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백_일홍 2022. 7. 29. 18:14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_ 양자역학이 묻고 불교가 답하다

 

김성구

 

 

▶ 발제


1. 우주와 '나'의 연기적 관계

우주, 나, 참나, 마음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우주는 전체가 단일체이다. 이 우주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체득할 때, 이 마음이 바로 불교윤리의 기반이 되는 '무아'인 것이다. 주와 객이 구분이 없는,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순수한 마음이 무아이고 이것이 참된 '나'인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없었더라면 우주를 생각하는 지성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우주를 생각하는 지성체가 없다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알까? 또 지성을 가진 외계 우주인이 있다면 그 우주인이 보는 우주는 인간이 보는 우주와 같을까? 우주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면 과연 우주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우주에 인간이라는 지성체를 만든 것은 우주이고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니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와 인간은 서로 통해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렇게 나와 우주 전체에 적용된다. 156

2.고통과 법계연기
비고. 아뢰야 연기

모든 번민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떠한 고통이나 어떠한 일에도 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연기의 이치이다. 지금 여기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도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가 완전하다는 것이 <화염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의 이치이다. 176

3. 한마음과 융의 집단무의식 차이

우주를 탄생케 할 수 있는 모유의 공을 가리켜 대승불교에서는 일심(한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만물의 본체라는 뜻에서 진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쪽으로 부르든지 그들은 실체도 아니고 제일원인도 아니다. 그들은 공의 다른 이름이고 공은 연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공을 일러 일심이라고 부를 때는 우주가 만물의 근원인 모든 중생들의 공통적인 유심체인 한마음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인데, 이 공통의 유심체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172

 



1. 불교는 미래 종교인가?

불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 
. 삶은 괴로움이다. 고성제.
. 윤회

2) 무아론과 윤회

사건 중심의 세계관(과 존재 중심의 세계관) 26~
.. 사건이 이 세상의 기본이고 어떤 존재라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조작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스몰린 인용.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물(things)이 있는 것 같다. 돌맹이나 깡통처럼 그 성질만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objects)들이다. 다른 하나는 과정(processes)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나 문화 같은 존재(entities)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들이다.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things)'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물체(object)와 과정(process)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 다.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이 있을 뿐이다. 우주가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환상은 고전역학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현대물리학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론(相對論, theory of relativity)과 양자론(量子論, quantum theory)은 우리 우주가 과정들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과 변화(motion and change)가 주된 것이다. 근사적이고 임시적인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 도 없다. 무엇인가가 어떤 고정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우주는 많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사건은 과정의 가장 작은 부분 또는 변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구성될 수 있다....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relational universe)다. 모든 성질은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서 기술된다. 두 사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 요한 것은 인과관계다." 27~28

사건이 인과관계를 맺고 일정 시간 동안 진행될 때 이 사건들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 사건의 흐름이 어떤 특성을 갖고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하면 사람들은 이 사건의 흐름을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 처럼 보게 된다. 28

과정으로서의 자아: 무아
색수상행식 사이에는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질과 정신은 모두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 오직 사건의 흐름만 있을 뿐인데 이 흐름을 밖에서 볼 때 이것은 물질로 나타나고, 같은 흐름인데도 안에서 볼 때 이것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35

윤회외 아뢰야식 
아뢰야식에는 업의 종자 말고도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다. 업의 종자를 비롯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들은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유식 불교에서는 이 흐름을 가리켜 '식의 흐름'이라 고 부른다. 이 '식의 흐름'은 끊임없이 현세에서 내세로 이어지는데, 업은 이 흐름을 조직하여 유기체를 만들었다가 흩어지면 다시 만드는 일 을 반복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다. 여기서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정보가 어떻게 존재라는 실체로 변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보는 그렇게 추상적이지 않다.37

정보는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양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정신 속에 있다. 정보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연결하는 묘한 개념이자 물리량이다. 양자역학, 정보에 불과한 확률파가 입자라는 실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의 변환 중 하나를 윤회로 본다면, 무아이기에 동일성은 없지만 모든 존재는 인과관계를 가진 사건의 흐름으로서 단멸하지 않고 연속성을 가진다. 38


2.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

1) 불립문자와 교외별전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과 사물의 모습.

두 상태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젊은 아내가 그대로 늙은 장모님이다. 이것은 젊음-늙음의 이중성을 뜻한다.


'삶'과 '죽음'이나 '있음'과 '없음'도 이 그림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데 사람의 사물 인식방식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삶'을 보기도 하고 '죽음'을 보기도 하며, 혹은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무위와 유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젊은 여인, 혹은 노파 둘 중 하나를 보는 것은 변으로서 유위에 해당한다. 젊은 연인에게도 끌리지 않고 노파에게도 끌리지 않으며 그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무위에 해당한다. 업이 짠 매트릭스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71

전일주의적 관점과 환원주의적 관점
"비구들이여, 흙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 그 속에는 이 세간도 없고 출세간도 없고...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은 괴로움의 끝이다" 붓다.

이것은 붓다의 내적 체험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정신적 경지를 말한 것이다. 흙도 없고, 불고 없고 바람도 없다는 말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 더 이상 인식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식 대상이 사라졌기에 인식과 지각도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지각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와 객이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는 뜻이다. 도킨스나 호킹과 같은 유물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하나의 착각이나 환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 오히려 인간의 의식에는 새로운 경지가 있을 수 있고 종교인들 중에는 그런 차원의 의식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75

2)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인간의 이성적 사유(분별지, 논리)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엄밀한 수확적 증명이다. 자기언급이 있으면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다. 논리법칙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o 괴델의 제1 불완전성 정리: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 체계 안에는 옳고 그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는 이 공리체계 안에 존재한다. 

o 괴델의 제2 불완정성 정리 :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 체계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이 공리체계만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정리, 수학에는 기존의 공리체계 안에는 풀수 없는 문제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2정리, 하나의 공리체계가 완벽하다면, 이 체계가 완벽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공리체계보다 더 큰 공리체계가 필요하다는뜻이다. 

수학에 모순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는 근원적으로어떤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불완정성 정리는 과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물리학의 기본방정식이 완벽해 보이더라도 그 방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물리현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물리현상 말고도 과학적 지식체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 현상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학이 갖는 문제점 중 큰 것은 자기 언급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우주와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물리학, 인지과학 등 과학이 얻은 이 지식체계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자기언급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자기언급은 이성적 사유에 필연적으로 패러독스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결코 자아가 무엇인지 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우주에 대한 기술도 마찬가지다. 제2 정리를 과학에 적용하면 과학이 찾고 증명한 진리 외에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진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떠나서 물질세계만을 따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79

3) 불교와 과학의 특징

불교철학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하나는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지과학에서 마음 개념을 정의하는 것과 관련된 일이다. 이런 뜻에서 불교는 우주적 종교의 강력한 후보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종교적 감정이다. 

불교의 지관.
불교에서는 사람이 일체의 편견과 선입관에서 벗어나 거울같이 맑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결코 사물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에 불교에서는 마음을 바르게 '관'함으로써 마음과 물질의 실상을 알고 삶의 원리와 우주가 운행하는 이치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를 비롯하여 많은 수의 불교의 수행승들은 선정 속에서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불교 교설이란 이렇게 마음을 '관'하여 얻은 진리를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5

쿨라다사, 명상은 일인칭 과학이다. 96

검증과 표현의 문제
과학은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객관적으로 검증한다. 객관적 으로 검증하려면 모든 것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야 한다.(각주 72, 고전역학에서는 사물을 주체와 객체로 칼같이 나눌 수 있다고 보지만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역학에서는 그렇게 칼같이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칼같이 나누는 것이 불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양자역학에서도 사물을 일단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기술한다.) 사물을 관찰자인 '주(主)'와 관찰대상인 '객(客)'으로 나누어야 주체는 객체에 아 무 런 영향을 주지 않고 객체를 논리정연하게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런 이유로, 물질과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불교와 과학의 공통된 관심사지만, 과학의 연구대상으로는 물질이 적합하다. 물론 과학도 마음을 연구한다. 그러나 과학에서 마음을 연구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관찰자의 앞에 놓인 객관적 대상이 된다. 객관적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관 찰자와는 분리된 존재가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과학과는 달리 관찰자가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것이 불교의 '관'이다. 불교의 '관'은 남의 마음을 지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主, 관찰자)'으로 '마음(客, 관찰대상)'을 '관'하면 관찰자도 마음이고 관찰대상도 관찰자 자신의 마음이니 관찰자인 '주(主)' 와 관찰대상인 '객(客)'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여기서 불교가 그 관찰내용을 검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관찰자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는 양자(量子, quantum)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하여 훗날 양자역학을 탄생케 한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플랑크(Max Planck, 858~1947)의 말을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 플랑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학은 자연의 궁극적인 신비를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탐구하다 보면 자연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탐구해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98

주와 객이 하나가 된 상태에 본 것을 형식논리로는 묘사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근본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지혜를 특별히 '반야'라고 하여 분별지와 구별을 한다. 주와 객이 하나가 되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과학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경과학자들은 이 경지를 신비스럽다거나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치가 있는 특별한 경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나'와 '외부세계'를 구별하는 두뇌 영역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고 본다. 99


4.연기법

1) 연기법의 개요

사물의 상호의존성과 실재성
. 사물간의 인과관계. 이 세상에 원인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된 존재도없고, 다른 것과 구분되는 그 사물 고유의 성질도 없다. 

연기=무자성=공

우주는 전체가 그대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다. 140

우주의 참 모습을 알려면 전일주의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우주의 구성요소를 알아 봤자 그것은 과학기술자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과학 기술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가 말하는 우주와 불교 수행자가 체험한 우주는 같을 수가 없다. 뇌신경 과학자가 선정삼매에 든 수행자의 뇌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삼매의 의미를 알 수는 없다. 뇌신경 과학자들이 주와 객이 하나가 된 상태를 가리켜 '나'와 '외부세계'를 구별하는 두뇌영역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40

2) 상호의존성에 대한 과학적 고찰

상호의존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누구인가?"하고 물어 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생명체는 환경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물질의 입자 역시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세상에 다른 것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입자는 없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관찰자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찰자가 그것을 관찰할 때 비로소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148

(각주 103)
원자보다 작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소립자들이 원인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원인 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소립자들을 포함하여 미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존재와 사건들은 관찰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3) 인과관계와 세계관

우주와 '나'의 연기적 관계.
지구에 인간이라는 고등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시공간적으로 지금처럼 커야만 했었다. 초신성이 그 잔해를 우주 공간으로 날려 버리지 않았다면 지구상에 생명체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이 죽어서 썩으면 비료가 되고 이 비료를 이용해 다른 식물이 자라듯이 지구상의 생명체는 태양계 밖의 무거운 별이 죽은 잔해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초신성의 잔해가 생명의 씨앗이자 생명이 자라나는 토양이기도 한 것이다. 155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으로서 우주는 전체가 단일체이다. 이 우주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체득할 때, 이 마음이 바로 불교윤리의 기반이 되는 '무아'인 것이다. 주와 객이 구분이 없는,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순수한 마음이 무아이고 이것이 참된 '나'인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하는 것이고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없었더라면 우주를 생각하는 지성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우주를 생각하는 지성체가 없다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알까? 또 지성을 가진 외계 우주인이 있다면 그 우주인이 보는 우주는 인간이 보는 우주와 같을까? 우주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면 과연 우주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우주에 인간이라는 지성체를 만든 것은 우주이고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니 '인간이 생각하는 우주'와 인간은 서로를 통해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렇게 나와 우주 전체에 적용된다. 156

선형인과율과 세계관
제일원인을 찾는 종교와 철학
궁국적 실재,결정론
유신론, 물질마음 이원론, 관념론, 유물론 

상호인과율로 맺어진 세상에서라면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삶은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세상사가 복잡하게 연기적으로 얽혀 눈앞에서 전개되는 일이 단순하지 않을 때 누구나 사마천처럼 천도를 의심하게 되지만 세상일이 아무리 꼬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엄정한 질서와 법칙이 있고 사람이 정도를 걸어야만 최고의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158

물리학은 물체가 2개가 있을 때만 완벽하게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을 뿐. 이 우주에 태양과 지구만 있다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물리학은 지구의 운동을 끝없는 과거로부터 아득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입자가 3개만 있어도 물리학이론에는, 고전역학이든 현대물리학이든, 이 3개의 입자로 구성된 계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할 방법이 없다. 우주에 있는 대부분의 물질계는 복잡계로서 선형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행동을 보인다. 이 복잡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연기법이 말하는 상호인과이다. 161

상호인과율과 세계관

사람이 어리석어서 "내 사업이 잘되도록 도와주시오"라거나 내
자식을 잘되게 해주시오"라고 기도를 올릴지도 모른다. 이런 기도는 멤브 로즈 비어즈나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합리성을 추구하도록 교육받은 현대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기도를 답이 없는 허망한 기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정성껏 올리는 기도는 결코 허망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알게 되면 더 이상 파랑 새를 쫓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정성이 계속 됨에 따라 주위 사람을 감동시킨다. 기도가 계속됨에 따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잡념이 없어지는 쪽으로 정화된다. 기도하기 전보다 자유 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을 살피 는 마음을 갖게 되고 지혜가 싹트게 된다. 물론 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신경조직이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거기에 맞도록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이 분비된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올렸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긍정적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연기법이 말해주는 기도의 힘이다. 

4) 법계연기


<중아함경>의 "도경", 붓다, 세상일은 숙명적으로 미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우연에 의한 것도 아니며 신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일은 연기적 관계에 의해 내부적인 인과 외부의 조건이 만드는 연에 따라 일어나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여기에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165

소금, 한 잔에 넣는 것과 갠지스강에 넣는 것의 차이. 

사종법계

법계연기, 우주만유 전체를 하나의 큰 연기적관계로 봄. 법계연기의 특별한 점은 현상세계를 진리 그 자체인 법신불의 나타남으로 본다는 데 있다. 169

법계연기의 이중성
중생 즉 부처, 번뇌 보리, 생사 열반, 물질 정신, 음 양
입자 파동의 이중성

범부가 보는 차별상, 미혹의 현상계, 사법계,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업이 만든 메트릭스다. 

미혹의 세계에 살던 범부가 눈을 떠 사물의 실상을 알게 되면 그는 우주 만유의 공통된 통일성, 즉 공을 깨닫는다. 실체가 없어 '공'이라고 부르지만 만유가 그것에서 나오기 때문에 진공모유라고 한다. 모든 현상의 본질이 공이기에 여기에 어떤 차별상도 있을 수 없고, 선악, 유무, 주객 등 일체의 대립적 차별상은 사라진다. 이 평등한 세계를 이법계라고 한다. 


(참고
화엄종의 교리인 사법계(四法界) · 십현 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 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모두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는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각기 그 한계를 지니며 대립하고 있다는 차별적인 현상계(現象界)를 가리켜 사법계라하고, 그 반대로 평등한 본체계(本體界)를 이법계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본체는 서로 원인이 되고 융합되어, 평등하면서도 차별을 보이며 또 차별 가운데 평등을 나타낸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이다.

나아가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 원인이 되어 밀접히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이 사사무애의 특징적인 모습을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등의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십현연기문이다.
출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주를 탄생케 할 수 있는 모유의 공을 가리켜 대승불교에서는 일심(한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만물의 본체라는 뜻에서 진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쪽으로 부르든지 그들은 실체도 아니고 제일원인도 아니다. 그들은 공의 다른 이름이고 공은 연기를뜻하기 때문이다. 공을 일러 일심이라고 부를 때는 우주가만물의 근원인 모든 중생들의 공통적인 유심체인 한마음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인데, 이 공통의 유심체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172

고: 삶의 원동력
진선미의 근원은 '고'이다. 사람은 물론 동물들의 삶은 고통이 그 원동력이다. 고통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무생물과 식물과 같은 무정물만 있을 것이다. 배고품의 고통이 없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동물도 없을 것이다. '고'는 생명 활동의 원동력이다.

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그가 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의 머리말에서 '과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고귀한 선물. 그것은 생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에 "생명이 고귀한 것은 '고'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그 말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 175

연기적으로 서로 얽히고 설킨 이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법계의 의미도 달라지고 고통의 의미도 달라진다. 다만 세계가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다 마음의 문제로 적극적으로 수행에 의해 마음을 잘 다스리면 마침내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 영원한 평화와 절대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모든 번민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떠한 고통이나 어떠한 일에도 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연기의 이치이다. 

지금 여기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도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가 완전하다는 것이 <화염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의 이치이다. 176


5. 양자역학과 중도의 원리

2) 입자-파동이 이중성

확률파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성공적으로 기술하지만 그 실험결과들을 인간의 통상적인 사물인식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양자역학은 이론과 실험을 이어주는 해석이 필요하다. 양자역학의 이론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소립자나 원자의 파동성을 훌륭하게 기술하지만, 양자역학 이론은 이들 미시세계의 물리적 대상들이 왜 관찰 전후를 통하여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말하지만 이론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파동뿐이다. 양자이론에서 소립자의 파동함수와 별도로 존재하는 소립자는 없다. 따라서 이론에서 말하는 소립자(파동)은 위치라는 속성도 갖지 않고 운동량(속도)이라는 속성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험에서 관찰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하는 입자란 무엇이며, 소립자가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갖는다고 할 때 파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서 이론과 실험, 파동과 입자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해석이 필요해진다.

3) 파동함수

코펜하겐 해석. 
확률파.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공간상에 파동의 형태로 퍼져있다고 해석하는 것. 측정 전에는 정보(입자를 발견할 확률)만 있고 입자라는 실체는 측정 과정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 여기서 물리량을 측정하는 관찰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측정 도구도 훌륭한 관찰자일 수 있는지 아니면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여야 하는지 하는 문제인데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측정 도구도 훌룽한 관찰자라고 본다. 확률파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파동함수이다. 

파동함수의 붕괴.
관찰 전후를 통해 물리계의 상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찰자의 관찰이 필연적으로 관찰대상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다. 미시세계에서는 물리량의 측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계의 교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물리량 측정의 정밀성에 어떤 한계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불확정성 원리. 

소립자와 같은 측정대상이 측정 전에는 아무런 실체도 없이, 단지 관찰자가 입자를 관찰할 확률만이 파동의 형태로 전 공간에 걸쳐 펴져 있다가, 관찰자의 관찰과 더불어 확률파가 사라지고 어느 한 점에서 입자라는 실체가 나타난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함. 이 해석에 따르면 측정 전에 입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측정한 후라야 입자의 존재가 의미를 가진다. 관찰을 하여 입자를 어느 곳에서 발견하면 관찰된 입자는 입자가 발견된 그곳에 존재할 확률이 즉각적으로 '1'이 되고 나머지 공간에 존재할 확률은 '0'이 되면서 파동함수 전체가 갑자기 붕괴한다. 201

어떻게 측정하자마자 우주의 끝까지 퍼져있는 파동이 순식간에 붕괴를 한다는 말인가? 물리적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고 이 정보가 전달된 후 그것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국소성이라고 한다. 한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시공간의 제약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비국소성이라고 하는데, 미시세계의 물리계에서는 비국소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 

일상경험 세계에서 보는 모래알과 같은 입자들은 관찰자와 독립된 존재로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시세계의 원자나 소립자들은 입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모래알과 같은 의미에서 입자는 아니다. 관찰자의 관찰 방식에 따라 이것들이 때로는 입자로서, 때로는 파동으로서 행동한다. 이것은 관찰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실험방법을 선택하여 이것들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한 곳에만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관찰자가 어딘가에서 입자를 관찰했다면 관찰자가 그런 방식으로 그 대상을 측정했기 때문에 그곳에 입자가 나타난 것이지, 본래부터 그 근방 어딘가에 있던 입자를 관찰하게 된 것이 아니다. 관찰 전에는 모래알과 같은 의미에서 입자라고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소립자들은 측정 과정에서 생겨난 허깨비 같은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고 해서 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붓다가 말한 중도적 존재다. 
'무엇을 위한 일종의 경향' 
'상태의 중첩' 204

파동함수와 상태의 중첩
관찰자가 여러 명 있다면 이들은 같은 물리계를 관측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다 같은 상태를 보는 것은 아니다. 제각기 다 다른 상태를 관측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하므로써 코펜하겐 해석은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 많은 가능성 중 어떤 상태를 관측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관찰자의 선택에 달린 것도 아니고 이론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론은 관찰자가 어떤 상태를 관찰하게 될지 그 확률적 분포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상태의 중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파동함수와 유사하다. 인간의 마음도 여러 가지의 마음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이전의 사람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무의식 속에 중첩되어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이 구체화되면서 하나의 생각이 의식 위로 떠 오르고 행동을 하게 된다. 생각은 무의식 상태에서 중첩상태로 있다가 의식의 작용과 더불어 중첩상태가 깨어지면서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만일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면, 관찰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고 관찰자마다 다른 상태를 보게 된다는 것은 이 관찰자가사물을 인식하는 데 어떤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인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물리학적 원리, 불확정성 원리다. 210

4) 불확정성원리와 상보성 원리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속도)은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불확장성원리가 말하는 것은 위치나 운동량 및 에너지 등 기본적인 물리량의 측정 시 원리적으로 그 정밀도를 임의로 동시에 크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불확정성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해 준다. 하나의 예로서 진공 성질을 들 수 있다. 진공은 비존재로 인식되지만 양자역학으로 기술되는 진공은 그냥 씌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에너지가 생겨나더라도 이 생겨난 에너지가 관측자가 인식할 수 있는 시간보다 짧은 시간 내에 사라지면, 이 사건은 불확정성 원리에 어긋나지 않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도 위배하지 않을 것이다. 관찰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에 에너지를 가진 입자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더라도 이 사건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도 무관하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관측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관측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 공간에 걸쳐 입자가 생성되었다가 관찰자가 인식할 수 없을 만치 짧은 시간 안에 소멸되면 관찰자는 이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진공으로 인식할 것이다. 따라서 진공이란 관찰자가 인식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내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온갖 종류의 수많은 가상입자들로 가득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들 가상입자는 온갗 가능한 모든 상태로 중첩되어 전 공간에 걸려 가득 차 있다. 

물리적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득 차 있지만, 관찰자가 그것의 물리량을 측정하면 모든 물리량은 영이기 때문에, 관찰자가 그것을 비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불확정성원리는 인간의 사물 인식에는 원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말하며, 관찰자의 측정이 언제나 측정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측정과 무관한 물리계란 없다는 뜻이며,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전체가 그대로 하나를 암시한다.  불확정성 원리는 많은 신비 체험가들이 말하는 바 우주와 하나가 된 '나',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심외무경을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심외무경이란 마음밖에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우리가 보는 외부 세계의 존재들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6식이 아니라 한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참고로 하나 말해둘 것이 있다. 양자역학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측정대상-측정-관찰자에 관련된 문제는 모두 불확정성원리를 통하여 설명해왔다. 이 설명이 뜻하는 것은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관찰자의 측정이 물리계에 필연적으로 교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계의 상태가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불확정성원리 만으로는 이 문제에 관련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실험들이 보고되고 있다. 

계에 의미 있는 교란을 가하지 않더라도 관찰자가 계로부터 정보를 얻으면 계의 상태가 바뀌고, 의미 있는 교란을 가하더라도 관찰자가 정보를 얻지 않으면 계의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는 실험적 결과가 많이 있다. 불확정성원리는 이 가운데 계에 교란을 가하고 정보를 얻은 경우를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얻은 결론에 해당한다. 물리계의 교란과는 상관없이 계에 대한 정보의 획득이 계의 상태와 행동을 바꾸는 것이라면,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이 싫어하지만, 양자역학과 관련된 문제는 관찰자의 의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관찰자의 의식에 관한 문제는 상보성원리와도 일부 관련이 있다. 217

상보성원리.

불확정성 원리를 일반화시키고 보다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상보성 원리다. 

상보성 = 이중성,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짐. 상보성 - 자연현상은 하나의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결코 기술할 수 없고 반드시 이 개념과 짝이 되는 대립되는 개념을 함께 사용해야만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 파동성을 가진 세계와 입자 성질의 세계 이 두 가지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인다. 중도의 이치. 

자연이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인간의 사물 인식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거나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에 어떤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람의 사유방식과 사물 인식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데 적합한 용어와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 일상적 경험세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으로 미시세계를 기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시세계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는 어떤 한계가 따를 수 밖에 없고, 이 인식의 한계로 인해 미시세계의 현상이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인다. 

상보성 원리: 미시세계의 자연현상은 반드시 서로 상보적인 두 조의 물리량으로 기술되며, 서로 짝이 되는 한 쌍의 상보적인 양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 

속도-위치, 파동과 입자

미시세계의 자연현상은 반드시 이 현상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상태와 이 상태를 벗어나려는 경향으로 기술되며, 이 상태와 상태를 벗어나려는 경향을 동시에 정밀하게 알 수는 없다.

노이만은 1932년 측정 대상뿐만 아니라 측정 도구까지 양자역학적으로 해석하고 측정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측정도구는 파동함수의 붕괴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것을 보이고, 의식을 가진 관찰자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되된다고주장했다. 226

5) 코펜하겐 해석
의 핵심 내용 정리

①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세계를 원자와 소립자들이 속하는 미시세계와 측정 장비가 속하는 거시세계로 나누고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거시세계의 물리계는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르며, 미시세계의 물리계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대상을 파동함수로 기술하며, 파동함수는 관찰자가 그 계에 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② 관찰이란 미시적인 대상이 거시적인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측정 도구는 훌륭한 관찰자라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의 기본입장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 해석이 유물론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으며,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의 관찰자는 반드시 의식을 가진 존재라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노이만의 해석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른다.

③ 상태의 중첩: 관찰이 있기 전까지 미시세계의 존재는 모든 가능한 모든 상태에 '동시에 존재한다. 관찰은 파동함수를 붕괴시켜 관찰자는 단 하나의 고유상태만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시공간의 각 점에서 파동합수가 갖는 값은 그곳에서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 많은 고유상태들 중 어느 고유상태를 관찰하게 될 것인지 또는 시공 간의 어느 점에서 관찰자가 입자를 발견할 것인지에 대해서 양자이론은 단지 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는 없다.

④ 관찰 결과의 창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위치 와 운동량과 같은 비가환적 물리량들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임의로 아무 물리량이나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찰(추청)이 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인데, 관찰은 계를 교란시킬 뿐만 아니라 관찰결과를 만들어낸다. 모든 물리량은 관찰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그 의미를 가질 뿐 관찰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물리량은 없다. 예를 들면 소립자는 관찰하기 전에는 위치라는 속성도 갖고 있지 않다. 소 립자의 위치도 측정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⑤ 불확정성원리와 상보성원리: 미시세계에 속하는 원자나 소립자와 같은 존재들은 파동-입자 이중성을 보인다. 이중성을 갖는 미시세계의 자연현상은 반드시 서로 상보적인 두 조(組, set)의 물리량으로 기술되며, 서로 짝이 되는 한 쌍의 상보적인 양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

⑥ 관찰(추정)이 '파동함수의 붕괴(collapse of wave function)'로 표현되는 불연속적인 양자도약(quantum jump)을 일으킨다. 이는 양자역학으로 기술되는 미시세계의 물리계가 비국소적 성질(non-local property)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⑦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근사이론에 해당한다. 이를 대응원리 (correspondence)라고 한다. 대응원리에 의하면 상태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그 물리적 대상의 크기가 거시세계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에 대한 고전역학의 서술과 가까워진다. 227-228

6) 양자역학의 불교적 의미

존재-비존재의 중도를 말하는 붓다의 교설. 
중첩현상, 파동함수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연기법과 코펜하겐 해석

폰 노이만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코펜하겐 해석은 유식 불교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상호의존성.
소립자와 원자와 같은 미시세계의 입자들은 거시세계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미시세계의 입자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측정 
대상과 측정 기구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즉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양자 현상들은 모두 거시세계에 속하는 측정 장비를 통해 드러난다. 미시세계는 거시세계로 인해 드러나고, 거시세계는 미시세계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다. 관찰자의 의식이 있든 없든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 세게의 사물들은 왜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가? 보어가 주도한 정통 코펜하겐 해석은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고 폰 노이만은 관찰자 의식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재성 문제

입자라는 실체가 관찰자의 측정과 더불어 추상적인 파동함수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라면 관찰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기법, 세상 모든 존재는 사건의 흐름. 세상에 실체를 가진 존재는 없다. 미시세계의 존재도 거시세계의 존재도 그저 사건의 집합이고 사건의 흐름일 뿐. 여기서 어느 것이 더 허깨비이고 어느 것이 더 실제적인 존재인가 하고 논할 바가 못 된다. 실제적인 존재로 본다면 그것은 범부의 착각일 뿐. 범부의 마음이 범부가 보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폰 노이만의 주장과 유사하다. 미시세계도 거시세계도 '공'일 뿐이다. 진공모유. 


6. 실재성의 문제와 관찰자의 의식

1) 실재성의 문제

고도의 지성을 갖춘 관찰자가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는 것일까? 
보는 사람이 없다면 달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가? 

보어와 아인슈타인 논쟁. 
어떤 물리계를 대상으로 물리량을 측정하여 위치나 질량-에너지 및 전기량 등의 값을 얻었다면, 이것은 이런 값을 주는 어떤 물리적 실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측정 과정을 통해 물리량이 결정된다고 하는 코펜하겐 해석보다는, 어떤 물리적 실재가 있어서 그런 물리량을 측정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확실히 보통 사람들의 직관에는 더 잘 맞는다. 

양자얽힘.
전자-양전자의 쌍과 같이 두 입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 
양자얽힘은 물론 미시세계에서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원리적으로는 자연계 전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의 만물은 태초에 대폭발로부터 플랑크 길이라고 부르는 크기를 가진 작은 한 점에서 출발하였기때문이다. 만물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엃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물들 사이에 분리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세계의 물체들은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거시세계의 바탕이 되는 미시세계에 분리성이 없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세계의 분리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거시세계의 물체들에서 파동성을 볼 수 없고 우리 주변의 물체들은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일까? 

양자얽힘의 불교적 의미.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셀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가 있고, 이 많은 나라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금강경》

양자적으로 얽히면 얽힌 물리계가 우주의 양쪽 끝으로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한쪽에서 일어난 일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저쪽에 즉각적으로 미친다. 물질계에 그런 일이 있다면인간의 정신 현상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 인간의 의식이 높은 차원에 이르러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하나로 되고 남과 나의 구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남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붓다가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 무조건 부정되어야 할 말은 아닐 것이다. 자타불이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마음과 물질을 포함한 전 우주가 그대로 자기 자신이다. 전체가 그대로 하나임을 깨친 사람이라면 그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 모르겠는가? 

유식 불교, 하나로 연결된 이 마음이 바로 아뢰야식이다.258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심불급중생, 삼무차별 《화엄경》

2) 일상적 경험의 세계

원자보다 훨씬 큰 거시세계에 속하는 물체들의 실재성.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구분하는 엄격한 기준이 물리학에는 없다. 

양자역학의 이론은 원리적으로 미시세계의 원자나 소립자뿐만 아니라 거시세계의 물체도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이론에는 입자의 개념이란 없고 파동만 있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이론적 측면에서 볼때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구별하는 기준이 있을 리 없다. 

거시세계의 바탕이 되는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이 허깨비와 같은 존재라면, 허깨비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은 왜 허깨비가 아닌 것처럼 보일까? 왜 허깨비를 많이 모아두면 허깨비가 실체를 갖는 존재로 바뀌는 것일까? 입자라는 실체가 관찰자의 관찰과 더불어 추상적인 파동함수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라면, 이 거시세계를 이루는 원자나 소립자와 같은 미시적 존재들은 누가 일일이 관찰한 것일까? 

평균치의 세계. 

소립자가 높은 에너지를 가질 때 관찰자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 소립자가 가진 에너지가 크면 소립자가 파동으로 행동하여 간섭무늬를 만들더라도 관찰자는 간섭무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 소립자를 고전역학적인 입자로서 인식하게 된다. 

거시세계의 입자들도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그 간섭무늬의 간격이 너무 촘촘하기 때문에 관찰자는 그 무늬를 보지 못하고 평균치를 보는 것이다. 에너지가 큰 입자는 입자 스스로 거시세계의 입자처럼 행동하고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에너지가 큰 입자도 파동으로 행동한다. 그것을 입자로 보는 것은 관찰자가 그렇게 인식할 뿐이다. 여기서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다.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보면 거기서 아직도 파동성을 볼 수 있다. 문제는 파동함수를 붕괴시키고 입자를 관찰하는 양자역학의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265

(2) 결어긋남 해석

파동이 만나 간섭현상을 일으킨다고 해서 모든 파동이 만나서 간섭 무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두 파동이 만나 간섭무늬를 만들려면 두 파동의 속성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두 파동의 속성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할 때 두 파동 사이에 결맞음(coherence)이 있다고 하는데 '결맞음'이 있는 파동들만 간섭무늬를 만든다. 265

태양광선이나 백열등은 수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졌으므로 태양광선이나 백열등에서 나오는 빛은 수많은 독립적인 광원에서 나온 빛들로 이루어졌다. 이런 파동들을 가리켜 '걸어긋남(decoherent) 파동'이라고 한다. 걸어긋남 파동은 그 위상 관계가 들쭉날쭉하여 두 파동이 합쳐지더라도 간섭무늬를 만들지 못한다. 그 결과 결어긋남 파동'들이 만났을 때, 그 합성파의 세기는 개별적인 파동들이 갖는 세기의 합과 같다. 합성파의 세기가 개별 파동의 세기의 합과 같다는 것은 '결어긋남 파동들이 만나면 그 결과 파동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파동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이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266

다른 광원에서 나온 빛의 파동 사이에서만 걸어긋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광원에서 연속적으로 나온 빛들이 서로 '결이 맞는다'고 할지라도 이 빛줄기들이 이중 슬릿을 통과한 후 입자들로 가득한 경로를 지나 벽면에서 만난다면 간섭무늬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파동이 다른 입자들이 충돌하면 그 위상이 조금씩 바뀌어, 연속적으로 벽면에 이르는 두 줄기 빛 사이에 마침내 '걸어긋남'이 생기기 때문이다. 267

소립자나 원자들도 빛의 파동과 똑같이 행동한다. 입자가 많이 모여 충돌하면 충돌할 때마다 그 파동의 위상이 조금씩 바뀌어 그들 간의 위상 관계가 들쭉날쭉하게 된다. 따라서 원자나 소립자가 많이 모이면 이들 모임에서는 파동성이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세계의 물제들에서 파동성을 볼 수 없는 이유는 , 이 물체들은 모두 결어긋남 파동들의 합이기 때문. 

결어긋남 파동이 만나서 만드는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도 결국평균치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거시적 세계란 이 거시적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미시적 현상 하나하나가 모여서 나타내 보이는 평균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평균값이라 실재로 존재하는 값이아니다. 268

거시세계는 미시세계 물리량의 평균값에 불과, 거시세계가 이시세계보다 오히려 덜 실재적이다. 268

3) 관찰자의 의식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서는 물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 사 이에서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도 특별히 큰 논란이 있는 문제를 꼭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아무래도 관찰자의 의식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관찰자의 의식에 관한 문제는 노벨상 수상자급 이상의 뛰어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김성구는 관찰자의 의식이 양자역학의 측정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는 입장을 지지하는데, 아래 소절에서 의식이 물질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말을 소개하고, 이 책의 저자가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1)물질과 의식에 대한 논란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노이만이나 위그너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물질계는 물리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리학자들의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물리학의 본질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이 물질계에 영향 을 미친다면 물리법칙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물리학은 뉴턴의 만유 인력의 법칙이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별들의 운행을 기술하는데, 거 에 의식이 영향을 미친다면 중력의 법칙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물질의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의식의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면 물리법칙은 의미를 잃을 것이다. 물리법칙이 의미를 잃는다면 물리학이라고 부르던 것은 더 이상 물리학이 아닐 것이다.

이런 원론적인 이유 말고도
물리학과 의식의 만남을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 결어긋남 해석.  그러나 앞서 주렉이 말한 대로 파동함수를 확률파로 해석하는 이상 결어긋남 해석도 관찰자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주렉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중 슬릿 실험이나 벨의 정리는 반드시 관찰자의 자유의지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272

2. 정보의 선택과 관찰자 의식

소립자로부터 파동성을 볼 것인가 아니면 입자성을 볼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찰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275

비교. 결정론, 기계적, 무작위 

일반적으로 물리계의 성질을 나타내는 물리량은 위치, 속도, 에너지, 스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고전역학에서는 원리적으로 계의 성질을 나타내는 모든 물리량을 다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 모든 물리량을 모두 측정하여야 계의 상태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전역학의 관찰자는 계의 상태를 결정하기 위해 어떤 물리량을 측정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관찰자에게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것은 계의 상태를 결정하는 일이 기계적으로 처리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전역학에서는 관찰자의 의식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원리와 상보성원리에 의해 서로 상보적인 두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관찰자는 상보적인 물리량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측정함으로써 계의 상태를 결정하게 된다. 다른 관찰자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물리량을 측정하고 계의 상태를 기술할 것이다. 측정 도구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상보적인 양들 중 어느 것을 측정할 것인 가를 결정하는 것이 관찰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면 이런 물리계의 측정이나 관찰에는 관찰자의 의식이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76

계에 의미있는 물리적인 교란을 가하지 않더라도 어떤 정보를 얻으면 계의 상태가 바뀌고, 약간의 교란을 가하더라도 정보를 얻지 않으면 계의 상태가 바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각주 184)도 있다. 양자역학적 측정에서 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는 과학이 유식 불교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283

각주 184
184 Scully, M. O., B. G. Englert, and H. Walther, "Quantum optical tests of complementarity. Nature 351 (1991), pp.111~116. 우리나라 포항대의 이후종 교수와 그 동료들도 2009년 3 월에 비슷한 실험을 하고 "달은 보는 사람이 있기에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실 힘을 해설하였다.

 
7. 중관학: 공과 중도

문제의 답은 바로 성자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가 평화의 종교라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불교인의 사상'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교인의 사상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불교인의 철학을 말한다. 물론 불교의 모든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지만, 불교인의 행동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인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성자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불교인의 철학 역시 붓다의 가르침 못지않게 중요하다. 

붓다의 가르침을 간명하게 해석한 것은 상좌부 불교보다는 대 승불교 쪽이다. 붓다의 연기법을 간명하고 제계적으로 정리하여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정립한 것은 공과 중도를 말하는 용수의 중관 사상(中觀思想)이다.

공과 중도는 사물의 실상을 나타내는 오묘한 개념으로서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철학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사상이다. 287

'공'이 사물의 실체 없음을 강조하고 무엇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한 다면 중도는 대립되는 견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 것을 말하면서, 또한 모든 견해를 다 긍정하고 포용할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도사상 은 대립을 벗어나 평화공존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299

중도: 평화와 표용의 원리


. 상대성원리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우화가 뜻하는 중도의 이치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아주 비슷하다. 서로 다른 좌표계에 있는 관찰자는 다른 물리현상을 보고 다른 물리량을 측정하게 되지만 서로 다른 물리량들이 다 똑같은 방정식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장님이 만져보고 말한 것은 다 다르지만 그것들은 다 코끼리의 진면목 중 하나의 모습을 나타낸다. 장님은 진리의 한 면을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현상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경험은 진리계(무위]의 실제 모습 중 어느 하나이다. 부분 을 본 것이 유위이고 전체를 본 것이 무위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과학 기술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고 살펴본 과학 기술자의 관점에서 본 것이 유위이고, 전일주의의 관점에서 백남준이 전하는 예술성을 본 것 이 무위이다. 그래서 용수는 이를 가리켜 '생사 즉 열반'이라고 말했다. 306

. 조화의 원리
조화의 원리 는 양자역학의 상보성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가 운행하는 근본 이치를 담고 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한다면 조화의 원리란 우주는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 이를테면 음(陰)과 양(陽)의 조화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 불이의 원리
용수, 팔불중도(八不中道)

불생역불멸(不生亦不減):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여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 
상주불멸도 아니지만 단멸도 아니다.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불래역불거(不來亦不去):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팔불중도는 연기의 이치를 짧게 설명한 것이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며 인연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없던 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생역불멸'이라고 하며, 인연이 다하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던 것이 사라지지만 이것은 새로운 인연을 통해 새로운 것이 형성될 뿐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상역부단' 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 및 '있음과 없음' 등, 세상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면, 이것들은 분명히 다르지만, 이중성과 상보성에서 보듯이 더 깊이 있게 살펴보면 이들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이 불일역불이의 뜻이다. 용수가 불일역불이 라고 한 것은 파울리가 조심스럽게 "물리적인 것(physis)과 정신적인 것 (psyche)이 동일한 실재의 상보적인 측면이라면 가장 만족스러울 것이다라고 한 말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불래역불거(不來亦不去)은, 용수의 설명에 의하면, 만물은 자재천이나 기타 불변의 요소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 데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온 데가 없으니 그리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거(法)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제일원인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연기의 이치를 달리 표현 한 것이다.

팔불중도 하나하나는 연기법이 말하는 실재성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동일성과 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연기법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사건과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동일성은 없다. 동일성은 없지만 인과적으로 연결된 사건의 흐름 또한 끝날 수가 없다. 이것을 삶과 죽음의 문제와 결부시키면 동일성이 없으니 무아요 사건의 흐름은 끝나지 않으니 이것을 가리켜 윤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315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사물의 실상은 하나이되 사람의 사물 인 식방법에 따라 사물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중도의 이 치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는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것이 중도 의 원리가 강조하는 바다. 

 '있음'과 '없음'에 대한 중도의 이치.
있음-없음의 중도는 불이의 원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별도로 특별히 취급하는 것은 우리 눈앞에 전개된 사물들이 너무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아무리 공과 무아를 강조해도 사람들이 이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있음-없음의 문제를 특별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관학을 세운 용수도 있음과 없음 의 문제를 팔불중도에서 말하지 않고 별도의 항목에서 다루었다. 

삼제게와 원융삼제

"나는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을 공이라 하네, 그것은 가명이며 또한 중도이네."

사물에 실체가 없어 '공'이라고 하지만 현상적으로 전개된 세상 사물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은 실체 없이 임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공'과 '가'의 진리를 포용하면서도 초월한다는 것이 '중(中)'이다. 후대의 불교학자인 중국의 천태지의(天台 智頭, 538~597)와 신라의 원효(元曉,617~686)는 결국 공가중(空假中)의 셋은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보는 관점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것이라고 보았다. 공가중의 각각으로 설명하는 명제를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을 원융삼제(圓融三諦)라고 한다. 317

가유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사물의 본질적 측면인 공(空)과 현상적 측면인 가(假)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용수가 말하는 중(中)이다. 공가중이 같다는 말은 바로 색이 공이며 공이 색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색즉 시공 공즉시색이 바로 원융삼제를 뜻한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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