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실체의 연구

백_일홍 2022. 7. 29. 23:14

 

실체의 연구 _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한자경

 

지은이의 말

.... 이 책에서는 서양철학에서 실체 개념이 얼마나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실체는 '궁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자아와 세계를 이루는 궁극의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따라 추구된 궁극이 바로 실체이다. 궁극의 이해가 다양하기에 실체의 이해 또한 단일하지 않다. 궁극이 개별적인 물리적 사물이면 물질적 개별자인 물체가 실체이고, 궁극이 개별적 자아이면 개별적 영혼이 실체이다. 개별자들이 궁극이 아니고 개별자들을 이루는 입자가 궁극이면 입자가 실체이고, 입자를 있게 한 우주 에너지나 신이 그 배후에 있다고 간주되면 에너지나 신이 실체이다. 에너지나 신이 궁극이 아니고 그 배후의 빈 공간이 궁극이면, 그 빈 허공이 실체이다. 이처럼 실체는 무엇을 궁극으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 책에서는 서양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철학자들이 실체를 무엇으로 간주하는지, 존재의 궁극을 무엇으로 설명하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지금 여기의 우리가 실체는 논하기 위해 굳이 서양 고대에서부터 형이상학의 흐름을 되짚어보는 것은 왜일까? 동양의 우리는 실체를 무엇으로 이해했을까? 실체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아(atman)'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개별자를 바로 그것이게끔하는 기반, 본질 내지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아'를 주장해왔다. 인무아는 개별적인 영혼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법무아는 개별적인 물질적 실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자를 그것이게끔 하는 개별적 실체, 아가 없다는 것이 곧 무아이고 공이다. 인무아이기에 아공이고, 법무아이기에 법공이다. 불교는 언제나 일체가 인연화합의 산물이며, 따라서 어느 것도 궁극의 실체가 아니라는 연기론을 주장한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궁극은 언제나 무한 후퇴하여 사라지고 원인과 결과는 연기로서 순환하며 반복된다. 선험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다시 경험이 선험을 가능하게 한다. 종자가 현행을 일으키고, 다시 현행이 종자를 심는다. 개념과 언어구조가 경험을 규정하고, 경험이 다시 개념과 언어구조를 생산한다. 다양한 차이가 하나의 개념 아래 포섭되고, 다시 하나의 개념이 다양한 차이로 전개된다. 어디에서도 궁극의 기반은 발견되지 않고 모든 것은 허공에 떠 있는 현상이고 가상이다. 허공에 핀 꽃, 환화일 뿐이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 주관적 자아나 객관적 사물이라고 생각되는 것, 이데아나 신이라고 여겨지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실이 아닌 허이고 가이며 체 아닌 용, 성 아닌 상일뿐이다. 한마디로 궁극이 아니고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실체에 관한 한, 불교는 철저히 무아, 즉 무실체를 주장한다. 그렇게 동양의 무아론 내지 연기론은 서양의 실체론과 대비된다.

동양의 무아론이 서양의 실체론과 대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불교 무아론의 진정한 깊이는 실체론과의 대비만으로는 다 해명되지 않고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심장한 곳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 내지 궁극에 대한 최종적인 핵심 물음은 실체의 부정 이후에 비로소 제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 지기 자성을 가진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실이 아니고 가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일체가 가라는 것을 아는그 앎은 가인가 아닌가? 모든 것이 자기 아닌 것(타)을 통해 자기가 되는 연기와 의타기의 산물이라면, 그렇게 연기와 의타기를 아는 그 마음은 의타기인가 아닌가? 나는 바로이 물음이 석가가 연기로써 드러내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고자 한 최종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물음은 우리의 앎이 궁극에서 부딫히는 역설을 드러낸다. '일체가 가이다'라는 통찰은 의미 있는 통찰이지만, 이 통찰이 그 일체에 포함되어 그것마저 가가 되면 그 유의미성은 사라진다. 환을 아는 앎도 환이고 의타기를 아는 마음도 의타기라면, 그 앎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환이다'가 의미 있으려면 그 앎 자체는 환이 아닌 실이어야 하고, '모든 것이 연기(의타기)이다'가 의미 있으려면 그 앎 자체는 의타기가 아닌 절대(원성실성)이어야 한다. 일체의 궁극-아님을 아는 그 마음 자체가 궁극인 것이다.

허공 속 일체 만물이 궁극이 아님을 아는 마음은 그렇게 궁극이 없음을 알기 위해 허공 전체를 비춰보는 적조의 마음이며 스스로 허공이 된 무변, 무외의 마음이다. 궁극을 추구하다가 구경에는 궁극을 찾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대각의 마음이다. 궁극은 궁극이 없음을 아는 바로 그 마음자체인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일체의 무실체성을 논하되, 그렇게 실체 없음을 아는 그 궁극의 마음, 무외의 마음, 일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 궁극의 마음을 말하는가? 모든 것의 궁극-아님, 실체-없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모든 것의 상대성에 깨어 있기 위해,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궁극의 마음, 절대의 눈, 절대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궁극의 눈으로 보아야 일체가 궁극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절대의 마음으로 보아야 일체가 절대 아닌 상대임을 알 수 있다. 절대의 마음은 그 마음 안에 주어지는 모든 것을 녹여내고 유동화하고 비실체화하는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는 모든 것을 녹여 유동화하되 그 자신은 녹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 용광로마저 녹아버리면, 그 안에서 유동화되어야 할 모든 것이 다시 고체화되고 실체화된다. 그렇게 절대의 마음은 모든 것의 연기성과 가상성을 유지하고 알아차리기 위한 마지막 보류이다. 그 마지막 보루인 절대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그 앞에서 상대화되고 비실체화되어야 할 모든 것이 다시 절대화되고 실체화된다. 우리는 또다시 특정 이데올로기나 물질, 돈이나 권력을 실체화하고 절대화하면서 그 힘에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된다. 실체=없음을 논하는 오늘날과 같은 이 무실체의 시대에 모든 것이 유동화되고 상대화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것들이 도로 고정화되고 실체화되며 절대화되고 권력화되어 우리 일상의 삶을 짓누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이 바른 궁극을 얻기 위한 사투의 과정이라고 본다. 그들은 궁극의 마음을 알지못하기에 그 마음에 주어지는 온갖 것들, 이데아 또는 개별적 사물이나 개별적 영혼 아니면 신 등을 궁극으로 간주하며 실체화해왔다. 이 모든 것들이 궁극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 마음에 주어지는 일체의 상을 여윈 텅 빈 무변의 마음, 우리 일반 중생의 살아 있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이 궁극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확연하게 알지 못한다. '일체유심조', '삼계유심'의 마음, '심위태극'의 마음, '인내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닌 마음의 내용 내지 마음의 대상에서 궁극을 찾으려 하며, 그래서 오늘날은 언어나 정보, 정보처리 시스템으로서의 두뇌신경망이나 전산망 등을 절대화하고 마음을 그 아래 예속시키고 만다. 실체를 주장할 때도 실체를 부정할 때도 궁극이 무엇인지, 이 가상의 바탕이 무엇인지를 알지못하는 것이다. 궁극은 궁극을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 자체라는 것, 일자는 일자를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 자체라는 것, 아공 법공의 공, 무자성의 공은 바로 텅 빈 마음의 공이며,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본래 '공의 마음', 스스로를 공으로 아는 '공적영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6-10

 

 

근대편 

 

(1)

데카르트,

합리주의적 실체 이원론

 

근원적 의식의 발견 

 

감각이나 사유나 의심 등 일체의 의식활동을 모두 포괄하여 '사유'라고 부르므로 그러한 의식활동으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또는 '나는 사유하는 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의식 내용은 모두 거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의심 가능하지만, 의식활동 자체만은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의식활동의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207 

 

데카르트 이전까지 서양철학에서 주객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의식은 유한한 인간 개별자의 의식이 아니라 무한한 신의 의식으로만 사유되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그것의 부정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그런 절대적 확실성의 존재는 신에게만 귀속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의 확실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보다 더 먼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확실성의 존재로서 사유하는 자아를 확립한 것. 즉 그 부정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의식활동으로서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중세 신학의 영향력을 벗어난 근대철학의 시작으로 평가될 만하다. 209

 

개별자 실체론 : 실체 이원론

 

사유적 실체

그는 주객포괄의 의식활동이 존재한다는 것, 그런 의식활동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난 후, 다시 그러한 자아는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다. 자신이 발견한 의식활동을 기존의 '실체-속성'이라는 실체론적 개념틀에 따라 특정한 개별적 실체가 일으키는 속성으로 간주하면서, 그런 의식활동을 하는 자는 과연 어떤 실체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의식활동을 사유로 규정하면서 사유만이 그 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해서 자아를 사유하는 것, 즉 '사유적 실체'라고 결론 내린다. res cogitans

 

자신이 발견한 자아를 사유를 본질로 삼는 '사유적 실체'라고 규정한다. 자아를 현상세계에 등장하는 '사유적 실체'라고 규정하면서 그는 서양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유지되어 온 물질과 정신, 물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그대로 답습한다. 211

 

연장적 실체 

물체의 성질 중에서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동일하게 남아있는 성질은 감각이나 상상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이성이 이해하는 것으로 간주함. 이성이 이해하는 사물의 본질을 사물의 연장성이 가지는 수학적 진리로 여김. 미각이나 촉각 등 감각으로 포착되는 것들은 사물의 우연석 속성으로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데 이성의 수학적 진리로 표현되는 사물의 연장성은 그것이 물질인 한 따르게 되는 원리들이다. 

그러한 물질적 실체를 '연장적 실체' 라 부름. 

   

데카르트는 근대적 '표상주의'를 보여준다. 

* 표상주의 : 213 

 

... 우리의 관념에 상응하는 물제가 실제로 외부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의 관념과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식영역으로부터 답을 얻어낼 수가 없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신의 통해 그 답을 얻고자 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그가 아직도 중세 스콜라철학의 영향 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성이 발견하는 수학적 진리의 보편타당성도 신의 존재 및 성실성에 입각해서 논하려는 것. 자신이 발견한 자아를 '사유적 실체'로 규정하면서 그와 대립되는 '연장적 실체'를 설정한 후, 그러한 연장적 실체로 이루어진 외부세계의 존재 및 그 인식의 가능성을 논증하기 위해 다시 그 둘을 유한실체로서 포괄하는 절대적 무한실체로서의 신의 존재를 논증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함. 215

 

신의 관념은 나로부터 나올 수 없다. 무한실체의 관념이 유한자의 의식으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의 관념이 유한의 관념에 선행한다. 

 

"나 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내가 의심하고 어떤 것을 바란다는 것, 즉 내가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고 아주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218

 

무한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간으 유한성의 의식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것은 기존의 신 존재증명과 구분되는 데카르트 사유의 특징. 그러나 외부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논한다는 것은 그가 중세 신학의 영향하에 있음을 보여줌. 

 

신이 무한실체로서 우리 의식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후, 그렇게 존재하는 신의 완전성 내지 성실성에 근거해서 그러한 신이 우리의 이성을 속이는 기만자일 리가 없다는 것을 논함. 219 

 

신이 우리의 이성을 속이는 기만자일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물질적 사물에 대해 이성적으로 아는 수학적 진리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아는 감각적 인식도 모두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질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외부세계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실재하며 또 우리의 표상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실재한다고 논함. 수학적 인식과 감각적 인식 또한 모두 진리일 수 있다. 

 

만약 신 존재증명이나 신의 성실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철학은 외부세계의 실재성이나 인식 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회의주의를 면치 못하게 된다. 220 

 

(2)

로크, 경험주의적 실체 이원론

 

관념의 기원

. 본유관념 비판

. 관념의 경험적 기원 :감각과 반성 

 

관념과 실체 

단순 관념과 복합관념 

그림 233

 

관념과 성질 

 

표상적 실재론 236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발산되는 미립자들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충격으로 자극해서 신경체계에 반응을 일으키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미립자 자체와는 종류가 다른 하나의 실재물인 마음 속의 관념을 만들어낸다. 

 

대상으로부터 나온 미립자들에 의해 우리 마음에 관념이 생기는데, 이 관념이 대상의 성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그런성질이 제1성질, 관념의 대상이 성질과 닮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 제2성질.  제2성질의 관념은 우리 스스로 산출한 관념이다. 

 

인간 마음의 근본적 작용, 그림 237

 

실체의 관념, 

실체를 경험으로부터 얻은 단순관념들을 지성이 결합하여 만든 복합관념으로 설명함.  

 

실체의 존재에 대한 이중적 태도

1. 경험으로부터 직접 얻은 단순관념들을 함께 귀속시키기 위해 우리의 지성 기체로서 설정한 가정이며 개념일 뿐

2. 우리에게 단순관념을 일으키는 성질 내지 힘을 갖는 것이되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떤 실재.  

 

미지의 실체 : 소박한 실재론 244

 

우리가 사물의 성질로 아는 것은 그 사물의 '명목적 본질'에 해당하고, 사물이 그런 성질을 갖게 하는 것, 즉 감각되지 않는 미립자들이 이루는 실재적 구조가 바로 그 실체의 '실재적 본질'에 해당한다. 다만 우리가 각각의 실체의 실재적 본질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다. 이처럼 물제와 정신, 그리고 신에 대해 우리가 그 각각의 실체의 실재적 본질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각각 실체로 존재한다. 

 

실체를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여 형성한 복합관념이며 지성의 가정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념이 지시하는 실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 실재적 본질을 알지 못한다는 것. 246

 

실체와 의식 :인간과 인격

 

사물의 동일성 : 수적 동일성

시공간적 동일성

 

식물, 동물, 인간의 동일성 : 생명의 동일성

 

인간과 인격을 구분한다. 

인간의 동일성은 신체적 동일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동물의 동일성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유기체로 조직하는 생명에서 온다. 

 

인격의 동일성 : 의식의 동일성

자기(self)의 동일성은 인간의 동일성이 아니라 인격의 동일성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의 자기동일성인 인격동일성을 만드는 것은 개별적 신체도 개별적 영혼도 아니고 그 영혼 안에서 작동하는 의식의 연속성이다. 

 

예. 왕자의 영혼이 구두수선공의 영혼이 떠난 그 몸에 들어갔을 경우, 그는 신체를 따라 구두수선공과 같은 동일한 인간이되 스스로를 왕자로 의식 내지 기억하기 때문에 왕자의 인격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인격적 자기동일성은 의식을 통해 확립되며, 이러한 인격을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적, 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 

 

인간이 단지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진 신체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법적 책임을 지는 인격으로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신을 아는 의식 때문이며, 이 의식이 확장되는 범위, 즉 기억이 미치는 범위가 곧 자신의 인격에 포함되게 된다. 

 

로크가 '실체로서의 인간'과 '의식으로서의 인격'을 구분한  이유는? 256 

 

(3) 

라이프니츠,

실체 이원론의 극복

 

개별적 실체 : 소우주로서의 생명체 

 

생명체에 내재하는 본유관념 

 

우리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까? 마음이 떠올린 관념으로 어떻게 세계를 알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떠올린 관념이 세계와 일치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데카르트, 인간안에 무한자인 신의 관념이 있는데, 그 관념은 유한자로부터 나올 수 없으므로 무한자인 신 자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본유관념으로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는 신은 완전하고 성실하므로 인간 이성이나 감관을 속일 리가 없고, 따라서 우리의 이성이 사유하는 것이나 감관이 감각하는 것은 모두 실재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논함. -> 인간 이성 안에 신의 관념 및 수학적 관념이 본유관념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한 주장임. 

 

- 로크, 인간의 영혼 안에는 아무런 관념도 주어져 있지 않으며 모든 관념은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얻어진다고 봄. 본유관념이란 존재하지 않고 영혼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다고 주장. 

 

- 라이프니츠, 우리 영혼에 관념이 있다는 것이 곧 우리가 그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 또는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봄. 우리가 분명하게 의식하거나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해도 우리 영온 한에 관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영혼의 활동이 의식이나 사유보다 더 넒고 더 깉다는 것을 의미함. 

 

데카르트나 로크가 인간 영혼의 본질을 명석판명한 의식 내지 사유로 규정한 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인간 영혼의 활동을 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마음의 활동으로 간주한 것. 260

 

생명의 힘 : 대우주를 표현하는 소우주

 

형상을 질료 바깥에서 질료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질료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힘으로 간주함. 

 

이렇게 해서 라이르니츠에게서는 이전의 형이상학자들이 불류했던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형상과 질료, 영혼과 물체의 이분법이 사라짐. 

 

우주 만물은 모두 자신 안의 형상을 스스로 실현하는 정신적 존재, 영혼으로 간주됨. 

 

우주 만물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 전체를 담고 있는 소우주다. 

 

영혼이 없는 소위 물질적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별자는 우주를 표현하는 힘을 가진 영혼이다. 

 

생명체의 단일성 : 모나드 

 

모나드 = 잔신 안의 관념을 바깥으로 표출해내는  생명적 힘을 가진 실체 

 

모나드가 세계를 표현하는 활동이 지각과 욕구임. 단일한 모나드의 지각활동을 통해 복합적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것. 우리의 의식읭 근저에는 의식으로 올라오지 못한 무수한 미세한 지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미세한 지각의 방식으로 우리는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지각은 한 순간에 다수의 물질세계를 표현해내는 공간화의 활동이다. 

 

욕구는 모나드가 한 순간의 지각에서 그 다음 순간의 자각으로 나아가는 시간화의 활동이다. 

 

지각과 욕구는 형혼적 실체의 특징. 이것을 모든 개별자들, 즉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모나드의 특징으로 간주함. 다만 지각의 판명성에 따라 모나드는 서로 다른 층위의 존재가 된다. 

 

지각은 의식되지 않는 지각에서 명료하게 의식되는 지각에 이르기까지 그 판명성에서 차이가 있음. 

- 힘(생명력)의 모나드 : 광물과 식물

단지 지각만 있고 의식 차원으로 떠오르는 지각인 감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음. 무의식적인 지각인 미세지각만 있음. 동물이나 인간에서 의식이 끊긴 상태(꿈, 기절) 

 

- 영혼의 모나드 : 동물

감각(의식되는 지각)기관이 있음. 

 

* 영혼 모나드와 인간 모나드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인가? 272 

 

동물의 지각 : 기억에 근거

인간의 지각 : 원인의 인식에 근거, 이성의 추리에 따른 사유

 

- 정신의 모나드 : 인간 

이성을 가진 영혼, 반성할 수 있고, 자아, 실체, 영혼, 정신이라고 부르는 비물질적 사물과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인간 모나드는 신과 가장 가까운 모나드이며 완전자인 신을 모방하는 정신이다. 모든 모나드 안에서 일어나는 지각활동과 인간의 정신 모나드 안에서 일어나는 통각(의식)활동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함. 276

 

그렇지 않으면 의식되지 않는 지각을 하는 모든 생명체를 지각활동이 없는 죽은 물체처럼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미세지각을 알지 못한 이전의 형이상학자들은 모두 이런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함. (예, 데카르트, 277)

 

유아론과 예정조화설

 

모나드의 창 없음. 

각 모나드는 자신의 관념을 내부로부터 펼쳐내지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모나드는 창이 없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창이 없는 각각의 모나드가 자신의 세계를 펼여내지만, 우리는 그렇게 표현된 세계 안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신의 에정조화로 설명함. 

 

신이 일체 모나드를 창조할 때 미리 장차 그 모나드들의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끔 창조했다고 주장. 

-> 신 존재증명 

 

각주 37 (281) 

 

 

(4)

흄,

실체의 부정

 

경험주의

감각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감각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것, 둘을 구분하며, 우리의 이성은 오직 감각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논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 뿐, 감각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성적 진리 인식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 

 

앞서 형이상학자들이 경험적 현상의 근거로서 실체, 즉 물체와 영혼에 대해 논해왔던 것을 "주제넘고 근거 없는 것"으로 간주함. 283

 

관념을 인상의 재현으로 보고, 인상을 관념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흄은 경험주의자가 된다. 

 

본유관념의 부정, 그때까지의 본뉴관념 논쟁에 종지부를 찍다. 경험과 무과나게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본유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91

 

회의주의 : 실체와 실재에 대한 회의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오직 지각일 뿐이므로 지각 너머 독립적인 자기동일적 대상을 추론해낼 근거가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된 대상을 지속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즉 물체나 영혼 등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은 이성에 입각한 판단이 아니라 상상력이 작용 결과라는 것. 300

 

감각경험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것들은 상상력과 습관에 의한 신념에 속하는 것들이다. 301

 

자아의 부정 : 관념의 다발 

자아의 단순성과 동일성은 객관적인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상상이며 허구일 뿐. 

 

우리가 자아에 대해 갖는 인상은 고나 쾌, 슬픔과 기쁨, 정념과 감각 등 서로 다른인상들이며 그 어느 것도 항상적이고 불변적인 인상은 아니다. 결국 동일적이고 항상된 자아의 인상도 없고 ,그런 자아의 관념도 있지 않다. 내가 나에 대해 발견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인상들일 뿐. 303 

 

자기 동일적 영혼이나 자아 등 실체의 관념은 모두 상상력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상상력은 "허구로 나아가는 성향"이다. 이런 허구를 창출하는 성향인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변화하는 지각의 계기들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자기동일적인 불변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상상하며, 그것을 영혼, 자아, 실체로 간주한다. 307

 

물리적 사물세계의 물질적 실체 뿐 아니라 현상세계를 지삭하고 의식하는 의식 주체로서의 자아인 정신적 실체도 상상력이 만든 허구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림. 

 

각주 36

비교. 불교의 무아론 

흄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인상 내지 관념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 현상에 매인 존재일 뿐이다. 

 

 

(5) 

칸트,

범주로서의 실체(현상)와 그 너머의 무제약자

 

. 이성비판 

   . 독단주의와 회의주의 비판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314

   . 인식의 형식 = 시공간과 범주

   . 선험적 인식의 확립 328 

. 실천이성의 길, 신앙

   . 선험적 인식의 한계, 오직 도덕의 차원에서 신천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 

 

=> 초월적 통각 

칸트는 무슨 근거에서 선험적 원칙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일까? 선험적 인식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현상 너머 물자체인 무제약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334

 

그것은 이성비판안에서, 즉 우리의 선험적 인식의 근거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험적 인식의 최종 근거로서의 초월적 통각이다. 

 

초월적 통각은 그 자체 현상의 존재 및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최종 근거이지만, 그 자체는 감성적 직관 안에 주어지는 경험대상이 아니다. 즉 현상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의 초월적 통각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나는 어떠한 인식도 갖지 못하고, 단지 나의 직관형식인 시간 흐름 속에 내감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현상으로서의 나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나와 초월적 자아로서의 나는 구분된다. 나는 현상으로 주어지는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나를인식할 수는 있지만, 현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초월적 자아로서의 나를 인식할 수는 없다. 

 

각주 31

 

 

탈근대편 

 

1. 포스트모더니즘 

서양의 근대성인 모더니즘

서양의 근대성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는 서양 전통 형이상학의 결실임.

절대적 근원과 기준, 절대적 의미와 진리 등을 추구하고, 인간의 신체적 욕망이나 감성보다는 보편적 이성이나 합리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근대는 여전히 고대와 중세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함. 

-> 서양 전통 형이상학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 동일성의 철학 비판 

(자기동일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실재로 간주하고, 자기 동일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바뀌는 것들은 참된 실재가 아닌 가상으로 간주함. 현상을 실재하는 것의 움직임에 따라 산출되는 외적 모습, 허상, 비진실로 평가하는 것. 

-> 불변하는 것과 가변적인 것,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 실재와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낳는다.)

-> 이러한 이분법은 변화하는 현상 너머 불변의 실재를 상정함으로써 오히려 현상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변화하지 않는 이성적인 것만이 실재하는 중심으로 간주되고, 변화하는 현상적인 것들은 주변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 없어도 되는 것, 오히려 없어지고 부정되어야 할 것들로 간주된다.  

 

=> 탈이성화, 탈중심화, 탈영토화를 꾀함. 무한한 발산의 힘, 변화의 생동성, 생명의 에너지를 긍정하려 함. 

 

 

2. 니체 

의지의 형이상학

 

칸트 -> 쇼펜하우어

현상과 생의 의지

칸트, 이론이성, 이론 이성의 근거로서 실천이성(의지)

쇼펜아후어, 그러한 의지는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

각주2

 

형이상학의 중심과제로 삶의 고통을 발견한 것.

 

현상세계의 근거가 되는 우리의 의지가 자연적인 사적인 경향성을 떠난 보편적 순수의지가 아니라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개별적 삶을 지향하는 맹목적 의지라고 논한다. 346 (각주3, 제7말나식)

 

삶의 고통과 그 고통의 근거가 되는 맹목적 의지 그리고 그 의지 극복의 길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을 우리는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라 부른다. 347 (각주4, 고집멸도)

 

니체, 고통을 낳는 삶의 의지를 부정하거나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고통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는 강한 염세주의. 

쇼펜하우어 비판.

 

니체는 어떤 의미에서 삶을 긍정하고자 한 것일까? 

의지란, 

. 쇼펜하우어 : 스스로 개별화하여 고통에 찬 가상의 생을 만들어내는 근거 없는 맹목적 의지, 따라서 체념 내지 극복의 대상

. 니체 : 일체의 가상을 떨쳐내고 자신 안에 생에의 의지를 느끼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도취이고 환희다. 

 

고통 승화의 두 길. 아폴론적 꿈과 디오니소스적 도취

 

칸트, 현상과 물자체

쇼펜하우어,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

니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아폴론 신은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가상을 창출하는 "꿈"의 정신(일반적인 이성 활동, 칸트의 이론이성 활동,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객관화 활동), 디오니소스 신은 개별화의 원리를 파기하고 가상을 부숨으로써 탈실체화하여 근원적 일자로 구의하는 "도취"의 정신. 

 

우리는 왜 가상을 만드는가? 출발점은 삶의 고통. 

 

아폴론 정신은 가상의 꿈의 세계를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에 몰입하여 거기 머무르게 하는 것. 

 

비극, 가상의 몰락을 바라보며 아폴론적 꿈에서 깨어날 때, 그는 과연 무엇을 느낄까? 

 

개별화의 원리의 파기, 가상세계의 목락은 인간이 설정한 절도와 한정, 규범과 제한이 모두 무너지고 무효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설정한 규범과 제한이 파괴되고 그러한 규범 안에서 통용되던 개별자로서의 모든 차이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결국 개별화되기 이전의 근원적 일자, 가상으로 객관화하기 이전의 근원적 의지이다. 개별화된 가상세계의 몰락을 바라보는 자, 아폴론적 꿈에서 깨어나는 자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가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자신을 개별화 이전의 근원적 일자와 하나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가상의 몰락 속에서 스스로를 근원적 일자와 하나로 느끼는 환희, 탈개별화에서 오는 일자와의 합일의 환희를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도취"라고 함. 353

 

그리스 비극, 가상의 건립과 가상의 붕괴 사이에서 인간은 고통과 고통의 승화를 경험하고, 고와 락이 함께 하는 삶의 모순을 알게된다. 

 

자신을 개별화를 넘어 진실로 존재하는 자아로 자각한ㄴ 자가 진정한 예술가이다. 디오니소스적 체험은 예술에 속하는 미적현상이다. 

 

그리스 비극의 시대가 지나가고 소크라테스의 이성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양철학은 전도된 형이상학으로 나아간다.(세계를 이론적 차원에서만 접근하여 아폴론적 정신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가상에 머무르고 마야의 베일에 싸여 있으면서,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벗어나지 못함) 

 

아폴론적 이성에만 매몰된 기존 형이상학을 이성형이상학, 언어형이상학, 의식형이상학이라 칭하며, 비판함. 

 

도치된 형이상학

현상의 근거는 무제약적 자아 내지 의지.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개별화되고 객관화된 결과일뿐. 

 

가상의 몰락을 목도도하면서 가상을 가상으로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가상 너머 근원적 일자에게로 회귀하여 하나 됨의 도취, 형이상학적 환희에 빠져들게 된다. 

 

서양 형이상학은 왜 이성을 절대시하고, 이성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의지를 간과한 것일까? 이것 또한 생의 고통 때문이다. 

 

삶에 만연해 있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아폴론적 이성은 삶에다 한계와 절도, 규칙과 법칙을 부여하여 가상을 창출하고 그 가상을 관조하면서 거기 머무르고자 한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가상을 실체화하여 오래도록 가상의 꿈에 머물러온 철학이다. 

 

플라론이 제시하는 규정과 한정의 이데아의 철학은 바로 우리 삶의 고통을 피해 이성이 꿈꿔온 형이상학, 언제까지나 이데아의 사유로 빚어진 가상에 머무르고자 하는 아폴론적 꿈의 형이상학이다.  

 

비극의 시대 -> 철학의 시대 

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함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본능 

-> 

인식, x(낯선 것)=y(익숙한 것) x는 y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 또는 y와 같은 종류의 것. 이 y가 바로 우리의 이성이 현상을 규정하는 일반 개념이며 현상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하는 범주이다. 우리는 현상세계를 이러한 일반 개념 내지 범주에 따라 인식하고 경험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러한 일반 개념에 해당한다. 

 

최후의 것과 최초의 것이 도치된 형이상학

언어형이상학의 기본 전제인 항속성, 동일성, 실체, 원인 등의 모든 추상적 개념은 단지 사고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사고가 우리에게 낮선 존재를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구조에 따라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형이상학이 사물을 실체-속성, 세계를 주어-술어의 언어구조에 따라 이해한다. 

 

그렇게 이해된 세계가 결국 우리의 언어구조 내지 사유구조에 따라 이해된 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객관적인 세계 자체인 줄로 아는 것이 전통 형이상학이 갖는 한계이다. 

 

이성(인식)과 의지

이성은 개념적 가상을 형성하는 최후의 활동이며, 우리 삶에서의 모든 망설임과 사려, 판다나과 결정은 이성적 판단에 앞서 이미 의지 차원에서 행해진다. 

 

서양은 고대에서부터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해 옴. 

인간은 늘 '이성을 가진 동물'로 정의됨. 인간 종을 구분 짓는 종차가 바로 이성이라고 간주됨. 

 

니체에 따르면 이성 내지 의식은 "인간의 기관 가운데 맨 마지막에 발달한 것이며, 따라서 가장 비완성적이고 가장 무기력한 것"이다. 360 

 

이성은 결정권과 통제력을 가진 고차적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충동들 간의 투쟁이 서로 화해하면서 끝나갈 무렵 그 최후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기관에 지나지 않다. 이성의 의식은 삶의 충동들 간의 투쟁 자체, 생 자체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의 끝에 비로소 나타나는 가장 최후의 것, "가장 무기력한 것"에 불과하다. 

 

이성의 사유에 근거해서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활동이 선행하고 이성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의지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이성은 사후의 변명이나 구실 등을 찾는 것이다. 

 

의지의 형이상학

이성이 의지의 표현임. 의지 자체가 이성을 사용해서 가상을 세우고 그 가상을 다시 무너뜨리는 것이다. 

의지의 긍정이 곧 삶의 긍정이다. 

 

<비극의 탄생> 1872

<차라투스타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1, 

영원회귀 

초인의 의미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서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렇게 생겨난 개별자는 먹고 싸고 자고, 또 먹고 싸고 자고.... 사람들은 떼거지로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다가 한 가상이 무너지면 그 다음 가상을 만들고, 그 가상이 또 무너지면 다시 그 다음 가상을 만들고.... 그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산다. 어찌 역겹지 않겠는가. 

 

영원회구의 사슬, 존재의 수레바퀴를 끊어버린자, 생사를 넘어선 자, 그가 초인이다.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인간이 수용하고 체념하고 따라가야 할 굴레가 아니다. 삶의 고통은 우리가 굴종하고 체념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맞서 있는 것, 끝없이 위험하고 낯선 것, 그래서 오히려 인간을 인간 너머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 초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끊는 순간은 어디 멀리 따로 있지 않고 바로 내 곁에 편재해 있는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 

 

초인은 시간 흐름 속에 이끌려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사는 자이다. 삶의 고통으로 비탄에 빠져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자이다. 

 

초인의 결단은 이성의 결단이 아니다. 모든 이유와 근거를 넘어선 결단, 의지의 결단이고 실존의 결단이다.  

 

의지의 결단, 실존의 결단??

(각주 371)

 

 

3. 비트켄슈타인 : 언어적 전회

 

나는 언어로써만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세계는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로 그려진다. 세계와 언어는 함께 가므로, 나의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가 된다. 결국 세계는 나의 언어를 통해 그려진 세계이며, 따라서 나의 세계이다. 384

 

 

4.들뢰즈 :차이와 생성의 철학

 

즉자적 차이

미분적인 것의 내적 차이

강도적 차이, 

'초월적 경험론'  현상세계 형성의 기본 역량이 지성이 아니라 감성에 있다. 

 

근대철학/칸트와 들뢰즈 비교 그림. 412

다양한 생성(되기)의 길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창조적 분화

그림. 418. 

잠재성, 현실성, 실재성 

 

존재의 일의성 : 일체 존재자의 평등성

존재의 의미가 일의적이라고해서 존재가 모두 동일한 양상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현상에 드러나는 존재의 양상은 서로 무한히 다르고 차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양상으로 표출되는 존재 자체는 그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 아직 분화되지 않은 잠재적 역량의 미분적인 것 dx는 다양한 양상으로, 다양한 선으로 발사나될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의 결집물이다. 하나의 차이소 dx가 주변의 다른 차이소 dy와 어떤 비율적 관계로 마주치는가에 따라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서로 다르지만, 차이소 dx 또는 dy는 그 차이가 0에 가까운 것, 미규정적인 것, 비어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모든 미분적인 것, 모든 잠재적 역량은 서로 동등하다. 이러한 존재의 동등성, 평등성을 '존재의 일의성'이라고 부름. 423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체 안에 내적 차이를 가진 잠재적 역량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체 비규정적인 것, 비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무한한 다양성으로 자신을 표출하고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주변의 것들과 마주치고 접속하면서 자신의 선을 발산해나가지만, 그 어느 것도 기존의 관계에 고정적으로 매여 있을 수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기존의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탈주선을 그을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자는 어느 한 지점에 뿌리내리는 정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 배회하는 유목민의 영혼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424

 

각각의 개별자는 자기동일적 실체가 아니고 즉자적 차이의 존재이며, 자기 완결적 존재가 아니고 주변과의 접속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해가는 되어감의 존재이다. 

 

 

5. 지은이 후기

 

실체의 문제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의 문제이며 결국은 우리 자신의 자기정체성의 문제이다. 

 

나는 서양 형이상학자들이 실체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얼마나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왔는가를 밝혀보고자 했다. 

 

사실은 그들이 주장하는 실체의 벽을 뚫고 들어가 각 개별자의 무실체성과 공성을 드러내고 싶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빈 마음의 자기지인 공적 영지로, 무한의 신성으로 밝혀보고 싶었다. 426


 

▶ 발제

 

실체, 궁극에 관한 최종적 핵심물음은?
석가가 알고자 했던 최종 물음은?
...왜 궁극의 마음을 말하는가?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저자의 총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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