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

백_일홍 2022. 7. 29. 17:43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 _

에코다르마, 생태위기 시대 새로운 불교 행동철학

 

데이비드 로이

 

서론


환경문제와 교차점에 있는 사회정의 문제.


세가지 불교.
. 내세적. 현세를 초월
. 세속적. 현세의 행복 증진을 위한 치료법
둘다 현세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 자신과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깨닫고 경험함.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함.

명상, 자아(생각, 감정, 행동의 습관적 패턴)의 해체. 재구성

개인의 변화라는 길과 사회의 변화라는 길은 실제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각성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고, 명상과 같은 사색적 수행은 우리 행위의 바탕이 되어 그것을 영적인 길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19

에코다르마
. 자연 속에서의 수행
. 불교가르침의 생태적 의미 탐구
. 오늘날 요구되는 생태운동 이해

속도를 늦추고 우리와 자연과의 원초적 관계를 재발견할 때, 세계는 개별적인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자연의 여러 과정들이 합류하는 지점임이 더욱 명백해진다. 상호의존적 공동체
. 자연관. 공리주의. 기능, 도구.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세계.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로 언어방식에 의해 구조화된 세계. 개념과 기능과 갈망에의 집착에 우리를 가두다. 도시환경, 우리가 인식하는 거의 모든 것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사람과의 관계도 실용주의적.
.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기. 집단적이고 제도적 의미를 지니는 문제.
기술의 발달. 자연을 인류를 위한 원자재로 한정하는 인본주의. 이원론. 도구주의적 자연관이 우리 생태적 곤궁의 중심에 있음.

오늘날 가장 필요한 해방운동.


1장. 기후변화가 문제일까?

성스러움의 상실.
세속주의. 세속적 세계.
원래 두 가지 성질을 가진 세계의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의 상실로 여전히 괴롭다. 신의 초월성과 탈영성화된 물질세계 사이의 분열로 부터 근대성이 생겨났다. 69

중세의 세계관

민족ㅡ국가, 자본주의, 기계론적 과학

불교적 가르침은 창조주 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속적인 근대성이 제시하는 무신론적이며 불가지론적 대안에 수월하게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적 접근은 거대한 우주라는 시계장치를 작동시킨 초월적인 시계공이라는 관념으로 회귀하는 것을 옹호하지 않으면서도 세속적인 물질주의에 의문 부호를 던지는 대안적 견해에 훨씬 더 호응한다. 76
화엄불교. 인드라망.

영적 위기.
생태 위기는 지구가 우리에게 깨어나지 않으면 결과는 고통이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태위기는 또한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십에 관한 위기이기도 하다. 80


2장. 생태위기는 또한 불교의 위기인가?
지난 세대의 불교인들이 강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올리는데 훨씬 나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렇게 물에 빠진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에 미숙하다. 90

불교인들은 노숙자와 교도소 재소자들을 도우면 그틀은 보살이라 불린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왜 이렇게 많은 노숙자가 있는지, 왜 이렇게 많은 유색인종이 교도소에 있는지를 물으면, 다른 불교인들은 그들을 좌익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사회적 행동은 불교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92

지난 몇년 동안 매우 성공적이었던 마음챙김 운동. 불교계 내에서 이 운동은 점점 더 논란이 되어왔다. 마음챙김 수행은 매우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챙김 수행 또한 사회적 고통이라 불리는 집단 고통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저해할 수 있음에 주목한다.

마음챙깅 운동의 상업화. 이 운동이 불교가 전통적으로 제시해온 윤리적 맥락을 상실할 경우. 예리한 사회적 비판이 부재한 불교수행은 현재 상황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데 이용되기 쉽고 소비자본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다.
개인적인 변화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사회변화의 중요성으로부터 멀어지계 할 것이다. 93

문제.
생태위기에 관한 많은 불교인들의 명확한 무관심을 이해시킬만한 불교전통의 필요불가결한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로얄 루, 차축시대의 종교에 대한 언급.
우주적 이원론과 개인 구원론을 강조한 점
불교에서도 우주적 이원론을 가르치는가? 윤회와 열반 사이의 관계.
만약 열반이 이 세계를 초월하는 장소이거나 상태라면 이는 우주적 이원론의 한 형태다. 98

소승. 대승 전통 모두가 현상적 실재를 평가절하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00
공성에 대한 집착이 우주적 이원론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
조애너 메이시, 자비행의 용기를 자르는 영적인 트랩들.102

자아의 해체.
나의 스승 야마다 코운에 의하면, "좌선을 하면서 자아를 축소시키는 것보다 이 지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위대한 서비스는 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생명은 드러날 기회를 갖는다". 좌선이 이 무한한 생명이 드러나도록 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진다.

공과 무한은 우리의 본질적 성품이 지닌 특성이다.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릴 필요가 있다.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하나 이상의 세계가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던 세계가 아니란 것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 엘렌 식수 -


3장.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바로 자연이다.

갈애와 개념화.
문제는 우리가 대체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을 사물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방식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해체될 수 있는 심리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과 동일시하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세계를 경험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고, 하나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49

우리가 삶을 단지 의도와 욕망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경험하고, 계속 세계를 도구의 집합이라고 파악한다면, 우리는 거듭 중요한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의 문이 깨뜻해지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무한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문을 단단히 닫아버렸다.
자신의 동굴 좁은 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될 때까지" 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며
당신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150

Christopher Mines
"문자 이전 시대의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역사 전반에 걸친 대부분 문화에서, 모든 세계는 소통하곤 했다.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애미니즘이라고 불렀다. 애니미즘은 인간의 역사에 가장 만연해 있는 세계관이다. 애니미즘 문화는 자연 세계에 귀를 기울인다. 이들에게 새는 말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벌레들, 늑대들, 폭포들도 마찬가지다.

The Re-enchantment of the world 모리스 버만
"서구에서 과학혁명이 도래하기 까지 지배적이었던 자연관은 매혹적인 세상의 자연관이었다. 바위와 나무, 강과 구름들은 모두 경이롭고 살아있는 것으로 보였고, 인간은 이러한 환경에서 편안합을 느꼈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는 소속됨의 장소였다. 이 우주의 구성원들은 우주에서 멀리떨어진 관찰자가 아니라 우주 드라마의 직접적인 참가자였다. 자신의 개인적 운묭운 우주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의식의 유형은 우리와 우리 주변환경과의 통합 혹은 동일시를 수반하고, 그런 매혹적인 풍경이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의 영적 온전함을 보여준다. "154


나는 인디언입니다. 나는 이 냄비처럼 평범하고 흔한 것에 관해 생각합니다. 거품이 이는 물은 비구름에서 옵니다. 그건 하늘을 나타내지요. 불은 태양으로부터 와요. 태양은 우리 모두의 인간들, 동물들, 나무들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고기는 네 다리를 가진 생명체인 우리의 동물 형제들을 상징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증기는 살아있는 숨입니다. 그것은 물이었다가 이제 증기는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구름이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스럽습니다.... 우리 수족은 모든 사물에 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많은 상징을 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지요. 우리에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백인은 너무 적게 보는데, 그는 오직 눈 하나로만 보는 게 틀림없어. 우리는 당신들이 더 이상 알아채지 못하는 많은 것을 봅니다. 다인들이 원하단다면 아라첼 수 있지만, 당신들을 대부분 너무 바쁩니다. 우리 인디언들은 상징과 이미지의 세계에 삽니다. 거기서는 영적인 것과 평범한 것이 하나입니다. 156

만약 불교의 공이 그 자신의 어떤 형체나 특성이 없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해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형테를 생성한다면, 공과 도는 구별하기 어려워 진다. 157

우리의 과제는 새로운 언어, 심지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것은 국가라는 한계뿐만 아니라 고립된 인간 종의 한계까지도 넘어서서 살아있는 종들의 보다 광범위한 공동체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와 가치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 토마스 베리 -

4장. 인간의 고통과 생태계의 고통은 동일한가?
:개인의 고통에서 집단의 고통으로, 개인적 깨달음에서 집단적 깨달음으로

집단적 깨달음.
토마스 베리와 브라이언 스윔, '신우주론'
인간은 "아주 특별한 형태의 의식적 각성을 통해 우주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찬양'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주의 자의식이다" 우리 인간들은 우주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진화를 우리의 우주가 자기를 조직하는 방식이어서 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보다 의식적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우리 자의식의 본질에 관한 다른 견해는 나타낸다.

문제는 자기를 의식하는 자아는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우리의 특별한 종류의 인식을 축하하여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견해에서 볼 때, 개별적인 자아에 대한 인식은 다른 자아들과 나머지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결합이 있다. 불교의 길은 우리는 더 커다란 것을 구체화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런 의식은 개인적인 자아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자아라는 인식은 의식이 드러나는 방식 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달리말해서, 우리가 우주의 자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주가 의식하는 자아는 우주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라가 붓다의 깨달음에 관해 물었다. "누가 당신의 깨달음이 진실이라고 증언할 수 있는가?" 붓다는 무엇을 했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단지 땅을 건드렸다.

도겐 선사가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곤 했는데, "나는 마음이 강과 산과 드넗은 대지, 태양과 달과 별들과 다르지 않음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생물학적 진화는 이와 같은 영적이고 문화적인 진화의 형태에 의해서 채워질 필요가 있으며, 이는 어머니 지구와 우리가 비이원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또한 우리의 진정한 집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불교적 깨달음이 형태를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생태적 위기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제공한다. 생태위기는 우리에게 다음 단계를 밟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만큼이나 영적인 문제이다. 파괴의 과정을 멈추기 위해 우리에게 집단적인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틱낫한의 주장은 육체적 생존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는 영적인 진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집단적 깨달음은 무엇인가?
점진적 깨달음의 집단적 형태를 어떤 모습일까? 폴 호컨,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지구적인 문제인 생태적인 문제와 더불어 사회정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난 사회적 참여 조직의 세계적인 네트워크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다.
잡지, 에 실린 그의 인터뷰, 이 운동이 전개되는 모든 방식의 기원을 추적하며 다양한 차축 시대 종교에 의해서 신봉되던 생명의 신성함과 자비심으로 거술어 올라간다. 그러나 이 운동에는 공통의 이념이 없다.
"이데올로기가 매번 인류를 곤경에 빠트렸으며 여기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든 '주의'는, 불교도 포함하여, 분열로 끝나고 대부분의 경우 폭력, 전쟁, 잔인함으로 귀결된다. 이 운동이 장점은 모든 것이 이미 원자화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이 운동은 '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더 분열될 수 없다. 오로지 함께 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름도 없다."
이 운동은 마치 우리의 세상을 약탈하는 힘으로부터 우리가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인류의 '면역 반응'이다. 이 운동을 구성하는 조직들은 '권력이라는 병리현상의 사회적 항체'이다.
"면역체계가 자아와 자아가 아닌 것을 인식하듯이, 그 운동은 무엇이 인간적이며 무엇이 인간적이지 않은가를 인식한다. 면역체계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기체를 지속하도록 하는 내부 방어선이듯이, 지속가능성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류를 계속 존속시키려는 전략이다. 면역성이라는 단어는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5장.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종말을 가다리며: 당신은 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350.org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빌 맥키번은 2010년 저서 에서 우리가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훨씬 지났음을 강조했다.

Alan Weismsan, 'methane burp' 메탄 트림

종말을 기다리며.
고타마 붓다는 다음에 올 붓다인 미륵이 나타나서 다르마를 복원할 때까지 물리적인 쇠퇴와 도더걱인 타락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가르침인 진정한 다르마가 쇠퇴할 것이라고 예연했다. 동아시아의 정보불교는 정토를 달성하기 위해서 헌신적인 수행을 강조했는데, 헌신적인 수행 없이는 이 퇴락의 시대에 깨달음을 달성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아시아 불교 신자들 대부분이 미래불인 미륵에 대해 친숙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만든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나타날 어떤 메시아나 화신에 대한 신앙을 믿기는 더욱 어렵다. 틱낫한은 미래불이 수행자들의 공동체인 승가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우리가 기다려왔던 바로 그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팔리어 경전인 고타마 붓다는 우리 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설명하는 데 7개의 태양이 지구를 메마르게 하고 불태우게 된다는 것. 일곱번째 태앙이 나타날 때 "대지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때까지 화염으로 휩싸일 것이다. ... 조건 지어진 것은 그렇게 무상하고, 그렇게 불안정하며, 그렇게 의지할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궁극적 운명에 관해 이렇게 암울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에는 다른 대응방식들이 있다. 우리는 인류와 다른 모든 생물형태의 멸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본질은 조만간 멸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

이 운명은 우리가 흔하게 하는 소위 미래지향적 사고와 행위에 이 시나리오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성찰하게 해준다. 왜 인간의 생명이 결국 그러나 불가피하게 멸종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를 불편하게 할까? 우리가 직면한 보다 당면한 문제들을 고려할 때, 10억년은 분명 걱정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이 조만간 끝날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방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화하는 우리의 심리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우리의 유전자를 미래세대로 물려주는 것에 몰두하도록 우리를 조건 지었다. 이것이 멸종에 관한 생각에 대해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원천인가? 하지만 무상과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는 진화의 역사가 반드시 운명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존건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은 흩어졌다가 조건에 따라 다시 뭉친다. 이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사라왔던 삶의 방식은 종말을 고하는가?.
"당신이 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불교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붕괴에 대처하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우리의 삶이 우리 개개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더 큰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생각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빌 맥키번)
인류가 사라지면 불교와 그 밖의 모든 종교 전통 역시 사라질 것이다. 예술, 시, 희속, 소설, 음악, 과학적 발견 모두 함께 사라진다. 이와 같이 매우 현실적인 가능성 앞에서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현대의 스승들은 이러한 우려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가장 훌륭한 두 사람은 틱낫한과 조애너 메이시다.
"기후위기에 대한 불교의 대응, A Buddhist Response to the Climate Emergency", 틱낫한 스님.
온라인 저널 에 발표한 2012년 인터뷰,
... 호모 사피엔스의 멸종...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영원한 시간에 닿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멸종은 여러번 일어났다. 대멸종은 이미 다섯 번이나 있었고, 이번이 여섯 번째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태어남고 없고 죽음도 없다. 멸종 후에도 종들은 다른 형체로 다시 나타난다. 우리 인간이 100년 안에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깊이 호흡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 어려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절망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해결책은 현재의 순간에 영원과 접속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환경이 우리와 다른 것처럼 이야기해왔지만, 우리가 환경이다. 비인간적 요소들이 우리의 환경이지만 우리가 비인간적 요소들의 환경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과 하나이다. 우리가 지구이고 지구는 균형을 복원할 역량을 가졌으며 때때로 이러한 균형의 복원 때문에 수많은 종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기적을 접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현재의 이 순간은 경이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여러분이 이 경이로운 것들과 접촉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여러분은 생명에 관하여,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 " 245
호흡강조, 생명의 기적에의 접속. + 태어남고 없고 죽음도 없다.

불교전통에 따르면 태어남고 없고 죽음도 없다는 가르침은
우리 자신의 물리적 소멸 가능성에 비추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애너 메이시, 2011 한 인터뷰,
"남은 시간이 거의 없지만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이 깨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기쁨과 보람의 원천인 지구에서의 총체적 경험이 우리 마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지구가 스스로를 볼 수 있고 생명이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축복의 몇 가지 원천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죽더라도 말이죠. "일출은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일몰이라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한국의 승려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눅음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두려옴에 빠지지 않고 우아하고 관대하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격과 공포에 빠지지 않습니다. "

메이시는 다른 사람들과 함게 살아있는 현재라는 순간을 진정으로 경험하면,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에 전심으로 다하여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틱낫한은 태어난다거나 죽는다는 그러한 것들은 실제로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덧붙인다.

우리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 슬픔. 절망

그녀의 작업은 절망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일 뿐만아니라 우리가 지구와 우리 자신에게 가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는 통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99년 Mary NurrieSteams와의 인터뷰, 자비로운 행동으로 완전히 변하기 위해서는 절망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 사람들은 절망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자신이 단지 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력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이 세상에 대한 고통을 느끼게 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생명의 그물망에 열어두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내 생각에 혼자 행동하려는 시도가 가장 중요한 실수입니다. 적절한 대응은 다른 사람과의 연대감을 성장시키고, 우리의 자원은 무엇이고 우리의 힘은 무엇인지에 관한 전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정교하게 하는 것이다." 251

2012년 저서,
절망을 감사로 시작하는 변화의 나선형과 통합시킴.
새로운 눈으로 봄으로써 감사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우리의 고통을 존중하게 하고, 나아가 그녀가 '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느는 것에 참여하다록 한다. 운명을 못바땅하게 하는 대신, 우리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운다.

Charles Eisenstien, "Grief and Carbo Reductionism"
우리가 처한 현실 상황을 깊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하여 슬픔은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남는다. ...자연에 대한 도구적 공리주의의 태도, 그것이 문제다. 이런 생각이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 바꾸기 위해서, 자연과 물질세계를 그 자체로 신성하고 가치 잇는 것으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깊은 부분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처럼 연결되어서 지구의 상처를 느끼게 될 대, 슬픔은 불가피해진다." 254

절망과 슬픔은 전심을 다한 참여를 간섭하는 장애가 아니라 생태적인 다르마의 길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이거나,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문제가 있는 방식으로 조직하는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더 깊이 변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느껴야 한다. 우리를 마비시킨 억압된 슬픔과 절망에 마음을 열고 그 결과 그 슬픔과 절망이 자비로운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걸까? 깊이 느낄 때, 쓸픔은 평소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와 느낌, 행위 방식을 뚫고 들어온다. 우리의 습관 대부분은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 개념화된 인식은 우리의 편안한 생활방식을 문제로 삼지 않는다. 심지어 절망과 슬픔은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것,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 자신과 우리 슬픔의 대상 사이의 분리를 해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면 '나의' 슬픔은 지구 자체의 슬픔이 되고, 지구의 안녕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공리주의에서 고려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것에 근거를 둔다.

조지 마셜,
"우리는 기후변화가 만들어내는 불안과 기후변화가 요구하는 극심한 변화를 회피하고 싶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기후변화는 다른 주요한 위험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보통 우리의 뇌로 하여금 단기적인 이익을 무시하게 할 분명한 표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적극적으로 공모하고, 기후변화가 영원히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우리 자신만의 편견을 동원한다. 257

죽음도 없고 죽음의 끝도 없다.
불교에서는 영혼이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불멸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대신 불교의 가르침은 태어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삶과 죽음은 나-생사의 과정에서 떨어져서 자아로 존재하는 의식-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태어나거나 죽는 그런 자아가 없는 한, 두려움도 없다. 얻거나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사를 피하는 방법은 생과 사 속에 있는 '자아를 잊는 것'이다. 태어남이나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평상시의 인식을 제거하는 것이고, 대신 완전하게 태어남과 죽음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순간 오로지 죽음의 과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죽음을 거부하지도 않고 죽음을 끌어안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 또한 '공'하다.

생사가 열반 자체임을 알라. 피해야 할 생사도 없고, 구해야 할 열반도 없다. 오직 이것을 깨달을 때 그대는 생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류를 비롯한 종들이 멸종하더라도 잃을 것이 없으며 우리 종이 생존해서 번성하더라도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유일한 관점은 아니다. 비록 색이 공하다는 것이 죽는 개별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에 멸종의 사건에도 실제로는 어떠한 것도 죽지 않음을 의미할지라도, 그럼에도 공이 색이라는 것은 공한 것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마땅히 신성한 것으로 불리는 이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멸종과 멸종없음의 이러한 역설.
(생과 공, 절대와 상대...)

"온 우주가 무너지더라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와 같기 때문이다"

우주가 진화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공'한 진화과정 자체인 것처럼, 파괴 도한 우주에서 이분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공'한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파괴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이유이다.

영적인 길은 그러한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소멸되면서 소멸되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이고 같은 손의 손등이며 손바닥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너무 늦었는지 또는 너무 늦지 않았는지에 관한 물음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문명 붕괴나 심지어 인간 멸종이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간과하지 않는다.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더라도 그런 가능성에 의해 무력하지 않다. 너무 늦든 늦지 않든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2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0) 2022.07.29
깨달음의 심리학  (0) 2022.07.29
동물과의 대화  (0) 2022.07.29
신들의 마을  (0) 2022.07.29
식물의 시간  (0)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