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발췌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 1971
다시 보기는 되돌아보는 행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 새롭게 비판적인 방향에서 오래된 텍스트를 접하는 행위를 말하며, 여성에게는 단지 문화 역사의 한 챕터 이상을 의미하는 생존 행위 이다. 그 전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을 자기 인식의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추동력 은 단순히 정체성 탐색에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남성지배사회 의 자기 파괴성을 거부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문학을 급진적으로 비평하고자 하는 충동에 빠진 페미니스트는 무엇보다 이 일을 우리 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자신을 어떻게 상상해왔 는가, 우리의 언어는 우리를 어떻게 해방했고 또 어떻게 가두어왔는가. '이름 짓기'라는 행위 자체가 지금껏 어떤 방식으로 남성의 특권이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름 짓고, 그리하여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실마리로 삼을 것이다. 모든 새로운 혁명마다 낡은 정치 질서가 다시 살아남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성 정체성의 개념 변화가 필수이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알아 야 하고, 우리가 이제껏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전통 을 물려주는 대신 우리를 향한 전통의 장악력을 깨뜨려야 한다. 27
여성들이 경험한 피해자성과 분노는 모두 현실이고, 현실적인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은 우리가 사는 환경 곳곳에 존재하고 사회와 언어와 사고 구조로 스며든다. 다른 누구보다 시인들이 그곳을 탐 색하고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 곳에 안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 시인들은 벌써 페미니스트 철학자 메리 데일리가 가부장제 경계 안의 '새로운 공 간'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생 겨난 정신적 활력을 통해 작업하고 있다. 여성들은 시를 통해 여성 들에게 말하고 있고, 또 여성들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새롭게 생겨 난 용기를 품고 서로 이름을 짓고, 사랑하고, 위험과 슬픔과 기쁨을 공유한다.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보면 현재 글을 쓰는 서구 남성 시인들의 작품은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숙명 론적 비관주의를 드러내며, 여성(과 자연)을 한편으론 구원의 대상 으로, 또 한편으로는 위협적인 요소로 사용하는 익숙하고 낡아빠진 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또 요즘 영화가 드러내는 성적 야만성에 부 합하는 남근 중심 사디즘과 노골적인 여성혐오라는 새로운 흐름도 보인다. 남성들이 쓴 '정치적인' 시는 여전히 남성 집단 사이 권력 다툼의 한가운데 좌초되었고, 미국의 제국주의나 칠레 군사정부를 규탄하면서 억압당한 이들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성적 억압 체제의 일부분인 남성으로 남아 있다. 적은 언제나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고, 투쟁은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진다. '비정치적인' 시에 스며든 고립과 자기 연민, 자기 모방의 분위기를 보면 남성의 시에는 새로운 시적 영감보다 남성 의식의 심오한 변화가 더 시급함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의 창조적 에너지는 빠른 속도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남은 것은 파괴를 향한 자가발전 에너지다. 우리 여성들은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일이 있다. 49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1976
(지상의 모든 인간은 여성에게서 태어난다. 모든 여성과 남성이 공유하는 한 가지 통일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경험은 바로 우리가 한 여성의 몸 안에서 펼쳐지며 보내는 몇 달간의 시간이다. 어린 인 간은 다른 포유류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양육에 의존하고, 인간 집단 내 오래전부터 확립된 노동 분업 탓에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키우는 일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거의 모든 책임을 떠 안았기에, 우리 대부분은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실망, 힘과 다정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평생,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이 경험의 각인을 품고 산 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재료 는 이상하리만큼 부족했다. 우리는 들이마시는 공기와 여행하는 바 다보다 모성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더 많이 알지 못한다.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 아래서 문화를 만들고, 발언하고, 이름을 지은이들은 어머니의 아들들이었다. 남자들의 마음에 한 여성에게 생명 자체를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끈질기게 달라붙고, 아들들이 '여성에게서 태 어났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보상하거나, 부정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많다. 128
어머니가 된다는 것과 아버지가 된다는 것
모성의 두 가지 의미
.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아이들에 대한 잠재적 관계로서 모성
. 그 잠재성 그리고 모든 여성을 남성의 통제 아래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제도로서의 모성
어머니의 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 인간의 생명을 낧고 기르는 생물학적 잠재력이나 능력.
. 남성이 여성에게 씌운 마력, 여성에게 통제당하고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남성들의 두려움.
가부장제 안 에서 모성은 강간과 성매매와 노예제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 이 아니다. (이를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별, 인종, 노예제도와 같은 억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모성은 정복과 농노제, 전쟁과 조약, 탐험과 제국주의의 역사 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역사와 이데올로기가 있다. 모성은 부족주의나 국가주의보다 더 근본적이다. 내가 엄마로서 갖는 개별적이고 사적으로 느끼는 고통, 그리고 내 주변 여성들과 이전 세대 여성들의 개별적이고 사적으로 보이는 고통, 우리 계급이나 피부색이 어떻든 모든 전체주의 체제와 모든 사회주의 혁명에서 남성이 여성의 생식 능력을 규제하는 것, 남성이 피임과 출산 능력과 낙태, 산과학, 부인과학, 자궁 외 생식 실험을 법적으로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부장제의 필수 요소이고 어머니가 아닌 여성의 지위를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155
특별한 한 아이 혹은 여러 아이와 강렬한 상호관계를 맺는다는 면에서 모성은 여성이 겪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 영원한 정체성은 아 니다. 40대 중반의 주부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실직 자가 된 기분이에요." 그러나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한때 엄마였던 우리가 영원히 엄마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아이를 놔 주는' 과정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지만 가부장제 문화 를 거스르는 반역 행위다. 그러나 아이를 놔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 다. 우리에겐 다시 돌아갈 자신이 필요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가부장제와 심리학이 결탁해 여성성 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린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와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 체와 신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성격의 변화도 느낀다. 종종 자기절제 와 자신을 불로 지지는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했 다'라고 여겨지는 자질들을, 즉 인내심과 자기희생과 한 인간을 사 회화하기 위해 사소하고 틀에 박힌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의지 등 을 습득한다. 또한, 놀랍게도 우리가 알았던 그 어느 감정보다 더 강 렬하고 격한 사랑과 폭력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낀다. (유명한 평화주 의자이자 엄마인 한 여성이 최근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라도 내 아이에게 손을 대면 죽여버릴 겁니다") 159
부족이나 봉건사회에서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진지한 의무를 줬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의무가 없다. 그러나 아이들과 집에 있는 여성 또한 진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여성은 그저 모 성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남성은 절대로 하지 않을 허드렛일을 하 고, 대체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비판하면 안 된다. 그래서 아이 와 엄마는 똑같이 가치하락을 당한다. 오직 유급 노동을 하는 성인 남성과 여성만이 '생산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권력관계는 그저 가부장제 사회의 권력관 계를 반영한다. "너에게 어떤 일이 좋은지는 내가 잘 아니까 너는 내 가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은 "너를 그렇게 시킬 수 있으니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과 구별하기 어렵다. 권력이 없는 여성 은 언제나 어머니 역할을 권력을 향한 인간적인 의지를 위한 수단으로,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요구를 세상에 다시 돌려줄 좁지만 깊은 통로로 이용해왔다. 아이를 씻기려고 팔을 붙잡아 끌고 가고, 싫어하는 음식을 '한 입만 더' 먹으라고 구슬리고, 협박하고, 뇌물을 주는 것에는 '좋은 엄마 노릇'이라는 문화적 전통에 따라 아이를 키 우는 일을 넘어선 뭔가가 있다. 아이는 먼지와 음식처럼 혼자서 움 직일 수 없는 비활성 물질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행사할 수 없게 제한당해온 여성이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바꿀 수도 있는 현실의 한 부분, 세상의 한 존재이다." 161
처음 임신했던 스물여섯 살, 임신 사실을 신체적으로 알고 싶 지 않아 도망치면서 동시에 지성과 천직으로부터도 도망쳤던 그 젊 은 여성의 몸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나는 엄마가 된 사실 때문이 아 니라 엄마 됨이라는 제도 때문에 나의 진짜 몸과 정신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음을 깨닫는다. 162
이 책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지겠지만, 나는 클리토리스, 가슴, 자궁, 질에서 분출되어 확산하는 강렬한 관능, 달의 주기를 따르는 월경, 생명을 잉태하고 결실을 보는 등 여성의 신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생명 활동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믿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는 여성의 생명 활동을 좁 고 구체적인 내용에 가둬왔고, 그런 이유로 페미니스트의 시각도 여 성의 생명 활동에서 뒷걸음질쳐왔다.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우리의 신체성을 운명이 아닌 하나의 자원으로 보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 는다.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몸의 통제력을 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통제가 전제조건이지만) 우리 신체성의 통합과 공명 을 이루고 자연 질서와 유대를 맺으며 우리 지능의 육체적인 토양과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남성은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능력을 지속해서 질투하고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감정은 반복적으로 여성의 창조성 을 증오하는 형태를 띠었다. 여성들은 모성에 집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우리의 지적이고 미적인 창조물은 부적절하고 하찮고 부도 덕하고, 또는 '남자처럼' 되고 싶거나 결혼과 출산이라는 성인 여성 의 '진짜' 임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말을 들어왔다. '남자처럼 생각한다'라는 말은 몸이라는 덫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여성에게 칭찬이자 감옥이었다. 지적이고 창조적인 수많은 여성이 자신은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여성들과의 유대 및 자신의 신체성을 경시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 성에게 몸은 너무도 큰 문제라서 신체 없는 영혼처럼 떠다니는 편이 더 수월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몸을 향한 이러한 반응은 이제 여성의 생명 활동에 내재한 실제적인 힘을 문화적으로 왜곡된 힘과 달리 새롭게 탐구하려는 노력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기로 하든지 이 힘은 절대로 어머니의 기능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이 책 전체에 이어질 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국, 내가 열중한 것은 한 여성 개인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여성과 함께 마음과 몸의 분리를 치유하겠다는 결심,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서서히 나는 '나의 모성 경험에 모순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164
어머니와 딸
여성은 온기와 자양분, 다정함과 안정과 관능과 상호 교감에 대 해 가장 먼저 어머니로부터 배운다. 한 여성의 몸을 다른 여성의 몸 으로 감씨는 이 초기 경험은 조만간 부정당하거나 거부되고, 숨 막 히는 소유욕이나 거부, 함정, 금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처음에는 완 전한 세계다. 물론 남자아기도 다정함과 양분과 상호 교감을 여성의 몸에서 처음 알게 된다. 그러나 제도화된 이성애와 제도화된 모성은 여자아이가 '정상적인' 여성으로 규정되고 싶다면, 다시 말해 가장 강렬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남성에게 보내는 여성이 되려면, 첫 번째 여성에게서 경험한 의존성과 에로티시즘, 교감의 느낌을 남성에게 옮겨야 한다고 요구한다. 166
어머니와 딸은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식을, 즉 잠재적이고 전복적이고 언어 이전의 지식을, 언어 전승을 뛰어넘어 서로 교환해 왔다. 이 지식은 비슷한 두 육체 사이를 오갔고, 그중 한 몸이 다른 몸 안에서 아홉 달을 보내고 나왔다. 딸은 출산의 경험을 통해 어머 니에 대한 깊은 반향을 느낀다. 여성은 임신과 진통 도중 자기 어머 니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 앨리스 로시는 여성이 처음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자기 어머니의 젖 냄새를 기억하고 동요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딸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럽고 갈등을 겪는 모녀 관계 에서도 월경 때는 어머니에게 여성적인 친밀감을 느낀다. 169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가 나보다 아버지를 선택했고, 아버지의 요구와 이론에 맞춰 나를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171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매일, 매일 밤, 매시간, '내가 제대로 하는 걸까? 충분히 하는 걸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는 어머니로서의 죄책감이 안겨주는 완전한 무게와 부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성 제도 아래서 모든 어머니는 어느 정도는 아이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특히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완벽한 딸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2
어머니가 적에게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딸의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 안에도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음을 안다. 모든 어 버니는 자녀를 향해 압도적이면서 인정할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있 다. 내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었을 때의 조건, 불가능한 기대치, 임신 한 여성을 향한 아버지의 혐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향 한 아버지의 혐오를 생각해보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어머니 를 위한 비애와 분노로 바뀌고, 다시 어머니를 향한 분노로, 즉 오래 되었으나 정화되지 않은 아이의 분노로 바뀐다.
지금 어머니는 늘 원했던 대로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고 있다.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는 할머니로서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며, 과거 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살아간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와 치유를 위 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환상, 그 대화 속에서 서로 상처를 전부 드러내며 모녀 사이에 공유한 고통을 초월해 마침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런 환상은 치유되지 못한 어린아 이의 환상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지금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인정할 수 있다.
20세기 새로운 여성운동 초기에 우리 어머니 세대가 받아온 억 압을 분석하고, 왜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를 아마존이 되도록 교육하 지 않았는지, 왜 우리 발을 묶어 놓거나 그냥 우리를 떠나버렸는지 를 너무나 간단히 '이성적으로', 게다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실 지어 그 분석은 정확하고 급진적이기까지 했고, 좁은 의미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의식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우 리 대부분의 내면에는 아직도 한 여성의 보살핌과 애정과 인정, 우리를 지키기 위해 행사하는 여성의 힘과 여성의 냄새와 감촉과 목소 리. 우리가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때 우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강인 한 여성의 팔을 갈구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깃들어 있다. 누구나 크 리스타벨 팽크허스트의 말처럼 "여성을 위해 여성참정권 운동의 대 가를 미리 지불할 준비가 된 어머니'를 갈망했을 것이다' 우리 어머 니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여성의 힘을 손에 넣으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머니들이 필요했다. 우리 안에 깃든 여자아이의 울음은 부끄러운 일도 퇴보도 아니다. 강한 어머니들과 강한 딸들을 당연한 일로 여길 세상을 창조하려는 우리 염원의 시작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시각을 이해해야만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 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어떤 방식으로 양육되었는지 알지 못한 다. 그저 막연히 어머니가 우리 편이었다는 것만 안다. 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죽음이나 입양으로, 혹은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 심각 한 우울증, 광기 등으로 우리를 버렸다면, 또는 모성 제도는 임금노 동을 하는 어머니들을 지원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무관심하고 애정도 없는 낯선 이들에게 우리를 맡길 수밖에 없 었다면, 또는 제도의 요구에 따라 '좋은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하다 가 우리의 처녀성을 지키려고 안달하고 걱정하는 청교도적인 어머 니가 되었다면, 혹은 아이 없는 삶이 필요해서 그냥 우리 곁을 떠났 다면,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는 어머니를 용서하고, 개별적인 어 머니의 사랑과 힘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안의 어린아이, 남성이 통 제하는 세상에서 자란 어린 여자아이는 여전히 순간순간 심각하게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것이다. 175
우리가 이러한 역설과 모순에 맞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잃어버린 어린 여자아이의 탐구열을 우리 안에서 직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박탈감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함께 운동을 해나가는 여성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분출되는 맹목적인 분노와 고통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 이전에 어머니와 딸의 관계라는 과도기적이고 파편적이지만 본질적이고 중요한 지식이 있었다. 176
대체로 여성들 사이의 강렬한 관계가 그랬듯이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도 남성들에게는 근본적인 위협이었다.
고대 문헌을 보면 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에 게 주는 의미는 풍부하게 표현된다. 《우파니샤드》의 다음 구절처럼. 177
이미 자녀를 둔 후에 여성을 향한 감정의 폭과 깊이를 인정하 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머니와 새롭고 복잡 한 유대가 가능하다. 시인 수 실버마리는 이렇게 쓴다.
이제 레즈비언과 어머니 사이에 모순 대신 서로 일치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연인과 나. 내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내 아들과 나 사이의 공통점은 원시적이고 포괄적이며 가장 중요한 모성유대감 이다.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서 나는 내 연인의 어머니가 되고 그 연인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는 깊은 충동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 발견이 두려웠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그것은 악이라고 말했다. 대중적인 프로이트주의는 이것을 병적인 집착이자 미숙함의 징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점차 나는 나의 욕구와 욕망을 믿게 되었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두 여성 사이의 드라마, 즉 서로에게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아이가 될 수도 있는 드라마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뢰 한다.
일상생활의 이별이 잠시 사라지는,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해진다. 연인과 입을 맞추고 연인을 어루만지며 연인의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동시에 어머니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아이가 된다. 나는 자궁의 조화로운 상태로, 고대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연인에게 들어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르가슴을 느 끼는 연인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의 얼굴에서 감긴 눈 뒤의 기억을 간직한 어린 아기의 무의식적인 환희를 본다. 그리고 그가 나를 사랑해줄 때...... 그 강렬함은 동시에 밀어냄이고 태어남이다! 그는 들어와 태어나는 환희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나는 또 내 어머니의 신비로, 모성 유대감이 강화되었을 때의 모습일 세상의 신비로 돌아간다.
시인 린 수케닉이 만든 '모성공포증"이라는 용어는 어머니나 모성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수많은 딸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타협과 자기혐오를 자 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웠으며, 여성 존재에 대한 제약과 비하를 강제적으로 전수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 힘이 어머니에게서 출발해 자신 에게 영향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 191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나를 죽일 거야' '내가 결혼하 지 않으면 어머니가 죽고 말 거야. 자신의 에너지를 가치 있게 연중 해서 사용할 곳이 달리 없는 상태에서 전업 '가정주부'는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헌신하거나 소유욕으로 통제하려 하거나 만성 적인 걱정에 빠지기 일쑤인데, 그 모습이 소설 속에서 '유대인 어머 니'로 그려진다. '유대인 어머니'는 19세기와 20세기 여성을 오로지 한 가지 역할을 제외한 모든 역할에서 강제로 배제한 결과 생긴 창 조물일 뿐이다."
모성 공포증은 어머니의 속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하나의 개 별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여성의 자아 분열로 보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희생자, 자유롭지 못한 여성, 순교자를 상징한다. 우리의 속성은 어머니의 속성과 위험할 정 도로 비슷하고 구별이 안 되어 보인다. 어머니가 끝나고 딸이 시작 되는 지점을 알고자 절박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수술을 단행한다. 192
어머니와 딸 아이의 열정과 환희를 표현한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잃어버린, 그리스의 얼레우시스의 비밀 종교 의식, 테메테르와 코레의 모녀신화.
이 신비로운 비밀의식의 진정한 의미는 가부장제의 분열이 이들을 완전히 갈라놓은 것처럼 보여도 이처럼 죽음과 탄생을 다시 통합했 다는 사실이다. 196
데메테르와 코레의 이별은 스스로 원한 게 아니다. 딸이 어머니에게 반항한 것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딸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엘레우시스는 고전적인 가부장제 세계에서 마침내 위대한 여신의 다양한 면모가 부활한 모습이다. 일부 신화에는 데메테르의 어머니 레아도 등장하고, 코레 역시 지하세계에서 어머니가 된다.” 제인 해 리슨은 이와 같은 비밀의식이 남성들을 배제했던 훨씬 더 이전 시대 여성들의 의식을 바탕으로 했다고 여긴다. 그만큼 어머니와 딸의 카섹시스가 선사시대부터 위험에 처했고 복잡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가 오기 천 년 전에도 모든 딸은 자신을 몹시 사랑하고, 엄청난 힘을 소유해 강간을 없던 일로 돌리고,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되살릴 수도 있는 어머니를 갈망했다. 그리고 모든 어머니는 데메테르만큼의 힘과 분노의 효능과 잃어버린 자아와의 화해를 갈망했다. 198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라고 느끼는 여성은 평생 어 머니를 찾아다닐 수도 있다. 심지어 남성에게서 어머니를 찾을 수도 있다. 최근 어느 여성 단체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 를 찾으려고 결혼했어요." 그러자 많은 이가 그 말에 동의하기 시작 했다. 나 역시 남편 옆에 누워서 내 옆에 가까이 있는 이 몸이 내 어 머니의 몸이라고 반쯤 꿈꾸며 반쯤 믿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모 든 성적이거나 친밀한 육체적 접촉이 그 첫 번째 몸을 떠올리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 없는' 여성은 자신의 취약함을 부정 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부정하는 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그는 램지 부인처럼 남자들의 연약함을 통해 자 신의 강한 힘을 느끼는 식으로 남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거나, 교 사나 의사, 정치 활동가, 심리분석가의 역할을 통해 어머니 노릇을 하는 등, 다른 사람의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결핍한 것을 남에게 주고 있 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계속 자신의 힘을 느끼려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요구가 필요하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는 여성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끼기 어렵다. 우리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무리 깊어 도, 우리를 위해 어떤 투쟁을 감수하든, 어머니의 힘은 너무 제한되 어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는 일찍부터 어린 여자들에게 적당한 기대 치가 무엇인지를 어머니를 통해 가르친다. 아무리 딸의 생존에 도움 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랬더라도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자신을 낮추고 의욕을 꺾는 역할에 순응하도록 압박하는 것을 '어머니의 보 살핌'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많은 딸이 너무도 쉽게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건 뭐든지' 받아 들이며 살았다고 어머니에게 분노를 느낀다. 어머니의 희생은 어머니 자신에게도 치욕이었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지켜보는 딸까지도 훼손한다. 전족을 전통으로 삼는 중국 여성처럼 자신의 고통을 계속해서 물려 준다. 어머니의 자기혐오와 낮은 기대치는 딸의 정신까지 속박한다. 203
어머니들이 책임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껴서 이런 일이 벌어 지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딸들의 경험에 투사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강간을 당하면 죄책감을 느낄 것을 알기에 딸에게도 죄책감을 느끼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함을 통해서 딸과 자신을 극도로 동일시한다. 204
그러나 편애를 받는 남자 형제나 아버지가 없 는 경우에도 딸은 자신과 어머니의 강력한 동일시 때문에, 또 자신을 위해 싸우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무력함과 투쟁 정신 부족을 향해 분노를 느낄 수 있다. 205
생존을 위해 온종일 힘겹게 일하다가 하루 끝에 어머니 로서 에너지는 바닥이 난 상태로 무감각하고 지친 모습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사회제도나 모성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모진 목소리, 멍한 눈동자, 자신을 안아주지 않는 어머니,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말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206
한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선물로 줄 수밖에 없는 힘, 우리에게 유전되는 피의 흐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여러 세대에 걸쳐 여성이 여성에게 사랑과 긍정과 본보기를 강력한 끈으로 연결해 전달하지 않는다면, 여성들 은 여전히 황무지를 헤매게 될 것이다. 206
우리 딸들에게는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 머니가 필요하다. 208
우리 안에 어머니와 딸을 모두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강화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가부장적인 태도 탓에 우리는 이러한 이 미지를 분리하고 양극화하며, 원치 않는 죄책감과 분노, 수치심, 힘, 자유를 '다른' 여성에게 투사해왔다. 그러나 자매애를 급진적으로 바라보려면 그들을 다시 통합해야 한다. 217
흑인 어머니
그러나 청소년기의 경계에서 우리는 비슷한 명령에 따라 친어 머니에게서도 멀어짐을 깨닫는다. 이제 우리의 관능적, 감정적 에너 지는 남성들을 향해 흐르게 되어 있다. 문화는 흑인 어머니도 백인 어머니도, 그 어떤 다른 어머니도 우리의 가장 깊은 사랑과 신의를 받을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 의 금기가 된다. 단지 성적인 금기만이 아니라 동지로서, 공동창조자 로서, 서로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서 금기가 된다. 이 금기를 깨뜨릴 때, 우리는 어머니들과 다시 결합한다. 우리 어머니들과 다시 결합할 때, 이 금기는 깨진다. 220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1980
강제적 이성애
이성애 중심주의
정치 제도로서 이성애
레즈비언, 클로짓 상태로 있으라 강요받는다.
페미니즘 관련 책, 4권 비판
. 이성애는 대다수 여성의 성적 선호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레즈비언 존재
레즈비어 연속체
에로스
이중생활
이성애 정치학
이성애 경제학
이성애 특권
유아론
수건 캐빈은 도발적이고도 풍성한, 더불어 꽤 사변적인 논문에 서 남아는 포함해도 사춘기 남성은 내쫓는 원시 여성 집단이 남성에게 침략당하고 수적으로 열세가 되면 가부장제가 가능해지는데, 남성 지배의 첫 번째 행위는 가부장적 혼인이 아니라 아들의 어머니 강간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진입 수단 혹은 발단은 단순한 성비 변화만이 아니라, 집단에서 축출될 나이가 지나서도 계속 체제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사춘기 남성이 어머니 자식 사이 유대를 조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의 성적 접근권을 확립하기 위해 모성애가 이용되는데, 원래 어른들끼리의 깊은 유대는 여성과 여성의 유대이므로 남성의 성적 접근권은 처음에는 무력에 의해(혹은 의식의 통제를 통해) 확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강제적 이성애에 복무하는 거짓 의식 중 하나가 어머니의 위안, 개인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 양육, 자신의 학대자나 강간자, 폭행자(수동적으로 착취하는 남자들도 포함)를 향해 연민을 품을 것을 요구하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어머니-아들 관계 유지이기 때문에, 위 가설이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한다. 260
'대다수 여성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자다'라는 전제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정치적 걸림돌이다. 이 전제가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이 우는 부분적으로는 레즈비언 존재가 역사에서 배제되었거나 질병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레즈비언 존재가 본질적인 게 아니라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일부는 스스로 자유롭고 '선천적인'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성의 이성애가 '선호'가 아니라 힘으로 강제, 관리, 조직, 선전, 유지되어온 사실을 인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하나의 제도로 검토하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인종차별 주의라는 카스트제도가 물리적인 폭력과 거짓 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힘으로 유지 존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성의 '선호'나 '선택'으로서 이성애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보는 그리고 이에 따른 지적, 감정적 작업을 감수하는 일은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페미니스트에게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겠지만, 나는 그 보상이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한다. 사고의 구속이 풀릴 것이고, 새로운 길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하나의 거대한 침묵을 깨뜨리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새로이 명쾌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61
레즈비언 존재는 레즈비언이 역사적인 실체라는 사실과 우리가 계속해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창조해나갈 것을 뜻한다.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용어는 여성 정체성의 경험을 각 여성의 삶을 통해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포괄적으로 포함한다는 의미이며, 단지 한 여성이 다른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거나 의식적으로 욕망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 풍부한 내적 삶을 공유하거나. 남성 독재에 대항하는 유대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지지를 주고 받는 등 여성들 사이에 맺는 다양한 형태의 일차적이고 강렬한 관계까지 모두 포괄하는 수준으로 확대한다면, 또 메리 데일리가 정체화한 결혼저항 같은 연대와 '길들지 않은' 행동(낡은 의미들: '다루기 어려 운' '고집 센' '제멋대로인' '행실이 나쁜' '구애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 에 대해서도 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레즈비어니즘이라 는 단어의 제한적이고 임상적인 개념 때문에 닿을 수 없었던 여성 역사와 여성 심리학을 비로소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62
이제 우리는 여성이 역사상 '성적 합의'를 통해 남성과 협 력해왔다는 디너스타인의 견해를 더는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리고 개인의 일생에서 지금껏 가시화되지 못했거나 오명을 썼던 행동을, 해당 시대와 장소에서 대항 세력이 발휘할 힘의 한계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급진적인 반란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을 제대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과 반란의 필요성을 레즈비언 존재의 중추인 여성을 향한 여성의 육체적인 열정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의 경험 가운데 가장 폭력적으로 삭제당한 사실이 바로 성애의 관능성이었다. 267
내가 여기서 '레즈비언 연속체'라고 부르는 것을 발굴하고 설명하는 눈앞의 작업은 잠재적으로 모든 여성을 해방시킬 것이다. 이 작업은 서구의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학문이 지닌 한계를 분명하게 뛰어넘어 모든 인종과 민족, 정치제도 안의 여성들의 삶과 일, 집단 분류를 살펴보는 일이다. 게다가 '레즈비언 존재'와 '레즈비언 연속체' 사이에는 우리 삶의 운동 과정에서도 분간할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나는 레즈비언 연속체를 여성들의 '이중생활' 측면에서 정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이중생활은 자신을 이성애자로 설명하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레즈비언으로 설명하는 여성들 도 해당한다. 우리는 그 이중생활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 훨씬 더 철저하게 포괄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성애 제도가 어떻게 여성의 임금 규모와 중산층 여성의 '여가' 강제, 소위 성 해방 의미화, 여성 교육의 억제, '순수예술'과 대중문화 속 이미지, '개인적인' 영역으로의 신비화 등을 통해 조직되고 유지되었는지 모든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여성의 이중적인 업무 부담과 성별 노동 분화를 가장 이상적인 경제적 관계로 보는 이성애 제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경제학이 필요하다. 278
개인적인 경우나 다양 한 집단의 상황을 뛰어넘어 도처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하는 권 력, 다른 모든 착취와 부당한 통제의 본보기가 되어버린 그 권력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 필요한 복합적인 설명이 가능해지려면 이성 애의 문화적 선전 선동뿐만 아니라 이성애의 정치학과 경제학도 과 감하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270
저는 레즈 비언 존재가 스스로 섹슈얼리티를 지닌 여성들이 주장하는, 인정받 지 못하고 긍정되지도 못한 요구이며, 일종의 저항 방식이고, 동시에 이성애 관계부터 남성 우월주의에 이르기까지 분석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경계의 위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레즈비언 존재를 인 정하려면 단지 상징적인 한두 가지 토큰의 사례를 참고할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의 분석과 비평을 의식적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285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표현 은 여성 정체성 경험 중 가장 가능성이 큰 형태를 고려하고 싶은 바 람에서 나왔고, 한편 여성을 일차적인 성애와 감정으로 선택한 여성 들의 자취와 지식에 대해서는 또 다른 존중의 마음을 담아 레즈비언 존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지금 그 글을 쓰더라도 여전히 이 차이 를 구분했을 테지만, 레즈비언 연속체에 대해서는 더 조심했을 것입니 다. 저는 스미스-로젠버그의 '여성적 세계'가 규범적인 중산층 이성 애와 결혼제도 안에 싸여 있는 이상 사회가 아니라는 여러분의 의견 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86
샤론이 에드리언에게
그보다 우리는 모든 성애의 삶이 하나의 연속체이며, 남성과의 관계도 포함하는 연속체라는 복 잡한 사회적 모델을 가정합니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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