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백_일홍 2025. 2. 5. 18:30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백낙청 외

 

 

1장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K사상의 출발

 

김용옥:

그러나 원불교의 핵심은 사은(四恩,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에 있습니다. 사은이란 무엇이냐? 인간 존재를 '은'으로 규정한다는 것 이죠. 은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어 떠한 경우에도 독립된 실체일 수 없으며, 관계망 속의 일 항목입니 다. 존재는 생성이며, 생성은 관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은 중에 천지, 부모, 동포는 하나의 항목입니다.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에 건을 아버지라 칭하고, 곤을 엄마 라 칭하는데, 그 건과 곤에서 태어나는 만물은 나와 대지의 탯줄을 공유하므로 동포라 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지와 부모와 동포는 결국 상즉상입(相即相入)의 일체(體)입니다. 풀잎 하나도 나의 동포 이며 경외의 대상이라는 자각이 없으면 일원상의 진리는 구현될 길 이 없습니다. 하물며 같은 민족 동포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법률은은 문명의 질서에 관한 것이죠. 그러니까 원불교는 고조선 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사유를 계승한 토착적인 세계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사은은 소박한 사상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유니 크한 진리입니다. 원불교의 매력은 현란한 레토릭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실천적 소박미에 있습니다.

 

백낙청:

사은사상이 굉장하다는 말씀까지 이끌어냈으니 박교무님은 안심하고 귀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다만 원불교가 '사은사 상'을 제창함과 동시에 '공(空)'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더 음 미할 대목같아요. 74

 

백낙청:

촛불혁명이 동학하고 또 가까워지는 면이, 저는 의제도 그렇다고 봐 요 첫째, 이제까지 민중항쟁에서는 남녀평등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 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성평등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 있고, 2016~17년 항쟁의 여파로 미투운동도 벌어지며 큰 변화가 일 어나고 있는데 그 시원이 사실은 동학이거든요, 기독교인들은 자꾸 기독교가 여성 교육도 하고 이것저것 해서 남녀평등사상을 가져왔 평등 종교가 아니에요. 그런데 동학은 그게 뚜렷했고, 그것이 상해임 다고 하는데, 물론 그런 공헌이 있었지만 성경이나 교리 자체를 보면 시정부 헌장에도 명시되어 있죠. 또 과거의 우리 민주화운동하고 달 라진 게 생태계와 기후위기 문제입니다. 그 해법을 사실은 동학이나 원불교에서 찾아야 되는데, 아직도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양의 생태이론 생태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원만한 사상이 안 나오고 있다 고 봐요. 또 하나가, 촛불항쟁 당시에 큰 이슈로 떠오르지는 않았지 만, 남북문제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거 아닙니까. 지금 남북관계가 교착상태라고 하지만 2018년 이루어진 엄청난 변화는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앞으로 더 진전되면 그야말로 우리가 어변성룡을 하게 되 어 있습니다. 1987년 6월항쟁만 해도 운동권에서는 자주통일을 굉장 히 강조했지만, 어디까지나 분단체제라는 틀 안에서 남한만의 변화 를 일으켰지 분단체제를 크게 바꿔놓지를 못했어요. 물론 그때 벌어 졌던 통일운동과 자주화운동의 기운을 타고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 정책을 펴고 남북기본합의서도 만들고, 또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 현 대통령의 돌파가 있긴 했습니다만, 분단체제라는 틀을 못 깼거든 요. 그걸 깰 수 있는 기회를 촛불항쟁이 만들어줬다고 봅니다. 78

 

김용옥:

우리나라의 생각있는 사람들 중에서 선생님만큼 한 민족으로 서의 북한 동포를 품에 안고 생각하는 사상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활동하고 계시는 동안 온전한 남북화해가 이루 어져야 할 텐데, 문재인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남북문제에 본격적으 로 올인했던 것만큼 마무리 시기에도 구체적인 성과물을 내주기를 갈망합니다. 미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미국을 뒤받 으면서 설득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미관계에 있 어서 너무도 비굴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사상가이니까 주제를 좀 래디컬하게 설정합니다. 백선생님 처럼 마음이 곱지를 못해요.(웃음) 근대의 문제만 해도, 근대라는 개 념을 방편으로 해서 근대를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개념 그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원점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가 생각하기에는 원시공산제, 봉건제, 자본제...... 이런 개념보다는 보다 단순하고 유용한 개념이 '왕정이냐, 민주냐?' 하는 설정이라는 것이죠. 단군 이래 구한말까지 관통하는 권력의 형태는 왕정입니다. 이것은 전세계의 역사가 다 똑같아요. 왕정에서 민주체제로의 변화 는 모두 최근 한두 세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수운이 "개벽 후 5만년"이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개벽 후 5만년이 지나 비로소 민주적 혁명의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민주를 말해도 그것은 50년 정도의 체험을 바 탕으로 하는 것이고, 보수세력들은 5만년의 관성을 등에 업고 설치 는 것입니다. 프랑스혁명도 루이 16세의 목을 잘랐다고는 하지만 그 뒤 2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쳐도 민주가 정착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79

 

 

2장 동학의 확장, 개벽의 운동

 

해월의 '이천식천'

 

내 항상 말할 때에 물건마다 한울이요 일마다 한울이라 하였나니, 만 약 이 이치를 옳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물건이 다 한울로써 한율을 먹는 것 아님이 없을지니, 한울로써 한움을 먹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 쳐서 보는 말이요, 만일 한울 전체로 본다면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하여 같은 바탕이 된 자는 서로 도와줌으로써 서로 기운이 화함을 이 루게 하고, 다른 바탕이 된 자는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으로써 서로 기 운이 화함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울은 한쪽 편에서 동질적 기화로 종속을 기르게 하고 한쪽 편에서 이질적 기화로써 종속과 종속 의 서로 연결된 성장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니, 합하여 말하면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은 곧 한울의 기화작용으로 볼 수 있는데, 대신사께서 모 실시(侍) 자의 뜻을 풀어 밝히실 때에 안에 신령이 있다 함은 한울을 이 름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 함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을 말씀한 것이니 지극히 묘한 천지의 묘법이 도무지 기운이 화하는 데 있느니라.

- 해월 최시형 '이천식천, 해월신사법설, 106

 

정지창:

이른바 '삼경사상' 법설도 예수의 산상수훈 못지않은 시적 표현이 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하늘만 섬기고 사람을 섬기지 않으면 이는 농사의 이치는 알되 실제로 종자를 땅에 뿌리지 않는 행위와 같으니, 도 닦는 자 사람을 섬기되 하늘과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바르게 도 를 실행하는 자니라,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하늘님이 강림하였다 이르라 하였으니, 사람을 공경치 아니하 고 귀신을 공경하여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 어리석은 풍속에 귀신을 공경할 줄은 알되 사람은 천대하나니, 이것은 죽은 부모의 혼은 공경 하되 산 부모를 천대함과 같으니라. 하늘이 사람을 떠나 따로 있지 않은지라, 사람을 버리고 하늘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해갈 을 구하는 자와 같으니라. 셋째는 경물이니 사람만 공경한다고 해서 도덕의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는 무생 물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 느니라."("삼경」, 『해월신사법설』) 107

 

도움의 '불연기면' 해석

 

"기연(특)"이니, "불연(不然)"이니 하는 말은 선진고전에서 자주 찾 아볼 수 있다. 『논어』 「현문」 14에 보면, 공자가 위나라 대부 공숙문자의 인종에 관해 듣고, "기연(其츠), 기기연호(豈基然乎)?"(그럴까? 과연 그 사람이 그러할까?)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 그런데 수운이 사용하 는 불연, 기연의 용례는 그러한 일상언어의 용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기존 고전의 용법은 "그러하다"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단순 한 서술적 설명이다. 그러나 수운의 용법은 "그러함'과 '그러하지 아니 함'이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철학적 주 제를 끌고 나간다. 기연과 불연을 철학적 개념으로서 파악한 것은 마테 오 리치의 신의 존재 증명과 관련된 다양한 논변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 것이다. 한국의 동학연구가들이 천주실의」를 진지하게 읽지 않고 있다 는 사실을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수운이 진지하게 읽고 고투 를 벌인 그 문헌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에게 과연 기연은 무엇이고 불연은 무엇인가? 기연(其然), 즉 "그 러하다'는 것은 시공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잡다한 이벤트 중에서 인과 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체계, 즉 합리적 논리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는 상 식의 세계(the World of Common Sense, the Realm of Causality)를 가 리킨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초경험적인 세계를 수운은 불연(不然)이라고 부른 다.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우리의 감각의 인과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 사실, 우리 동양사상에 이러한 초월과 내재, 본체와 현상, 초이성 과 이성, 비논리와 논리라는 문제는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러셀 의 말대로 모든 것의 오리진(Origin)을 추구하는 사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는 최초의 기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 그 자체가 매우 비과학 적인 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동방인들은 존재의 신빙성을 따지기 위하 여존재의 최초의 오리진을 규명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큰 재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최초로부터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복합적 관 계이다. (...) 그런데 존재의 오리진이나 역사를 생각할 때 (시간은) 흔히 수직적으로 된다. 이런 수직적인 시간관에서는 우리는 항상 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 단절을 만나게 된다. (...)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너무 도 아름다운 질서의 디자인 또한 그밖에 불연의 디자이너가 있게 마련 이라는 것이다.

 

(*) 서학의 근원적인 수직적 사고는 불연의 사기성에 그 특징이 있 다. 이러한 불연의 사기성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수직적 권 위주의(Vertical Authoritarianism)의 상징태이며 이것을 수용할 경우 우 리민족은 왕정적 사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깊은 우려를 수운 은 죽음의 직전에까지 절실이 느꼈던 것이다. 수운이라는 사상가의 애 국애족의 마음과 그것을 표현하는 사상의 깊이에 우리는 경이감과 경외 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총결론은 이러하다: "불연은 기연 이다!"

 

(...) 인류지성사의 발전은 결국 불연을 기연화하는 과정이었다. 비이 성적인 것을 이성화하면서 이성의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인류의 참다운 과학(Science, 본디 지식Knowledge의 의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내에서의 불연을 기연화하는 프로세스였다. 수운은 죽어가면서도 우리 민족에게 종교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선사하려 했던 것이다. 수운이 있기에만 우리는 고조선과 조선의 동시대성(Contemporaneity), 그리고 무궁한 코리아의 미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용옥 동경대전2」, 통나무 2021, 195~2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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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원불교, 자본주의 시대의 절실하고 원만한 공부법

 

허석:

만약 불법을 중심에 둔 점에만 치중하여 동학 이래의 개벽사상을 계승한 면모를 소홀히 하면, 이는 소태산이 혁신의 대상으로 삼은 과 만약 불법을 중심에 둔 점에만 치중하여 동학 이래의 개벽사상을 거 불교의 모습으로 회귀할 우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 적으로는 교리 해석이나 교학 연구에서 '개교표어'나 '개교의 동기' 이 의미를 간과하거나 그 본의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그 결과는 물 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과 수 행을 강조하는 출세간적 양상을 떨 수도 있구요.

 

원불교가 해외에서 교화하는 과정에 이런 경향이 나타날 우려도 있습니다. 가령 한반도 특유의 개벽사상을 강조하면, 보편적인 불법 을 내세우지 않고 한국적 사상에 치중하여 원불교의 세계화에 걸림 돌로 작용한다는 인식이 해외에 계시는 원불교인들에게 없지 않다 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화의 방편상 당장의 편함이 있을지는 모 르나, 소태산의 본의에서는 멀어지는 큰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고 봅 니다. 214 

 

 

4장 기독교, 사상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이은선:

다시 말하면 이것은 기독교인, 특히 남성들이 역사에 대한 비관과 함께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 의지를 끝까지 버리지 못하 는 것과 관계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이신 목사님은 어 려운 상황에서 살았어도 전 역사와 삶에 대한 마음의 기본적인 정조가 남달랐습니다. 그분에게는 유교의 왕양명과 퇴계 선생님이 이야 기한 '낙(樂)', 즉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많은 문제를 근본 적으로 고치고 싶을지라도 순간순간의 현실의 기쁨과 평안함을 인 정하셨던 거죠. 반면 기독교나 남성문화는 이런 것을 잘 인정하지 못 해서 결국은 내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겁니다. 나 중에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같은 사람 도서구 정신사의 최종 모습이 헤겔이나 하이데거 등에서 “의지하지 않기 위한 의지"(will-not-to-will)를 말하는 차원으로 갔다고 비판 했습니다. 의지를 포기하기 위해서도 다시 의지를 이야기하는, 결국은 자기중심적, 인간 중심적인 사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신의 종말론이나 쉬르레 알리슴 이해를 해석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보고, 그의 의식에 포괄된 동양적 한국적 성격들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봐요.

317

 

제가 앞에서 메리 데일리 이야기를 했지요. 원래 가톨릭 수녀였다가 파계하고 나온 메리 데일리가 래디컬한 여성철학자이자 신학자 로서 "교회와 제2의 성』(The Church and the Second Sex, 1968)이나 『하 나님 아버지를 넘어서』(Beyond God the Father, 1973) 등에서 말하기 를, 페미니즘이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는 문제 에 너무나 골몰하느라 그것보다 더 큰 문제, 예를 들면 우주나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 등은 여전히 남성한테 다 맡기고 사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에겐 그 말이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래 서 어떻게 하든지 여성의 손과 눈으로, 여성의 말로 지금까지 남성들 이 주로 해온 존재론이나 형이상학, 신학적 인식론 등의 물음을 재구 성하는 것이 저의 주된 관심이었어요. 당시에 일반적인 페미니즘은 '여성의 경험'을 굉장히 강조하고 '사유'보다는 '실천'을 말하며, 철 학적이고 신학적인, 좁은 의미의 학문과는 거리를 두기가 십상이었 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편향성을 비판하면서, 여성들 자신의 경험과 했어요.

 

제가 다석 유영모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석 유영모가 '염 재신재(念在神在)' 또는 '궁신지화(神知化)' 등을 말하면서 우리 '생 각'이 있는 곳에서 결국은 초월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며 인간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석은 '심지 관즉사(心之官則思)', 즉 우리 마음과 존재의 핵심 과제는 사유하는 일 이라고 한 동아시아 유교의 맹자의 전통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도 제가 이해하기에는, 다석을 비롯해 윤성범 선생님 등 한국의 남 성신학자들은 여전히 서구의 전통적 기독교 사유 안에 머물러 있습 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석의 지난한 일 기라든가 글들의 해석에 매달리기보다는 다석이 다석일지』를 써서 오늘날에 큰 의미를 주었듯이 여성인 나 스스로의 일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벽사상가 김일부(金一夫)는 일부(一夫)라는 호가 말 해주듯이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동아시아적 우주관이 담긴 『주역(周易)』을 다시 전복해 『정역(正易)』으로 그려냈는데, 저는 그런 그의 웅지를 좋아하죠. 그래서 한문 독해보다도 더 어려운 "다석일지』 읽기에 매달리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매일의 삶에서 깨달은 바를 적어느가는, 예를 들면 여성 내지는 이은선의 『정역일지(正易日誌)』를 써서 이 우주와 존재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올바르게 하고(rectify), 정(正)하게 하고자 시도하는 게 진짜 다석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327

 

이정배:

지금 보편과 특수의 문제, 수용자와 전달자의 문제를 잘 정리 해주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개벽사상, 서세동점 시 기우리 민족에게서 발아한 사상을 포착해서 그 의미를 자신과 동화 시키는 모험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내세나 개인만을 위하 는 차원에 머무르면 우리 민족에게서 퇴출될 수밖에 없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개벽사상을 이렇게 환원해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유 교의 민중화 혹은 실천적인 유교라고 정의해도 좋을 듯합니다. 기복 적인 종교를 이 세상과 삶을 바꾸는 생활종교로 만드는 기폭제가 되 었다는 점에서 개벽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특히 동학 개념에서 '시 천주(天主)'의 '시)'라는 개념을 장일순 선생님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시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지요.

 

수운 선생의 '시' 자 풀이를 보면 '내유신령)' '외유기화(가 有氧化)각지붕이(各) 이렇게 세 측면이 있습니다. 수운 선생 은 '내유신령'을 두고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이 깃들어 있고 그 동일한 영이 우주에는 기화로 펼쳐져 있으며, 우리들 안에 있는 영과 우주의 기는 사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서 절대로 나누거나 떼어놓거나 할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하늘()에 대한 해석은 하 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의 개념을 보면서, 유교가 '내유신령'을 모 른다는 수운 선생의 말씀을 유교에 인격적인 신의 개념이 부족하다 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를 향해서는 '외유 기화', 즉 우주 속에도 인간 내면의 영과 같은 거룩한 신성이 내주한 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애니미즘 차원을 제거, 탈각했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오로지 사적 욕망을 위한 물적 토대로 여겼다는 문제의식이 녹아 있지요. 각지불이는 이를 극 복하기 위한 지혜이자 방책으로서 우주를 사사화(私事化)할 수 없다 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전체와 인간 개체의 공속성(共屬性)에 대한 이 해라 봐도 좋겠습니다. 전체와 부분을 거듭 분리해 이기적인 종교, 개인 및 국가의 영달을 위한 종교로 치닫는 서구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고요. 여하튼 저는 이 개념을 종래의 제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사 상적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시천주'의 시는 인격과 비인격, 전 체와 개체를 아우르는 종교적인 미래를 열어놓은 것이죠. 339

 

무위당 장일순의 '시' 이해

 

해원 선생님의 말씀을 보니까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业侍入主山)'라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윤님 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제비 알이나 새알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고 풀잎이나 곡식에 이삭이 났을 때 겪지 말아야 되거든요. "새알이나 제비 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봉황이 날아 깃들 것이고, 풀의 싹이나 나무 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숲을 이룰 것이고, 그렇게 처세를 하면 그 덕이 만물에 이른다. 미물까지도 생명이 함께 하신다고 모시게 되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셨더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새알을 깨고, 팀을 나눠 경쟁 해서 남이 안 보니까 남의 밭에 나는 콩 싹을 잘라버리는 것들이 제국주 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제국주의란 것이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모신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작은 것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그러니까 옛날에 착한 분들이 써놓은 책들을 보면, 특히 우리나 라의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말씀을 보면 그 많은 말씀이 전부 시(侍)에 관 한 말씀이라. 그러니까 이 구석을 들여다봐도 시(侍)고 저 구석을 들여다 봐도 시(侍)고 시(侍) 아닌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구석에 가서도 그거 하나만 보고 앉아 있으면 편안한 거라.

-장일순 '시에 대하여,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 2016, 80~81면 338

 

이은선:

아까 백낙청 선생님이 끊임없이 불교적 각(覺), 깨달음을 얘기하셨 지만, 저는 그것은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적 사고가 될 수 있다고 봄 니다. 그대신에 민중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가 『논어(論語)』의 유명한 '경사이신(敬事而信)'을 실천하듯이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는 일과 사물을 존중하고 그것들이 구체적인 물성의 몸으로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지속적으로 경(敬)하게 되면, 그리고 그런 기(氣)가 축 적이 되면, 거기서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생긴다고 봐요. 그렇게 물 질을 진정 소중히 여기게 되면, 함부로 생산하지 않고, 하나를 만들 어도 정성으로 좋게 만들어서 오래 쓰려고 하고, 또한 사람의 일에서 도 이미 태어난 사람을 두고 종족이나 집안, 성별, 학식 유무에 상관 없이 그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요. 히브리 성경 신 명기」에 보면, 인간의 경우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의 시신이라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했는데, 이렇게 몸과 형체 로 시공간에 존재하게 된 대상에 대한 존숭이야말로 그것들이 진정 '천상의 빵'이 되게 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오랫 동안 축적되어야 새로운 참인류세가 도래할 수 있고 지구와 전우주 도 구원되는 것이지, 일론 머스크가 외치듯 다 써버린 지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자는 것은 해법이 아닌 듯합니다.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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