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부의 상상력: 바이오크라시, 비인간 생명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면
안병진
서문
민주주의는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 팬데믹, AI 등이 야기하는 현기증 나는 대전환 의 시대에 기존의 정치와 경제정책, 사회제도가 과연 적절한가 에 대한 회의감과 불안감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 히 자본주의의 효용성은 어느 때보다 더 의문시되어야 할 만큼 그 영향력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정말로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선두에서 탐구하는 리더는 슈퍼스타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다. 나는 경 제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이 질문을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사회적 상속 등 피케티가 제 안하는 급진적 경제 프로그램이, 과연 그에 상응하는 세계관과 정치적 메커니즘으로의 대전환을 자극할 상상력과 운동 없이 도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렇게 기대치가 큰 경제 프로그램이 현실 정치 지형의 벽에 부단히 막힌다면, '열망-실 망'이라는 사이클의 덫에 빠져 결국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배 타적 애국주의의 복수를 양산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는 경제 적 대전환의 상상력은 물론, 정치적 대전환의 상상력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정치 과정에서 경제적 대안도 만들어지기 때문이 다. 데이비드 플롯케가 강조하듯, 정치는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 고 조직하는 요소다. 11
이후부터는 베리의 바이오크라시 개념을 생명공화주의 정 치질서로 바꾸어 부를 것이다. 바이오크라시라는 개념은 과학 전문가의 통치 혹은 부정적 의미의 훈육적 통치 기제를 가리 키는 생명정치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크라시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명 존 재들의 공존공영을 의미하는 세계관, 담론, 정치 연합, 제도적 배열 등을 의미한다. 생명의 공존공영이라는 화두를 나는 익숙 한 개념인 공화주의를 확장해 풀어볼 것이다. 공화는 이미 민 주주의, 자유주의의 개념을 포괄하면서 모든 존재의 더 다원적 이고 더 동등한 공동체를 합의한다. 그렇다면 보다 확장된 공 화로서, '모든 존재'에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생명까지 포함 되는 공동체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를 '생명공화 주의 정치질서 bio-republican political order'라 부른다.
내가 바이오크라시를 공화주의와 정치질서의 결합으로 표 현하는 이유는, 이를 단지 공화주의라는 이념의 영역으로만 국한해 이해하는 시각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흔히 민주주의를 단 지 주의主義로만 이해하면서, 인민주권의 이념인 동시에 부단 히 열린 정치 과정이라는 민주주의의 두 측면에서 후자를 배제 하곤 한다. 이 책은 이념과 정치질서라는 두 측면의 결합을 더 중시한다. 13
1장 모든 '사람'만이 평등하다
ㅡ 미국 민주주의 모델, 참여와 심의의 이중 위기
왜 상원과 민주주의 제도는 시조들의 의도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귀결되었는가? 이는 설계도 자체의 내재적 결함인가, 아니면 시조들의 의도를 왜곡한 후대 정치 과정의 부작용인가? 그 대답으로서, 제일 근원적으로는 건국시조들의 선현여능 개 념 근저에 깔린 사상적 배경을 의문시해볼 수 있다. 건국시조 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타자'를 수용하기보다는 지배하고 배제 하는 자산 소유자의 자유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현재의 시민 들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장기주의적 미래를 배제하는 민주주의를 낳았다. 단지 미국식 대통령제의 일부 제도적 결함으로 인해 결손 민주주의가 된 것이 아니다. 타자를 소 유하고 지배하는 세계관과 정치관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애초 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민주주의 결손을 치료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유 관념에 기초한 민주주의 개념 자체에 수술칼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38
하지만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이해관계의 대립, 양당의 독 점적 이해관계의 일치로 인해 이중의 과제는커녕,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등의 '사소한' 개혁마 저 거의 불가능하다. 이 틈새는 트럼프와 같은 위험한 비자유 주의 포퓰리스트들에게 부단히 연료를 제공한다. 아니, 오히려 슐레진저가 말한 종말론적 전망이 힘을 얻을수록 극단적 파시즘이 더 암약한다. 최근에는 심지어 반反기후 포퓰리즘만이 아 니라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와 기후위기에 대한 디스토피아 적 전망을 연료로 생태 파시즘 운동마저 성장하고 있다. 이미 유럽 22개 극우 정당 중 15개 정당이 생태 파시즘 담론을 구사 하며, 이 담론은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테러에 활용되었다. "침략자들을 죽이고 환경을 보호하자"라는 당시 테러리스트의 선언문은 몇 달 후 미국 텍 사스주에서 벌어진 히스패닉계 인구에 대한 테러에서 재등장 했다.
현재 미국이 마주한 이중의 위기는 건국시조들의 세계관, 가치, 제도적 편견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기 존의 타자 지배적 자유와 도구로서의 자연관을 극복하는 세계 관을 새로운 제도로 반영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즉 인간 중심 의 민주주의관과 자연관을 인간, 비인간 주체들에게 더 확장 적인 정치질서로 변경하는 새로운 가치와 정치관으로의 전환이다. 61
2장 사상의 세 저수지
ㅡ 베리, 누스바움, 요나스와 생명의 정치질서
사회는 지배적 가치와 담론, 정치질서 그리고 경제 인프라까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이 중 정치질서와 경제 인프 라는 만연한 오작동을 이미 대대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71
누스바움과 센은 역량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 는 기본 역량basic capability이다. 이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게 하 는 타고난 능력을 말한다. 둘째는 내적 역량internal capability이다. 이는 글쓰기처럼 기술적으로 개발된 특성이다. 셋째는 결합 역량으로서 내적 역량과 관련된 활동을 실제로 선택하는 데 적합 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목록에는 인간의 자유 로운 삶에 대한 기존 목록만이 아니라 다른 종과의 관계에 대 한 역량도 포함된다. 누스바움과 센은 이를 "동물, 식물, 자연계 에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 것"이라 규정한다. 78
동물의 내면세계에 대한 공감과 역지사지를 최근 생물학 의 성과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누스바움의 글은 그의 학문 역정 에서 놀라운 이론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누스바움의 동물 종 의 정의론으로서 역량 접근법은 이후 모든 생명체로 확장될 수 있는 풍부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다. 87
3장 미래 세대와 비인간 생명을 위한 제4부
ㅡ 미래심의부 구상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새로운 이야기 구조에 공감하는 이 들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난다면 어느 시점에 인류는 민주주의 를 넘어선 물질적 실험의 분기점을 만들어갈 것이다. 더구나 각종 기후 재난이 갈수록 심화하고 이를 틈타 생태 파시즘 등 의 참주 선동 세력이 바이러스처럼 출현하는 시기에는 반대로 생명 존중의 가치를 중시하는 대안적 정치질서에 대한 요구에 도 가속이 붙을 수 있다. 초보적 형태로라도, 전 세계 어딘가에 서 비전 있는 전환적 리더십이 이끄는 대안적 생명 정치질서 실험은 시민들로부터 대안적 흐름을 더욱 확장하고 구체화할 수 있다. 105
수탁자는 현재와 미래 인간, 비인간의 지속 가능성 가치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 풀에서 선정한다. 예를 들어 세대 간 정의나 생태 가치를 연구하는 학문 공동체(지구법학계나 생물학계), 동물권과 식물권 비영리 조직, 미래학 계 등을 기본 풀로 한다. 선정은 각국의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 만 한국의 경우에는 대통령과 국회의장, 헌법재판소장이 각기 2인씩 지명하여 6인, 국회 미래위원회 위원장 추천 4인, 관련 학회 추천 5인에 당연직으로 전직 대통령과 전직 총리, 전직 환 경부장관 등까지 더해 총 20인 내외로 구성할 수 있다. 임기는 8년으로, 중립성과 다양성을 일정 수준 보장할 필요가 있다. 또 한 이 20인은 추첨으로 선출된 시민 배심원단에 의해 최종 인 준 여부를 결정한다. 시민 배심원단 가운데 3분의 2가 이의를 표할 경우에는 후보를 새로 추천해, 위로부터의 엘리트 선발에 따른 공동체 내 폐쇄성 위험을 조금이나마 방지한다. 시민 배 심원단의 비공개 청문회와 최종 인준을 통해 혹시 있을 수 있 는 정치 세력 간 담합을 막고 당파성이 강한 전문가를 걸러낼 수 있다면, 제4부의 권위는 더 강화될 수 있다. 130
4장 모든 종들의 정치로
ㅡ 생명공화주의 정치적 질서 만들기
헌법에 비상사태와 같은 예외적 상황을 규정하는 문제다. 기후 파국이 도래했는데도 이에 대해 헌법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거나, 반대로 기후 파국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데도 행정부 가 이를 비상사태로 규정하여 시민의 법률적 권리를 제한하려 하는 경우, 시민권의 수호와 비상사태의 대응이라는 딜레마 속 에서 대혼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 뉴올리언 스주 카트리나 재난이나 코로나19 유행병 당시 우리는 곳곳에 서 시민권이 위협받는 현실을 경험했으며, 앞으로 지금까지와 는 차원이 다른 비상사태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진다. 마크 코켈버그는 "그린 리바이어던』에서 현기증 나게 발전하 는 AI가 기후위기의 기술적 해결책을 만들 수도, 반대로 권위 주의적 해결책의 유혹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갑 자기 맞이한 붕괴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에 빠진 시민과 정치인 은 권위주의적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브루스 애커먼의 문제의식에서 하나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애커먼은 테러와 같은 비상사태에 한해 발효되는 비상 헌법을 규정해 위기에 대응하는 특별 조치를 허용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권리가 영구적으로 침해 되지 않게 하는 균형을 제기한 바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비상 기간에 대한 대통령의 일방주의적 결정을 특히 경계한다. 따라 서 비상 기간을 규정하고 연장하는 등의 사안에서 의회 절대다 수의 승인을 얻도록 하여 의회의 엄격한 권한을 강화하고, 각 총 시민권 침해 가능성이 있는 조치들에 대한 법원의 견제와 감독 또한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앞으로 더 중대한 대규모 기후 파국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 은 만큼 비상 헌법은 새로 고민될 필요가 있다. 단, 헌법상의 문 구만이 아니라 제4부의 축적된 경험을 통해 의회와 시민사회 모두 기후 파국의 비상사태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형성할 수 있다. 151
그러나 생태대로 이행하기 위한 제도를 갖추어도, 생태적 세계관이 마음의 습속이 되고 매력적인 삶의 방식이 되지 않고 서는 기존 민주주의의 지평 너머를 보기 힘들다. 생태적 공유 공간과 시민교육, 교육기관의 전면적 재편 등은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로의 전환 및 지속 가능한 마음의 에너지를 만들어낸 다. 1989년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을 몰락시킨 가장 큰 요인 은 비무장 대중 저항이 장기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대중적 믿음이 확산된 것에 있다. 철권통치조차 시 민들의 믿음 앞에서 비폭력에도 붕괴했던 것이다. 기후위기의 대안이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라는 대중적으로 공유된 믿음이 형성되면 실질적 제도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161
에필로그
생명과 사랑의 정치학을 위하여
도널드 트럼프, 2024년 11월 5일 미국 제47대 대통령 당선.
바이든 행정부의 '신냉전 자유주의' 시대를 넘어 보다 생태 적 공존공영의 시대로 나아가는 상 중 하나로 제4부를 제안하 는 이 책의 교정지를 보던 중,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자막이 텔레비전 화면에 떴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에 힘 이 빠지면서 절망감이 엄습한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이제 매일매일 트럼프 지진의 충격파에 전율하고 있다. 비록 신재생 에너지 산업이 대세인 현실은 되돌리기 어렵겠지만, 이미 집권 1기 때도 화석연료 산업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던 트럼프였 기에 향후 기후 정치질서로의 진전에 타격을 가져올 것으로 예 상된다.
세계는 마치 냉전이 부활한 듯 바이든의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빚어내고 있는 이 심각한 갈등의 시기를 탈피하거나 극 복해 진전해가기는커녕, 오히려 냉전 이전의 '도금 시대'(탐욕 스러운 자본이 지배하는 정글 자본주의)나 각자도생의 보호주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트럼프는 캠페인을 도 운 화석연료 산업과 우주 산업 등 거대 자본에 이익을 돌려줄 것을 거리낌 없이 공언하고 있다. 동시에 동맹들의 팔을 비틀 어 보호비를 얻어내고 중국에 관세 전쟁을 예고하는 등 미국이 선도적으로 만든 기존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 고 있다. 이러한 퇴행의 시대에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로의 이 행이란 꿈만 같이 들린다.
윤석열, 2024년 12월 3일 내란 기도.
트럼프 재선의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몰아닥치기도 전에 더욱 초현실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책의 마감을 목전에 앞두고 최종 교정지를 받아 든 지금도 이 기묘한 현실이 체감되지 않 는다. 과거 히틀러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 대계 독일인 정치학자 카를 뢰벤슈타인은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미국 국경을 넘는 순간 민주주의에 대한 죽음의 키스로 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국만은 이제껏 예외로 기 억되어왔다. 자의적 통치를 남발한 박근혜 행정부를 시민과의 회가 헌정주의 방식인 탄핵으로써 평화적으로 교체한 사례가 이를 웅변한다. 하지만 미국 국경 내에서조차 오작동을 일으키1
던 대통령제는, 국경 바깥에서 자리 잡는 데 예외적으로 성공 했다고 평가되던 한국에서조차 죽음의 키스로 변했다. 두 국가 에서 대통령제는 어떤 형태로든 대대적 수술이 불가피하다. 끝 도 없는 퇴행의 시대에, 자유주의적 헌정주의의 방어나 개혁을 넘어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로의 대담한 이행이란 그 어느 때 보다 꿈만 같이 들린다.
오늘날 대위기에 직면한 미국과 한국의 정치질서가 긴급 한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일단은, 무엇보 다 당장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제왕적 행정부의 통치를 예방 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대대적 개혁이 우선이다. 트럼프 행정부 는 트럼프 자신을 비롯해 주변의 많은 참모들까지 단일 행정부 론이라는 비자유주의 이론을 신봉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행정 부 수반인 대통령이 행정부의 권한을 행사할 때 의회의 견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 이론은 미국 건국시조의 견제와 균형 원 칙을 침해한다. 더구나 이론을 제기한 존 유조차 트럼프 진영 의 무제한적 행정부 권력 행사 시도에 대해 비판적이다.'
윤석열 또한 한국판 최악의 단일 행정부론을 제기했다. 그 는 의회의 빈번한 탄핵 시도를 빌미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대 통령의 비상 권력과 결단을 주장했다. 2024년의 미국과 한국에 는 당장 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견제할 각종 조치를 시급히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는 자유주의적 헌정주의 민주 주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구현해나가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의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강화하거나, 행정부 밖에서 독립적 권한을 지닌 기구가 감찰 기능을 하게끔 하는 개혁 조치들이 일단은 급선무다. 물론 이는 시민에 대한 의회의 반응성과 시 민 개입을 높이는 가운데 진행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검찰 및 사법부에 대한 시민의 다양한 통제 기제 또한 양국이 훨씬 더 강화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 조치들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향후 전 세계는 기후위기와 AI 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제도나 일상이 붕괴될 예 외 사태를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트럼프와 윤석열이 만들어내는 가짜 예외 상황과 다른 진정한 예외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은 가공할 만한 비상 권력(그린 리바이어던')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단일 행정부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쓰고자 했던 이유 또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트럼프와 윤석열 행정부의 초법적 행위가 향후 더 일상화될 경우에 민주주의가 아예 붕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붕괴의 임계점을 넘어서기 전에 전환 의 정치를 현실화할 방법은 없을까? 그 작은 씨앗은 토마스 베 리가 말한 새로운 이야기와 이를 반영한 정치적 상상력의 실험 에서 찾을 수 있다. 야론 에즈라히는 "현존 민주주의가 맞닥뜨린 정치적으로 긴급한 질문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증진하고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대안적으로 모색하는 정치적 상상력들 중에서 견제와 균형의 정치질서를 어떻게 발견하느냐는 것"이 라고 말한다.? 나는 에즈라히의 질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민주 주의 세계관과 정치 기제 - 한동안 잘 작동했고 우리에게 필 요했던 정치적 상상력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면서, 평화를 증진하고 다양한 동등성 속에서 견제와 균형의 생명 정 치질서를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를 묻고자 했다. 제4부와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는 질문의 답이자, 필요한 정치적 상상 으로서 제안된 것이다.
제4부와 생명공화주의 정치질서는 현재의 정치적 부족주 의, 각종 정치적 교착 상태와 너무나도 동떨어진 규범적인 미 래 목표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먼 미래의 초현실적 SF 시나리오 같던 주제들이 현실로 실행되는 '극단적 가속'의 시대다. 기온 상승 폭이 산업 화 이전보다 섭씨 1.5도를 넘어설 경우 가속화할 기후위기 시 나리오는 이제 '투모로우」 같은 재난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기온 상승 폭이 2024년 이미 섭씨 1.5도를 돌파했 으며, 향후 50년 내에 기온이 섭씨 2도 이상 상승해 티핑 포인 트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구테흐스가 2024년 7월 제78차 유엔 기후목표 정상회의에서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는 가고, 지구가 펄펄 끓는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강력하게 경고한 이유 다. 이 같은 기후위기 과제만으로도 인류가 대처하기에 너무나 방대하고 압도적이지만, AI 과제 또한 그에 못지않다. 과거에는 먼 미래를 그린 SF 영화 주제였던 AI도 이제 벌써 되돌릴 수 없 는 분기점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구글X의 신규 사업 개발 총책임자인 모 가댓은 지금부터 중·장기적으로 더 나은 가치가 사회에 지배적으로 형성되어야만 미래의 AI가 좋 은 가치를 가진 존재로 움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두 가지 이슈는 지금까지 인류가 접해온 시공간의 감각과 는 다른 차원을 작동시킨다. 이 거대한 가속과 되돌릴 수 없는 분기점을 앞둔 이 이슈들에 대응하는 데 있어, 근대의 감각으 로 만들어놓은 3부 간의 견제와 균형, 하원의 신속한 반응성과 상원의 심의 이분법 등의 기제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지 모른 다. 이제는 과학적 상상력에 비해 너무나 지체된 사회적 상상 력이 그 거대한 격차를 따라잡을 순서다. 현실은 우리가 상상 하는 만큼 진전된다. 오래전 베리는 아예 민주주의 개념 자체 에 대한 급진적 도발을 감행하면서 생태대, 지구법, 바이오크라시 같은 생경하고 이상주의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그가 예언한 미래는 윌리엄 깁슨의 표현처럼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마찬 가지로 그가 던진 바이오크라시의 화두 또한 현실화할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에 와 있다. 이제는 새로운 질문과 답을 긴급히 던져야 하는 시점이다.
베리의 우려가 현실이 된 지금, 다시 「서문」에서 인용한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 의원과 장혜영 전 의원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 의원은 미래 세대가 맞이할 "끔찍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 윤리를 제기했으며, 장혜영 전 의원은 이 끔찍한 가능성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전환하기 위 해 질문을 던졌다. 이제는 두 밀레니얼 세대의 질문에 이론적 이고도 실천적으로 답을 탐구해나갈 차례다.
두 사람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치열하게 모색해나가는 동 력은 베리의 우주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저 모든 취약한 존 재에 대한 염려와 연결의 감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 서 나는 토마스 베리와 마사 누스바움의 공통 감각으로서 다 른 존재에 대한 염려와 친교, 상호 돌봄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사랑과 영성의 사유 방식이다. 서구 근대의 주류 정치학은 합 리적 소통과 제도적 배열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마음이라는 중 요한 토대를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한국에서도 서구화에 치중 하면서 과거 동학 등이 제시한 우주론과 생명 사상을 망각하고 말았다. 기존 제도의 정치학과 반대로 혁명적 사랑의 정치학은 생명공화주의로 가는 연료다. 파커 J. 파머가 말한 것처럼, “기 쁨은 사랑의 선물이다. 슬픔은 사랑의 대가이다. 분노는 사랑하 는 대상을 지키는 힘이다.” 기쁨과 슬픔, 분노를 동시에 안고 모든 취약한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확장되어갈 때 생태 대로 나아갈 수 있다.
아직 국내외적으로 생명공화주의의 가치와 사랑의 정치학 은 너무나 미약하다. 생태대는커녕 기업 국가가 강화되고 기술 대의 장기 지배로 이행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바이오크라시는 커녕, 제4부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비극적 운명으로 귀결된 프로메테 우스의 꿈만큼이나 허망할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알베르 트 슈바이처의 예견이 오늘날 현실에 더 부합하는 듯 보인다. "인간은 미래를 예견하고 앞지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마침내 지구를 파괴할 것이다.""
베리는 매우 신랄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한다. 그는 만약 비인간 생명체들의 의회가 있다면 그 의회의 첫 활동은 인간을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투표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 점에 서 민주주의를 넘어 바이오크라시로 최종 이행한다는 생태대 의 꿈은 어쩌면 반인간주의의 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토 록 인류의 인간중심주의에 통렬한 자기비판을 내놓았음에도 토마스 베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강, 2024년 12월 7일 노벨상 수상자 강연.
오래전 토마스 베리의 희망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나는 아직 희망이란 단어를 포기할 수 없다. 트럼프와 윤석열의 폭거로 점철된 절망의 연말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희망의 연말이기도 하다. 한강은 "희망 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스웨덴 스톡홀름 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담담하게 밝 혔다. 이어 열린 수상자 강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한강의 말처럼,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하 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한다. 한강은 강연에서 이런 질문 또 한 던졌다.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한강의 질문들은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현재 그리 고 미래가 동시에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같다.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지 를 묻는다. 한강이 죽은 자를 언급할 때, 나는 머릿속으로 토마 스 베리를 떠올렸다. 2009년 세상을 떠난 그는 아마 한강의 인 간 종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다음의 구절을 다시 들려주며 화 답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홀로 미래의 일을 결정하고 있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지구 공동체에 의 해 구체화되는 미래는 전체 지구, 즉 지구의 모든 구성원, 인간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구성원과 생물학적 구성원 그 모두가 갖고 있는 유기적 기능의 통일성에 의존한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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