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12년의 결혼생활 동안 단 한순간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자녀 넷을 둔 여자.
욕실문을 잠그고 혼자 있어도 손님방을 개조해 만든 자기만의 공간에 있어도 그녀에게는 계속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도저히 자신을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녀는 모텔에 방 하나를 빌리기로 했고 거기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의 오후시간을 마음껏 고독 속에서 지낸다.
그러나 그녀의 기쁨도 불안함을 잠재우지 못한다.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이 혼자 있고 싶어"라고 부르짖는 자신의 욕구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남편이 그녀에게 매일 오후 어디에 가느냐고 묻자, 혼자 있고 싶어하는 자신의 이상한 욕망을 실토하기보다는 다른 남자를 사귄다고 말해버린다. 그러자 남편은 자기도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 모는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네 사람이 함께 만나 저녁식사라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가짜 연인이 고독이었음을 밝혀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자살하고 만다.
한 13년 전에 읽었던 <결혼안식년, 결혼한 여자 혼자 떠나늗 여행>이란 책을 다시 읽습니다. 이는 나이듪수업 책을 읽고 정한 주제 '남편과의 관계 재설정'을 모색과 관련될 것 같아서요. 이 책을 읽다 도반님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 이 책의 내용 중 도리스 레싱의 소설 내용을 올립니다.
위 책에서 이 소설을 인용하는 맥락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의 파트 중 "변화를 거부하는 편견4, 여성은 남편이 곁에 있는 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입니다.
소설 주인공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솔찍했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었지요. 누군가 옆에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인정해주었다면 죽지는 않았을텐데요.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요? 그녀가 느겼던 불안함은 어디서 오나요? 그녀의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는 온전한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실존적인 욕망의 표현일 텐데요. 그런 욕망을 따르면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갇게 만드는 현모양처의 관념을 생각할 수 있겠네오. 무서운 것은 이 관념은 당사자에게 내면화되어 자동적으로 작동하므로 쉽게 극복할 수 없다는 거죠. 이에 결혼한 여자는 가족이든 누구든 타인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고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정체화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결혼한 여자 대부분은 19호실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은밀한 19호실을 마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언젠가는 당당히 내 19호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 아닐까요?
자기가 내면화한 이 죄의식과 두려움을 어떻게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불자로서 하고 있는 수행은 이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혹시 현모양처 역활의 일환으로서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아침마다 절하면서 혹시 이 주워진 역활에서 벗어났음을 참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본래없으므로 나를 죽여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내 내면에서 올라오는 존재적 소리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일입니다.
'202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0) | 2022.08.01 |
---|---|
성배와 칼(1) (0) | 2022.08.01 |
자기만의 방 (0) | 2022.08.01 |
번역청을 설립하라 (0) | 2022.08.01 |
여자는 인질이다 loving to survive (0) | 2022.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