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와 이바지에 주력하는 관계일수록 외려 보상체계의 작동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의 영역에서 보상에 유의하라니! 요점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은 없다는 것이고, 실상 더 중요한 사실은 지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감히(!)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을 욕심내지 말라는 윤리적 언명에 놓인다. 왜 그런가? 죄 중에서도 '깊은' 죄가 바로 그 같은 오만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다시 요점은, 신의 영역을 범하지 말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저 한 순간 지상을 스쳐지나가면서 어울리며 어긋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무공동체'와 같은 증여의 관계에서는 보상체계가 부실하긴 하다. 이런 점에서, 동무는 구청직원이나 삼성전자의 사무원이나 한나라당의 당직자나 서울대학교의 대학원생에 비하면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인다. 동무는 스스로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는 희생양의 처지'로 예외하시킨 존재이므로, 현재 속의 그의 패배는 차라리 당연한 것이며 그의 가치는 미래 속에서 되돌아올 뿐이다. 공동체의 이념은 근사하고 그에 조응하는 열정은 드높으며, 때론 이를 추동하는 의욕은 숭고하기조차 하건만, 이들의 생활과 생계를 보상하는 제도와 장치는 없다. 동무들은 현실적으로 소외될 뿐 아니라 차마 보상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만성적인 불안에 내몰리곤 한다. 나도 입이 있고, 그 끝에 똥구멍이 있으니, 먹고 싸야 하진 않겟나? 라고들, 병아리처럼 입을 모으면, 아아, (나는) 슬프다-슬프다, 그 누구에게나 뻔한 비밀은 당신의 몸과 생활이 아니던가?
보상의 결락을 메우는 소망의 장치가 환상이므로 이 둘이 대조적으로 배치되긴 한다. 이를테면 보상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환상은 상상적인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사이에 '자본의 체계'라는 우리의 현실의 구조를 놓는 순간, 보상과 환상이 한 통속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난다. 가령 이 사실은 교회와 사찰 속에서 융통되는 자본의 매커니즘을 살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마치 욕망이 환상에 의해 조절되듯이) 보상도 환상에 의해 조절되며, 거꾸로 환상도 보상에 이미/늘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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