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
박홍규, 박지원
추천사
내게 이 책은 '고독의 책'이 었다... 이 고독은 아무것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해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닮았다. 부모를 사랑하는 방식과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 주위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식.... 우리에겐 분명 지금과는 다른 길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7
정혜윤
들어가며
저는 오늘도 도서관에 갑니다.
한겨레 인터뷰 기사.
그 인터뷰에는 분명 교수님이 한평생 추구했던 아이덴터티가 상당히 잘 녹아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으로 좇아가려고 다짐하고 있는 어떤 아이덴티티 말입니다.(인터뷰어) 10
아니키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고, 또 동시에 가장 미래지향적일 수도 있는 어떤 이념이라고 믿고 있어요. 31
읽고, 쓰고, 경작하는 삶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일어나고요,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잡니다. 새벽에 일어나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러지요. 이 새벽시간이 제가 제일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는 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봄이나 여름이면 아내와 함께 아침 7시에서 8시까지 밭일을 한 후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나오죠. 한 9시에 학교에 도착한 후부터 오후 5시까지 도서관을 둘러보고, 도서관 안의 지금 이방에서 또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저녁에는 6시 정도부터 한 시간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33
노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우리 문화라는게 사실 대부분 다 청춘 문화예요. 어딜가나 젊은 이들과 학생들이죠, 도서관도 그렇고, 미술관도 그렇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장도 마찬가지고요.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청소년기나 20-30대의 젊은 분들이 30-40년 뒤에 도서관이나 미술관에서 자기 삶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조금 회의적으로 느껴집니다. 47
2.독서에 관하여: 책은 날씨와 공기처럼
어떤 책이든 간에 '읽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습관과 감수성이 쌓인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은지 발견해나갈 수 있겠죠. 그 모든 책이 그것을 읽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책들일 겁니다. 제게도 그랬고 말이죠. 79
독서는 날씨와 공기처럼
서로 다르다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세계랄까요. 저는 그런 세계관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렇고 그런 독서를 바탕으로 책을 쓰는 이유 역시 그렇습니다. 지적 세계의 핵심은 다양함입니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고, 자기 다운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저마다 다른 게 자연스럽지요. 각각의 개인들이 저도 모르게 집단의 분위기에 휩쓸려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순간, 사회는 획일주의이자 전체주의로 흐릅니다. ... 이런 인간과 사회의 다양성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 81
폭넑은 독서를 통해서, 즉 책을 꾸준하게 읽음으로써 자기만의 생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렇게 읽으면서, 자기만의 수많은 생각을 품고서 말이에요. ... 저는 생각한다는 일의 진정한 힘은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고 있어요. 다양한 생각들이 자기 안에 축적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 생각의 좌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 그런 축적과 인식의 연쇄 과정, 그게 바로 생각의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82
기존의 지식과 권위에 '퀘스천 마크'를 붙일 수 있는 힘
고흐의 영혼, 그리고 고흐의 독서
저는 젊은 분들이 '야망을 가져라' '하면 된다'라는 식의 이야기 등에서 거리를 두었으면 좋겠고, 정말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무언가를 찾아서 성실히 해나갔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기는 합니다. 꼭 고흐처럼 힘든 삶을 살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충실했던 그의 자세는 지금도 제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저도 평생을 책 속에 파묻혔던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켰고요. 10대 시절부터 고흐에게서 그런 용기를 많이 배웠죠. 자신만의 삶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용기 말입니다.
박홍규,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 책과 그림과 영혼이 하나 된 사람의 이야기> 고흐가 자신의 편지에 남긴 300권이 넘는 책들, 고전 부터 당대까지 150명이 넘는 작가를 두루 언급함.
저는 어떤 분야의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 고흐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113
번역 작업과 우리의 번역 문화에 관하여
저한테도 어떤 책을 직접 번역하는 것이 공부가 훨씬 더 깊이 되고 많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책에 집약된 하나의 사상을 전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한국에는 한국 사람들이 한국말로 연구하는 어떤 공통의 자산으로서의 번역 문화라는 게 없다는 애길 하고 싶은 거예요. 더욱이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교수의 연구 업적에서 번역을 완전히 도외시합니다.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논문뿐이니까요. 130
미국이나 유럽, 일본 같은 경우엔 중요한 작품들과 학문적 저작에 대하여, 학계와 출판계에서 이런 정도의 책은 당연히 번역되어야 한다는 공감대와 기준 같은 게 있단 말이에요. 우리 지식사회에는 그런 기준이 없습니다. 잘 팔리는 책은 번역이 돼요. 그런데 잘 팔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책은 번역이 되지 않습니다. 133
홍기빈 칼폴라니사회연구소장이 교수님과 같은 관점에서 "번역이야말로 지식인의 의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네요.(인터뷰어) 139
책은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이기에
내가 정말 가장 깊은 층위에서 전하고 싶은 말, 내가 가장 고독한 차원에서 품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보편적인 문법으로 전할 수 있는 매체가 책이니까요. 책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되, 독서의 생활화와 일상화가 지금보다 더 중요해져야 한다는 게 교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인터뷰어) 141
IMF 이후 우리 사회의 참 많은 게 메말라버렸죠. 이런 각박한 현실에서 책을 읽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는 현실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각박한 현실이기 때문에 더둑더 자기를 잘 알고,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탐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계기를 만들어주는 게 바로 독서이지만, 꼭 독서가 아니어도 됩니다. 어쨋든 헤세적인 의미에서의 알을 뚫고 나가려는 노력과 시행착오,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일은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그런 용기를 위한 지도와 도표로서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143
3. 고독에 관하여: 가족, 거울, 그리고 스마트폰 너머에
저 자신에게 가정 차원의 모순과 갈등, 균열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버님께선 돌아가셨지만, 제 동생들과 친지들 다수는 이 지역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굳건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152
가족과 부모라는 무거운 굴레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들, 집안사람들과도 정말 많이 싸웠는데, 아직도 해결하진 못하고 있어요. 제 어머니께서 이제 곧 구순이시죠. 저는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제사 같은 건 다 때려치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제사를 지내시는 것 아니겠어요? ...더욱이 지금의 제사 방식은 완전히 여성 노동의 착취 아닌가요. 156
부모라는 것,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 제 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저에게 아주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셨습니다. 158
유교의 오랜 논쟁거리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도둑질이나 살인을 했을 때 자식이 부모를 고발할 수 있느냐고요. 묵자와 순자는 부모를 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공자나 맹자는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고요.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공자와 맹자 같은 이야기를 했죠.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이 소속된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 대해선 반드시 상대적인 거리를 둬야 한다고 믿으니까요. 178
가정폭력도 폭력이고, 부부간의 강간도 강간입니다. 그것을 가족이란 이유로 옹호할 수는 없는 거죠. 180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고독에 관하여
고독에 관해 제가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을 말해본다면, 우리는 고독하다는 것을 외롭다는 것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고독이라고 하는 말을 풀어봅시다. 한자로 고와 독이 합쳐진 단어죠. 이 두개의 말을 각각 놓고 보면, '고'는 부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고아', 그리고 '독'은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남편 혹은 아내가 일찍 죽은 '독신자'의 뉘앙스를 강하게 품고 있어요. 앞의 가족 이야기와 연결되는 지점이겠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고독이란 말은 그 중국적인 어원에서부터 가족관계나 가족 구성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거죠. 말 그대로 아주 동양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182
중국 역시 춘추전국 시대부터 시작해서, 노자와 장자에서 확인할 수 있듯 동양에서도 고독한 존재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온 건 사실이예요. 그런데 동양적인 고독의 연원을 가만히 살펴보면 노자와 장자 이후에 도연명을 거쳐 이백이나 두보 등등의 문학에 스며들어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고적감 같은 성격이 짙어요. 그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대부분 벼슬을 하지 못해서 느끼는 고독감이예요. 도연명의 귀거래서가 대표적이죠.
가족주의적인 의미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 가족과 헤어진 슬픔, 그리고 이 가족이 좀 더 확대된 게 왕과 맺었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슬픔에서 오는 고독이 있었다고 한다면, 제가 보기에 이런 고독은 아주 소극적인 고독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이 왕에게 도전하는, 체제에 도전하는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동양사상이나 동양문학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183
지금 우리 사회의 '고독'이라고 하는 말도 아직까진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발견, 자기 추구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싶어요.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그런 능동적 고독에 대한 주목 자체가 너무도 덜 이뤄지고 있는 것 같고요.
서양에서의 '고독'이라고 하는 말을 풀어본다면, 하나는 'loneliness' 또 하나는 'solitud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 loneliness라고 하는 개념은 17세기 존밀턴이 쓴 실낙원에 가장 먼저 나와요. 그때 지옥의 악마는 '인간과 굉장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 거리가 멀기 때문에 외롭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악하다는 것이었죠. 그런에 이렇게 거리가 멀었던 어떤 존재가 도시나 마을로 들어가면 그의 loneliness는 사라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혼자 있는 존재란 곧 '타인과 멀리 떨어진 존재'라는 인식이 자연스럽죠.
그런데 17세기, 18세기의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서구권에 solitude라는 개념이 생깁니다. 여기서 'sol'이란 접두어는 태양을 가리킵니다. 태양과 같은 존재, 즉 자기의 주관을 발현하고 내세우는 의미로서의 고독이 바로 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풀자면 '고독'이라는 번역보다는 '독존'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겠네요. '독존'은 불교적인 용어이지요. 내가 자신을 스스로 존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에서의 고독이 바로 이런 고독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인 '자발적 고독'은 여기서 등장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거나, 나의 존엄을 침해하는 세계와 스스로 유리되는 일, 그것이 바로 solitude를 실천하는 일이며, 그것은 오로지 자발적일 거예요. 185-186
사회의 쏠림이나 대세, 흐름에서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과 입장과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자세, 이것이 제가 집중하는 '고독'의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고독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참으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예요. 187
저는 자가용이다, 스마트폰이다. 큰 평수의 아파트다, 이런 요란스러운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각을 세워왔는데요.... 지금 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그런 도구들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관래서 조금 의문이죠. 189
우리가 좀더 solitude적인 삶을 살자, 자발적으로 고독한 삶을 선택하자고 하는 개념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런 고독한 삶의 자세가 개인적인 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적이고 사상적인 차원에까지 포함하는 게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리치에게 배운 것도 바로 그런 것이지요. 어떤 주류적 이념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주장과 노선을 지킨다는 것, 그게 고독을 강조하는 저의 입장과 연결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189
고독의 사회성과 정치성
일본의 사회주의 문헌을 읽고 식민지 시대의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조선독립이나 중국문제 등에 있어선 일본의 우익과 똑같은 민족주의자들이었다는 발견을 했어요. 193
현실에 구현된 마르크스주의에 실망하시고, 그 후에 좀더 일리치나 간디, 톨스토이와 같은 문명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지셨던 것이군요.(인터뷰어)
맞아요. 1970년대에 저와 같이 사회주의 공부를 했던 김문수, 이영훈 같은 친구들이 있었죠. 그분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 여전히 사회주의 공부를 열심히 했었는데, 저는 그전에 이미 그 전선에서 이탈했어요. 저에겐 어린 시절에 읽었던 간디와 톨스토이의 입장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중요하게 다가왔고, 일리치도 그렇게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발전주의 사회, 발전주의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회죠. 좌익이든 우익이든 마찬가지예요. ... 과도한 경제 발전보단 적정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체제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게 일리치의 주장과 맥락이 같았다는 애기를 하고 싶습니다. 194
결국, 고독하다는 건 주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개인성의 확보와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개인성은 사회나 국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요. 혼자서 사고하고 혼자서 행동하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을 갖는 게 고독입니다. 그런데 사회와 국가는 그런 개인을 가만히 내벼려두지 않고, 기본적으로 흡수하고 동화하려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죠. 그래서 저는 고독을 기본적으로 저항이라고 생각해요. 저항을 위해서 고독하는 것이지, 저항의 의미없이 그냥 고립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195
그렇다면 고독이라고 할 때 무언가 감상적이고 부정적이고 더 나아가 병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왜 생겨났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적 인간관계의 탓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동양적인 의미에선 완전한 부모-형제-자녀의 관계에서 일그러질때 '고독'이라고 표현했단 말이죠. .. 아직도 유교적 가족주의의 영향과 잣대가 강력하게 남아있는 한국 사회와 같은 곳에서는 고독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개념화되어 있다는 거죠. 197
친구나 조직 내의 인간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관계가 우리 삶을 규정하는 여러 요인 중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사실은 자기만의 주체적인 가치관에 대한 고민, 새로운 삶의 양식 같은 것을 추구하는 일에 경우에 따라선 방해가 되기도 쉽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0
영화, <거버나움>, <로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이 세 영화 모두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사람들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관한 영화였다. 202
그런데 이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 느껴지는 획일화와 쏠림 현상이랄까요. 어떤 집중화의 경향 같은 것도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획일적인 집중화에서 멀어진 삶이 오히려 더 개성적이고 자기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요? 204
인터넷과 SNS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어떤 궁극적인 목적은 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패거리문화를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지금 유행하는 이 기술문명이 또 다른 패거리를 만드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되는 지점이 있지요. 지연과 학연, 혈연이 물러간 자리에 SNS연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우려 말입니다. 205
젊은이들에게 제가 항상 하고 싶던 이야기는 이것이었습니다. 세계를 좀 더 폭넓게 파악하고 언제나 지적인 호기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것이요. 모든 젊은이가 그런 건 아니껬지만 꽤 많은 학생이 보통 생각하는 범위가 너무도 좁은 것 같다는 아쉬움, 또 이 세상을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모든 사건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열린 시야랄까요. 그런게 참 중요하지 않나,
독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실존을 가장 잘 건드려줄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겠죠. 233
자기 자신에 충실한 삶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바로 이 말입니다. 240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출세주의, 상위 몇 퍼센트에 들어가야만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저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를 계속 우리가 용인하게 된다면, 우리 자식 대부분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패배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저 자신도 평생을 부모의 굴레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저는 제 자식에게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241
4. 사회에 관하여: 우리 모두의, 수정처럼 맑은 정신
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옳고 또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275
조지 오웰과 류짜이푸와 루쉰을 읽다.
류짜이푸, <쌍전>, 삼국지와 수호지 비판서
이 작품들은 시대 분위기와 어울려서 거의 뭐 국가적으로 읽히기도 했었는데, 저는 그런 독서가 잘 이해되지 않더라고요. 수호지 주인공들의 잔인한 살육전, 또 삼국지 주인공들의 패거리 문화와 집단주의, 영웅주의, 지략으로 포장되는 음모, 이런 게 과연 순수한 의미에서 읽힐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었어요. 남학생들의 유비, 관우, 장비 세 의형제에 대한 동경이랄까, 그런 분위기와도 잘 맞질 않았던 것 같고요.
류짜이푸, <루쉰과 공자>
루신과 공자를 아주 적대적인 관계에 두고 공자를 비판한 책. 304
교수님의 쓴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아아 슬프다, 개인이 더 우위에 있다는 믿음이 부족한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개탄할 만한 죄악이다. 개인이 아니고서는 어떤 변화도 이루어 질 수 없다" 319
자기 자신의 위치나 권력을 철저하게 인식 또는 인정하고, 바로 그 삶에서 출발하는 작은 실천, 나눔과 연대의 에너지가 모일 때에만 우리 사회의 진정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320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고, 이런 생각도 해볼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중요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무슨 계몽적으로 남들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요.
아마 저는 그게 가장 저답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 내 주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땐 서슴없이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삶, "자유란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권리"라고 말했던 카뮈의 말을 힘껏 좇으려고 노력하는 정도의 삶, 그렇게 저는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자기다운 생각과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시시하나마 표본이 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예요. 321
5. 인간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제나 구체적으로
제가 그 어떤 사상가나 예술가보다도 간디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두 사람이 보여준 철두철미한 비폭력이예요. 그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제가 겪었던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실감하곤 했으니까요. 대한민국 사회는 폭력에 중독된 사회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도 맞았고, 학교 선생님들한테도 맞았고, 군대에서는 심지어 고막이 나갈 정도로 맞았으니까요. 337
그 폭력적이었던 분위기는 어떤 사상적인 연원도 있다고 생각해요. 유교와 주자학의 전통 이념은 폭력에 대한 통제, 폭력에 대한 반대를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양반사회라고 하는 것은 양반이 상놈을 죽여도 괜찮은 그런 사회였잖아요. 양반 사회만이 아니라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남편이 아내를 조그마한 잘못 때문에 때리고 욕보이고 불륜의 경우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죽여도 될 만큼 폭력에 관대한 사회였습니다. 340
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햇습니다. 그게 아버지에게는 최대의 미덕이었던 거예요. 제 아버지는 60이 넘은 아들에게까지 보수정당과 정치인을 찍으라고 강요했어요. 우린 그런 부모의 행태를 사랑이나 도덕이란 말로 미화하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상의 테러'입니다. 타인의 머릿속을 조정하겠다는 것이니까요..... 스스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회의하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346
명태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 번씩 두드려야 맛이 난다는 말이 있던 사회잖아요. 우리 사회는 굉장히 폭력적인 사회예요. 제가 단언할 수 있는데, 가부장 사회는 곧 폭력 사회입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하여
저는 톨스토이의 책 중에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이 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차르 체제의 권력과 빌붙었던 러시아 정교를 철두철미하게 비판하고, 성경 속에 포함된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철두철미 배격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원죄설, 대속 사상 같은 것들을 완벽하게 거부하는 책입니다. 비폭력 사상과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종교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중요한 고전이고, 특히 어디에서든 권력의 힘이 남용되고 폭력으로 흘러버리는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빈센트 반 고흐가 제일 아꼈던 톨스토이의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간디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이 책을 번역한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360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 둘의 문학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구분 짓는 문제는 대속 사상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대신 죽었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다 개인으로서 사는 것이며, 예수는 그저 우리들의 삶의 모범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지요.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왜 남에게 대신 책임을 지라고 해? 이게 대속 사상의 거부잖아요. 말 그대로 신의 나라는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에 있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속 사상의 문제는 종교를 자율적으로 볼 것이냐 타율적으로 볼 것이냐, 자기 구제로 볼 것이냐 신의 구제로 볼 것이냐는 점을 우리에게 묻고 있죠. 톨스토이는 명백히 자기 구제와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톨스토이는 무신론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가 상징하듯 현실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고 타율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속주이자이죠.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국가권력과 결합해 러시아 정교의 전통을 신봉하고, 러시아 민족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예찬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반근대적인 국가주의자의 측면이 강해요. 그는 좀 심하게 말하면 러시아 군국주의자였고 차르주의자였습니다. 러시아 정교의 사도였고요. 362
톨스토이는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 적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평화주의,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아부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반항 정신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애기하는데 363
진보의 패러독스를 성찰하다
우리 모두에게 흐르는 우열의 논리와 감수성 같은 것을 극복하지 않고선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혁될 순 없을 것 같다.(인터뷰어)
동물의 세계에는 지배하는 소수와 지배받는 다수라는 어떤 생존의 기본법칙이 있지요. ... 물론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는 존재가 다수를 지배하는 힘으로 누르는 동물 사회의 특징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끝내 인간이기 때문에 지배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함께, 보다 동등하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욕망 또한 가지고 있다. 분명히 인간에게는 동물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만의 존엄과 가치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믿는 거죠.... 제가 니체주의와 플라톤주의를 배격하는 이유는 바로 그 동물성에 관한 적나라한 긍정에 있어요. 플라톤주의와 니체주의로 이어지는 서양의 주류적인 사상의 흐름이 힘세고 현명한 극소수의 인물이 다수를 지배하는 게 옳고 마땅하다는 식의 정치관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370
어릴 때 겪은 충격적 경험(어머니가 가져 온 밥상을 엎어버린 아버지) 저는 일찍부터 가부장제에 대한 증오를 싹틔웠던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는 평생 노예처럼 사신 분이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제 어머니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제사 같은 일들을 그만두실 줄 알았어요. 아버지 사후에 어머니가 더욱 철저하게 그 전통을 지키는 바람에 제가 참 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미니즘적 자각이라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386
대화를 마치면서
그래도 몇 달간 열 번에 걸쳐 네댓 시간씩 박 작가와 대화를 나눈 것은 혹시 나처럼 살았거나 앞으로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비슷하게 사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모두 고독하지만, 서로 닮은 모습으로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곧 인도로 떠날 것이다. 두 달 넘게 간디의 흔적을 찾아 인도를 혼자 여행할 계획이다. 간디는 무슨 대단한 진리를 가졌다거나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람은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참되다고 생각했던 삶을 추구했을 뿐이다. 내가 그를 찾는 것은 그런 그가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디의 삶과 생각처럼,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언제나, 모두 책에서 찾았던 것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내 읽다가 늙어갈 것이다. 460
책머리에 (인터뷰어, 박지원)
외골수, 자발적인 단독자의 길
그렇지만 이 세계와 완전히 절연된 외골수는 끝ㄴ 존재할 수 없다. 단독자는, 어떤 의미에선 이 사회의 일면을 가장 민감하게 '자신의 외로운 존재성에 묻히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외로워서 투명하고, 그의 투명한 삶 위엔 마치 지문처럼 이 사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심지어 그가 오랫동안 비판해오던 사회의 어떤 면들까지도 말이다. 다만 그는 그 흔척을 집단과 구조, 상황의 이름으로 숨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대학교수이면서도 대학의 교수가 누리는 기득권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진 않은 채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노동의 존엄과 가치를 말했지만, 그 자신이 현장의 노동자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와 가부장주의를 통탄했지만 동시에 그는 한 가정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부장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 보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북도의 정치와 문화를 비판했다. 박홍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순적인 정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유를 얽매는 둔중한 중력을 알고 있고 고독이 품은 위태로운 역설을 알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을 꿈꿔왔다. 하지만 그의 발은 족쇄처럼 이 땅 위에 묶여 있다. 이상을 꿈꾸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 현실을 살아가되 이상을 노래하는 사람, 자유인이고 싶되 자유롭지 못한 사람,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인을 염원하는 사람.
그래서 그는 언제나, 매번 다시, 책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10대 시절부터 읽고 매혹된 사람들을 펴들며 자기 나름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고, 비로소 노년의 삶에 당도했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와 조지 오웰, 헤르만 헤세와 루쉰과 몽테뉴, 톨스토이와 간디, 이반 일리치와 한나 아렌트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카뮈와 카프카.... 등등의 사람들에게서 자기 자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박탈된 자유의 흔적을 발견한다. 어떤 권력과 군중의 대세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자유의 흔적을.
아니, 그들도 물론 '완전히' 자유롭진 못햇던 게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의 세상에서, 자기의 시대에 맞서, 자신의 한계를 응시하며 나름으로 힘껏 분투하며 글을 썼던 이들이었다. 박홍규는 책의 세계 안에서 그들을 만나 이 현실의 세계를 살아갈 힘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다. 단독자들의 몸부림을 바라보고, 자신이 얼마나 그들을 열렬하게 좇아 왔는지를 확인하면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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