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남성됨과 정치: 서구 정치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적 독해

백_일홍 2026. 2. 6. 12:44

남성됨과 정치: 서구 정치 이론에 대한 페미니즘적 독해

 

웬디 브라운

 

 

서문(1988)

 

이 책은 페미니즘 관점으로 정치 이론을 다룬 책이지, 여성에 대 한 책은 아니다. 『과학과 젠더 ReflectionsonGenderandScience』 에서 이블린 폭스 켈러Evelyn FoxKeller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젠더와 과 학에 대해 연구한다고 했을 때, 대개 이를 여성에 대한 연구로 여 기는 걸 보고 상당히 놀랐다. 여성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다면, 남성도 당연히 그러하다. 과학도 그러하다." 정치와 정치 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인문학 연구자라면 인간세계의 모든 게 구성된 것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지난 10여 년간 인간세계의 모든 것이 젠더화를 통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 책도 그런 주장을 담고 있다. 정치 이론은 서양사에서도 특히 남성의 관점이 강한 분야로, 갖가지 양상으로 남성성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정치 이론의 고전에는 여성이 정치에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배제되고 종속적 지위로 떨어졌는지 기술되어 있으며, 남성적 공권력, 질서, 자유, 정의에 대한 표현이 매우 풍부하게 담겨 있다.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 비평이 여러 분야의 모든 틈새로 확장된 과정을 꼼꼼히 따라온 이라면, 여성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페미니즘적 탐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페미니즘의 고민이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은 이라면, 이런 탐구가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내가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남성됨manhood과 정치를 연구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오로지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듣고 내 연구가 정치 또는 정치 이론에서의 여성이나 여성 정치사상가 같은 '여성 문제'를 다루리라고 짐작했다. 혹자는 수전 오킨Susan Okin의 『서구 정치사상 의 여성 Womenin Western Political Thought 이 내 연구와 "가장 유사한 경쟁 연구"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오킨의 연구는 크나큰 존경을 받을 만하지만, 제목에 드러나듯 그 책은 서구 정치사상에서 남성이나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많은 이들은 페미니즘 연구이면서 여성을 최우선 관심사로 두지 않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것이고, 페미니즘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즉 남성에 관한 것이라는 세계관에서는 내 연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 책은 이런 몰이해에 깃들어 있는 칼날, 바로 그 정치적인 지점에 관심을 둔다. 과학의 구성 과정에 젠더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을 목도하고서 켈러가 놀랐던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런 몰이해가 정말 놀랄 만한 일일까?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나오는 몇몇 말들은 소수자를 시민권 안에 가둬 버리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 문학이든 여성 권리든 여성 문제에 한정된 페미니즘은 그 문제 밖에 있는 이들에게 도전이나 위협으로 보이지 않고, 따라서 쉽게 받아들여진다. 여성과 관련된 것으로만 구성된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도 별다른 고충이나 상처 없이 다양하게 지지, 협력, 감내 또는 주변화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전혀 남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페미니즘이라면 교육과정에 '끼워 넣을' 수 있고, 강연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여 가며 들을 수 있고, 학술회의의 한 대목으로 엮을 수 도 있으며, 전문가 조직의 자리를 하나 따내거나 구직 면접의 기회도 얻게 할 수 있고, 교육법 수정안 9조의 통계치로 변환할 수도 있다. 그런 페미니즘은 부족한 일자리를 두고 어쩌다 여성 우대 정책에 대한 갈등이 빚어질 때나 가족 모두가 피곤한데 누가 설거지 를 하면 좋을지 옥신각신할 때 정도를 빼고는 남성과 무관해 보인다.

 

여성이 완전히 배제된 영역에 페미니즘의 척도를 도입하는 것은 페미니즘을 주변화하거나 들러리 서지 않게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제2의 물결'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20여 년 전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기나긴 여행을 해 왔는데, 이 여정에는 주목할 만한 두 번의 전환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전통적 학문에서 여성을 지우거 나 터무니없게 묘사하던 것들을 기록하고 보여 주는 데서 그 삭제와 묘사를 바로잡는 기반 공사 작업으로 이동한 것이다.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이미 승인된 역사 가운데서 여성 혐오misogyny와 근거 없는 믿음을 공들여 찾아내는 한편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헌을 복원해 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여성'은 여성들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영구 불멸의 여성성'이라는 상상이 아니라, 그 상상에다가 근대· 백인·중간계급 등과 같은 속성을 결합시켜 변주한 형태가 아니 라, 저마다 특정 인종·계급·시대·문화에 걸맞게 구성된 복수의 창조물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을 복원하는 것에서 그 회복된 관점으로 세계를 비판적으로 따져 보는 것으로의 전환, 즉 기존 담론·규율·제도·실천의 젠더화된 특질에 대한 비평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주변부 여성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그 경험을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파고들어 가는 이동이었다(이 전환은 오직 이 순서대 로만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덕분에 페미니즘 연구는 이익집단을 변호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나, 가장 심오하고 충만한 시민을 상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영장류 동물학에서 관료제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에서 재현에 이르기까지, 성과학에서 도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의 틈새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론과 인식론에 대해 이야기할 무언가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우리를 다시 게토로 보내 버리고 싶어 하지만 말이 다. 『미국 정신의 종말 TheClosingoftheAmericanMind 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쓴 앨런 블룸Allan Bloom올 비롯한 몇몇 이들은 이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켈러를 놀라게 한, 여성 문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젠더를 '상상할 수 없는' 이들 또한 그러하다.

 

동시대 페미니즘은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사회가 남성적으로 구축한 다양한 담론 규율·제도 등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혁하기 위해서" 이론에 던지는 유용한 경고다. 남성적 담론·규율·제도 등을 공격하면서 이를 바꾸는 길을 찾아 지도를 그리는 사이, 우리가 남성 지배의 급소를 타격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기존 지식과 권력의 질서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고 그려보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 역사에 필요한 일원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목소리로 쓰였다. 일부는 참고한 텍스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일부는 내가 정치적·학문적으로 텍스트에 다중적으로 몰입하며 나타난 현상이다. 텍스트의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타인의 기분과 스타일에 잘 휩쓸리는 편이라서 막스 베버 MaxWeber에 대한 장은 진지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우울한 반면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에 대한 장은 암시적이고 쾌활하다.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텍스트와 이렇게 '합체'된다는 것은 분명 미심쩍은 데가 있다. 이는 분명 젠더화된 무언가와 관련되는데, 체득된 의식구조는 변혁적 마음가짐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정치에 뜨거운 관심을 품은 학자라면 누구든 틀림없이 이런 다중적 몰입을 경험해 보았으리라는 점 정도다. 나는 이따금 고전 정치 이론가들의 기교 넘치는 천재성에 얼어붙는다. 애초에 나는 지적인 미학 때문에 정치철학에 끌렸다. 다시 말해 애초에 나를 끌어 당긴 것은 플라톤 Platon의 정치학이 아니라 장엄함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적 지배의 피해자를 비롯해 고난과 부정이 만연한 세계에 대한 긴급한 요구들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순간에는 텍스트의 뉘앙스와 해석의 미묘함에 집중하는 데서 벗어나 정치 이론의 정전들이 권위를 부여하고 정당화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조바심이 앞선다. 물론 여기에는 내 모순된 자아들이 있다. 각기 팽팽한 긴장 상태로 묶여 있는 생명의 가닥들이, 플라톤이 '무질서한 영혼'의 증상이라고 또는 (내 생각에는 다소 가혹한 판단인) 민주주의의 무정부주의적 단계라고 규정했던 방식으로 서로 싸움을 벌인다.

 

이런 나의 모순된 모습에는 열정 가득한 정치철학 추종자와 조바심 내는 시민만 있는 게 아니다. 남성들의 잘난 척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그들이 만든 제도가 너무나 터무니없어 보일 때, 나는 그 고매하신 이론적 지껄임과 자아도취적 묘사를 패러디하고 싶어 진다. 또 다른 때에는 남성성의 구성 과정 그리고 남성성 내부의 긴장과 모순에 흠뻑 사로잡혀, 그 복잡한 지점들을 콕 집어내고는 상당히 흡족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적 지배가 부조리나 내적 긴장이 아닌 파괴적 결론으로 내 눈앞에 나타날 때,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과 생존과 세계가 위기에 놓이는 순간에는, 격렬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런 목소리들의 다중성은 페미니즘에 들어 있는 두 가지 목소리의 대립, 즉 (비록 저평가되었지만) 힘 있는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여성이라는 특징과 종속적이며 희생된 여성이라는 특징 간 대립으로 나타난다. 사실 둘 다 우리 자신이다. 남성적 지배에 말도 못하게 하찮은 순간과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순간이 모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페미니즘은, 여성과 여성 경험의 범주를 포착하는 분석에 실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드러나는 각기 다른 목소리들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정치 이론과 세계를 다루는 페미니스트 연구 자에게는 피할 수 없이 내재된 것이어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일부 여성운동은 적어도 이 다양한 목소리들의 크기를 줄이거나 위계질서를 정하거나 심지어 분류하고 유형화하는 식으로 간섭하지 않고, 윤리적 상대주의에도 굴복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다. 때로는 무척이나 어색하지만, 우리는 차이에 대해 그리고 분절적이고 유동적이며 복수인 정체성에 대해 단순히 관용적인 데 그치지 않고 진정 민주주의적이면서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정치 이론도 언젠가는 이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2021)

 

내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던 1979년 당시 정치학 과에는 나를 포함해 여자 동기가 셋뿐이었다. 당시 학과장은 "여 자들은 박사 학위를 받아도 쓸 데가 없어.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그만이야"라고 말하며 내가 장학금을 못 받을 거라고 알려 주었 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개교 이래 상당 기간 동안 백인 남성 프로 테스탄트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내가 입학할 무렵에는 그 지배적인 문화를 들쑤시거나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오래 도록 배척해 온 우리 같은 존재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정도의 관용 을 베풀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나한테 그렇게나 까칠하게 구는 곳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경험은 확실히 내 연구의 방법론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유럽 과 대서양 정치 이론의 정천을 사랑했다. 그 이론들이 보여 주는 시야, 관심사, 미학과 함께 문장 자체를 사랑했다. 나는 그 이론들 의 질문, 그 이론들이 꺼내는 도발, 그 이론들이 출현한 곳의 역사 를 다시금 들려주는 방식을 사랑했다. 나는 위대한 작품들이 다다 른 장엄한 영역과 복잡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정전들이 극심하게 젠더화된 세계에서 백인 유럽인과 주로 자신을 가진 이들의 손으로 그 자신들을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론들이 이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정치학과 정치 이론이 남성에게 독점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시대를 가로지르며 연속적이면서도 다양하게 남자다움이라는 사회적으로 고안된 속성 및 자만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정치적 삶에 여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변치 않으리라 는 점을 감지했다. 서구 정치학은 남성주의적이며 그 형식·정신· 내용에서, 범주에서, 특징에서, 가치를 판단하고 혐오의 대상을 정하는 데서, 그 호감과 반감에서 여성 혐오일 수 있다는 점을 감지했다. 정치학과 정치 이론에서 여성에 대한 질문을 꺼낸 뒤 진지한 어떤 지점에 다다르려면, '남성에 대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산양식과 관계를 통한 계급화, 착취, 지배 등을 이해할 때 내가 한껏 기댔던 마르크스주의는 이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와 내 관심의 대상이 달라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가 그 언어·양식·정서·불평동 등에 대해 제한적으로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젠더화된 질서의 핵심적 쐐기라고 보았다.

 

이때 나는 정치 이론의 정전들에 맞서는 방식을 상정하고, 그 정전들이 남성성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읽어 내고, 그 남성성이 어떻게 정치의 정식화로 나타나는지 발견하면서 내가 감지한 것을 주척해 갔다. 내 주제로 나아가기 위한 이상하면서도 우회적인 방법이었지만, 누구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기 마련 아닌가. 사실 20세기 후반 미국의 페미니즘 연구는 바로 이런 식으로 진척되었다. 생물학부터 철학에 이르기까지, 경제학부터 문학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은 자기가 몸담은 학문의 토양을 뒤엎고 젠더가 그들 각자의 토양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밝혀내려고 했다.

 

이는 내가 후기구조주의, 문화 연구, 정신분석을 접하기 전의 일이다. 내가 이 기획을 시작한 1980년에 페미니즘 이론은 수십 권의 책과 논문이 전부였으며, 퀴어 이론은 아직 태동하지도 않았고, 인종·계급 카스트 젠더 섹슈얼리티를 솜씨 좋게 가로지르며 사유하는 작업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수전 오킨과 진 엘시테인 eanElshtain이 쓴 페미니즘 책이 두 권 있었지만, 이 책들은 남성, 남성성, 정치의 본성 등이 아닌 여성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내 문제를 안고서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마키아벨리, 베버를 택한 뒤, 서양사의 각기 다른 세 시대에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뿐만 아니라 정치와 남성됨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견고한 관념들을 만들어 냈는지를 고려하면서 그들의 저작을 읽었다. 그들이 정치의 본성 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정치적 활동, 질서, 이유, 목적, 권력의 본성과 의미에 대해 규정하는 지점들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표현 아래 묻혀 있는 젠더화된 가정과 배제를 밝혀내고 싶었다. 나는 그들이 드러내 말하진 않은, 젠더화된 가정과 속성의 베일을 벗기려고 했다. 나는 그들이 혐오하거나 정복 대상으로 삼는 것, 즉 본성·욕구 필요에 대해, 그리고 종속과 의존적 존재·정서성·취약성·필멸성·육체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물구나무 서듯 전복한 것들에 대해 숙고했다. 즉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폴리스polis가 존재론적으로 사적 영역에 해당하는 오이코스oikos(집)에 선행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약삭빠르고 야수 같은 비르투 virtu의 힘으로 포르투나fortuna를 들어 메치려 한 마키아벨리의 시도, 남성적인 면을 더욱 강화해 남성주의적 합리성으로 지어진 강철 우리를 벗어나려고 한 베버의 시도 등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박사 논문을 마칠 무렵, 페미니즘 이론은 말 그대로 폭발했다. 1980~90년대에 이 분야는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의 젠더화 작용을 그리고 이 젠더화 작용을 다시 상상하고 전복할 수 있는 사회 구성적 방식을 알려 주었다. 페미니즘 이론은 언어, 육체, 이미지, 사회적 공간, 문화적 실천, 그리고 모든 분과에서 젠더를 감지하고 해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젠더를 차이로서 탐구하면서 시대 장소·계급·인종 등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여러 종류의 젠더화 작용을 따져 물었다. 계급, 카스트, 인종의 층위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젠더화 작용을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는 점을 밝혀냈으며, 젠더를 상부와 하부에서 도출된 다양한 힘을 통해 생산된 것으로 이해하게 했다.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여러 접근법들이 화려하게 뒤섞여 발전했으며, 이런 요소들이 함께 젠더 형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주관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사상이 되어 갔다. 그러므로 10년쯤 뒤에 쓰였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비평이 주류 정치 이론에 얼마나 작은 균열만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넘어가이겠다. 분석적 자유주의 이론가라면 자신의 예시에서 '그'를 '그녀'로 바꾸고, 몇몇 강의 계획서에 젠더 불평등에 대한 내용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이론의 정전을 가르치는 강사라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여성의 종속 TheSubjectionofWomen 이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ar Wollstonecraft의 『여성의 권리 옹호AVindicationofthe RightsofWoman 같은 책을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로크 John Locke,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등이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종속을 강화하는 개념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보다는 그 지점에 더 머무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 페미니즘 이론은 정치 이론에서 분리된 채 분과 학문으로 남아 있으며, 페미니즘에 기반을 둔 정치 이론가들은 보편 범주와 보편 문제보다 (여성의 평등, 돌봄 노동 등) 특수한 데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유, 평등, 정의, 주권, 권력, 통치, 시민권, 민주주의, 국가 등은 모두 형식과 내용 면에서, 심지어 평등처럼 페미니즘의 관심사와 관련한 문제조차 젠더화되지 않은 것으로 이론화되고 있다. 이 책이 이런 가정과 실천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비판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

 

 

해제

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재구성

 

정희진

 

선생: 자네가 그간 여성에 관해 배운 것을 설명해 보게 이블린 폭스 켈러: 제가 공부한 것은 여성에 관한 것도, 남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과학일 뿐입니다.

 

위 이야기는 이 책의 서문에도 등장하는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분자생물학자 이블린 폭스 켈러의 유명한 일화다.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 시절, 여성학에 관심을 갖는 그녀에게 지도교수가 비난조로 질문했고 그녀가 답한 내용이다. 켈러의 대표작 <과학과 젠더>가 출간된 1985년경의 일이다.

 

'노동자 =계급(마르크스주의)', '흑인=인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여성= 젠더'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똑똑한' 한 여학생은 "여성학 수업에서 왜 젠더를 가르쳐요? 여성에 대해 강의해 주세요"라고 현재 한국 페미니즘의 상황을 요약해 준다. 30~40년 전 미국 사회의 젠더에 대한 통념이 당대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니, 페미니즘은 여전히 '급진적' 사유인 듯 하다.

 

계급, 인종, 젠더는 사회구조의 피해를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모순이자 인간, 사회, 자연을 연구하는 관점이다. 방법론이며 가치관이다. 계급, 인종, 젠더는 서로 얽혀 있어서 노동자, 흑인, 여성 등만을 따로 떼어 사유할 수 없다(노동자 중에는 여성이 없는가? 흑인 중에는 경영자가 없는가? 여성 중에는 백인이 없는가?). '여성=젠더'라는 인식은 일반 대중은 물론 스스로를 여성학자 혹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이들에게도 뿌리가 깊다. 남성성 연구나 젠더를 사회의 주된 작동 원리로 분석한 연구가 적은 이유이고,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심지어 남성 (성) 연구는 여성학의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성학자도 있으며, 젠더를 여성 피해의 가시화로 한정 짓는 오류를 '전략적 관점' 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흔하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여전히 잔여적 부가적 부차적 도구로 여겨진다. 나는 최근 북한학 관련 연구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는 데, 많은 남성들이 반가워하면서(?) "탈북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므로, 이제야말로 북한학 연구에도 젠더가 도입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나는 "북한학이나 국제정치야말로 이미 가장 젠더화된 영역이니 '젠더 부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응수했는데, 이 말이 소통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정치학, 정치철학, 국제정치학은 페미니즘의 개입이 가장 늦은 남성들만의 영역으로 악명이 높다. 1960년대에 이미 자연과학에 대한 페미니즘의 도전이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학'에서 젠더는 가장 미개척 분야 이다. 이 분야에서는 대체로 V. 스파이크 피터슨V.SpikePeterson이 편집한 <젠더화된 국가Gendered States Feminist revisions of international Relations Theory>(1992)를 본격적 접근으로 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국가 형성에서 젠더의 역할을 밝혔다.

 

그런 점에서 1988년에 출간된 웬디 브리운의 『남성됨과 정치: 서구 정치 이론의 페미니즘적 독해>의 문제의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브라운은 페미니즘 연구가 여성에 대한 배제와 거부, 비하를 비판하고 여성의 비가시화를 드러내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유의 분석 도구로서 젠더가 특정 시대와 로컬 (지역)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의 역사성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는 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차별 구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의 기준이 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질문이자 이 책을 읽기 위한 전제, 즉 일상적 통념인 "남성성과 여성성은 대립한다"라는 자유주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대개의 페미니즘 '이론' 책이 "어렵다"라는 오해를 받는 이유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 (1990)은 어떤 독자에게 익숙하지만, 다른 독자에겐 그렇지 않다. 텍스트 자체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존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적 관점으로 텍스트를 바라볼 때 도무지 독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독자의 위치성에 따라 '난이도'는 달라진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생물학적 남성과 사회적 남성성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는 건 더욱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특정 사회의 규범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변주된다. 어떤 사회에서 남성성으로 간주되는 특성이 다른 사회에서는 여성성이 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식민지배를 받는 국가의 하층계급 여성은 대부분 생계 부양자다. 남성이 '보호자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물론, 원래 보호자 담론은 신화다). 국제정치 처럼 성별 은유 gender metaphor가 난무하는 분과 학문도 드물 것이다. 국가가 주권(영혼)을 의미할 때는 '남성'으로 재현되지만, 영토 (욕체)를 의미할 때는 '여성'에 비유된다.

 

이 책의 원제는 'Manhoodand Politics'이다. 'masculinity'가 아니라 'manhood'인데, 남성성을 의미하는 'masculinity'에는 종속적 패권적 식민적 등의 뜻을 내포하는 다양한 복수형(masc ulinities)이 있다. 반면에 영어의 접미사 '-hood'는 특정 집단을 언급할 때 전형적 상태나 성질quality을 표현한다. 'manhood'의 우리말 번역을 '남성성'이 아니라 '남성됨'으로 정한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서양사에서는 시대마다 지배적 남성 모델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리스 시민/전사, 가부장적 유대 기독교인, 영주/후원자honor/patronags, 프로테스탄트 부르주아 이성주의자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유형의 이상적 남성성은 각기 다른 시대의 유산이며 서양 문명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러나 이 유형들은 패권적 남성성을 분석한 것으로, 그에 따른 주변적 혹은 종속적 남성성과의 대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웬디 브리운의 접근 방식은 이와 구분된다. 그는 남성성의 의미를 정의하기보다는,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 자신이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는지를 중심으로 접근한다. 브라운이 선택한 사상가들은 스스로 남성성의 규범을 만들고, 그럼으로써 초월적 자아로 자신을 구성해 낸다. 남성됨이란 이런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이 책은 '누가 더 남성적이었던가'를 가늠하거나 남성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사상가들이 세계를 만들어 가려는 makingthe world 의지와 그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의 성취는 내용 자체에도 있지만, 이는 가능케 한 것은 브리운만의 방법론과 사고방식이다. 그는 '남성'을 둘러싼 기존 개념 (폭력, 용감함, 이성 등)을 미리 전제하지 않는다. 이 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존 정치 사상가들이 자신의 구상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그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 구상을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고 평가했는지를 추적한다. 따라서 '의외로' 이 책에는 토머스 홈스, 게오르크 헤겔Gore, 카를 마르크스, 이마누엘 칸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등이 언급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의 '비판 대상'에서 제외된 이러한 남성들의 사상에는 상대적으로 패미니즘 혹은 해체주의의 가능성이 있다. 이 사상가들은 물론 대단히 남성 중심적이지만 젠더를 본질적인 인간사로 사유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브라운은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 마키아 밸리(르네상스 이탈리아), 베버(근대성)를 선택하고 이들에 집중한다. 이 사상가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심에 정치를 놓은 것은 이들의 개인적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특정 시대와 로컬에서 남성이 만든 정치 개념을 해부하고 있으며, 남성성과 정치 이론의 관계를 일반화하지 않는다. '내재적'·질적 방법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이 스스로 '그들 자신을 위해 만들어 온 정치학'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정치 이론의 특성을 이렇게 이해할 때, 정치학과 남성됨을 동일시하던 역사와 결별하고 새로운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남성됨의 핵심은 삶(일상, 노동, 육체 등)과의 대립을 통해 형성되어 온 정치의 초월성transcendence, 정신의 우월성이다. 초월성을 추구하는 남성됨은 인류사의 근본적인 문제다. 특히 근대 이전의 서구 사상에서 초월성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 었다. 존재하지 않는 초월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젠더는 물론 공간, 자연, 생명 등 수많은 개념들을 식민화해야 했다.

 

초월성은 자유 개념처럼 '~로부터의' 초월을 전제한다. 초월성을 얻으려면 '인간(남성)'의 바로 옆에 있는 여성과 노예 등 '비인간'이 극복, 정복해야 할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문명사가 그토록 성별 은유로 점철된 이유다. 존재하지 않는 것,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관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은유가 필수적이고, 은유가 반복되면 결국 물질성을 갖게 된다. 영웅도 없고 폴리스도 사라진 시대, 현대에도 초월성과 비슷한 개념들이 있다. 베버의 '영웅적 정치가', 아렌트의 '용감한 정치 행위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 chNietzsche의 '초인übermensch'? 대중문화에서 넘쳐 나는 '진짜 사나이', 한국 사회운동의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와 '민중의 아들' 등이 그것이다.

 

브라운이 선택한 고대, 근대 초기, 현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사상가들은 공히 지금 우리가 정치라고 간주하는 것, 그렇게 간주된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 정치와 위협의 관계성을 만든 이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연과 육체를 초월,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는 구분과 위계 설정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 유명한 형상과 질료 구분 역시 그의 위계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순수 잠재태(순수 질료)→비유기적 사물(암석, 흙)→식물→ 동물→ 인간→순수 현실태가 그것이다. 이때 '순수'는 죄종·최고의 가치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우주에서, 모든 개별 사물은 각각 최상의 방식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정치 이론의 바탕이 되는데, 인간의 탄생 이후 기본적인 욕구를 가정에서 충족하다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거치면서 정치는 좀 더 복잡하고 심오해진다. 여기서 여성은 주로 가족과 의미 없는 장소에 머물러 있는데, 이 '의미 없는 장소'는 여성이 자기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성도 구분했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격체를 가진 최상의 남자와 노예근성을 타고난 남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정치 공동체는 그 자체로 목적인 반면, 육체노동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플라톤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당시에도 그는 남성이 여성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생물학적 논증을 사용했다. 아이의 형상을 제공하는 것은 남자의 정자이고 여성은 단지 질료라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모두 질료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통념은 오늘날까지 강고하다.

 

그는 실천적 학문 분야인 프락시스praxis와 의식적 제작 활동인 포이에시스poiesis를 구분하고 위계를 나눈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리학과 정치학(국가 이론)이 대표적인 프락시스인데, 문제는 프락시스는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지만 포이에시스는 행위에 의해 창조되는 새로운 것이라는 사고이다. 그냥 놀고 있는 아이들은 프락시스 개념을 구현하지만,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거리를 활보하는 후보는 포이에시스를 구현하고 있다는 식이다. 즉, 포이에시스는 목적의식적인 것으로 프락시스보다 우월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목적의식적 행위를 현실 정치에 극적으로 적용한 인물이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이었다. 흔히 권모술수와 배신에 능한 현실 정치인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하는데, 그의 이론은 그의 실제 성격과 거리가 얼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세계가 힘과 인식이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힌 구조물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았다. 하지만 정치 행위자들이 그 다양성을 부정, 극복하고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마키아벨리가 산 시대는 중세에서 근세 초기로의 이행기였고, 이탈리아 사람인 그에게 조국은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처럼 '안정'되지 못한 채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바티칸은 서로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안정된 국가를 만드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현실에 필요한 것은 백성에게 사랑받는 군주보다,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군주라고 생각했고, 이를 절절히 간언한 책이 『군주론 The Pri nce 이다.

 

복잡하고 위태로운 사회에서 강력한 군주(오늘날의 리더)가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대안이었다. 통치자가 국가를, 인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냉정하고 냉소적이어야 했다. 그는 동치자가 직접 만들어 가는 절대적 군주 국가를 소망했다. 정치가가 국가를 창출하는 것, 여기서 그의 입장은 고대 그리스의 남성됨과 구분되기 시작한다.

 

근대에 이르러 국가nation state,normalstate는 정치 제도의 최고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국가는 남성됨의 본격적인 꿈이다. 물론 지구상에서 단 한번도 정상 국가('제대로 된 국가')가 실현된 적은 없지만, 이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하다. 마키아벨리는 그 방법론 중 핵심인 군주론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정교함, 안정성, 내·외부를 장악하는 강력함의 첫 번째 조건을 군주의 통치 스타일이라고 절감한 인물이며, 이를 통해 인류 역사상 새로운 남성됨이 탄생한다. 이는 오늘날 일상생활 전반의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리더십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작업이 남성 우월주의 정치 이론이 보여 주는 자기 전복(모순)의 극단적 형태라면, 막스 베버(1854-1920)는 확실히 가장 위대한 파토스(열정)을 보여 준다. 주지하다시피 베버는 이성, 가치중립성, 합리성, 목적성, 관료화, 노동의 윤리 등 유럽 근대화의 핵심 개념을 제공했다. 이성 중심의 근대사회가 그토록 많은 '베버리언Weberian'을 배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섰듯이, 베버는 마키아벨리의 '일상의 거친 투쟁'에서 생겨난 주정주의 경멸했다.

 

즉각성이 정치를 감염할 것이라는 베버의 두려움은 인구의 다수에게서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화와 공명한다. 이러한 베버의 두려움에는 인간의 욕구와 감정을 자유, 합리성과 대립 관계로 보는 남성됨의 특성, 분업적 사고가 반복된다. 정치가 적절하게 운용되려면 자신을 오염시키는 생존 행위와 충분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베버는 권력, 명망, 국가의 영광, 영웅적 리더십 같은 정치적 미학을 추구했다.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베버에게도 정치가 차지하는 공간은 고상하고 소중하다. 그곳에서는 평범한 관심사가 환영받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여성들은)' 폴리스에서 추방되고 폴리스를 위협하는 것을 모두 조사한 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질문을 베버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 만일 정치가 인간의 삶과 집단의 안녕 정의·참여 등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렇게 정치를 초월적으로 개념화하면 정치 조직의 적절한 배치나 안전 같은 실질적 사안은 정치와 결부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든 단순히 사회정책이든 정치의 자율성과 권력의 목적을 희석하거나 부식,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베버는 반대한다.

 

정치의 본질은 폭력이고, 정치 공동체의 본질은 진공상태와 같은 순고한 가치이다. 집단 .인종·부족 등이 조직된 명망 높은 정치권력에 속할 때까지 그들은 민족이 아니며 어떤 존재 이유도 없다는 베버의 주장은 이러한 사고에서 나왔다. 예컨대 베버의 표현을 따르면, '문화 없는' 존재였던 아프리카인들을 식민화하는 것은 적법하지만, 폴란드 같은 민족국가들의 문화적·정치적 자율성을 향한 투쟁은 지원해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가 살았던 시대와 그들의 문제의식은 각각 다르다. 그 가운데서 웬디 브라운이 주목한 서구 정치사를 관통하는 특성은 아르키메데스umedes의 원리와 비슷하다. "지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 라며 스스로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들어 올리는 자신을 형상화한 지렛대의 반비례 법칙,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는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응용할 수 있지만, 실제로 증명할 수는 없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지 않는다.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 어떤 누구도 아니며, 우주를 관장하는 조물주의 시각에서 초월성을 추구한다. 어떠한 흠stain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