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백_일홍 2022. 8. 1. 17:25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머리말. 글이 나다

(1) '글을 쓰는 자"는 누구인가

끌쓴이의 품성과 재능에 대한 논쟁은 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러한 논란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내가 먹는 것이 나다", 내가 행하는 것이 바로 나다"라는 진리처럼, 나는 "글은 곧 글쓴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글만큼 그 사람 자체인 것도 없다. 10

"내가 쓴 글이 (그 글을 쓴 당시의) 나다"

하지만 모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 사회의 정치, 경제, 담론의 일부이자 그 산물이다. 또한 고전, 클래식, 경전 개념은 가부장제 역사의 산물이다. 수천 년간 지식과 언어를 독점해 온 그들만의 세계에서 '아버지'를 만들고, 그 계보 안에 자신을 배치하려는 권력욕이다. 베냐민은 백번 옳았다. "역사 기술과 읽기는 기본적으로 감정 이입이다. 역사의 승자와의 동일시이다" 승리와 성공을 욕망하는 이들은 자신을 과거의 계승자라고 믿는다. 그러나 민초의 역사는 기존 역사를 해체하고자 한다. 고전에 대한 집착이나 읽기 스트레스는 이 계승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11-12

(2)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의 목표와 방법은 같다는 것.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 정체성(동일시)
. 당파성(부분성)
. 유목성
. 위치성.
. 재귀성(성찰)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14

(3) '몸으로 쓴다'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답, '살아내는 대로 쓴다' 흔히, '몸으로 쓴다'는 표현이 가장 가까운 의미.

여성주의와 글쓰기의 관계 :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은 드룰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 실천이 될 수 없다. 여성주의는 하나의 분과학문이 아니라 평화학이나 탈식민주의나 생태학처럼 일종의 인식론이다.

'글을 쓰는 자'에 대한 나의 모든 관심을 요약한 정찬의 말.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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