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백_일홍 2022. 8. 1. 16:44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_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자립
자치(민주주의)
평등
빈곤.절대적 빈곤. 빈곤의 근대화
자본주의 논리. 합리화. 근대화
비자발적 노동. 강제노동. 지겨운 노역
노동. 정신적 고양과 심미적 쾌락. 자유와 개성
소외감
관료적 통치체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확대재생산 논리
'영혼없는 기계'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근대적 인간의 운명(20)
경제성장. 의 토대는 사회경제적 격차
문제. 우리의 관성+ 삶의 뿌리가 뽑혀 농민공동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됨.
돈+사회적 서비스에 기댐.
소비수준 vs 공동체적 삶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어떤 경제성장이든 그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자본과 국가의 결합에 의한 일종의 총동원 체제임. 폭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26)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 비근대적 방식으로 방향전환. 급진적 노력.
나쓰메 소세키. 근대적 삶이란 그 속에서 미치거나 종교에 귀의하거나 아니면 자살할 수 밖에 없는 잔혹한 족새.
이러한 근원적 의미의 폭력성 혹은 야만성은 근대가 본질적으로 자연ㅡ인간본성도 포함한ㅡ을 거스르는 것을 원리적으로 강제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근븐적인 모순)
시급한 것은 인간의 삶을 자연적 괴정에 순응하는 순환적 생활패턴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
현대식 농업. 유럽인이 세계 도처에서 행한 대규모 살육의 산물.


녹색혁명의 재앙
소에게 동물.소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먹임. 곡물.옥수수 사료도 포함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엄청난 불경 혹은 극도의 교만이다. 원래 소는 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주적 섭리이며, 자연의 신성한 뜻일 것. 그러나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 속에서 어느새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은 극단적으로 퇴화하였고, 오로지 이윤추구를 최대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논리만이 폭주를 계속하고 있을 뿐.

단작.
단작재배를 하면 작물은 병충해에 취약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과다한 살충제 사용이 불가피해지는 것.

대다수 인간이 장구한 세월 동안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방법은 농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는 것. 농촌에서의 삶은 물론 가난하다. 그러나 그 가난은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상호부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면서 끊임없이 그 관계를 강화하는 공생공락의 가난이었다. 이 가난의 경험은 '결핍'을 모르는 도시의 돈 많은 부자로서는 전혀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가저다준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부'란 사람끼리의 유대이며, 그 유대는 '결핍'에 의해서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42

서구의 근대농업은 생명과 '부'의 윈천인 토양을 고갈시키는 논리가 내재해 있어.
인분의 퇴비화. 4천년간의 농부.

이집트, 아시리아, 인더스문명, 중국 황화문명, 그리스 로마문명에 이르기까지 한때 고대문명이 번영을 누렸던 땅은 모두 결국 사막화하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명이 망했기 때문에 땅이 사막화한 것이 아니라, 땅이 사막화했기 때문에 문명이 망했다는 사실이다. 45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소위 선진화를 향한 사회적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날 우리 삶은 갈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 출생, 양육, 교육, 취직, 주택, 의료, 노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단계, 모든 국면에서 우리의 삶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되거나 뒤틀리고 있다. 더욱이 갈수록 심각한 고용, 비정규직화 문제는 종래의 상투적 세계관, 세계인식의 틀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방법이 나올 수 없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갈수록 왜곡돠기나 허약해져 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농촌공동체가 죽어가는 현상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농촌이라는 자급의 궁극적 근거지가 소멸되어버릴때 민중의 자본의 전횡 앞어서 속수무책으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47



지금 많은 사람들은 서구에서 출발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래는 것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도농격차, 지방 공동화 황폐화.

그러나 실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농촌 황폐화라는 현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역경제의 피폐화란 결국 농촌경제의 붕괴 현상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라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농촌이라는 근본 토대 위에 서있는 공동체들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사태의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
사실 따져보면, 대도시를 근거로 해서 지금 전개되고 있는 온갖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적 활동 전체는 간단하게 말하면 기생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 그 숙주는 물론 농입니다. 저는 문명의 근본 토대는 농업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함. 우리는 인간인 이상, 기본은 땅을 딛고 걷는 보행입니다. 땅을 떠난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은 근대문명, 도시적 삶 자체의 존속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마치 기생충들이 자신의 생존기반인 숙주를 아무 생각없이 다 잡아먹어버린 꼴입니다.

땅으로부터 유리된 도시 주민들이 오로지 경제적인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무종교적 인간이 되어버렸다(슈펭글러)

뿌리가 뽑혀진 사람들이 무턱대고 여행을 좋아한다. 한국의 중산층 다수가 해외여행 중독증이 걸린 것 같다. 우리 자신의 생활 현실이 점점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황폐화되고, 우리의 인간관계가 삭막해지고, 우리 각자의 내면이 갈수록 공허해지고 있는 점과 깊이 연결돼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생활현장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함. 인간적 성숙이나 자기교육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생활의 공허함에 대한 반작용, 자기로부터의 도피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음. 소비주의 문화의 일환에 불과한지 몰라.

농사를 중심으로 한 자급자치에 기반을 둔 비폭력주의 생활이야 말로 인류사회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유일한 보편적인 생활방식이라는 게 간디의 일관된 입장임.

전진한 선생. 소련식 사회주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동시에 넘어서는 자유협동주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한다.

자유협동사회란 각자가 자기에 맞는 자리를 찾아 각자의 타고난 개성을 맘껏 발휘하는 사회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에게 맞는 자리란 전체와 개체가 조화를 얻는 위치. 그래서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발휘되어 각자의 경제생활의 균형이 보장되는 이런 사회야말로 자유와 빵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사회라는 것.



솔제니친, 중편 마트료나의 집.
혁명 후 러시아 오지 풀뿌리 농민들의 삶에 관한 이 뛰어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도스토엽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 전승되어 온 러시아의 심오한 정신적 사상적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줌.

근대발전 사관의 덫
사회주의가 성립하려면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맑스 자신의 논리.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함을 겨냥하는 운동으로 왜소화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결국 핵심은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록 잠정적으로나 맑스에게도 자본주의 근대는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단계로서 긍정하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근대를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

서구 자븐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뿌리 깊은 근대적 미신 때문. 실재로 인간생존의 궁극적 테두리인 우주와 자연은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갈 뿐인데, 서구 근대문명은 끊임없이 그 과정에서 생태적 사회적 인간적 한계는 계속 무시되어왔다.

근대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재생순환적 태양에너지 체계의 근븐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및 기타 지하자원을 채굴하며 마구잡이로 사용하자는 지극히 근시안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 영속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소비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

대안이 없다는 구호 밑에 강화되어 온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것보다 더 지독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음.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우리들은 현금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부조의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런 두려움은 당연한 것.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

상호부조 경제란 기븐적으로 성장경제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경제. 따라서 이른바 생활수준의 저하는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됨. 그리하여 가난은 회피할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미덕이 되어야 함. 아나키스트 철학자 프루동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생활은 윈래 가난한 생활이 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견딜 만하게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일이다.

구스타브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지금과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해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도 있다.
토지를 떠난 인민은 자본가에 맞설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
우리는 이웃들과 자발적인 협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필요가 있어.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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