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중생을 돕는다면 이는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비의 덕일 뿐이다. 자비나 사랑의 요체는 오히려 '좋아함(호)'의 정서와 예리하게 비껴서는 데 있다. 자비의 비는 대비인데, 대비는 곧 대비(클대, 아닐비)에 터한다. 대비-대비의 내적, 존재론적 연관성은 무아에 따르는 소식, 즉 망아소소의 지경에서 이루어지기 때문.
인간적인 도움이 기본은 오직 덕이라는 존재론적 함의에 의해서 밝아지는 '자리'의 형세일 뿐이다. 지혜와 덕은 대비(큰 아닐비)에서 생기는데, 물론 대비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따라올 자신의 에고다. 자신의 존재에 이미/언제나 '개입'하(되)고 있는 비(아닐비)를 온전히 비하고 자숙을 잃지 않는 게 곧 대비(아닐비)다.
이로써 자신에 대한 대비는 세상에 대한 대비(자비)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말해온 사린의 윤리란 이 대비와 대비의 지평 속으로 환치이입된 생활의 양식을 말한다. 나 처럼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천년을 살아도 이루기 어려운 이상이지만 다만 이치가 그러하므로 하릴없이 여기에 밝혀둘 뿐이다.
비(자비)는 자신의 에고를 무화(비)시키는 특이체험의 사운데 생성되는 행지이며, 진화와 창조를 통합시켜낼 수 있었던 기이한 존재인 인간 정신의 알짬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행지를 알아채는 성의 정서가 비(자비)였던 것은, 굳이 따져 말하자면 비(아닐비)와 숙의 변증법적 교호관계가 생성시키는 덕에 기인한다.
비(아닐비)가 나날의 비(바로잡다, 비평)로 드러나고, 그 일상이 곧 존재(사린)에 대한 비(자비)로 전환하는 것은, 엄현-허성을 말한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곧 큰-부정의 여러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만 무와의 접속이 가능해지고, 이 접속 속에서야 무는 존재를 새롭게 형성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현성 속에서 존재일반(사린)을 만나는 방식이 곧 대비(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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