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출

백_일홍 2024. 2. 14. 14:36

노출,

포스트휴먼 시대 환경 정치학과 쾌락

 

스테이시 알라이모

서론, 
소멸하는 가운데 거주하기


1. 저자의 질문, 
인류세, 신유물론, 인간, 윤리학과 정치학

인류세는 뭔가를 바로잡을 시간이 아니다. 인간 활동이 지구의 지질학적 시대를 통채로 변경했음을 깨닫게 되면 세계가 인간 주체를 위해 단지 배경으로만 존재한다는 상식적 가정은 무너진다. 신물질론new materialisms은 물질의 작용 능력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물질론은 우리가 한때 '자연'이 라고 불렀던 것들이 인류세에서조차 혹은 특히 인류세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행위하고 상호 작용하며, 심지어 인간의 몸 속에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인간 몸을 통해서 인간 몸의 주변에서도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누구나 인간이 지구의 지질학적 변천 속에서 점차 형성된 존재라고 믿는다. 그런 시대에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이 급속히 변화하는 물질 세계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물질 세계에 노출되어 있고, 심지어 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면 대체 어떤 형태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가능할까? 다양한 종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반면 인간은 살flesh에 불과함을 폭로해버린다면, 인간의 예외성은 과연 사라지고 대체될 수 있을까? 환경론자, 페미니스트, 퀴어 주체들은 어떤 형태의 저항과 쾌락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15-16


착근된 embedded
. 인식적 윤리적 정치적 참여의 착근된 형태 16
. 살과 장소의 맞물림


2. 위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내용과 접근법

. 집 home 
누군가를 길들이지 않고 벽이 무엇인가를 분리하지 않는 장소에 거주하는 쾌락 =>
바다생물의 껍질이 소멸하는 서식지, 인류세의 바다가 사멸하는 모습

미지의 미래에 근본적인 경계가 해체되고 소멸하는 가운데 거주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와 환경론자가 주장하는 일종의 윤리적 실천이다. 

브라이어 도티의 희망, "지속 가능한 생성", 새로운 윤리적 주체
=> 저자 비판 
각주 2, 희망보다는 불교적 올바른 의도를 선호한다. 

저자, 횡단-신체성이라는 윤리적 주체 모델을 제시

ㅇ 초월적이고 확실한 지도 작성, 명료한 지식 시스템, 확신 있는 인식론, 외부화된 자연 위에 인간이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

ㅇ 현상학적 조우나 지엽적인 인식론

둘 다 옹호하지 않는다. 현상학적 직접성으로는 서구의 평범한 시민과 소비자가 속한 위험-손해-과실-책임이라는 네트워크를 횡단-신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우르줄라 하이즈, 《장소와 행성의 감각》
신체경험과 감각 + 추상적이고 고도로 매개된 지식과 경험 
로컬과 그로벌, 즉각성과 고도 매개성. 이중적 이해가 필요. 

과학적 탐구, 과학관련 대중적 글 필요. 
. 레이첼 카슨과 닐 슈빈의 《당신 안의 물고기》 비교. 닐 슈빈 비판 

울리히 벡, 위험사회에 위험을 예측하는 주권상실
=> 횡단-신체적 주체성  

이 말은 자아에 대한 포스트휴먼적, 반인본주의적인 감각을 지닌 누구나 넓은 물질 세계로 자아를 활짝 열고, 결국 이해하든 못하든 온갖 종류의 물질과 물질적 행위 작용이 자신을 관통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아드리아나 페트리나 Adhan Petryna의 탁월한 저서 《노출된 생명: 체르노빌 이후 생물학적 시민들》은 생명-정치학적 주체를 절대적 노출absolute exposure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20

 '노출'을 실천한다는 것은 상호 침투하기 어려운 서구 인간 주체 가 이젠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직관 혹은 철학적 확신에 따른다.

'노출'을 윤리적이고 정치적 행동으로써 실천한다는 것은 끔찍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재앙으로부터 비롯되어 특별히 뒤엉켜버린 취약함과 공모의 문제와 더불어 산업화된 세상에서 재앙이 일상과 분리되면서도 동시에 연결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취약함의 반란으로써 '노출'을 이해하는 것은 추상적 동맹이기보다는 물질적 동맹을 수행한다는 뜻이고, 경계와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능력이 난처함에 처해도 그 난처함 가운데 거주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영락없이 신체적 존재라는 물질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백이 논의하는 주권의 상실은 인식론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인식론적이다(존재.인식론이란 캐런 버라드가 사용한 단어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밀접하게 연관됨을 강조한 신조어다. 역주), 이것이 바로 내가 옹호하는 횡단 신체적 주체trans-corporeal subject다. 

이 책에 있는 여러 글은 횡단 신체적 주체성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개진하고 있다. 횡단-신체적 주체성이란 신체가 장 소로 확장되고, 장소는 신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장소 안에 존재함을 극화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탈신체적인 서구 주체가 우월하다는 가정을 비판하고,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객관성이 가능하다는 가정도 비판한다. 노출된 주체는 알지 못하는 물질과 세력에 의해 '항상 이미' 침투되어 있다. 윤리학과 정치학은 거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만일 침투가 뭔가 성(性)적인 것을 암시한다면 더욱 좋다. 이 책의 여러 에세이들은 거의 성적이고 퀴어적인 방식의 정치학을 실행하면서 노출과 쾌락을 포함하는 시위와 공연을 분석한다. 이러한 공연은 페미니즘이 반복해서 폭로했던 이성주의의 위기를 예시한다. 또한 그 공연들은 쾌락, 욕망, 관능, 에로티시즘이 장소에 노출된 인간을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 주고, 환경론적 윤리학과 정치학에 영감, 자극, 에너지를 풍성하게 부여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공연들을 단순히 퀴어나 페미니스트 환경론으로 환원하리는 유혹에 저항한다. 나는 각각 장들이 다양성을 지니도록 내버려 두고, 종 합적인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고 싶은 욕망은 절제한다. 21

인식론적 겸손이 실용주의적 우월감을 거부하는 환경론적 윤리학으로 기능할 수 있다. 

2장, 퀴어동물 
갑자기 세상은 누군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퀴어할뿐만 아니라, 더욱 놀랍게도 세상이 퀴어 자체임을 알게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주체할 수 없이 풍요로운 퀴어의 세상과 함께 느끼는 쾌락은  덜 매력적인 생각들 때문에 주춤한다. 인류세, 기후 변화, 여섯 번째 멸종', 국내/국제 빈부 격차의 증가, 신자유주의적인 불안, 미국 인종차별의 병렬한 부활, 작은 규모지만 학계의 지적 삶에 대한 위험이라는 당연한 문제들은 해결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버려야 할 지식이 매우 많다. 아일린 조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를 배우려면 항상 이미 아는 것을 버려야 한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계속적으로 뒤엎어야 한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은 어렵고 우울하다." 하지만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금세 사라지는 구역인 현재 안에서 "우리는 융단처럼 다양한 무늬와 빛깔의 생성 기술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단처럼 다양한 무늬와 빛깔의 생성 기술은 이 책이 분석하고 있는 예술가와 활동가의 실천들이다. 예술가와 활동가는 과학적 데이터와 도표를 다루지만 '환경'을 외부화하는 지배적 충동을 저지하고, 대신 그들이 거주하는 즉각적이고 다층적인 환경 안에서 실천한다. 

고차원의 관점들은 인간이라는 앎의 주체를 세상에 뒤엉키게 만들지 않고 저너머에 두는 까닭에 페미니스트나 환경론자 모두에게 문제적이다. "도나 해러웨이(anna) Harrway는 이제 고전이 된 '상황적 지식"이라는 논문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복적 응시," "영원한 비전의 관점," 표식이 없고 탈신체화된 관점인 소위 "신의 속임수 "를 비판한다." 그러한 관점이 인류세의 지배적 시각인데 이제 너무 진부하다. 이 점은 6장에서 논의될 것 이다. 21세기의 환경, 경제, 지구 정치학적 공포 때문에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전 지구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주체를 위한 답시고 달신체화된 시스템이 '자원'을 보존할 수 있으며 '자원'에 대한 객관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믿는 허황된 신념이 확산되는 지금, 해러웨이가 오래 전에 썼던 글로 다시 돌아가 보면 유익할 것이다. 해러웨이는 "페미니스트의 객관성이란 주체와 객체의 분열과 초월이 아니라 제한된 위치와 상황에 따른 지식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나올 장에서는 초월을 비판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열도 비판한다. 대 신 신물질론적 노출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횡단·신체성'이란 개념은 명백히 해러웨이의 페미니즘적 인식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횡단신체성은 자아의 견고한 위치성을 인정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열은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주체는 자신이 알려고 하는 객체와 절대로 분리되 지 않는다. 그러나 '위치성 ponitionality이라는 개념은 내가 수잔 헤크만과 함께 편집한 '물질적 페미니즘과 내 책 '몸적 자연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나는 캐런 바라드의 이론으로부터 횡단 신체적 주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횡단 신체적 주체란 물질적으로 '상황에 놓인 주체다. 세상의 물질 자체가 횡단 신체적 주체를 통해서 교차하고 통과하는 까닭이다. 또한 가장 본질적인 국면의 자아를 물질 세계에서 출현하는 물질 자체로 이해하는 존재인식론을 제시한다. 초월적 인식론이 환경 파괴에 기름을 부었고 야생 동물과 더불어 가족과 실험실 동물까지 모두 해손시켰기 때문에, 인식론은 윤리학과 관계가 있다. 버라드가 이른바 "윤리 존재인식론'이란 개념을 만들었을 때, 이는 "윤리학과 지식과 존재가 서로 뒤엉켜있음을 고려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버라드가 주장한 '행위능력의 리얼리즘 agitial realism은 인식론을 존재론적 문제로 만든다. 이 책이 분석하는 예술가와 활동가처럼, 버라드는 인간이 '세계 몸이라는 역동적 구조 공간의 일부"이고, "세계의 생성은 깊은 윤리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버라드는 물질적 페미니즘과 신물질론의 탁월한 이론가이며, 물질적 윤리학뿐만 아니라 물질의 행위능력에 대해서 가장 철저하고 풍부하게 설명하는 학자다. 눈부시게 소중한 버라드의 사유는 이 책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책은 문화 연구이므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물질의 행위능력을 극화하는 여러 활동가의 텍스트를 즐겨 소개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5장에 나오는 '플라스틱 오염 연대의 예술가와 활동가는 땅 전체에 넘쳐나는 흉악한 플라스틱이 인간과 비인간의 신체에 침투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많은 환경 활동가가 소비품, 오염, 독성, 비인간 동물과 인간 사이의 상호 작용을 파악하는 동시에 중요하게도 신물질론 이론들이 발전하고 있다. 

제프리 제품 코엔jeffrey Jerome Cohen은 물질의 행위능력에 대한 신물질론 이론과 액티비즘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본다. "행위능력은 각양각색의 관계들 가운데 분배되어 있는데 반드시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패턴을 따라서 나타나는 행위는 처음엔 놀랍다가 이내 혼란스러워진다. 이러한 행위능력주의 agentism는 일종의 액티비즘이다. 즉 비인간이 우리가 통제할 소유물이 아니고,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심지어 의지까지도 소유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환경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중심주의는 출발점이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나올 장들에서 활동가, 예술가, 기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작업하는가를 탐색한다. 종종 인간 특성을 특정한 범주 너머로 확대시키고, 심지어 그런 인간 특성을 아에 소멸시켜버리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인간 거주지의 구조들은 비인간체가 지닌 놀라운 행위능력으로 개방될 때 덜 인간중심적으로 설계될 수 있다. 26

미크 스미스, "생태적 인식을 지닌 무정부적 윤리학과 정치학"

나는 스미스의 무정부적 윤리학과 정치학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의 무정부적 윤리학과 정치학은 야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야생의 예측 불가능한 활력을 무정부적 힘으로써 부각시킨다. 그러나 야생을 긍정하려면 신물질론적 감각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물질론적 감각이란 물체, 물질, 환경, 적어도 인간에 의해서 변경되고 생산된 것들 모두의 내부 안에서 혹은 서로 간에 물질적 행위능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물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적인) 윤리학의 영역과 (기본적으로 공적인) 정치학 영역의 뒤섞음 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물질적 페미니스트나 신물질론적 환경론은 몸, 소비품, 물질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으로 인해 모두가 윤리적·정치적으로 참여 하고 개입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됨을 강조한다. 


비판적 포스트휴먼 학자와 동물 연구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서구의 사유 안에서 윤리학이나 정치학 모두 비인간 존재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닌 문제라서 여기에서 해결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 트휴먼 신물질론, 횡단 신체성, 일부 환경론적 액티비즘은 윤리학과 정치학 의 범주를 뒤섞고 있다. 그들의 관심 대상이 비인간 생명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정의 영역에서 가장 사적인 윤리적 실천조차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곤경, 이를테면 전 지구적 자본주의, 노동과 계급 불평등, 기후 불평등, 신자유주의, 신식민주의, 산업형 농업, 공장식 축산, 오염, 기후 변화, 멸종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것과 정치 적인 것은 인류세에 대한 다른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규모를 변경하여 즉시 삶과 세계에 개입해야 할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삶과 세계는 어떤 안정된 배경이 없고, 그 무엇도 반듯하게 바로잡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진창 같은 곳에 대해서는 스테파니 레메나거Stephanie LeMenager가 석유 문화petroculture를 분석하면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 석 유문화에서는 심지어 미디어-"활기"를 경험하기 위한 매개물-조차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근대인, 특히 근대 미국인으로서 경험하고 있는데, 이는 매일 석유 속에서, 석유 안에서 살면서, 석유를 숨 쉬고, 석유를 감지하는 경험이다. [석유와의 관계는 영락없이 과도하게 깊 다. 그렇게 (석유로] 침윤된 삶의 세계에서는 초연하고 건조한 주장보다는 좀 더 몰입된 실천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 페미니즘, 환경론, 포스트휴머니즘, 신유물론, 물질적 페미니즘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 페미니즘 => 물질적 페미니즘 

환경론 + 페미니즘 => 물질적 페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 신유물론 => 물질적 페미니즘 


이 서문을 쓰는 내내 나는 "페미니즘"과 "환경론"을 환경론적 페미니즘이 나 생태적 페미니즘이란 용어로써 결합하지 않고, 각 영역을 분리된 범주로 유지했다.” 

환경 담론들은 종종 '자연'이란 단어를 전통적인 의미 그대로 사 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연' 개념은 오랫동안 인종 차별, 성차별, 식민주의, 동성애 혐오, 본질주의를 지지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런 까닭에 '자연' 개념은 변동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이 단어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31

이 책은 페미니즘과 환경론이 서로 교차하고 동맹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지점들을 추적한다. 위로를 주는 해답보다는 심란하게 만드는 질문을 제시한다.

"라 티그레사"(스페인어로 '호랑이'라는 뜻으로, 그는 가수, 헤어드레서, 배우, 모델이다. 역주)는 남성 벌목자들의 벌목을 막으려고 그들에게 벌거벗은 가슴을 드러낸다. 그때 그녀는 페미니스트인가? 기후 재앙 환경론자들 중에서 여성의 취약함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일부 페미니스트 시민단체들이 '자연'을 가정용 자원이라고 가정하는데, 그때 그들은 과연 환경론자인가? 《길들여지지 않은 땅: 자연을 페미니스트 공간으로 재구성하기》에서 나는 퀴어 페미니즘과 젠더를 최소화하는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페미니스트 문학, 이론, 예술, 액티비즘이 소위 '자연'이라는 특정 개념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논의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땅은 젠더 본질주의, 인종 차별적 분류, 이성애 규범성의 기초를 구축하는 데 복무하지 않는 '자연'을 개념화한다. 물질적 페미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 대해 예리한 문화적 정치적 비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몸, 물질, 환경의 물질성이 지닌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다. 바로 이 물질적 페미니즘이 환경론과 페미니즘을 생산적으로 동맹 맺게 만드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해냈다. 환경론과 페미니즘의 동맹은 본질주의를 부정하며 이를 조잡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본다." 더 나아가 결론에서 논의하듯이, 페미니즘이론, 예술, 액티비즘은 오랫동안 객체였던 존재들이 주체로서 나아가는 역설과 씨름해왔다. 스스로 세상에 속하는 물질 자체로 생각했던 페미니즘의 역사를 감안할 때 이제 페미니즘은 특별히 유력한 포스트휴머니즘과 신물질론에 개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물질적 페미니즘은 신물질론과 포스트휴머니즘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는 덜 중요한 잔가지이거나 추가물 혹은 지엽 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이 책은 노출과 쾌락에 대한 물질적 이해가 인간을 비인간hhe nonhuman/인간he inhuman/인간 이상의 것the more than human과 연결하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정치학을 지지한다고 논의한다. 이 책은 일종의 문화 연구기획으로써 활동가의 실천과 더불어 다른 소위 '저차원' 실천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 모두가 정치적 주장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환경론적 인문학의 작업으로써 기후 변화, 생물학적 다양성, 지속 가능성, 해양 보존, 환경 액티비즘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으며, 더불어 인류세를 묘사하는 문제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신물질론 연구로써 인간 몸의 물질 성이 어떻게 포스트휴머니즘의 쾌락과 환경론적 시위를 촉발하고, 또한 몸의 물질성으로 인하여 인간이면 누구나 세상을 구성하는 괴이한 행위능력 속에 푹 잠겨있다는 감각이 어떻게 형성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32



1부 포스트휴머니즘의 쾌락
1장 거주의 윤리학, 쾌락이 관건이다.

무주지 terra nullius

나는 이 글에서 제한된 공간인 '집'home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즉 '집'의 영역이 어떻게 서구적 "인간"을 담는 결정적 그릇 역할을 해왔는지 생각해볼 참이다. 경계를 지닌 공간인 집은 안전하다는 환상으로 만들어졌고, 소비주의라는 양분을 먹고, 국 가주의적 판타지가 제공하는 연료를 주입받는 곳이다. 

길들이지 않는 집, 단절시키지 않는 벽으로 만들어진 집을 다시금 설계할 수 있는 거주의 윤리학이 가능할까? 거주의 윤리학은 상호 연결의 쾌락과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발견 하는 쾌락 속에서 신나게 즐기는 것이다. 거주의 윤리학은 "자연"으로 알려진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와 관계 맺음이 가능함을 받아들인다. 38


환경 예술가들은 자기-지시성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연 물질과 아이러니를 활용했다. 예, 월터 드 마리아 Walter de Maria 의 설치물인 뉴욕 흙방 New York Earth Room
그래서 이 설치물은 본질적이면서도 그간 부정되었던 흙과 여성에 대한 뤼스 이리가레의 해체적 논의가 타당함을 입증해준다. 43


우리는 "집이 몽상가를 보호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단 말인가. 신체적·심리적 안전이 필요해서 집에 울타리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보호에 대한 꿈은 선의일지라도 집의 경계가 인종적, 계층적, 국가적 경계를 위 한 소우주 역할을 하면서 이 꿈은 국가적인 망상으로 변질된다. 

1997년 출간된 '공포의 건축이란 책의 서문에서 낸 엘린Nan Ellin은 "무엇이든 개인 소유로 만들려는 충동은 통제문이 있는 공동체의 증가, 입구를 통제하는 주택가 건설, 보안 울타리를 세워 이웃 동네와 명확하게 분리하는 데서 잘 요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입 통제문, 방범, 보안 시스템"을 구축하는 환경 양상들은 "점점 증가하는 편집증과 불신으로 인한 대중적 공포감을 조장하고 있다. 43


뛰어난 예술품과 영화들이 집의 안전에 대한 환상을 벗겨내고 있다. 예술 가 리사 레벤즈Lisa Lewenz는 1984년 자신이 제작한 달력에다 1979년 원자로 의 일부 용해를 경험했던 펜실베니아의 유명한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를 담았다. 이 원자력 발전소는 집 부엌의 창문을 통해 보이도록 배치되었다. 통상 피난처로 인식되는 집 안에서 사진을 찍은 것인데, 이런 촬영 방식은 '밖'에 있는 것이, 특히 방사선의 경우 이미 항상 '안'에 있음을 경고하는 데 유 용하다. 

토드 헤인즈Todd Haynes가 감독한 1995년 영화 '세이프』 Safe는 부유하고 극도로 청결한 백인 가정 내부를 배경으로 삼는데, 그가 말하듯이 "이곳은 당신이 살고 싶은 '안전'(보호되고)하고 '면역된'(고립된)" "세계 안”이다. 이 영화는 "집은 피난처다"라는 전제가 위험한 망상임을 폭로한다. 
이 영화는 환경 정의 원리들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가사 노동자는 값비싼 곳에 거주하는 특혜를 누리지 못한 채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학 세제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45

소위 정상적 가정은 사 이면 에스톡Simon Estok이 말하는 "에코포비아"와 깊이 연결된다. 왜냐하면 집은 벽을 세움으로써 소위 못된 자연 즉 "자연 환경이라는 위협적인 타자 성과성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은 그렇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집을 일종의 문덕liminal zone으로 기획하고, 쾌활한 상호 연결로 초대하는 장소로써 다시 계획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인간의 영토에서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연 어떤 실천이나 쾌락이 포스트휴먼적이면서 반소비주의적인 주체를 길러낼 수 있을까?


살아있는 거주지

린다 호건의 시, <빨강의 역사> 

빨강은 인간의 집이다 
밤이 되면 내가 돌아가는 집, 
들소를 기억하는 가죽 동굴 안에서 
나는 헤엄친다.

<벽돌>

비밀스러운 열망이 있다 
세상을 품은 벽돌 안에, 
함께 꿈꾸는 숲 
모든 벽 안에서, 
밖으로 내보내려는 
생명의 열정적인 넝쿨손 
일본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비워냈을 때처럼. 
도시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벽돌들이 피어났다.
먼 산으로부터 온 식물들과 함께.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들

영화 서식지 Habitat

이제까지 제시한 세 가지 집의 모습은 집을 놀랍도록 쾌락으로 가득 찬 생활터전으로 상상한다. 새로운 쾌락과 윤리학은 연결, 상호관계, 상호주체성이 존재론적 상황이 될 때 출현한다. 쾌락은 이러한 윤리적 존재론을 통해서 솟아난다. 이때 윤리적 존재론이란 추상적이거나 탈신체적인 원리이기보다는 틀림없이 물질적이다. 호건과 버틀러에게는 기억 자체가 벽 속으로 짜여 들어가고, 역사는 신체적이며, 감각은 실천과 실습praxis이 된다. 이러한 거주지는 인간과 자연이 매개 없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꿈으로부터 생겨난다. 벽은 뭔가를 담는 존재가 아니라 뭔가를 주는 존재다. 52

이런 거주지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석유 유토피아"에 대항할 것이다. 

추정하건대 석유 유토피아는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 까닭에 환경론이 금욕과 자기 부정만으로 이에 대항하려고 한다면 무력할 것이다. 카트리오나 샌덜랜즈Catriona Sandilands가 설명하듯이 "대부분의 생태적 담론에는 풍성한 쾌활함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쾌락을 종종 생태적 원리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검소함과 단순성은 쾌락이나 관대함에 대립하는 원칙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모든 욕망을 소비주의적 욕구속으로 일제히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지배적인 환경 담론은 우리에게 이런 욕망에 저항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윤리적 호소는 거의 효과가 없다.

웬델 베리Wendell Berny의 "광범위한 쾌락"extensive pleasure 
 "음식이 생산되는 세계와 생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더욱 맛있게 만들어진 음식을 맛보면서 미학, 쾌락, 정치학을 한데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로스엔젤레스 출신 도시 게릴라 정원사인 론 핀리 Ron Finley. 그는 공원 도로처럼 버려진 도시의 공간을 공동체를 위한 채소 텃밭으로 변모시켰다. 핀리의 텃밭뿐만 아니라, 도시 텃밭을 위한 광범위한 DIY Do it yourself 운동, 도시에서 꿀벌과 닭 키 우기, 공동체 텃밭 가꾸기,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사 짓기, 씨앗 저장, 야생 풍경 만들기, 씨앗 덩어리 뿌리기, 연료 재활용하기, 자전거 타기는 반소비주의적 공동체 중심의 환경적 쾌락을 풍성하게 제공하여 신나는 실험과 관능성 sensuality이 풍부한 실천을 통해서 탄소 발자국을 축소시킨다. 54

몸의 "벽", 상호신체성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Jula Butterfly Hil은 벌목을 막기 위해 루나(Luna라는 거대한 삼나무숲에서 일년 반 동안 살면서 자신의 신체 안에 일어난 변화에 주목한다:

" 나무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혹은 내가 나무의 일부가 되었다. 발로 나뭇가 지를 감싸며 나무에 오를 때 나무를 감싼 발의 바깥 면에 두툼한 새 근육이 자라났다. 손에는 더욱 많은 굳은 살이 배겼고, 비바람에 갈라진 피부의 틈 새는 루나의 소용돌이치는 패턴을 닮았다. 내 손가락은 나무 껍질과 이끼 물이 들어 갈색과 녹색으로 얼룩졌다. 루나의 조각이 내 손톱 밑으로 잘게 부 서졌고, 나무 껍질과 가랑잎 조각과 함께 수액은 내 팔과 손과 발을 얼룩덜록 물들였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한테서 삼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난나고 말 했다." 55

 "체현을 상호신체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몸으로 구현되는 경험이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항상 이미 다른 인간과 비인간 몸체와 계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매개된다는 뜻이다."

철학자 맥워터, 자신의 살이 흙과 친족임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자신의 몸을 낮설게 만든다. 흙과의 친족성
이탈, 벗어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연결한다. 
푸코식 윤리학, 즐거운 실천을 계발함으로써 출현하는 생성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어떤 실천을 계발해야 내가 성적 권력 체제에 대항하고, 저항하고, 반대하면서도 쾌활할 수 있을까?" 유사하게도 샌덜랜즈도 자신의 글 [자연을 욕망하기, 윤리학을 퀴어화하기에서 "생태적 위기가 작게나마 욕망의 문제- 특히 편협하고, 규제하고, 지우고, 질서 잡고, 자동화하고, 균질화하려는 욕망-라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퀴어 이론은 환경론적 윤리학에 상당 부분 기여할 수 있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타자의 실체적 존재를 욕망하고 그 안에서 쾌락을 얻는 것은 생태적으로 파괴적인 관계와 성적으로 파탄 난 관계로부터 섹슈얼리티의 지향을 변경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쾌락이 윤리적이라는 사유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쾌락이 정치적일 수 있지만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금욕적인 실천이 빈번하게 신체적으로 경계를 짓도록 강제한다거나, 자연과 거주지를 거부하거나 초월하도록 부추기는 반면, 쾌활한 실천은 인간 자신을 활짝 열어 비인간과 자연과 친족이 되고 상호 연결하게 만든다. 57


다종 예술과 건축

다종이 거주하는 장소 

휴머니즘의 토대를 잠식시킬 것이다. 

파우쉬는 "서구 문화가 몸을 추상화 하고, 왜곡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추방해버리는 경향의 문제를 건축 분야가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전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나는 물질성 을 자연 세계와 상호 연결하도록 비전을 확장하고자 한다. 

내가 결론에서 주장하겠지만, 건축의 내부에 있는 지배 패러다임을 포함해서 지속가능성이라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관리자적 거리감을 차용한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인간은 전문가이고, 문제 해결자이며, 공학자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존재다. 그는 취약하지도, 살을 가지고 있지도, 물질적 과정에 상호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는 세상을 건설하면서도 세상 밖 에 서 있는 존재다. 그러나 물질 세계의 놀라움, 행위들, 행위능력은 게슈탈트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형상과 상태, 역주)를 엎어버릴 것이고, 환경- 세워지거나, 건설되거나, 우연히 접촉하거나, 변형되는- 이 인간을 위한 단순한 배경 역할을 할 뿐이라는 사유를 방해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 는 자신의 책 《외부로부터의 건축》에서 자연은 사실상 적어도 두 가지 방식 으로 건축의 "가장 중요한 요소" 자체라고 주장한다. "건축은 두 개의 자연 개념에 의존한다. 착취하고 다시 써야 할 물질, 즉 부품standing reserve으로 여기는 자연 개념이 하나고, 또 한계를 교체하고 변형시킴으로써 부품이나 자원의 수동성을 넘어서 생성하고 진화하는 자연 개념이 두 번째다."

생성하거나 진화하는 자연이라는 두 번째 개념이 바로 과잉 소비와 통제로 기울어진 문화에서는 보통 무시당하고, 억압당하고,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 기반한 "인간적인 것'의 단단한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면, 인간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생성하는 자연 속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야 한다.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샌덜랜즈의 용어로 "실재의 윤리학"ethics of the Real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실재의 윤리학"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만들어낸 현존"이 아니라 "불가사의의 적극적 타자"로 여긴다. 그런 윤리학은 결과적으로 동물 기억과 동물 문화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68년 앨런 선 피스트Alan Sonfist(뉴욕의 환경 예술가, 역주)는 "전 세계 도심에 있는 공공 예술은 자체 자연 환경의 역사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식물, 새, 다른 동물의 이름을 따서 거리 이름을 짓고 새와 동물 소리와 심지어 식물의 냄새 가 '거리에 퍼지도록" 설계함으로써 말이다. 

땅 위에 있는 비인간 존재들이 요구하는 바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동물의 거주를 위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고, 야생 회복 rewilding을 실천하는 것이다.

뒷마당에 새, 나비, 도마뱀, 개구리, 포유 동물들의 거주지를 만들어주는 일반적인 실천으로부터 도시를 "주폴리스"Zoopolis(인간과 자연이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사는 개념)로 재상상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제니퍼 월치Jennifer Woldi(도시계획 지리학 교수, 여주)는 "주 폴리스에서 인간이 동물과 자연을 재통합해 내면 도시 거주자들은 세상 삶 에 대한 동물적 방식과 입장을 이해하고, 특정한 맥락에 따라 동물과 상호작 용하며, 주제로서 동물의 자율과 생활 공간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행위를 지역적 상황에 따라, 동물 생활과 관련된 일상 지식을 제공 받을 수 있 다"고 주장한다. 

철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곳이 다른 생명체의 땅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피노자의 욕망의 윤리학,
누구나 타자의 생성을 긍정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생성이 극대화됨을 의미한다. 

집은 타자의 위험으로부터 방어 하는 견고한 정계와 소유물로써 인식된다. 하지만 집에 대한 이러한 고정적 static 모델과 달리 우리는 집을 생성의 장소, 다른 생명체의 생성이, 특별히 우리의 생성 가능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장소로 상상할 수 있다.  다양한 범위의 공생적 관계와 상호 연결의 쾌락을 더해주는 거주지를 건설할 가능성을 상상해 보라.

육지의 야생 지역과 해양의 보호 지역이 생태 시스템과 종 보호에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간과 야생의 경계를 넘어 야생을 인간의 영역으로 초대하는 것도 또같이 중요하다. 64

 

 

2장 
포획에서 벗어나기: 퀴어 동물의 과학, 문화, 쾌락

동물학적 벽장의 인식론 

이성애 규범적 인식론
많은 사람들은 동물의 동성애 행위를 목격하면서도 자연 세계는 여지없이 이성애 세계라고 믿는다. 80

동물의 성적 다양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배적 사회 이론은 아직도 자연과 문화가 기본적으로 분리되었다고 가정하고, 퀴어 동물의 중요성을 최소 화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이 "자연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듯이, 많은 문화 비평가는 퀴어 동물을 문화적 영역으로부터 내쫓아버렸다.

 "인간 진화의 탁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섹슈얼리티를 생식과 어느 정도 분리했다는 점이다. 다른 유인원의 섹슈얼리티는 생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한다. 언어와 도구의 사용과 더불어 인간의 성취는 사실상 다른 종들도 비슷하게 성취했다는 증거가 나오는 것처럼, 동물도 [생식이 아닌 목적으로] 동성애를 한다는 증거들이 넘쳐난다. 81

문화적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물질적 실재와 행위능력을 밝혀내는 데 헌신하기 위해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도전적이다.(각주 37) 이를 위한 프로젝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분과적 장벽을 넘어서야만 수행가능하다. 


37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사회구성론을 종합하면서 동시에 인간 몸의 물질성, 인간 이상의 자연과 환경의 물질성에 생산적으로 참여하는 데 헌신하는 다양한 접근을 보려면 Material Feminisms에 수록된 글들을 참조바람, Sacy Alimo and Susan J. Hekman, "Introduction," in Material Feminisms, ed, Alaimo and Hekman (Bloomington: Inclana University Press, 2008), 1-22 같은 책에 수록된 Hekman의 글 "Constructing the Ballast: An Ontology for Feminism," 85- 119도 참조 바람

성적 지향이 얼마나 유전적 요인 탓인지는 동물의 성적 다양성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유전적 인간이 동물성과 동등하다고 가정하기보다는, 동물의 섹스를 문화적이고 물 질적으로 사유하고, 유전학을 유기체와 환경이 밀접하게 뒤엉키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사유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각주 41)


41 예를 들어 이블린 폭스 켈리 Evelyn Fox Keliere The Century of the Gene (Cambridge, Mav: 1

이성애 규범성과 과학적 환원론
자연/문화 대립  

자연과 문화가 학문 세계에서 분리된 것으로 취급되면서 동물 섹스는 기계적, 생식적 기능만으로 축소되고, 인간의 섹슈얼리티는~풍부하게 다양한 표현들~적어도 함축적으로 비인간 생명체의 짐승 같은 짝짓기 행위보다 인간을 우월하게 만드는 또 다른 성취가 된다. 퀴어 동물과 그들의 문화를 "자 연'이라는 벽장 속에 가둬버리기보다 우리는 대부분 종의 섹스가 물질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혼합이고, 모든 종류의 퀴어적 욕망은 무수한 자연·문화 들이 출현하는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정할 수 있다. (각주 49)


49 과학연구에서 신물질이나 '물질적 페미니즘'의 한 특징은 (얼라이모와 헤크만의 "서른" 참조) 물질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분과 학문을 초월하고 진보적인 잠재성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미라, 허드는 이를 <자연스러운 퀴어>에서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다. "정체된 것은 자연이고, 무한히 유연한 것이 문화라고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Hird, "Naturally Queer," Feminist Theory 5, no. 1 (2004): 88 참조. 러프가든도 이렇게 말한다. *생물학은 본질주의와 경직된 보편성을 조달하는 학문이 될 필요가 없다. 생물학은 우리의 잠재성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진화의 무지개), '길들여지지 않은 땅'에서 나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여성 작가들을 논의한다. 자연을 고정된 본질과 경직된 성적 차이, 이미 명백한 규범, 가치, 금지에 대한 근거로 보는 개념에 도전하는 작가 들을 다룬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몇몇 동물 문화 안에서 그 자체로 역동적인 힘일 수 있다. 사실 [인간] 문화"의 가장 현저한 특징 중 두 개 -도구 사용과 연어- 는 어떤 동물의 경우 성적 쾌락의 형태로 생겨났다. 배게밀은 수간 새비지 림보Susan Savage-Rumbaugh(영장류, 특히 보노보를 연구한 학자, 연주)가 1970년대부 터 시작한 연구에 기대고 있다. 배게밀은 보노보가 사용하는 "약 12개 정도의 손과 팔의 동작이 각각 특정한 의미를 지닌 '어휘들"이고, 이 어휘들의 목적은 "성적 행위를 유발하고 (동성 혹은 이성) 파트너와의 다양한 신제 자세 를 협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배게밀은 삽화에서 손동작을 그려 놓고, 이들 손동작을 "다가와" 혹은 "너의 성기를 이리저리 움직여 봐'와 같은 명령어로 번역한다." 배게밀은 인간을 포함한 유인원들 가운데, "성적 상호작용이 더욱 다양할 때 성적 소통 시스템은 더욱 정교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섹슈얼리티-특히 생식과 관련 없는 유연한 성적 행위-는 인간 언어의 기원과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배게밀은 결론 맺는다. 90

도구의 발전이 섹슈얼리티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은 대담하다. 배게밀은 많은 유인원이 자위를 돕기 위해 물건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물건을 제작하는 예들을 제시한다. 그는 "성적 쾌락의 추구가 영장류들 가운데 도구 사용 이 가장 다형적인 생물체인 인간의 유산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고 주장한다. 배게밀의 주장에 반박하기 힘들다. 그의 주장은 분명히 도구와 언어가 오로지 인간만의 배타적 전유물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기원"에 대 한 거대 서사를 전복시킨다. 그러나 비인간 생명체의 성행위가 중요한 이유 가 인간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보는 성행위의 선형적인 서사 속에서 단지 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배게밀의 주장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90

상당수 문화 비평가들은 동물의 섹스를 분리된 자연 영역으로 치부하는 반면에 퀴어 동물 섹스에 대한 많은 과학적 설명은 퀴어 동물의 섹스를 전적 으로 "문화적인 것으로, 따라서 성적이지 않다고 간주해왔다. 91

많은 동성애 성적 행위는 "사회적 성행위"로 해석되어 왔다. 즉 "외형적으로는 성적이지만, 적응이나 번식 전략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매개하기 위해서 이뤄진다는 뜻이다. 

"사회적·성적 패턴의 형태와 기능은 종 마다 다양하지만 중요한 점은 섹스와 통상 연관되는 모터 패턴은 종종 사회적 소통이라는 비성애적 영역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터 패턴이 섹스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는 "섹스"를 "사회적 소통"과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 위치시킨다. 이는 이성애든 동성애든 이상한 분리임에 틀림 없다." 베이시가 설명하듯이, 명백하게 "성적 욕구와 사회적 기능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능은 쾌락을 블랙박스에 넣어버리고 "사회적인 것을 추상적이고 탈신체화된 추론법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동성애 섹스를 벽장 속에 종종 가둬버린다. 92

메이시는 강력한 사례를 내세우면서 일본 암컷 마카크의 성적 행위는 실제로 성적이라고 주장한다.

" 지난 40년 간 암컷이 동성과 마운팅하고 구애하는 집단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이러한 행동이 사회성애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증명하는 연구는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모든 증거들은 암컷이 암컷에게 마운팅하고 구애하는 행위는 사회-성애적 행위가 아님을 보여 준다. 일본 암컷 마카크는 동성에게 마운팅하고 구애할 때 수컷 성적 파트 너를 유혹하거나, 동성 경쟁자의 생식을 훼방놓거나... 동맹을 형성하거나, 배우자 관계 밖에서 사회적 관계를 지속하고... 지배관계에 대해 소통하거나. 남의 새끼를 돌봐주기 위해서나, 초기 공격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이성애를 위해 미리 연습(암컷·수컷 마운팅)하거나, 혹은 갈등을 화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93

동물의 동성애를 섹스로 이해하려면 쾌락 이외의 다른 가능 성은 배제되어야 한다." 

주류 환경론자의 자연 개념과 동일하다. 
샌딜랜즈, 적극적으로 에로스를 배제하고 동시에 획일적인 이성애적이라고 비판한다. 

성애 공포
샌덜랜즈가 그레타 가드Greta Gaard의 연구에 기대어 설명하듯이, "성애 공포Erotophobia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규제와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이성애 규범은 특히 과학과 자연에 연결되면서 섹슈얼리티를 규제하고 도구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쾌락과 성취보다는 진리와 진화적 건강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퀴어 동물들은 "다형적인 섹슈얼리티와 다수의 자연"이 존재함을 입증함으로써 "생태적-성적 규범성에 의문을 던지도록 돕는다. 또한 퀴어 동물들은 특정한 존재론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 그 존재론 안에서는 쾌락과 에로티시즘이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도아니고 문화적 음모의 도구도 아니다. 이것은 안으로부터 출현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자연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창의적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쾌락은 캐런 버라드의 '수행성' 개념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버라드의 '수행성' 개념은 "물질적이고, 자연적이며, 포스트휴먼적"인데, 이는 "물질을 세계의 생성과 계속적인 '내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주체로서 여기며 그에게 합당한 자리를 부여한다.

동물의 섹스(그리고 젠더)가 페미니스트 이론 기반을 다층적으로 만들듯이, 동물의 습성들은 귀어이론과 게이문화에서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던 범주와 가정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다. 

"퀴어" 동물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퀴어"다. 그러나 퀴어의 어느 경우도 21세기 초반의 "게이"나 "레즈비언"의 범주와 일치 하지 않는다. 


러프가든은 대부분의 수컷 큰뿔양은 다른 수컷들과 항문으로 구애하고 섹스하는 "동성애 사회"에서 산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에서 오히려 비동성애 수컷이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동성애 행위에 참여하지 않 는 몇몇 수컷들은 나약한'effeminate수컷으로 규정된다... 그 수컷들은 다른 수 컷들과 어울리기보다 암양들과 함께 사는데, 그런 면에서 소위 '정상적 수컷 들과 다르다. 이런 수컷들은 암컷을 지배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덜 공격적이고, 암컷처럼 앉아서 오줌 누는 자세를 취한다. 이런 수컷들은 다른 수컷들이 마운팅하는 것을 거부한다."


" 동물 세계- 현재 여기 지구상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젠더 변이들이 넘쳐 나고 수많은 성적 가능성도 어른거린다. 예를 들면, 일부 도마뱀 종은 전체가 오로지 암컷만 있고, 암컷들이 서로 섹스하여 단성 생식한다. 다양한 젠더를 지닌 목도리 도요새 집단은 수컷 새 중에 네 개의 구분된 범주가 있는데, 그 들 중 일부가 서로 구애하고 짝짓기한다. 암컷 점박이하이에나들과 암컷 곰들의 경우 암컷끼리 교미하고 "수컷 남근"같이 생긴 클리토리스를 통해서 새끼를 낳는다. 수컷 아메리카레아 새는 "암컷 자궁"과 같은 남근을 (같은 종의 암컷처럼) 지니고 있어서 아버지 둘이 가족을 이뤄 새끼를 기른다. 산호초의 생생한 트랜스섹슈얼리티, 자웅 모자이크와 키메라의 놀라운 인터섹슈얼 리티도 있다. 인간은 "포스트모던" 패턴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탐색하면서, 성적 다양성과 젠더 다양성에서 우리보다 앞서 진화한 종들을 따라잡으려고 한다. 그런데 토착 문화는 오랫 동안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 98

일부 토속 문화는 훨씬 더 복잡한 성적 젠더 현상을 인정하고 심지어 존중해왔다. 

다른 한편, 경직된 범주는 서구 과학 이성을 위한 규범이 되어왔다. 그 경직된 범주는 길들이기, 관리, 손쉬운 사용을 선 호하는 경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킴 톨베어의 인용이 주목하는 바와 같 이, "과학의 권위와 경영적 접근이 부상하면서" "섹스와 자연 모두"를 궁극적 으로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격언대로 도구적 이성은 세상을 마법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그 안에 '철사로 만들어진 새장'iron Cage (푸코가 '차가운 괴물'이라고 부른 것)를 창조해 낸다. 

강제적인 탈마법화, 통치적 합리성, 지식의 유용성에만 한정

마법과 경이로움 

경이로운 깨달음의 순간에 [새로운] 인식론적 윤리적 이해가 시작된다. 갑자기 세상은 누군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퀴
어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랍게도 그것이 우리의 이해 범주와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달리 말해서 퀴어 동물에 대해 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피커링Pickering의 모델에서 과학이란 "인간과 물질의 행위능력들이 진화하는 영역인데, 이들은 서로 저항하고 수용하는 놀이에 참여하면서, 인간의 행위능력이 물질의 행위능력을 이해하려고 노력 한다. 역설적으로 과학 모델로 인하여 우리는 비인간 동물의 성적 다양성 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 설명이 (인간) 사회 의 구성체 그 이상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설 명은 또한 인간 지식이 자연 세계를 완전하게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함을 인 정하는 인식론적 윤리적 입장을 권장하고 있다."

퀴어 동물들은 완벽한 포획에서 벗어남으로써 이제 욕망, 행위능력, 상호 작용의 새로운 세계를 극화하고 있다. 이런 세계는 인간이 규정하는 세계의 배경이나 재료로써 결코 환원될 수 없다. 101

 "자연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다양한 성적 행위는 기절초풍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아 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배게밀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듀안 제프리Duane Jeffery는 이렇게 논평한다. "자연의 창조력은 자연의 창조물을 범주화하는 우리의 미약한 능력을 넘어선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자연의 완전한 창조력-풍성함-은 압도적이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비인간 동물의 양태를 깊이 생각할 때 느끼는 경이로움, 외경, 쾌락은 욕망과 성애의 정교한 창의성과 함께 고동친다. 이때 생성되는 환경론은 이미 현란하게 퀴어적일 것이다. 104


3장 
나체의 언어: 환경 시위에서 단어쓰기, 나체되기, 욕망하기

나체 시위로 획득하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운동가 들은 (여성) 살이 지닌 문화적 통화 가치를 단순히 이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말 그대로 정치적 주체가 물질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극화하는 것일까? 페미니즘 이론이 정말로 "지나친 장식으로 거추장스러웠다면 신체성과 수행성을 중심으로 변화함으로써 이런 실천, 경험, 이미지들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러한 시위들은 어떻게 인종성을 고려하는 몸의 정치학에 반응하고 연루되는 것일까?

나체 시위는 스테이시가 요청하는 "감각적 살"을 드러내면서 물질적 페미니즘의 발전과 동시에 급격히 퍼지고 있다. 

물질적 페미니즘은 담론 비평의 정치적 예리함을 지니면서도 언어와 텍스트의 범위에 있지 않은 것, 즉 인간 몸이나 비인간 자연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활짝 열고 있다.' 페미니즘 몸 이론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 그로츠,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 그리 고다른 이들의 작업은 몸의 물질성에 다시금 연결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몸 이론들은 인간이라는 경계 안에 머무는 반면에, 여기 고려된 나체 시위자들은 인간의 신체성을 실제 장소로 확장하면서 노출의 기술을 실천하고, 인간/동물/환경이 서로 동맹을 맺고, 함께 확장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를 극화한다. 

게일 웨이스Gail Weiss의 상호신체성 intercorporeality' 개념을 확장 하여 나는 "횡단 신체성"이란 용어를 제안한다. '횡단-신체성'이란 인간의 몸들이 서로 겹쳐있을 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이나 풍경들과도 서로 엉켜 있다는 의미다. 나체 시위가 인간의 신체성과 더불어 물질 세계와의 몰인간적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교환을 강조하면서 지배적 재현 방식과 젠더화된 가시성의 시나리오를 비판하거나, 전복하거나, 탈피하고 있는데, 페미니즘 수행 이론 특히 페기 펠런Peggy Phelan과 레베카 슈나이더 Rebecca Schneider의 이론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나아간다.

라 티그레사의 행위는 환경적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소유도 반대하는 반란을 행하는 것일까? 직접 행동으로 잘 알려진 급진적 환경론 단체인 '지구 먼저!」라는 그룹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라 티그레사의 시위를 즐기긴 해도, 그들은 그 시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위가 공연, 이미지, 구경거리, 기호임을 인정 해도, 노출된 살은 풍경, 지형, 환경적으로 훼손된 장소들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인식을 체현할 수도 있다. 114

 

 

 

4장 기후 시스템, 고탄소 남성성, 페미니스트 노출

이 장은 노출의 정치학이 반박하고논쟁하는 것들, 즉 고탄소 불투과성 공격적이고 소비적인 남성성, 또한 현실과 동떨어진 과학 비전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또한 노출의 정치학은 기후 변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반응 중 몇몇을 비판할 것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환경론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이론의 폭넓은 지형이 앞으로 나올 비판을 뛰 어넘기보다는 그 비판 안으로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나의 분석이 페미니스트 인식론,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물질적 페미니즘, 페미니즘 과학 연구, 퀴어이론, 환경 연구, 문화 연구에 기반을 두고 그들에게 빚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다. 1

남성적 소비주의가 남긴 탄소 발자국

과잉 남성성 + 소비주의
레이건, 부시, 트럼프
. 롤링코울, 
     백인 노동자계급, 소비주의, 기후위기 부정
. 아브 그레이브 교도소 죄수 학대 사건, 
     이라크 전쟁, 군사화된 남성적 미학, 
    인종화된 타자, 
    동성애 국가주의 
    팔루스를 취하는 여성의 퀴어적 실천은 남성적이고 이성애 규범적 민족주의를 중진시키는데 한 몫할 뿐이다. 155

기후변화에 대한 메타-과학과 "관점 없는 관점"

패권적 남성성과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재현
과학적 객관성 
전문가의 관점
미국의 공식 재현, 미국 환경보호청
지구 환경이 처한 위기를 일축하거나 부정함.

모든 책임, 모든 가치, 모든 위험이 마술처럼 사라져버리는 상태, 무관심을 조장한다. 
로버트 프록터, "무지의 사회적 구성체"
. 무지와 불확실성은 조작되고, 유지되고, 유포될 수 있다. 158

신의 관점
. 과학이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 너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과정 너머에 부유한다. 
정제된 중립성

이 시스템의 시스템의 수사학은 "과학의 통일성" 이라는 이상에 대한 한 예를 제시하는데,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바로 이 이상이 근대 과학의 정치적 무의식 안에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자연에 대해 하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과학만이 존재한다는 근대 과학의 주장은 오로지 하나의 독특한 보편적인 인간 계층-어떤 독특한 인간 그룹- 이 존재하고, 그들에게만 세상에 대한 진리가 명확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와 포스트식민주의 사상가들이 지적하듯이, 이는 대다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가정은 아니다." 162


여성의 취약성, 자연을 지배하기

취약성
학자들과 국제 여성 기구들이 기후 변화에 여성들 이 더욱 취약하다고 주장하지만, 여성의 취약함에 대한 강조는 다음과 같이 불리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1) 여성의 신체적 취약성을 과학적(혹은 남성적) 불투과성과 대립적 입장에 놓는 젠더화된 존재론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2) 자연을 단순히 자원으로 보는 모델을 부추길 수 있다. 
(3) 젠더와 성적 다양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젠더 이원론을 강화하거나 심지어 본질화 할 수 있다. 

《여성의 남성성》에서 할버스템은 "여성의 이성애와 종종 연결되는 너무나 전통적인 여성성은 종종 당신의 건강에 나쁠 수 있다"고 말한다. 할버스템은 여성성과 연결된 "수동성과 무기 력"이 "거식증에서 시작하여 하이힐 구두에 이르기까지 건강하지 못한 몸을 조작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여성의 남성성을 옹호하는 주장은 기후 변화 재앙의 시나리오의 한복판에서 훨씬 더 많은 힘을 발휘한다. 164

살아있는 존재들과 생태 시스템을 무기력한 자원으로 표현하는 것은 착취하는 식민주의 시스템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165

뤼스 이리가레가 설명했던 대로 "여성"은 남성적 지배 주체성이 잘 다져놓은 길을 따라 정치적 행위능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연은 여성의 행위능력과 주체성이 출현하는 배경으로만 기여한다. 166

자연=식물, 동물, 서식지, 생태시스템으로 상호 연결되어 역동적이며 창발적인 세계다. 


주류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 규범성
위 경직되고 본질화된 개념뿐만 아니라 켄더화된 이성에 규범성과 동방해 공포증을 주류화하고 있다. 다양하고, 다수의 (2장에서 브루스 베게밀의 용 으로 다시 돌아가면 풍성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세계에서 남녀 이원론을 급속한 변동 심지어 재앙 수준의 기후 변동에 대처하는 저항이 될 수 없다. 그이다-가정, 가족, 남녀를 보완적 존재로 호소하는 곳에도 안전한 피난 처는 없다.

지구의 기후 변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대응은 짐짓 보편적 관점을 주장 하는 듯한 주류 과학과 불투과성 공격적 소비주의라는 패권적 남성성에 도 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 규범성을 강화하는 성향에도 도전해야 한다. 나는 환경 단체, 페미니스트 단체, 퀴어 운동가, 녹색 소비자 들, 기후와 기후 정의 시위자들과 보통의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지식과 정치 적 참여 형태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창발하는 세계의 안위가듯이, "놀랍도록 정밀한 범주를 만드는 인간의 잠재력은 다수의 영역에서 발휘되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젠더에 관한 한 빈곤한 범주에 머물러 있는 것 일까?... 중요한 점은 젠더의 다양성을 탈병리화할 수 있는 많은 방식이 있고, 우리가 이미 생산하고 유지하는 다양한 젠더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방식 이 있다는 것이다." 168

기후 변화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날씨 재앙이 발생하고, 이미 유형화된 이주가 혼돈에 빠지고,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다른 극적이고 미묘한 변화가 야기될 때 우리는 안정된 이성애 규범적 젠더 이분법 안에 모종의 존재론적 피난처를 찿고 있을 수 없다. 

다양하고, 다수의 (2장에서 브루스 베게밀의 용어로 다시 돌아가면) 풍성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세계에서 남녀 이원론을 급속한 변동 심지어 재앙 수준의 기후 변동에 대처하는 저항이 될 수 없다. 그 어디-가정, 가족, 남녀를 보완적 존재로 호소하는 곳-에도 안전한 피난 처는 없다.

지구의 기후 변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대응은 짐짓 보편적 관점을 주장하는 듯한 주류 과학과 불투과성 공격적 소비주의라는 패권적 남성성에 도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 규범성을 강화하는 성향에도 도전해야 한다. 나는 환경 단체, 페미니스트 단체, 퀴어 운동가, 녹색 소비자들, 기후와 기후 정의 시위자들과 보통의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지식과 정치적 참여 형태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창발하는 세계의 안-위가아니라-에서 기후 변화와 싸우는 일상의 실천을 만들어내고 변화시키기를 희망한다. 170


젠더 이분법을 고착시키지 않는 대신에 생물학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우리는 모두 횡단·신체적 상호교환, 과정, 흐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저항적 취약성과 노출의 정치학 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항과 돌봄, 
시위와 쾌락 170


5장 인류의 해양 기원설, 플라스틱 액티비즘, 바다의 신물질론 

롱라인 어업이든, 트롤링이든, 거대한 어망이든지 간에, 산업적인 어업은 포획물 대부분을 "잡어 "bycatch로 취급하여 파괴해버린다. 살아 있는 생물들이 생명을 잃은 쓰레기로 버려진다.' 조너선 새프런 포Jonathan Safran Foer 는 자신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서 "스시 한 접시 대접받는 것"을 상상 해보라고 도전한다. "이 접시는 당신이 먹는 스시 한 접시를 위해서 죽임을 당한 동물 모두를 담고 있다. 그 접시는 지름이 5피트(1.5미터)는 되어야 할 것이다." 175


바다의 횡단-신체성?

물질적 자아는 경제, 정치, 문화, 과학, 실체적 인 것들이 동시에 작용하는 네트위크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한때 경계로 구획된 것처럼 보였던 인간 주체가 소용돌이치는 불확실성의 풍경으로 휘말려 들게 된다. 그 곳에서는 과거엔 조금도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 가 아니었던 실천과 행위들이 갑자기 윤리적, 정치적 문제가 된다.

횡단 신체성이란 인간이 물질의 흐름과 더불어 환경의 행위능력에 영원히 상호 연결된존재라는 신물질론적이고 포스트휴먼적 감각을 말한다. 

활동가뿐만 아니라 환경, 환경 보건, 환경 정의, 기후 변화 운동을 날마다 실천하는 사람들은 지역, 환경, 동물의 몸, 인간의 몸을 횡단하는 물질적 행위능력의 흐름을 드러내고 재형성하려고 한다. 심지어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의료 산업복합체는 개별 소비자들이 견고한 경계로 구획된 존재이며 생산품도 분리되고 무해한 존재라는 편리한 이데올로기를 거듭 주장하고 있다. 175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써 횡단 신체성은 세상의 생명체, 물질, 힘 사이에 물질적 내부/상호 간intra/inter 연결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예외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모든 종들이 특정 장소와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추적해내기 힘든 더 큰 흐름 속에서 서로 얽혀있음을 인식한다.  



이 책(당신안의 물고기)은 무엇보다 인식론적 결점이 있다. 즉 이 책은 과학자가 지식의 주체이고, 나머지는 지식의 불활성적 객체로 축소시키는 과학적 객관성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이 개념은 이미 많이 비판받고 있다. 

이 책이 말하는바, 물고기의 수족관으로 가득한 몸은 실제로 거주하는 몸이 아니다. 이 몸은 경험이 매개하지 않는, 과학적 기원 이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몸이다.(각주 46)

각주 46
(이 점과 관련해서 풍부하고 다양한 문헌이 페미니즘 이론, 장애 연구, 환경 연구, 퀴어 이론, 또 신체적 행위능력이 다른 물질적 세계력과 문화적 시스템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추적하는 다른 영역들, 가장 현저하게 물질적 페미니즘과 다른 신물질론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책 《몸적 자연》은 다수 화학 물질에 민감한 사람들을 핵심적인 횡단 신체적 주체로 제시한다. 그들은 몸이 체감하는 비정상적 물질의 행위능력을 상대해야 한다)

과학적 인간 이성은 "우리의 우주를 설명하고 설명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그 이성은 인간 내부 물고기와 수족관인 몸, 지금 이 순간 물질 세계의 흐름과 교환의 일부인 몸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논쟁할 수도 있겠지만 다윈이 과학적/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조하는 반면에, 슈빈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예외주의와 봉쇄라는 훨씬 더 인본주의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다윈의 포스트휴머니즘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견 고한 구분이 없으며, 인간은 자연/문화세계와 동일하게 생성한다. 189

바다의 횡단신체성이 존재의 윤리적 양태가 되려면, 물질적 자아는 진화적 계보학이 완성된 자기충족적 산물일 필요가 없고, 오히려 체현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세계 생성의 일부로써 수행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험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횡단 신체성을 알고 실천하려면 평범한 시민도 과학 정보에 접근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윤리적 실천으로써 횡단 신체성은 시민들이 자신의 건강에 위험한 정보-믿을 만하고 활용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할지 모르겠지만-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몸적 존재-음식, 연료, 특정 제품의 소비-가 다른 사람들, 다른 동물들, 서식지, 생태 시스템에 어떤 영향 을 끼치는가에 대한 정보도 찾아낼 수 있어야 가능하다. 197

 



6장 산성에 담긴 당신의 껍질

추상적 세력


디메쉬 차크라바티 Dipesh Chakrabarty 의 획기적 논문인 '역사의 기후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 중 몇몇은 인간의 종적 정체성, 물질성, 행위능력과 같은 개념과 관련된다. 그 논문에서 차크라바티의 첫 번째 주제는 "인간이 기후 변화에 책임이 있다는 설명은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따로 보는 오래된 인본 주의적 구분이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차크라바티는 이렇게 인본주의적 구분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은 유보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물질성은 우리의 거대한 지질학 적 변동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227

오로지 바위에만 전념한다면 인류세의 전 지구적 생물학, 화학, 지구물리학적 내부 작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리와 통제라는 환상을 불러올 뿐이다. 

그러나 차크라바티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 종속시킨다. 그 패러다임에서 인간은 지질학적 세력이 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제는 더 이상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연과 상호 작용해왔고, 이는 적어도 대부분의 서구 전통에서 인간을 상상하던 방식이다. 이제는 인간이 지질학적 의미에서 자연의 세력a force of nature이다. 인간이 "지질학적 의미에서 자연의 세력"이 되었다는 차크라바티의 말은 인간이 "자연과 하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력"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하면 인간은 탈신체화된 세력이 되어 변화하는 자연의 바깥에 서게 된다. 인간을 "세력"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이상하게도 비물질적인 것이 되어서 살의 급진적 위험성, 불확실성, 취약성이 사라져버린다. 또한 인간의 종적 정체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물질성은 난국을 초래한다.

차크라바티의 네 번째 주제도 결국 난국에 봉착한다. 네 번째 주제 제목은 "종의 역사'와 '자본의 역사'가 교차 부화cross-hatching하는 것은 역사 이해의 한 계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차크라바티는 가다머Gadamer에 기대어 "역사 의식" 을 "자신에 대해 아는 것"으로 보고, 이를 "종으로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 즉 그가 스스로 불가능한 성취라고 주장하는 것과 대조시킨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때 '우리'란 누구인가? 우리 인간은 자신을 결코 하나의 종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 종의 존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거나 유추할 수 있을 뿐, 그것을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종으로서 우리의 현상학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인류와 같은 단어와 감정적으로는 동일시할지 몰라도, 종이 무엇인 지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의 역사에서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단지 종개념의 한 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개 넘이 되는 것은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질문을 좀 간접적으로 제기해 보려 한다. 가다머를 떠나 틀을 확대 하여 종 존재에 대한 다양한 종류의 이론과 관점을 고려해 보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진행 중이고 아래에서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반면 인간이 자신을 종으로써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틀렸다. 토착민들이 자신의 문화와 전통적인 생태적 지식 안에서 다수의 종이 사는 세계에서 인 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으리라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 모두는 대체로 앎과 존재의 정치화된 형태의 개념이지, "순수하거나 추상적인 종 의식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로리
로완Ray Rowan은 이를 멋지게 표현한다. "인간anthropos은 선·구성된 정체성 이기보다는 지구에서 미래 인간 존재의 용어를 정의하려고 투쟁할 때 정치적인 논쟁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완의 "인간"은 정치적 투쟁 지형 안에서의 개념으로써 그 개념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 즉 과학, 역사, 문화 정체성, 정치학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공간에 위치한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이는 지엽적 정체성이나 문화 개념들과 분리되기보다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다. 

인간anthropos은 전체적으로 지엽적 맥락을 흐리는 이미지를 떠올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승고한 자본주의적 인본주의와는 꽤 다른 종적 정체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인 간anthropos은 이 종에 속하는 모든 개체가 긴 진화 과정의 일부이고, 지구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으며, 특정한 지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매트릭스에 서 분화된 환경적 취약성, 과실, 책임을 지니는 거주자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차크라바티의 주장 중에서 가장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을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정의함으로써-이에 대해 아래 더 설명하듯이-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다는 사실이다. 이안 바우콤tan Baucom은 차크라바티가 "상당히 놀랍게도 종 개념에 관심을 돌리는 것'에 주목한다. 차크라바티의 종개념은 "전체 생물학에서 인간 삶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사유이며, 선행 역사철학이나 가야트리 스피박이 포스트식민 이성의 실천이라고 부른 것 양쪽 모두에 명백하게 대립되는 보편주의적 종 개념이다." 

바우콤은 또 "현재와 미래 다가올 기후 변화 재앙에 직면하여 자유는 더 이상 전 지구화하는 동일성의 힘에 대항하는 차이의 자유일 수 없다"고 덧붙인다. 거대한 지구 환경 위기가 다른 모든 차이를 없애는 집단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 바우콤은 문제의 핵심을 포착한다. 233

그런데 일반적인 "우리"는 노출과 책임의 차이를 은폐하는 생명 정치학을 합법화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과학 담론은 막연한 "객관성"을 통해서만 합법성을 얻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단어는 과학적 중립성으로 인하여 대중화되면서, 이 단어가 갖는 정치적 계보학, 특수성, 정체성과의 연관성은 지워진다. 위에서 논의한 인류세에 대한 시각적 묘사는 규모를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실제 빈곤, 가뭄, 홍수나 이동은 보이지 않고, 관객은 연루되지 않으며, 누구도 기후 재앙이나 더디게 다가오는 폭력에 잠 재적으로 영향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33

사실상 인간이 행위는 해도 행위를 당하지 않는 추상적 세력이라고 사유하는 것을 멈추고, 인간에 대한 횡단신체적 개념, 즉 서로 다른 규모와 종류의 생물학적,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을 통해서 항상 생성되고 뒤엉키는 것으로 인간 개념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런 종류의 인간 -항상 물질적이고 항상 세상의 물질인 인간은 사회 정의와 환경 실천을 위한 장소가 된다. 236
 
횡단 신체적 주체는 신체와 장소를 가로지르는 통제 불능의 물질을 구별해내고, 추적하고, 극복하는 시민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환경 보건과 환경 정의 운동으로부터 출현한다. 주체는 늘 위험에 노출되고 뒤엉켜있는 세상의 행위능력에 종속된 물질적 존재인데, 이런 인식은 환경론적 포스트휴머니즘을 만들어내고, 몸이면서 마음인 우리는 순환하는 요소, 물질, 세력과 떼려야 멜 수없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론다 즈윌링어 Rhonda Zwillinger의 사진집인 《빼앗긴 자들》은 인류세의 횡단-신체적 거주를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즈월링어는 다중 화학적 민감성MCS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독성이 덜한 삶의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지 기록하면서 사물, 가정, 사막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위협적이고 소비주의적 풍경 안에 인간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진에서는 한 여성이 간이 창고 아래 앉아 있는데, 집안에 있음직한 물건들 침대, 컴퓨터 등등-이 실내도 실외도 아닌 하이브리드 공간에 어지럽게 흩어진 채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말 인간의 거 주지에서 일상적인 물건들은 다양한 화학 물질에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하게 해로운 행위능력을 지니고 사람에게 침투하여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친다. 즈윌링어의 사진들은 인류세의 규모 변화를 친밀하고, 손에 잡히는 일상적 -철학적으로 추상적이기보다-경험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사진들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공산품의 생산, 소비자 사용과 폐기라는 유해 네크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상하도록 요청한다. 그 사진들 은 인간을 현장으로부터 제거하기보다는 신체와 장소를 관통하여 횡단하는 물질적 행위능력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호 작용하는 흔적을 추적해 보라고 관객에게 요구한다. 242

즈윌링어는 유독한 인류세를 일삼적이면서도 불갈한 형태로 그린다. 242

 "The Dispossessed" by Rhonda Zwillinger.


산성에 잠긴 당신의 껍질: 인류세가 녹다

인류세에서 바다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해양의 
생태 시스템이 심각하게 위험에 처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바다의 공시적 깊이와 넓이가 인류세의 통시적 규모에 맞먹는 일종의 무한한 거대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주 60)

(각주
60 인류세 바다를 표현하는 비유를 보려면 드라우리의 "Ordinary Futures'를 참고, 그 글은 뉴질랜드 마오리 작가인 리 흄Ken Hulm의 사변 소설을 심해 바닥 광산의 관점으로 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휴의 해양적 상상체를
Foreshore와 "Seabed Act'가 주장하는 국가적 관점을 불안하게 만드는 문화적 정치학과 연관하여 읽어야 한다. 흄은
바다에 가라 앉았다가 떠오르는 평범한 행위를 통해서 바다와의 관계를 서사적으로 상상한다. 그의 서사는 인류세에서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에 대한 상호종적 해석학이다." (367))

한때 심해는 육생의 시간이 남긴 "살아있는 화석"을 보유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상 심해는 춥고, 어둡고, 무거운 물 안에서 육상보다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바다 생물의 서식처다. 특히 "신과 같은 조망적 시야" God's-eye view를 당연시하는 평평한 지구 지도 형태는 바다의 깊이를 표현해낼 수 없다.

우주로부터 지구를 보면 그저 바다의 표면만 드러난다. 3차원의 깊고 깊은 바다를 고려한다면 이 거대한 2차원 수평의 공간은 전 적으로 무시할 만하다. 누군가 바다를 이해하려면, 바다를 초월하기보다 바다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지식, 과학, 경제, 그리고 권력이 뒤엉켜있음 을 보여주는 고도로 매개된 환경 속으로 깊이 침잠해야 한다. 인간이 지구 행성이라는 지구물리학적 땅덩어리를 변질시키는 것을 장관Spectacle으로 묘사 할 수 있겠지만, 대기의 이산화탄소 함유 수준처럼 바다 온도의 상승과 산성화는 이미지로 직접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포착하고 창의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녹아 내리는 껍질을 아름답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은 인류세를 표현하고, 또 미세하지만 생명체에게 확실한 위협이 되는 알카리도의 변화를 묘사하 는 문화적 작업을 수행한다. 인류세의 집단 주체는 안전하게 추출된 세력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일지라도 산성에 잠겨있는 당신의 껍질을 상상하라는 요 청은 살을 지닌 포스트휴먼의 취약성을 환기하면서,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도 환경과 분리된 상태에서 존재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만든다. 연약한 껍질이 녹아내리는 작은 생명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의 일부여도 그들은 친밀감, 불잡아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녹아 내리는 장면은 사유 의 규모를 작은 생명체로부터 거대한 바다로 전환하는 참여와 활동을 요구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에서 죽음을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개념으로 상상해 보라고 도전한다. 즉 "친숙함에서 벗어나는 실험은 공허에 대한 공포에 대항하고, 우리 눈 앞에 매달려 있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비 인간nonhuman 의식 풍경에 대한 무지함을 인정하면서, 무한으로 생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초월이 아니라, "경험의 근본적 내재성"radical emplical imminence을 주장하면서 "우리 인간이 진실로 열망하는 것은 우리자신이 사라지되 생성의 흐름으로 합쳐지는 것이고, 그 전제는 진정 상실되고 사라지고 붕괴되는 것이 원자화된 개별 자아라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용해를 상상하는 것은 내재적, 몰인간inhuman, 혹은 포스트휴먼 실천이다. 254

당신의 껍질이 산성에 잠겨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기본적으로 외부화된 실체이며 인간 소비를 위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주체 를 녹여버릴 것이다. 껍질이 산성에 잠겨있다는 생각은 용해 속에서 거주하 는 것이며, 위험한 쾌락, 인간의 역설적이고 에코델릭한 확장과 용해, 취약한 생명체, 바다의 몰인간적inhuman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함으로 뻗어 연결하는 미학적 자극 속에 거주하는 것이다. 이는 또 자신을 정치적 행동에 노출하는 것이며, 특히 페미니즘의 윤리적 정치적 참여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255



결론 세상에 속한 물질로서 생각하기


그래서 노출은 계층이나 인종과 같은 사회적 물리적 분류에 따라, 또 북반 하남반구의 격차에 따라 들쑥날쑥 몹시 다르다. 이 책은 주로 노출의 물성적인 차원을 강조했지만,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분류에 따라 신제를 다르 위치시키고 다른 물질적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페미니스트, LGBTQ 사람들, 유색인, 장애인,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신체적 과정, 육상, 지향, 피해가 사회적 카테고리, 규범, 담론에 따라 얼마나 일치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를 잘 생각해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 인식론적 정치 과정이 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것이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엘리 클레어요는 자연 세계, 장애, 치료의 정치학에 대한 사유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자연 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용이들을 '초 원 회복 프로젝트' 안에서 언급하며 이렇게 쓴다.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이 라는 단어들이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늘 나를 괴롭힌다고 말하는 것은 과 장이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단어들은 나를 주먹으로 연타한다. 281


안정된 생태계와 자연적인 젠더로 돌아가는 복원의 이상은 폴 비아트리즈 프레시아도Paul Beatriz Preciado의 작업 안에서는 성취 불가능하다. 프레시아 도는 그의 책 『테스토에 심취한 자들: 약제 포르노 시대의 섹스, 마약, 생명 정치학에서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정치적 행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젠더, 섹스, 몸, 마음을 변형하는 일에 참여한다. 


누군가의 몸을 생명정치적 시스템과 생화학적 과정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분석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창조하고, 저항하고, 변형한다는 것은 몸을 바로 이 세상 예속한 물질로써 생각함을 의미한다.

이바 헤이워드Eva Hayward의 탁월한 작업은 노출의 정치학으로써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의 오랜 역사가 어떻게 새롭게 변형된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캐리 울프Cary Wolfe가 '포스트휴머니즘은 무엇 인가?에서 "포스트휴머니스트가 되려면 생각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의 강력한 도전에 내가 보기엔 헤이워드의 작업이 잘 대응하고 있다. 헤이워드는 자신의 글 "불가사리가 주는 더 많은 교훈"에서 트랜스섹슈얼리티에 대해 쓴다. 트랜스섹슈얼리티가 불가사리와 "공유하는 존재론'을 지니 며, "상호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몸의 모양이 변화하는 것을 동물의 모양 변화로 견주어 볼 수 있다. 만일 우 리가 '자르기'cut를 사랑의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면, "불가사리처럼"이란 말은 종을 넘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하는 행위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트랜스섹슈얼하면서 불가사리인 우리는 살아있는 신체다. 우리의 신체는 다른 살아있는 신체와의 만남을 통해서 경험하고 안다. 이러한 인식론은 현상학적으로 존재를 공유하고 있음을 기술해준다. 몸들 사이에 상호신체적 영역들이 언어로 또 경험적으로 읽힌다. 이 얽힘은 오감으로도 지각 가 능하다. 불가사리와 트랜스섹슈얼은 기호적 의미의 세계성worldhood과 현상학적 재현으로서의 세계성 모두를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모종의 상호신체성 intercorporeality이 아닌가?"

헤이워드는 자신의 몸이 건너편 불가사리로 재생했다고 생각한다. 캐리 올 프가 표현하듯이 이는 "앎의 주체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재구성한다. 왜냐하면 불가사리와 인간 자아는 일종의 상호신체성을 통해서 서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생생하고 놀라운 포스트휴먼적 표현이다. 불가사리와 공유하는 존재는 "종을 넘어 분화하는 transspeciated 자아", 즉 다른 종 과의 만남을 통해서 존재하고 알게 되는 자아에서 절정에 이른다. 헤이워드 는 자신의 방법을 "개인적인 설명이기보다는 결정적 얽힘 critical enmeshment" 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존재의 물질, 말 그대로 실제 물질이 인류가 우 려하는 산성액 속에서는 분해될 수 없는 구성적 세력으로써 계속 떠오른다" 고 말한다. 헤이워드의 작업은 신물질적 사유가 젠더, 섹슈얼리티, 노출에 대한 다른 구체적 지식과 실천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시해 준다. 또 신물질론을 다수의 생명체와 함께 생각하면 이론이 얼마나 더 풍 성해지는지, 신물질론, 포스트휴머니즘, 동물 연구들 사이에 얼마나 유익한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예시해준다. 헤이워드의 작업은 추론적이고, 창의적이고, 대담하지만 그저 단순히 존재를 상상하기보다 불가사리에 대한 과학적 사실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헤크만은 공개 disclosure 개념이 "재현"과 상대주의의 "문제를 피하고", 앤드류 피커링의 난 도질과 같은 모델을 제시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런 모델은 "다양한 요소가 상 호 작용하거나 내부적으로 작용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 도록 돕는다. 그 실재는 공유되지만, 동물 연구 분야의 주장에 따르면, 특징 좋은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한다. 예를 들어 헤이워드는 낙 피 동물들이 분명한 감각 수용체가 없는데도 어떻게 촉각, 빛, 온도, 방향, 물 의 상태에 민감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즉,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시각 촉각 을 감지하는 장치다."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