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사람은 왜 바뀌지 않는가 - 자의식의 함정

백_일홍 2020. 2. 15. 16:40

1. 사람이 쉬 바뀌지 않는 것은 실은 이미 그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물종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이 언제나 '변화의 도상에 있는 존재(being-in-the-making)'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그 존재론적 변화의 내력 위에서 가능한 변 화를 구상해야 한다. 초등학생이 진흙으로 빚어, 가까스로 물에 뜨게 만든 배는 완성된 이후에도 겉모양은 물론 그 구조까지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다. 이른바 가소성(可塑性)이 높은 유아의 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첨단의 기술자들이 건조한 이지스함(Aegis Cruiser)이라면 이제 구조변동은 물 건너간 것이다. 정교함의 역설이다. 초월의식이나 영혼을 말해온 지 오래된 사람의 존재는 토선(土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지스함 정도로도 비견할 수 없는 현묘한 '구조'를 지니게 되었으며, 말하자면 이 구조 속에 되잡힌 것이다.

 

2. 진정한 변화란 구조를 건드리는 일이다. 이른바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공동체적 장치는 이러한 변화를 향해서 몸을 '끄~을~고' 가려는 실천이다. 사람의 경우에 이는 에고라는 조종사를 교체하는 노동에 해당한다. 에고의 구조적 난경은, 조종사가 조종석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여건에 고착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기변화의 열망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이미 늦은 희망이며, 외려 변화를 향한 실존적 고민이 적은 아이들의 경우에만 그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공부의 '틀'을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사람이 쉬 바뀌지 않는 것은, 인류가 쉬 바뀌지 않는 것과는 따로 상설해야만 한다. 인류는 모짝 인류학적으로 구조에 물려 있지만, 개인은 교육학적으로 희비의 기로(岐路)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로에서 '생사를 건 도약(salto mortale)'이 이루어진다.

 

3. 양질의 단백질 섭취와 정교한 '상호작용'을 굄돌 삼고, 언어성의 지평을 매개로 기동하게 된 인간의 자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진화사의 정화(精華)다. 후설(E. Husserl)의 말처럼 순수한 의식으로 자아를 채운 일은 진실로 놀라운 것("Das Wunder aller Wunder ist reines Ich und reines Bewußtsein.")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귀한 것은 비용이 높고 또 그만큼 위태로운 구석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밝은 쪽의 아래는 어두워지고, 고된 성취는 후유증을 예비한다. 자의식이라는 진화의 꽃에 들붙게 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용은 바로 '불안(Angst)'이다. 불안의 정서에는 아무 특이함이 없다. "정신이 적을수록 불안도 적다(Je weniger Geist, desto weniger Angst.)."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은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의 자연스러운 조건이자 그 한계인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흔히 불안을 인간존재의 한계상황을 드러내는 지표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자의식을 틔워냄으로써 최초로 '무한'/영원과 대면하게 되었으며, 이 대면은 불안이라는 '낙인'을 인간의 정신에 찎어 놓았다. 심리적 억압(Verdrängung)의 보편성이 무의식의 저수지를 만드는 역사에서 그 출발점을 이룬 것처럼, 불안의 정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세계를 만드는 밑절미가 되었다. 혹자들이 종교의 등장을 바로 여기에 위치시키는 이유도 그럴싸하다. 따라서 각종각양의 도그마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습속 등, '쉽게 진리를 말하려는 버릇'(니체)에 빠진 채 자의식의 불안을 다양한 집착으로써 미봉하려는 태도, 바로 이곳에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잘라 말하자면 자의식이라는 인간존재의 알짬이 외려 출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7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