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장 아메리
목차
초판 서문―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
4판 서문―늙어감, 그 지속의 현상
살아 있음과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절없이 흘러버린 세월
시간,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
측량할 길 없는 시간의 상대성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시간의 무게와 죽음
다시는 오지 않으리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있다
낯설어 보이는 자기 자신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나
노화, 세계의 상실 또는 감옥이 된 몸
나는 누구이며, 내가 아닌 나는 또 누구인가
낮과 밤이 여명 속에서 맞물리듯이
타인의 시선
사회적 연령,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
소유냐 존재냐
저항과 체념의 모순에 직면하기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세상으로부터의 소외
문화적 노화
세상 이해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그 모순에 저항하기
죽어가며 살아가기
죽어감조차 평등하지 않다
죽음의 기이한 불가사의
죽음의 부조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보다 죽어간다는 게 두렵다
죽음과의 타협
위로가 아닌 진실을
옮긴이의 말―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찾아보기
살아 있음과 덧 없이 흐르는 시간
시간,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허무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이 둘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시간은 언제나 우리 시간, '살아낸 시간'일 따름이다. 23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저 새 모양의 얼굴을 한 날카로운 지성의 영국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경로를 통해, 마찬가지로 뼈아픈 역설을 확인할 뿐일까? 시간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공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듯, 우리는 시간을 우리 자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없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다. 물론 시간은 그 누구도 완전히 풀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시간을 손아 귀에 움켜쥐듯 잡아볼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A 처럼 게르망트의 대저택에서 작가의 환상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되찾은 시간' temps retrouvé으로 기억하며 천천히 음미하는 가운데 우리는 영원의 차원으로 올라선다. 33
오히려 시간은 이른바 지향성의 장이다.
현재를 말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일련의 자료를 가지고 어떤 시스템, 곧 장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한다. 35
그러니까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에는 미래와 과거를 포괄하는 시간 장이 성립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것은, 세계 안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전혀 개인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기까지는! 물론 이 순간을 맞아 우리는 "아, 슬프구나. 나의 세월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며 안타까워한다. 사라졌음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음을 자각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의 A는 길가에 주저앉아 시간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의아한 마음으로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돌연 시간은 선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설명 방법은 장을 동원하는 것뿐이다. 과거는 저만치 있으며,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그 시간 성격을 잃어버린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에 집어 삼켜지며, 미래 역시 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파악하는 사람은 오로지 늙어가는 노인뿐이다. 노인은 자신에게 더는 많은 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노인은, 다만 유보하는 심정으로 작별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세월이 지나거든 다시 만나세" 노인은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자신이 시간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노인은 이제 더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37
우리 몸과 통계가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로 시간을 얼마 남 겨두지 않았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이 우리 안에 쌓여 있다. 게르망트 가문의 왕자와 다르장쿠르 씨는 외모는 거의 그대로여서 A가 그들을 알아보는 게 힘들지는 않 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늙었다. 그들 안에서 커다란 짐이 되어 짓누르는 시간 때문에 늙었다. 젊은이가 시간이라고 믿는 것은 장차 그에게 다가올 것,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할 때 정당하게 주어질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기대함으로 의식된다. 젊은이에게 시간은 당연히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젊은이의 인생으로, 그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것이다. 젊은 사람을 두고 '그가 시간을 앞에 두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에게는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고 말하기를 즐겨하는 게 그 대표적인 특성이다. 노인 혹은 늙어가는 이는 그러나 미래를 매일같이 공간의 부정으로 경험하고, 이로써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부정으로 경험한다.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세계이자 공간이라고 우리는 말하곤 한다. 이런 사정을 일상의 많은 시 간에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젊은이는 초조하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뭔가 격렬한 흥분을 일으키는 일 을 기다리는 게 젊은이로 하여금 이리저리 기웃거리게 만든다. 자리에서 일어난 젊은이는 불안하게 이리저리 맴돌며 집을 나가 사건을, 공간이자 세계의 사건을 단 한 조각이라도 차지하려 떠돈다. 그는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시간, 본래는 시공간을 따라다닌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거나, 고작해야 중 요하지 않은 일만 예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과거로, 과거의 그 깊은 우물로 빠져들어 그 안에서 침묵한다. 스스로 무너져버 린 것처럼 침상 위에서 태아의 자세를 취하며 눈을 감는다. 인생이 었던 것, 세계였던 것, 공간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저 시간일 뿐임을 깨닫고 헛된 자기연민으로 안타까워하면서 시간의 흔적을 찾으려고 눈을 감는다.
늙었다는 것 혹은 늙어간다는 것을 감지한다는 말은 요컨대 몸, 그리고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 안에서 시간의 무게를 느낀 다는 뜻이다. 젊다는 것은 몸을 시간에로, 원래는 시간이 아닌 인생이자 세계이자 공간인 것에로 던진다는 뜻이다.
A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강의 좌안을 달리며 세계를 향해 나를 던진 게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다. 고작 20년 남짓된 일이다. 나는 이 20년이라는 세월을 심장이 놀라 죽을 것 만 같은 방식으로 짧게 느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드러난 이마의 주름살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름을 통해, 그 주름과 더불어 살아서 돌이킬 수 없는 지난 20년 세월의 전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다시 20년 뒤에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얼마 안 되는 세상을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앞에 두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언제 공간으로 나아갈지 결정할 줄 안 다. 말하자면 자신을 외화外化(Er-äußern) 한다고, 바깥으로 드러 낸다고나 할까. 인생을 자신 안에, 그러니까 진정한 시간을 자 신안에 가진 사람은 기억함이라는 내화內化(Er-innern)의 기만적 마력을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맛보았다.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 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Erinnern한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그를 공간에서 통째로 들어내리라. 그 자신과 그의 몸에서 남는 것을 탈공간화하면서, 그에게서 세상과 인생을 앗아가리라. 그에게서, 세계에 있는 그의 공간을 빼앗으리라. 바로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은 다만 시 간일 뿐이다. 그러니까 노인은 전적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자, 시간의 소유자이며, 시간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39
그러나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닐까? 시간은 죽음을 재깍거리며 알려주면서 그 순전한 시간성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격적인 차원은 시간으로서의 미래가 아닐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물음의 답으로 제시된 이런 긍정과 부정의 혼재에서 부정은 긍정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 그래서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의미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그 어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무엇이 출현할 미래가 나의 기다리는 시간을 채워준다. 이를테면 청년은 자신이 사랑할 처녀를 기다린다. 간절히 보고 싶은 풍경을 기다리며, 자신의 것으로 자랑스레 선보일 작품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의 목표가 죽음이라면, 그래서 나이를 먹어 가는 사람에게 이 죽음이 매일 더욱더 현실의 무게를 얻어 기다림의 다른 보상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경우에는, 미래를 향한 시간이라는 말을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죽음은 그 어떤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는 모든 실체성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다.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죽음에 다가가는 게 아니다. 죽음은 한마디로 무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시간 차원으로서의 미래를 우리에게 구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거꾸로다. 죽음의 총체적 부정성, 그 완벽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와해로 그 어떤 미래의 의미도 부정한다. 그렇다. 죽음은 완전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와해를 의미한다. (그저 무無일 뿐인 죽음의 의미를 말하는 데는 조건이 붙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한해서다.) 죽음은 큰 낫을 치켜들고 다른 손에는 모래시계를 든 사신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는다. 대체 어디로 데리고 간다
는 말인가? 죽음은 나의 탈공간화라는 모순된 사건에서, 말 그 대로의 의미로 '나의 파괴'다. 41
다시는 오지 않으리
자신이 그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노인 그래서 곧 공간으로부터 물러나게 될 나이 먹어가는 사람에게는 많은 기만적 위로가 주어진다. 가장 크고 최고로 우롱을 일삼는 환상은 물론 종교이지만, 그 밖에도 기만적 위로는 많기만 하다. A. 곧 프루스트는 천식을 앓아 괴로웠던 시절 틈새란 틈새는 모두 막아버린 방 안에서 민 수건으로 코와 입을 들어막은 채 침상에 누워 그동안 취재한 자료 recherche 를 가지고 원고를 끼적이다가, 기억 속에서 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을 빚어내는 동시에 기억과 더불어 일종의 시간 초월성, 이를 테면 영원성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위대한 작품의 탄생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은 고통의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42
인간의 정확한 현실에, 진리가 아닌 민낯 그대로의 현실에 근접하는 사실은, 시간과 그 되돌릴 수 없음을 나이 먹어가면 서야 비로소 완전히 실감한다는 점이다. 말년의 노인이 시간을 되돌렸으면 하고 간절하고도 무망하게 품는 소망이 그 증명이 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로 되돌리고, 일어나지 않은 게 지 금의 현실이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A는 후회와 회한으로 가슴을 쳤다.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한 것이든 안 한 것이든 돌이킬 수 없음을 곱씹어야만 했다. 지나가버린 인생에 '지금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예전에는 그런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레지스탕스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기를 기다리는 대신, 1945년 이후 힘들여 언어나 다듬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혼신의 힘을 다해 당시를 증언하는 글을 남기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다. 44
아마도 이 후회와 '다시는 오지 않음'이 죽음을 바라보며 느끼는 두려움의 뿌리가 아닐까. 물론 이 후회와 다시는 오지 않음을 그 어떤 유보도 없이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할지라 도, 더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죽음의 민낯이리라. 죽음은 우리를 공간으로부터 들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로 비롯된 절망감에서는 늘 일말의 어리석은 희망을 담은 후회마저 성립하지 않는다. 이로써 시간과 더불어 이를 되돌렸으면 하는 갈망마저 사라진 다. "시간이 발걸음을 되돌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20년 전의 우 리가 된다면, 몇 주전의 우리로 돌아간다면, 어제의 우리가 될 수 있다면!" 왕 베랑제와 왕비 마리는 이렇게 한탄했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왕은 죽어갔다. et le Roi se meurt. 늙어가는 노인이 자신의 늙어감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받아들일수록, 그는 되돌려질 수 없는 시간을 그만큼 더 정확히 경험한다. 그래서 더욱 깊은 회의에 사로잡혀 시간을 상대로 싸우면서 시간과 더욱 밀접하게 맞물리고, 같은 과정을 통해 시간에 속한다.
시간은 여전히 그 자신인 모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간에서 버릴 게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 간과 자신을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게 내일일지, 1년 뒤, 5년 뒤, 혹은 10년 뒤 일지 그건 더는 중요하지 않다. 45
낯설어 보이는 자기 자신
더 이상 에전의 내가 아닌 나
A가 벌써 오래전부터, 눈가에 노란 반점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사로잡히는, 실톱으로 갈리는 것처럼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가장 밑바닥에는 물론 늙어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필연적으 로 따르는 몸의 퇴화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심정 이랄까. 여기에는 A가 거울을 통해서만 아니라 일상에서 만져 보기도 하는, 그래서 만져보는 손이 기괴하게도 느낌의 대상이 되는, 곧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소름끼침, 우리 인간의 근본 정서 가운데 일부인 소름끼침은 거울 앞에서 물러나 평소 일상에 뒤덮여 하루 일과를 감당하느라 잊힐 따름이다. (새 립스틱이 너무 어둡거나 혹은 밝은 게 아닐까? 머리 모양은 너무 부풀려지지 않았나? 오늘 한 목걸이의 뉘앙스는 좀 분별없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 얇디얇은 일상의 층은 늙어가는 인간이 자신의 노화 흔적 을 뼈저리게 느끼며 거울 앞에 머무르는 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럼 돌연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것, 곧 '나 아닌 나'가 평소 익숙한 나를 문제 삼으면서 충격과 경악이 고개를 든다. 61
A는 자신이 아침에 거울 앞에서는 실험을 되풀이할수록 권태와 더불어 은근한 자기 보상 심리가 생겨나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 심리는 자기 보상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오랫동안 견뎌온 덕에 깊은 권태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거친 피부로 마치 흉터를 자랑스러워하는 용감한 전사와 같은 자부심을 맛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태도는 나르시시즘으로 물든다. 다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진 사랑은 어느 모로 보나 황홀함을 선물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권태 사랑, 곧 권태가 자신을 연민하는 나머지 그 사랑마저 깊은 권태에 사로잡힌 바로 그런 감정 이다. 64
노화, 세계의 상실 또는 감옥이 된 몸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독일의 위대한 의사나 인류학자의 책에서 읽어볼 수 있듯,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덧붙인다면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사람의 태도다.
그러나 늙어가는 사람은 갈수록 세계를 잃어가는 '나'가 된다. 한편으로 그는 정신과 몸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 '시간'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수록 더 자신의 '몸'이 된다. 여기서 노인은 많은 늙어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거울상을 피한다. 쭈그러든 피부가 추하다는 세상의 가치 판단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탓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A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거울 앞에 선다. 이제 몸은 고스란히 자아가 되며, 껍질로, 외적인 것으로, 세월의 이런저런 상처를 입은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동시에 그의 가장 본래적인 것이 된다. 늙어가는 사람은 갈수록 자신을 몸으로만 바라보며, 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거울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핏줄이 불거진 손을, 축 늘어져 주름이 잡힌 배를, 정성들인 손질에도 두꺼워지고 갈라져버린 발톱을 보는 것을 피하기만 할수는 없다. 눈 질끈 감고 몸을 외면할 수 없으며, 비늘이 부스러기 처럼 떨어져 내리는 피부를 만질 때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 없다. 몸은, 사르트르가 말하듯 '등한시한 것'le négligé인 몸은, 당연하게만 여겨온 기능을 잃어버릴 때에만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몸은 우리에게 세계를 매개해주던 바로 그게 더는 아니다. 오히려 무거운 숨결, 아프기만 한 다리, 염증으로 시달리는 관절로 세계와 공간을 우리에게 막아버리는 장애물이다.
이렇게 해서 몸은 감옥이 된다. 그러나 이 감옥은 마지막 안식처다. 몸은 껍데기가 된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두고 고민하는 모든 늙어가는 사람의 입에서는 '죽어가는 껍데 기'라는 단어가 미처 막을 수 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숨결을 고르고 다시 생각하면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이다. 결국에 가서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것은 언제나 몸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우리 자아의 부분이자 지분으로서 세계였던 몸은 시들어가며 졸아든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시드는 몸이 우리 자신의 분명한 부정이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아닌 나는 또 누구인가
벌써 오래전부터 A는 한때 그가 '풍경 감각'이라고 불렀던 게 차갑게 식어버리는 바람에 불안에 빠졌다. 그가 예전에 사랑했 던 산과 계곡과 숲은 그를 회원으로 받아주려 하지 않는 클럽이 되었다. 71
풍경 감각이 사라진 원인을 알아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이런 풍경 감각은 사라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풍경을 바라보는 노골적인 불만으로 굳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A는 도시 한복판에 있을 때보다 자연과 더불어 있을 때, 한때 자기 인격의 일부로 가졌던 세상인 자연이 이 인격의 부정이 되었음을 더 절박하게 의식했다.
오르고는 싶으나 너무 힘들어 지레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산은 이제 A의 반反자아다. 뛰어들어 마음껏 헤엄치고 싶은 물은 특정 온도가 되어야만 견딜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은 좀체 온도를 맞추어주지 않고 그에게 안 된다고 말한다. 보기만해도 사랑스러운 계곡은 파리가 들끓어 걸어보고 싶다는 희망을 여지없이 부정하며 분노까지 치밀게 한다. 젊은 시절에는 파 리가 조금도 성가시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산에 오르 고,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며 계곡을 거닌다. A는 내쫓긴 것만 같은 우울함을 맛보며 그저 자신에게 되돌려진 채 외로울 뿐이다.
풍경에 느끼는 적대감은 비록 여기서 우리가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생활세계'monde vécu에서는 얼마든지 현실이며,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사건이다. 풍경에 느끼는 적대감을 이제 A는 자기 인격의 모순으로 의식한다. 그는 자연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연은 그에게 전혀 낯선 것으로 소외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부정하게 된 세계가 어디 한번 도전해보라고 을러대는 것이 항상 굴욕적이지만은 않은 공간, 곧 자신의 방으로 후퇴했다. 친구들이 일요일 소풍을 가자고 하거나 어디 조용한 시골이라도 찾아 쉬자고 하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한다. 갈수록 우쭐우쭐 힘을 늘리며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적수와 겨루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 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왜 갈수록 왜소해질까' 하고 A는 한숨을 쉬었다. 73
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우리의 말은 진실이다. 몇몇 건장한 노인을 들먹이는 지당한 논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는 늙어가는 사람의 적이 된다. 빠르든 늦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몸의 노쇠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은 세계와 겨루는 불평등한 싸움을 포기하고 침잠한다. 바람에 날리는 깃발을 들고 퇴각하는 날, 적대적으로 변한 세상에 완전히 패배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 처럼 확실하게, 이날은 죽음의 예고일 따름이다.
늙어감의 기본 상태라는 게 있다면 이 상태는 비참함과 불행함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비참하다는 말은 어떤 고통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의식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이다. 그리고 불행함이란,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실존의 공간을 채우는 어떤 '확신'이다. 곧 생생한 아픔을 주는 병을 의학이라는 견지에서 회복하기는 했지만, 살아가는 형편이 예전보다 훨씬 더 골골해 졌다는 떨치기 힘든 확신, 여기서도 자기 소외와 그래도 자신을 믿고 싶다는 자신감, 자아 권태와 자아 중독이라는 애매모호함이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런 애매모호함에 사로잡힌 늙어가는 사람은 언어를 통한 생각의 차원에서 늘 이런 물음을 강조한다. '이게 나이어야 해?' 늙어가면서 늙음을 통해 아픈 사람은 거울을 보거나 걷거나 달리거나 산을 오르며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거듭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적이 되어버렸음을, 자기 자신을 떠받들고 있던 몸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며 그 자체로 짐인 몸통이 되었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을 이미 살아버린 사람의 깊은 내면, 아직 무어라 이야기되지 않은 깊은 내면에는 여전히 자아 탐색과 자아 중독이 지배적이다. 본래적인 심경의 변화는 거기서 이루어진다. 몸이 세계를 금지시키는, 그래서 심술궂을 정도로 몸에 집착하도록 강제하는 그 늙음 탓에, 사람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몸'이 되고 만다. 거역할 수 없이 '죽어가는 껍데기'가 되고 만다. 이 껍데기를 뒤집어쓴 늙어가는 사람은 안으로부터 발가벗겨지며, 이 껍데기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외부라고 느낀다. 그리고 임박한 죽음을 살인이라며 몸서리친다. 75
비유컨대, 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 나는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
노화라는 단계를 거치며 노인의 군단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몸으로 남을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몸은 갈수록 에너지를 잃어가며 질량이 되어버려 결국 나는 더는 나 일 수 없다. 이 몸은 요소가 파괴되어가는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노화란, 유행어를 빌려 써본다면, 변증법적 격변의 순간이다. 파멸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몸의 양은 변형된 나라는 새로운 질質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인가? 그럼 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 드는가? 79
틀니
그렇지 않아도 심하게 물질화한 몸은 극단의 물질화에 내몰리고 만다.
A는 농담을 웃어넘길 수 없다. 그는 틀니가 광야의 리어 왕만큼이나 비극적이며, 더는 고기를 씹을 수 없는 사람은 참담한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A가 턱뼈에서 느끼는 격심한 통증의 집인 것만이 아니다. 그는 치과의사가 어디에 드릴을 들이대는지 모르면서도 절박한 목 소리로 거기가 아니라고, 그곳은 통증 부위가 아니라고 호소한 다. 이런 관점에서 인생은 경멸의 교수대이기도 하다. 빈곤이 수치이며 대다수 관광객이 남루한 옷차림의 농부를 보며 욕지 기를 느끼는 것처럼, 몸의 쇠락 역시 부끄러운 일일 따름이다. 80
그러나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아 발견에 이르지 못한다.
아픔으로, 무엇보다도 늙어가면서 일상을 감당하기 힘든 쇠약함으로, 비로소 고스란히 몸이 발견된다. 몸은 생생한 아픔 그대로이며 더는 세계와 공간으로 나아가 그 안에서 녹지 않는다. 몸은 있는 그대로의 나인 동시에,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안에 켜켜이 쌓아놓은 시간 바로 그것이다. 81
자아 발견과 자기 소외의 묵묵한 대화에서, 늙어가는 사람이 비참함과 불행함으로 경험하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전면에 서는 것은 자기 소외다. 아픔으로 물든 몸의 실체화로 빚어지는 자아 성장은, 그게 비록 언제나 특정한 증상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는 할지라도, 그 자체는 극히 드문 순간에만 체험되기 때문이다. 어떤 A가 근심스럽게 아픈 사지를 만져본다거나, 자신의 아픔을 두고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기분 나쁜 습관을 키웠다는 것을 자각한다거나, 꼼짝도 하지 않고 자기 혐오감에 몸을 맡겨 혐오 자체가 되어버리는 드문 때에만 자아 성장은 체험될 뿐이다. 이런 체험을 생각으로 분명히 정리해내는 것은 다만 새롭게 생겨난 자아를 바라보며 느끼는 낯섦일 뿐이다.
소외라는 이 낯섦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는 게 좋을지 찾으면서, 늙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연장실체가 그를 지배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리라. 그래서 자신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사유실체로 변신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고 여기리라. 달리 말해서 그는 아마도 몸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은, 저항해야만 하는 것은 '정신적 자아'이며, 이게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리라. 그래서 도발적이고도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는 천식 때문에 인생을 금지당하지 않을 거야" 하고 외치리라. 천식에 대항하며, 연장실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누구 인가?
정작 연구해야 할 문제는 연장실체와 사유실체라는 데카르트의 구분이 가장 깊은 층까지 샅샅이 살아낸 현실과 정말 맞아떨어지는지 하는 물음이다. 아무래도 연장실체와 사유 실체는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이며, 바로 이 '고통의 경험' souffrance vécue에서 둘을 갈라놓으려는 어떤 시도에도 성공적 으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백하건대 이런 성찰에서 나는 불확실하게 앞을 더듬어 나아가기만 할 뿐, 이런 연구를 감당할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철저히 연구해야 할 물음 은 '자아가 아닌 것', 단순한 물질로서의 몸일 뿐인 '비-자아' 에 대항하려 허리를 곧추세우는 (강조를 위해 큰따옴표를 붙인) "진정한 자아", 곧 사유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것을 정말 따로 이 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사유실체로서의 자아는 쇠락하 는 몸을 비·자아라고 폄하하며, "빌어먹을 위장"이라거나 "더 럽게 아픈 다리"라고 말하길 즐긴다. 물론 자아라는 것은 이 위 장과 다리 이상의 것이기는 하다. 바로 그래서 A가 치통을 온전 히 자신의 고통으로 몰입하는, 그래서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85
몸은 자신의 것인 동시에 세계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와 그 구성원은 각자 자신의 몸을 충실히 지켜야 사회가 보존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픔은, 사회를 위한 것이어야 마땅할 몸이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자신의 것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 86
우리는 진리의 순간. 곧 아픔으로 우리 몸이 바로 나만의 것임을 알게 된 그 진리의 순간에서 조차 말조심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한다.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 안에 담고 있으며 기억을 통해 살아낸 시간인 '정신적 자 아'는 그래도 우리 존재를 바라보는 이웃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존재가 더 강한 것이어서 우리는 에움길을 거치기는 하지만 피상적인 일상경험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으며, 위에서 그 한계를 적시한 정상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을 우리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87
이제 좋든 나쁘든 자아는 사회의 좌표이기 때문에, 관계
좌표인 남자 친구를 잃어버린 상실감은 더욱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병에 시달리는 노인의 자기 소외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외는 몸의 통증과 물질화로 이룩한 자아 발견보다 더 끈질질뿐만 아니라, 보다 더 결정적이다. 원한다면 더욱더 현실적이라고 할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도 관계를 통해 빚어진 것이며, 동시에 여전히 변화하며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욱 절박하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회에서 관계할 힘을 잃어버린 자기 소외이다. 88
관계의 변화는 몸보다는 타인에 의해 일어난다.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몸은 타인에게 속절없이 맡겨지는 탓이다. 현실의 변화는 타인에 의해 촉발되는 탓에, 타인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A가 자신의 얼굴에 생긴 노란 반점을 보며 느끼는 혐오 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우리의 말은 맞다. 이 말에 서 거두어들일 것은 없다. 그런 변화가 변화를 겪지 않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익히 아는 사실이다. 반면 이런 흠집은 A, 그녀의 자산과 같아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역겨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와 인생이 덧붙여준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제의 핵심은 근본성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사회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88
A는 세계로부터 거부당한, 즉 세상으로부터 물려난 치아 없는 자아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지금 그를 위협하는 치아 잃은 자아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자신이 '세계'이며 사회이면서, 바로 이 사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A는 사회가 그를 느끼는 그대로 자신을 느낀다고 믿는다. 바로 그래서 튼튼한 치아를 자랑하던 젊은 시절로부터 이끌어낸 자신을 지키며, 한밤중에 얻은, 그가 "진정한 자아"라고 부른 그 다른 자아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떨쳐버리려 안간힘을 쓴다. 90
그렇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우리의 사회적 자아를 재형성하거나 새롭게 해석했다. 자신의 본래적 자아라고 고집하며 늙어 쇠약 해지는 나를 한사코 부정하려는 젊은 시절의 자아는, 많은 경우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자아를 떠올리며 노란 반점이나 치통을 앓는 나를 낯설고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그러니까 일종의 환상일 뿐이다. 91
우리 자신을 낯설게 그린 그림은 애매한 통계적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500명의 타인이 나에게 반감을 보였다. 50명이라 는 소수만이 나를 좋아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큰따옴표로 써야만 하는 "현실"에서 비호감일 따름이다. 우리는 통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의 사회적 자아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단순한 짐작으로 생겨 났다는 게 끔찍할 뿐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며 그 앞에 허리를 숙이는 사회적 자아라는 현실은 결국 한밤중에 치통을 앓는 A의 자아만큼이나 의심스러운 것이다. 많은 경우 잘 알지 못하는 통계에 맞추려 노력해왔으나, 통계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91
타인의 시선
사회적 연령,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
잔고 자아, 사회가 계산한 결산 결과는 이제 아무 반론 없이 감수하고 내면에 새기며, 심지어 결국 스스로 요구하는 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하는 바로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해낸 일을 헤아려 무게가 재어진 늙어가는 인간은 심판을 받았다. 그는 이겼을지라도 패자敗者다. 이 말은 그의 사회적 존재에 높은 시장 가격이 매겨진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무얼 하며 인생을 살았는지 생각해본 일도, 어떤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도전해본 일도 없다는 뜻이다. 과감하게 단절을 시도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그의 지평선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가 살아온 그대로 죽으리라. 평생 명령만 받아온 병사로 얌전하게.
사회의 모순은 어디서 성립하는지, 이 모순을 거부할 기회에는 어떤 게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102
소유냐 존재냐
우리의 경우에 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특정 연령에 이르러 사회의 판결을 받아들였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젊어서 이들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용기(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른 문제이기는 하 다)를 가지고 거듭 가능한 것을 향해 나아가려 시도했다. 사회가 아직 가능하다고 인정해주는 바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그 나이는 곧 현실이다. 나이, 곧 사회적 연령은 기억에 저장된 시간 층이나, 압박과 고통으로 손상된 몸을 세계의 상실로 경험한 바로 그 기억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 사회적 연령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시대마다. 그때그때 인간이 사로잡혀 있는 특수한 관계 영역에 따라, 사회 구조에 바탕 을 둔 사회적 연령이 달라진다. 105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존재는 가진 게 얼마나 되느냐는 소유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주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그가 무얼 가졌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일반의 질서는 인간에게 가지라고 요구한다. 수치로 표현될 수 있는 소유이거나, 소유 정도를 나타내며 보장하는 시장 가격이거나 아무튼 뭘 가져야만 한다. 소유가 있어야 인간은 사회적 연령을 규정받는 단계로 들어선다. 가진 게 없다면, 사회적 나이 먹음이라는 과정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 사회생활의 에센스도, 인간의 실존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라림을 곱씹어야만 한다. 어리석게 태어나 무얼 가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난하게 태어나 아무것도 벌어들인 게 없다. 그럼 A는 신분을 가지지 못한 무명씨에 지나지 않는다. 저 과대 망상에 사로잡힌 탈레랑이거나 다락방에서 눈물 젖은 빵이나 씹는 천재일 따름이다. 소유의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요구의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유의 이정표에 맞춰 인생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럼에도 늙어감이 시작되는 점이 정확히 어딘지 장소 규정은 어렵기만 하다. 소유했다는 사실 혹은 소유하라는 요구는 우리 인생의 여러 다른 지점에서 엇갈리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소유의 운명은 아주 일찌감치, 곧 요람에서 시작된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태어났다거나, 아버지의 공장 혹은 법무법인이 소유의 솜씨를 발휘해달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물론 이런 경우 당사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런 요구를 받는다. 다른 이에게 이 소유 과정은 중고등학교에서 시작된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게 발견되어 물리학자나 엔지니어라는 인생 궤적을 살아가도록 부추겨진다. 물론 이는 시장 가치를 확신한 선택이다. 세 번째 경우는 대학교나 직업 훈련을 받으며 피할 수 없는 강요로 소유의 길을 선택한다. 어쨌거나 존재를 규정하는 소유는 인간에게 두 가지 관점에서 숙명이 된다. 존재 역시 개인의 의식을 키우기 때문이다.
우선 소유는 개인에게 자유의지, 매 순간 인생을 원점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을, 사회가 없이 혹은 심지어 사회에 반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인생을 꾸려볼 자유를 앗아간다. 다른 한편 소유는 그 마수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소유를 키울 경제 수단 혹은 사회가 요구하며 시장 가치로 보상을 받는 능력, 곧 '노하우'를 수집하지 않은 개인에게 사회의 빈자리나 지키라고 심판한다. 이 빈자리는 자유롭게 인생을 새로 기획한다는 원점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사회는 그 구성원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지만, 개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 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110
게바라, 고갱, 정신병원의 과대망상증 환자 그리고 그의 먼 친척으로 카페에서 하릴없이 시간이나 죽이는 무명 화가, 이들은 모두 소유의 세계를 대표하는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았다. 112
다른 이들은 사회적 연령에 도달했다. 어떤 이는 일찌기, 다른 이는 좀 더 뒤에, 어쨌거나 대다수의 사람은 사회에 자신을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선보이면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시점을 경험했다. 이들은 언젠가는 재산을 방어하고 지식 소유를 자랑하며 배우자와 자녀를 돌보아야만 했다. 재산을 늘리거나 지키려는 노력은 이들의 인간다움이 소 진되게 만들었으며, 노심초사를 거듭한 끝에 어느 날엔가 인생 의 전환점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 존재가 더는 바뀔 수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제 늙은 사람이 되었다. 문은 더는 열리지 않는다.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런 대답을 듣는다. 당신이 어제와 그제 했던 것을 해보라, 어디 당신의 과거로 당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라.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 113
저항과 체념의 모순에 직면하기
그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러셀 전범재판'의 논리를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동안 A는 그저 산발적으로 강연 내용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가슴을 쓰라린 체념으로 물들인 것이 철학자의 이내 쓰러질 것만 같은 허약한 몸이 아니라, 오히려 사르트르의 사회적 연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허물어간 철학자 역시 사회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 강연의 시작을 맡았던 사회자가 말한 것처럼 명성과 평판의 포로는 아니다. 명성과 평판이라는 감옥은 사르트르가 이제 막 탈출했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그 자신 안에 쌓인 시간의 포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인생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텍스트만 읽었으며, 그가 평생 살아오며 이룩한 바로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작품과 인생으로 결산을 낸 사회는 그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장폴 사르트르이기를 강요했다. 사르트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런저런 책들을 쓴 필자였다. 1948년 정치 정당을 결성했으나 신도를 한 명도 끌어모으지 못했으며, 노벨상을 거부했으나 경계를 허문 철학자였다는 업적은 바로 그 자신의 한계가 되었다. 사회는 그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장폴 사르 트르로 규정했다. 이제 이미 늙어버린 남자는 아마도 15년은 더 살리라. 그게 5년일 수도 있으나, 아무래도 아무튼 15년 이상을 넘기지는 못하리라.124
A로 하여금 자기 나이의 불편함을 감지하게 만든 통찰은, 연단의 늙은 남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주의 깊게 강연을 듣는 2,500명의 젊은이들이 사르트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훔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저 젊다는 것과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그들의, 오로지 그들만의 특권으로! 125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적 연령을 지정해줬다. 사회는 우리를 파괴한다. 이제 겨우 절정에 오른 우리를,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냈고 무엇을 못했는지 결산하며, 일종의 불문율, 매일처럼 새로워지는 젊음의 법칙에 따라 우리를 파괴한다. 사회가 주목 하는 것은 변화와 발전의 기회, 곧 미래를 가지는 젊음일 뿐이다. 노년에 이른 우리의 사회적 해체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우리가 사르트르든 미스터 X든, 박수갈채와 플래시 섬광을 받든 혹은 무명씨로 그저 거리를 걷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늙 었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해체당한다. 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존재자로, 이것과 저것을 소유한 자로 규정되었다. 결국 우리 에게는 무엇인가로 변화할 길이 막혔다. 미래는 이미 끝났다. 우리의 사회적 자아는 그저 주어졌을 뿐이다. 고독한 순간에서조차 허구적인 "진짜 자아"를 꾸며내 자위하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정신병원의 탈레랑이나 카페의 위대한 화가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을 뿐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우리는 판결의 접수도 공개적 거절도 거부하고, 자기기만으로 피할 수 있다. 이게 대다수 노인이 우습지만 신중하게 시도하는 노년의 행복이다. 이런 자기기만으로 물론 절대 평안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달리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우리는 파괴된 자, 정신병자가 아니고 평화롭게 늙어가는 그 누군가일 수 있다. 정상이라는 지극한 단조로움에 사로잡힐지라도, 어떻게 지내시나요? 감사합니다. 나이에 맞게, 형편에 맞춰 지냅니다. 물어본 사람은 멋쩍은 미소를, 대답하는 사람은 난처한 미소를 각각 짓는다. 이런 식으로 지극히 평범해진다. 누가 그걸 부정하랴? 세계는 안심하면서도, 그 어떤 가책도 피하려고 '긍정적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그 어떤 저항도, 불평도 없이 품위 있게 늙기를 요구받는다. 우리에게 들이밀어진 요구는 우리 자신의 허약함 및 타성과 맞물려 그런대로 충분하다. 128
긍정적 태도, 품위 있고 불평하지 않는 노년은 두 측면을 가진다. 변화와 발전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저 자기기만의 인기 높은 주장대로, "젊음과 더불어 젊게 살자!"고 외쳐대는 게 그 하나다. 사회는 그 경제제도로써 전력을 다해 돕는다. 인생은 마흔부터, 쉰부터 시작합니다. 쉰다섯에 캘리포니아에서 누리는 은퇴생활은 얼마나 행복할까. 여성은 폐경 이후에 성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How to retire happily at fifty five in California, Women can be sexually happy after the menopause. 옷이 사람을 만듭니다. 젊게 입으세요, 그럼 젊은 겁니다. 늙은이를 파괴한 바로 그 사회는 불변의 존재라는 정장을 강제로 노인에게 입히며 노년을 소비하라고 요구한다. 저 옛날 젊음을 소비한 바로 그대로, 이 사회는 늙은이를 경제활동으로 내몬 바로 그 사회가 아닌가. 128
늙음을 바라보는 '긍정적 태도'는 전혀 다른 측면도 가진다. 이 측면은 경제가 주도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경제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인이 전원으로 돌아가 은퇴생활을 즐긴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대를 뒤쫓으며 사회의 [노인] 파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 숨가쁜 행보로부터 자신은 빠져나왔다고 하면서 사회의 파괴를 부정한다. 늙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젊었을 때는 토론에 끼어 말을 거들었을 뿐이지만, 늙은 지금은 내 말이 진리다. 이미 오래전에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없게 노후 준비를 해두었다. 그러니 오 세상이여, 나를 이대로 내버려다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닌 평화를 허락해준 사회에 만족했다. 사회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사회가 그에게 더는 기대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인생의 대부분을 이미 살아버린 자로서 죽음을 얌전히 기다리라고 허락해주었다. 사회의 이런 태도는 그에게 깊은 안도감을 선물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수확한다고 말한다. 그는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세계를 구경한다. 마치 오페라 망원경을 거꾸로 든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보이는 세상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저기서 사냥을 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광경은 그의 눈에 무척 왜소하게 보일 뿐이다. '게임은 끝났다. 'Les jeux sont faits. 이제 더는 게임에 낄 필요가 없다.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은 몫을 했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보여줄 때라고 말한다. 아무런 질투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을 소진하기에 바쁜 다른 사람들을 구경할 뿐이다.
오 시대여,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보았노라. 권좌가 무너지고 국가가 생겨났으며 철학은 세계를 주물렀으나, 20년 뒤 누렇게 바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구나. 유행은 왔다가 사라지고, 인간은 태어나 죽어간다. 위대한 것과 영원한 것에만, 무덤에 가지고 갈 금고에만 집중하자꾸나. 전원에서 사는 노인은 젊게 남으려 환장한 늙은이보다 사회의 [노인] 부정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늙은이는 그를 짓밟고 지나간 시간을 따라잡겠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전원의 노인은 간단히 시간을 부정하고 시인처럼 영원 만 노래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허위 속에서, 허황된 믿음 속에서 살 아갈 뿐이다. 130
자신이 늙어가는 이로 살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시도한 사람은 거짓말을 포기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애매함에 빠져 달아날 수 없다. 결국 노인은 활짝 열린 모순에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 한다. 자기 부정을 받아들인 것은, 이 부정에 저항하려고 들고 일어나야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이 애초부터 좌절을 선고 받았다는 점도 노인은 안다. 이런 사실의 인정은 곧, 뒤집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노인은 자기 부정과 파괴에 "안돼!" 하고 저항하는 동시에 '알았다" 하고 그것을 인정한다. 아무런 전망이 없는 부정에서만 노인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자아의 포기를 강요당하는 획일적 일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정신병원에서 묵을 거처를 찾는다. 여전히 젊음이라는 마스크를 쓴 것처럼 자신을 기만하며, 거짓으로 묵직 한 황혼의 노년이라는 목가적 풍경에 매달린다.
노인은 사회가 요구한 바로 그대로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에만 누군가다. 노인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녹아 있는 부정이 자기 문제임을 알아차리고 그에 저항하려 몸을 일으킨다. 노인은 실행할 수 없는 일을 하려 과감히 떨쳐 일어난다. 아마도 이게 노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 진정 품위 있게 늙어갈 유일한 가능성이리라. 131
더는 알 수 없는 세상
세상으로부터의 소외
빠르든 늦든 누구나 언젠가는 더는 알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한 탄할 문턱에 이르기 마련이다. 대개 지레 실망부터 하지 않는 올곧은 자세로 감당하려 하지만, 자기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자기기만에 빠지는, 물론 그리 강하지는 않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이도 적지 않다. 사회적 노화의 이런 측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인 나이 먹어감은 상당히 오래 걸리고, 그래서 극적이라 고할 것은 전혀 없는 연속적 통찰의 과정이다.
과정의 출발은 흔히 시대의 '문화적 은어'라고 하는 것에 느끼는 막연한 저항감이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도 그런 은어를 써야 할지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철 지난 용어만 고집한다.
유행, 속물근성, 각종 주의들, 아는 척 뻐기는 행위 따위를 거부하면서도 그저 어깨만 으쓱하며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는 게 문화적으로 늙어가는 사람의 태도다. 거부감이 들지만 이를 감수하는 이유는 늙은이의 퇴행적인 고집이라 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135
문화적으로 소외된 노인은 잘 알지 못하는 표시 체계, 곧 전혀 새로운 신호로 가득한 상황에서 길을 찾느라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처음 영국을 여행하는 자동차 운전자는 교통 표지판이 대륙과 다른 경우가 많아 자신감을 잃고 중압감에 사로잡혀 차를 천천히 몬다. 시대의 문화적 표시로 혼란을 겪는 늙어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훤히 드러난 팔뚝을 보며 A는 그게 새로운 유행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젊었던 시절 그런 것을 도발적인 유혹이라 여기던 관점을 그대로 고집하며, 당시의 표시 체계 그대로 외설이라며 혀를 찬다. 그러나 현재의 표시 체계에서 그런 해석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팔뚝이 에로틱한 유혹은 아니며, 무슨 성적 도발도 아니다. 또 자극이라는 것을 현재에는 외설이라는 범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늙어가는 사람은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자신의 시대였던 과거라는 관계 지점에 따라 해석하려 시도하는 그만큼 현재로 부터 소외된다. 그에게 미래이자 세계와 공간을 약속해주었던 그의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소외로 비롯된 낯섦의 정체는 무기력한 거부와 불쾌감으로 표현되는 불안함이다. 140
사정이 그렇다면 늙어가는 인간에게 그 시대의 상위 체계는 그 개인의 강력하게 변화한 요소를 포함하는 탓에, 결국 늙어가는 인간의 소외는 전면적으로 이뤄지는 총체적인 소외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남아 있는 탈출구는 오로지 그를 더욱 깊어지는 소외로 이끌 뿐이다. 늙어가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체계에 간결한 거부로 대답한다면, 그는 시대로부터 빠져나와 세계의 이방인, 속내를 알 수 없는 괴짜가 될 뿐이다. 144
A 자신이 개인 체계, 그 인생의 향기를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탓에 그의 개인적 체취가 되어버린 그 체계로부터 빠져나 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150
돌연 A는 늙어가는 사람에게는 지금껏 자신을 떠받들어주던 몸이 말하자면 감당하기 어려운 짐, 벗어던지 고픈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문화마저도 고통만 안긴다는 기괴한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헉헉대는 심장, 민감하기만 한 위장, 음식을 씹기조차 힘든 허약한 치아로 괴로운 마당에 시마저 고문이 되다니.......
매일 새로운 표시와 체계를 배우고 익혀야만 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152
인간의 문화적 실존은 그가 살아가는 사회적 실존의 한 형 식이다. 그가 사회생활을 하는 폭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그 가 누리는 문화생활이 어떤가도 결정된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맺는 관계가 지니는 성격에 따라 인간은 그가 현재 어떤 모습을 가지는지 정해지는 셈이다.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문 화생활이란 사실 가능하지 않다. 이미 쌓아둔 교양의 정도가 얼마나 크고 넓으냐에 따라 그 주인의 문화생활은 경직됨이라는 틀을 가진다. 그래서 몸이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살덩이 라는 질량이 되어버리고 힘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여기서 문화적 감성으로 이해된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둔중하고 무거워지는 나머지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154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늙어가는 사람은, 새 옷을 맞추려 새 유행을 살펴 주문을 넣은 뒤, 오후의 늦은 시간 눈을 감고 '30년 전의 의상과 모자가 그래도 멋졌어' 하고 눈가의 눈물을 훔치는 저 50대 여인과 보조를 같이할 뿐이다. 물론 그에게 새 행철학은, 여인이 바라보는 오늘날의 유행처럼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시대에 뒤처졌다는 의식, 그렇다고 시대를 부정하는 방어적 태도로 굳어질 수도 없는 의식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몸의 만성적 아픔과 견주어도 될 지경이다. 시간의 흐름은 늙어 가는 사람에게 불친절해진다. 아마도 지난 그 어떤 시간보다 더 적대적일 수도 있다. 문화적인 개인 체계의 핵심은 젊은 시절에 형성된다. 생동감과 감성이 정점을 이루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지점이 젊은 시절이다. 이제 개인 체계는 부단한 역동성으로 끊임없이 혁신되는 상위 체계에 제압당한다. 상위 체계가 최신 정보 수단으로 한껏 과시를 일삼으면, 늙어가는 사람은 동시대의 문화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자아와 세계의 상실로 고통받는다. 161
묶임을 묶임으로 느끼지 않고 자유가 더는 자유가 아닌 곳에서, 자욱한 안개의 잿빛 북해라는 영원에만 자신을 맞추며 빠져나갈 수 없이 지레 체념을 하면서도 이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 막아줄 묘약이라고는 없는 몸의 쇠락과 문화적 노화는 더 나쁠 수 없는 메시지, 곧 종말의 선포다. 문화의 어떤 표시 체계가 힘을 잃고 허약해지는 과정의 끝에는 죽음 혹은 죽음의 상징이 기다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어간다'로 읽어야 하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뭔가 '생겨나기'는 하리라. 다만 그가 없이. 어둑한 황혼녘에 우울한 손님, 그는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깊은 충격에 사로잡혀 이미 흘러가버린, 힘을 잃어버린, 소진된 체계들을 생명에 매달리듯 그러쥔다. 이 체계들이 그의 인 생이었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했다. 다만 인생은 역설, 죽음에 둘러싸여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죽음으로부터만 그 의미를 수태하는 인간 실존이라는 모순에 짓눌린다. 결국 인생은 죽는다는 특성으로 의미를 가질 뿐인 인간 실존이다. 늙어가는 사람의 인생, 우리가 다른 자리에서 자아-시간-기억이라 부르며 젊은, 그러니까 공간과 세계를 약속하는 존재와 대비시켰던 그 늙어가는 사람의 인생은 그의 조촐한 문화로 이미 시체일 따름 이다. 귀여운 헤세, 권주가를 노래하는 데멜, 인생을 바라보는 회의로 고통받는 프랑수아 모리아크. 늙어가는 이가 이들로부터 존재의 힘을 길어올릴 수 있으리라 믿는 동안, 이들은 이미 세상과 작별했으며 벌써 부패 지경에 이르렀다. 169
문화적으로 늙는 일의 품위는, 그것이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사회적 노화의 품위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오로지 모순된 저항, 모순과 철저히 싸우는 저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새로운 체계들은 이미 찾아왔다. 늙어가는 사람은 아무 희망도 없이 매일 새로운 체계를 해독하려는 싸움터로 나가야만 한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한, 부패하는 질서를 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신적 태도가 시체를 붙들고 못 다한 성욕을 풀려는 음울한 네크로필리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부패한 체계에 무가치할지라도 충절을 보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망한 시도로 자신의 부정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만 한다.
그는 세계를 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해하는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강제는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만큼이나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일 뿐이다. 그리고 늙어 죽어가는 모든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다. 170
죽어가며 살아가기
죽음을 두고 성찰하며 그는 허공에 붕 뜬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내 그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경험을 한다. 그런 생각은 그 어떤 결과에도 이를 수 없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함'penser l'impensable이라고 철학자 블 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자신의 책 『죽음』에서 썼다. 그렇다. 173
죽음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천재든 속없는 바보든 죽음이라는 이 대상 앞에서는 입을 다물 뿐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 그 어떤 것도 아닌 없음, 말 그대로 무이다. 죽음을 둘러싼 상념은 일종의 점과도 같은 상투적인 진부함으로 응축된다. 물론 압축의 법칙에 맞추어 극한의 밀도를 가지는 진부함이다.
분명 내 언어의 경계가 내 세상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아니, 내 세계의 경계가 곧 내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나의 안티 세계 앞에서 내 언어는 그 무력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174
죽음의 기이한 불가사의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그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세상을 떠올려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없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근본 상황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실존은 결정적 순간에 세계의 의미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의미는 참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모순이다. 181
그러나 유일한 진리는 죽음이라고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죽음은 미래 가운데 미래, 모든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떼는 모든 발걸음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행보다. 우리가 품는 모든 상념은 결국 죽음 에서 깨어진다. 죽음의 완전히 공허한 진리, 그 비현실적인 현실성은 우리 인생이 가지는 무의미함의 완성이다. 무無로 넘어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인생을 극복한 우리의 승리는 곧 우리의 총체적 붕괴다. 183
죽음의 부조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은 근원적 모순이다. 이 모순은 절대적인 '부정'으로, 다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을 포괄한다. 죽음은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 따름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가지는 수십 억 개의 세포가 궁극적으로 파괴되는 게 죽음이지 않은가. 부정적 생각은 죽음으로부터 비로소 비롯된다. 죽음이 가지는 되돌릴 수 없음이야말로 부정에 총체적 의미를 불어넣어주는 근거다. 183
우리는 이 절대적인 부정을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이해한다. 절대적인 부정에 접근하는 기준점을 죽음으로 잡아 각자의 개인적인 죽음을 통해 절대적인 없음을 알아보려는 상대적인 이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부정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라는 모순으로서의 죽음은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부조리다. 모든 의미, 신비, 비속함, 필연적이고도 가능한 생각 등이 이 부조리 앞에서 무너진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경계 덕분에 가치를 가지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끝장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185
원하지는 않는다. 몸의 상실, 사회로부터 소원해짐, 문화적 감 각의 손실은 예전에 그가 그저 이론적 진리로만 무심하게 여겨 왔던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다. 나는 죽어가고 있구나! 광기 어 린 장광설의 유혹이 손짓을 한다. 나는 죽으리라, 죽는 것은 나 이리라. 내가 죽으리라, 죽으리라.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어 떤 가능성도 지워버리는 죽음일 뿐이다. 이 파괴적인 부정을 바라보며 광기의 시구를 읊조리는 것 외에는 달리 어쩔 수 없 음을 깨달으며, 거듭 다시금 힘차고 발랄하게 죽어감이라는 저 불쾌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 어떤 것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죽는다'는 동사는 논리적으로 과거형으로만 쓰일 수 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일을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그럼에도 죽음의 모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뒤덮는 죽음이라는 먹구름의 모순은 모든 논리, 항상 인생 논리일 뿐인 모든 긍정적 사고를 무력하게 만드는 탓에 과 거마저 부정된다. 모든 것을 체념하게 하는 죽어감의 상념 저 편에 드디어 죽음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 당사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리라. 죽음 자체를 생각할 수는 없으니, 죽 음의 언저리를 돌아가며 더듬어봐야 하겠구나. 이런 돌아봄을 거듭 시도하면서 그는 반원만 그리는 자신의 행보를 발견할 뿐 이다. 나는 죽는구나, 늙어가는 이는 자신에게 다짐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다. 191
위로가 아닌 진실을
A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을 해냈을까? 그는 그랬기를 희망한다. 남은 날들은 쪼그라들며 메말라 비틀 어지리라. 그럼에도 그는 진리만큼은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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