것이며, <자연의 죽음>은 그런 성찰을 시작하기 위한 좋은 참고서이지 않을까?

'자연의 죽음'에서 자연이란 인식을 위한 하나의 개념일까, 아니면 실재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 즉 하나의 존재로서 나, 타인, 사회. 식물, 동물, 우주, 등 만물을 지칭하는 가장 포괄적 개념으로서 나는 자연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돌아가야 할 것 또한 자연이다.

자연과 생명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라는 의문도 든다.

나의 이런 잠정적인 생각이 더 깊어지고 내용을 담아내길 바라면서 책 <자연의 죽음>을 내려 놓는다. 올해 철학사와 개념 뿌리들을 공부한 뒤 다시 <자연의 죽음>을 읽어야 겠다는 작정을 하면서.

인류의 사상사를 자연에 관한 관점에 초점을 두고 다시 읽는 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일 것 같다. 어렵고 머리 터지는 일일까?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자연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지만,
도는 그저 스스로 그러함을(자연)을 따를 뿐.

그래서 나는 땅과 함께 땅 곁에서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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