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라 _ 오래된 미래에서 페미니스트의 안식처를 찾다
추 와이홍
p.153~155
나는 여성들의 세상에서 환영받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스스로가 진정으로 수용되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여성이 중심이 된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내가 혼자서 즐겁게 돌아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쒀인들은 여남을 불문하고 강인한 여성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다. 모두 자기 집에서 그런 여성을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쒀 친구들 역시 여성을 기리는 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을 내가 얼마나 편안하게 느끼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모쒀인들과 나 사이에는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이해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내가 아직까지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한 어떤 깨달음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사는 동안 이렇게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서 편안하게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성인 나를 그저 나로 존재하게끔 하고, 그럴 수 있도록 북돋아주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세계에서 포근하게 보호받는 기분을 느낀다. 과장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거나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 순간에 나는 단 한 번도 의견을 묵살당한 적이 없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한 번도 무지와 싸우거나 적대감에 맞설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강요받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잘못된 신념에 맞서 핏대를 세울 일도 없었다. 직관적으로, 나는 모쒀인들과 살아가는 이곳이 훨씬 더 집처럼 여겨졌다.
아직도 나는 어떻게 이 가모장제 부족이 고문 변호사로 살아온 여태까지의 내 삶을 부수어내고, 가슴속 깊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의식을 길러냈는지 생각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163-4
이 사회에서는 여성을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삶과 빛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여성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었다.
이 사회에서 삶과 빛을 맡는다는 건 죽음과 거리를 둔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엔 동물을 잡거나 직간접적으로 시체를 다루는 일이 전부 포함되었다. 더럽다고 여겨지는 일은 남자들이 도맡아 했다. 같은 의미에서 여자들은 장례식에서 시체를 염하고 만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달갑지 않은 이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여성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이러한 행위를 보고 있자니 모쒀 여성들이 부러웠다. 이들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특별하게 여기고 반갑게 느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독한 성차별주의가 군림하는 중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이런 기분을 가질 수 없었다. 중국인인 나의 할머니는 가족 식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준비했고, 그 와중에 크고 작은 부엌살림을 다 해내야 했다. 날생선, 닭, 오리를 잡는 것도 할머니가 했다. 한 집에 사는 남자들은 이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비천한 여자들이 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라주의 집안에는 모쒀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한 특별한 지위에 얽힌 이야기들이 더 많이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 라주의 집은 그의 어머니 집이지 아버지 집이 아니었다.
“이 땅은 내 거야.” 구미가 말했다. “내 아샤오가 내 집에 들어와서 살겠다고 말한 뒤로 어머니가 내게 자기 땅의 일부를 물려줬어.”
168-171
이 집에서, 농가와 농장의 관리인 겸 주인 역할을 하는 쪽은 명백하게도 구미였다. 가장으로서, 구미는 농장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경작과 농사 일정을 계획하고, 어떤 동물을 몇 마리나 기를지 전부 결정했다. 구미는 몸소 실천하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는 유형의 리더였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체력이 필요한 일을 할 때 기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 구미는 대부분의 농사일을 해냈다. 낫을 들고 돼지를 먹일 꼴을 베어 바구니에 짊어지고 돌아와, 풀을 손으로 갈가리 찢어서 다진 감자와 쌀겨를 섞은 뒤 돼지에게 먹였다. 이렇게 농장에서 기르는 동물들을 먹이고, 경작하고, 추수하고, 쌀과 옥수수, 감자를 저장하고, 집안의 식사를 전부 책임졌다. 여기서의 식사에는 가족 구성원뿐 아니라 기르는 동물들까지 전부 포함된다. 그러니 구미가 가계의 재정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은 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기지의 입을 통해서 집안에서의 이런 질서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구미가 집안의 돈을 관리해. 농작물이나 가축을 팔고 나서 버는 돈을 구미가 갖고 있어. 내가 나무를 베서 버는 돈도 다 가지고 있고. 나는 구미한테서 돈을 받아 쓰고, 구미가 돈에 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따르지.”
중국 여성이 집안에서 구미와 같은 위치를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무엇이든 주겠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중국 시골에서는 어떤 여성도 이와 같은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가계 혈통을 충실히 따라서, 집안의 재산은 오직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또다시 아들로 건네진다. 아내는 가족의 재산을 관장할 수 있는 어떤 권력도 가지지 못한다. 오직 남편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부인이 가계 지출내역을 관리한다고 하더라도 소비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모두 남편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돈을 받아서 쓴다.
현대적인 중국 도시에서라면 이런 남성중심주의가 힘을 잃는 모습을 종종 마주친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임금노동에 뛰어들어서 배우자와 함께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본적인 사상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의 모부님은 둘 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산층에 해당하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그의 친조모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가부장제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부님이 나이가 드시면 그분들을 봉양할 거라는 큰 기대를 받고 있어. 내 여동생에게는 아무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아. 내 여동생은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남편한테 속해 있으니까, 출가외인으로 취급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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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쒀 친구에게, 누군가의 재산을 사용하는 데 제한을 두는 일은 이기적일뿐더러 그가 공동체 재산에 대해 가진 감각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개인이 가진 재산에 대해 이들이 보이는 격의 없는 태도를 내면화해보고자 무진 애를 썼음에도 도무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떼어버릴 수 없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루구호에서 보낸 시간이 몇 년이나 되었지만 내가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내 물건을 쓸 때면 여전히 속 깊은 데서부터 울컥 하는 기분이 든다.
190-193
모쒀식 가족 구성은 간단했다. 가계의 중심인 할머니와 핏줄로 직접 연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 가족은 집안의 여자가 그 여자 조상에서부터 오직 딸 쪽의 자식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계 혈통을 잇는다는 불가침의 믿음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다.
3대 모계 가족을 상상하려면 3대를 이어주는 축과 거기 연결된 세 개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우선 첫 번째 관계는 1세대인 할머니에서 시작한다. 나를 초대해준 그 젊은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형제는 내가 ‘할머니-남자형제’ 공식이라고 부르는 이 첫 세대에 포함된다. 할머니의 자매들은 이 세대에 포함되지 않는데, 각각의 자매들은 각자 자기 소유의 온전한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다음 관계는 할머니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식들을 포함한다. 이 단계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할머니가 낳은 자식들이므로 할머니와 핏줄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것은 이 ‘할머니-딸/아들’ 조합에 그 자식들의 아샤오, 즉 연인은 일체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쒀족에게 가족에 아샤오가 포함되는 시도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아샤오는 성별을 막론하고 다른 모계 혈통에서 태어나 다른 모계 혈통을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간단히 아샤오는 연인으로 가족 중 딸이나 아들과 성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일 뿐, 모계 혈통 바깥에 위치하므로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존재다. 아샤오가 남자일 때, 그는 한 가족 내의 여성을 만나기 위하여 그 집에 들르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도 연인과 함께 영구적인 결합을 이루지 않는다. 모쒀 사회에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부재하는 만큼,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성인 가족 구성원은 독신이다.
세 번째 세대를 이루는 관계는 오로지 할머니가 낳은 딸 쪽 손주들로만 이루어진다. 모계 혈통으로 세대를 나눈다면 이 구분이 이치에 맞는 게 된다. 할머니가 낳은 자식 중 오직 딸만이 다음 세대로 혈통을 이을 수 있는 존재다. 마지막 세대에서는 손녀와 손자 모두 할머니 가정에 속한다. 딸이든 아들이든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손자가 아샤오와 아이를 만들게 되면,
아이는 또 다른 가족에 속해 있는 제 어머니의 혈통을 따른다. 즉, 다른 혈통을 이어받은 아이는 손자와 서로 다른 가족에 포함된다. 아이는 손자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가족의 일원으로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머니-엄마-손주로 이어지는 모쒀식 가족을 이해할 때의 핵심은 자식이 오로지 엄마에게만 속하지 그의 아샤오에게는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여성이 엄마가 되려면 남자 아샤오의 존재가 필수라는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남성이라는 요소는 모계 혈통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49-250
나는 도축을 삶이 순환하는 데 필수적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모쒀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토속신앙에 의지하며, 도축을 자연의 풍요로움과 연결지었다. 또한 도축은 불교가 살생에 대해 내리는 금기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들은 여성과 죽음을 멀리 떨어뜨려놓는 고유의 전통을 따랐다.
278-279
모쒀인들의 집집마다, 난로 위에는 돌로 지어진 제단을 뜻하는 추오두오가 놓여 있다. 여기에 모쒀인들은 매년 처음으로 추수한 결실을 바치는 짧고도 진심 어린 의식을 치른다. 한 가정의 가모장이 그들의 주된 식사 중에서도 가장 좋은 음식, 주로 닭의 머리를 추오두오에 올려둔다. 모계 조상들에게 바치는 의미다. 그러고는 모쒀어로 축복을 빈다.
“마부들이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길을 떠난 말들이 가시를 밟거나 뱀이 지나다니는 길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고 평화가 있게 해주시고 대를 이어 강성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며 쏜 화살이 제 목표를 찾게 해주시옵소서.”
289
세상에 몇 없는, 여성이 가족 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사회에서 자라난 우진과 같은 모쒀 여자아이에게는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 있게 성장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거의 모든 모쒀 여성에게서는 침착함이 자연스레 풍겨나왔다. 세계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애써 가진 척하고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날 마을 술집에서 여자들의 밤을 보내는데, 구미의 언니가 모쒀 남자들이 있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맥주를 몇 병 샀다. 중국 다른 지역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광경과는 반대로, 구미의 언니는 남자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리-처” 구미의 언니는 우렁찬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수줍음 따위는 타지 않았다. 그는 남자들과 함께 앉아서, 주변으로 번지는 웃음과 익살맞게 던지는 추파로 그날 저녁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291-292
모계 혈족의 장으로서 할머니를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는 가정과 사회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여성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특히 아주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 구성원이 성별을 불문하고 할머니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면 말이다. 또한 이 여성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모든 모쒀 가족이 여성의 심장으로 뛴다는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최소한 모쒀 여성은 가부장적 가정에서 한 발 뒤로 밀려난 자리에 앉기를 강요받고,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그 뒤에는 남편의 뜻을 따르고, 나이를 먹어서는 아들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전통에서 자라난 중국 여성보다 훨씬 더 스스로를 특별히 여긴다. 중국사회에서 여성과 관련된 모든 것은 보다 낮은 지위로 밀려나버린다. 그러나 모쒀 여성은 태어난 날부터 특권이라는 옷을 입고 자라난다. 모쒀 가정에서, 여자아이의 출생은 오랜 중국문화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결코 비극적인 일이 아니라 경사이기 때문이다.
300-302
내가 감명 깊게 생각했던 부분은 여남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농담을 했다는 것이다. 모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가정 내에서도, 모쒀 여자에게 져주는 법이란 없었다. 그들은 의견을 가진 한 그것을 표현하는 데 수줍어하지 않았다. 여성의 목소리에는 무게가 실리고, 최후 결정권은 할머니가 행사했다.
비록 가모장제이기는 했지만, 모쒀 여성들은 전통 중국문화에서처럼 성별 간에 우열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의 세계에서 살았다. 이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바라보노라면, 가부장제 사회에서보다 권력구조가 더 균형 잡혀 있는 예를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사회 속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다. 여성이 남성을, 여성이 여성을, 남성이 여성을, 남성이 남성을, 나이 많은 이가 적은 이를 대등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지주오의 집에 가면, 할머니가 손주를 대할 때 아이가 아니라 동등한 성인에게 할 때와 똑같이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손주에게 이야기를 건 뒤 인내심 있게 답을 기다렸다. 혹은 자시가 누군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나는 자시가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가 친구나 사업 파트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시의 직원이었다. 중국에서 상사가 말투나 몸짓을 통해 직원을 자신의 아래로 본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303
기본적으로 모쒀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는 엄마가 될 수 있는, 즉 그로 인해 모계 혈족 식구를 늘려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되는 순간은 모쒀 여성의 삶에서 가장 축복할 만한 사건이었기에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축하가 쏟아졌다. 반대로 아이를 낳은 적 없는 여성은 주변으로부터 동정심을 샀다.
305
외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들이 언제까지나 독신모라는 점이다. 모쒀 여성이 낳는 아이는 어떤 아이든 간에 혼외자식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따라서 아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가부장제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쒀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매 순간은 하나의 추문이자 가족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는 사건일 것이다.
306
모쒀 여남이 살아가는 동안 아샤오가 될 상대와 그 수를 고르는 건 철저히 그들의 자유다. 여남이 결혼을 해서 핵가족을 이루어야 할 필요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에서 사는 모쒀 여성은 자신의 모계 가정에서 안락하고 사생활을 존중받는 방식으로 연애 상대를 골랐다. 그에게는 꽃방의 문을 잠시 사랑을 나누었던 상대에게는 닫고 또 다른 이에게 열어줄 자유도 있다. 모쒀 사회에는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족생활의 시작점으로 설정된 우리에게는 이 점이 모쒀 여성의 삶에서 가장 혁명적인 부분이다.
모쒀 여성이 남성 아샤오를 고르는 기준이 결혼을 위해 영원히 삶을 함께할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라 추측하는 건 매우 타당하다. 모쒀 여성에게 아샤오란 고된 일상에서 자신을 잠시 벗어나게 해줄 즐거운 일탈이자 잠재적인 정자 기증자다. 그러니 아샤오를 고르는 기준은 이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나의 친구인 저명한 중국인 사회인류학자 차이후아蔡华는 모쒀 아샤오 체계에 대해 분석한 자신의 저작 『아버지나 남편이 없는 사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전, 모쒀인들은 여성이 가진 씨앗이 땅 위에서 파란 풀로 자라나려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여성은 그것을 실제 생명의 탄생으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씨앗에 물을 줄 남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니 외관상으로 좋은 가치를 가진 자가 물을 주어야 씨앗을 크고, 강하고, 아름답게 길러낼 수 있다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이를 원하는 여성의 관점에서, 물 제공자인 남성은 무엇보다도 잘생기고 몸매가 좋아야 했다.
결국 모쒀인은 남성과 가정을 꾸리지 않으므로 당연하게도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가 그에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저 양질의 물을 주는 본분을 다하기만 하면 됐다.
311
모쒀 여성에게 사랑이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사건이었다. 다시 생각해본다면 모쒀 사회에 살지 않는 우리에게도 그리 이상하게 여겨질 말이 아니다.
313
남성중심적인 중국문화에서 바라본 모쒀 여성은 문란하게 여겨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모쒀 여성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결코 지조 없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여러 아샤오의 마음을 끌었다는 이유로 칭찬을 들을 것이었다.
317-318
나는 모쒀 여성의 삶에 깃든 다양한 면모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요소를 발견했다. 바로 여성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모쒀인 엄마가 딸에게서 가장 높게 사는 가치는 지성이다.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가장 지위를 물려받아 어머니의 가정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쒀족 여자아이에게는 파티를 즐기고, 웃고, 자리를 주도하고, 일하고, 사랑하는 데 어떤 문화적, 사회적 제약도 따르지 않는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런 힘을 부여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따로 힘을 얻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 아이는 힘을 가진 엄마와 할머니들, 나아가 공동체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존경받는 모든 이들의 손에서 자란다. 이 여성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점에는 거무 산신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이 힘을 가진 존재라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구태여 이 사실을 소매에 적어놓거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외칠 필요가 없다. 시작해야 할 투쟁 같은 건 없다. 아예 처음부터 아이는 지금의 높은 위치에서 태어나고, 여성을 기리는 세계에서 평생토록 이 힘을 유지하며 안온하게 살아간다.
322
중국 남성에게 수이싱양화란 늘 문란한 여성을 가리킬 뿐이고, 부인이나 딸이 이런 여성이 된다면 나쁜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반면 그 자신이 어떤 문란한 여성과 하룻밤, 혹은 이틀 밤을 즐길 수 있다면 그건 그저 좋은 일로 여길 것이다.
325-328
돈을 위한 섹스냐, 사랑을 위한 섹스냐는 모든 사회에서 영구히 제기되는 질문이며 루구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모쒀 사회가 가부장제 사회에 제시한 여성에 대한 더 광범위한 논점들을 가리지는 못했다.
첫 번째 논점은 전 세계를 뒤덮은 가부장제라는 광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여성중심 사회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모쒀족의 사회 양식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가 발전하면서 남성중심의 전형을 따른다는 필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어머니의 나라인 모쒀족은 대안적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온전하고 믿음직한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여성을 길러내고 발전시키는 데 더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과거와 오늘날 세계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고 있노라면, 가부장제의 남성중심 사회는 분명 해결책을 줄 수 없다. 모쒀 사회는 남성을 연옥으로 끌어내리지 않고도 여성을 중심에 두면서 훨씬 나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등시민인 여성의 자리를 주요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일이 인류의 종말을 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물론 모쒀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논점은 모쒀 여성들이 중국사회 내의 모든 독신 여성들에게 가르쳐준 귀한 교훈이다. 중국에서 독신 여성들은 버려진 위치에 놓인 취급을 받고, 결혼할 남자를 찾는 데 실패한 불쌍한 존재로서 사회 내 위계관계에서 다른 어떤 여성들보다도 낮은 등급이 매겨진다. 이들은 내가 그러했듯 모쒀인들로부터 혼자임을 기쁘고 명예롭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통나무집에서 유독 커다란 행복감을 느끼던 어느 때, 나는 내가 전생에 모쒀 여성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전에 다녔던 싱가포르의 로펌 내에 만연하던 남성우월주의와 맞서거나 전부 남성으로 구성된 로스앤젤레스의 변호사 네트워크 안에서 옆 자리 남성만큼이나 공격적인 기질을 더 이상 드러낼 필요 없이, 모쒀 친구들에 둘러싸여 느끼는 이 유대감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더 올바른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쒀 남성이 가진 자리가 무엇인지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첫째, 모쒀 남성은 모쒀 여성과 같이 영원히 독신으로, 결혼이 없는 사회에서 살기에 남편이 될 수도 없다. 둘째, 모쒀 남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모쒀 사회에는 아버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살펴볼 모쒀 남성의 삶은 가부장제 사회 속 남성의 삶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해야 이제부터 이어질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외부인인 우리가 처음으로 알아차리게 될 모쒀 남성의 특징은 이들이 마마보이라는 것이다.
모쒀 남성을 마마보이라고 부르는 말은 사실상 적절한데, 왜냐하면 평생토록 모계 가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는 모계 가족 구성원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매형제들, 그리고 어머니 쪽 친척과 함께 산다. 이들에게 어머니, 그리고 나아가 할머니는 자신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연장자들이다.
모쒀 남성의 또 다른 자리는 자매들이 낳은 아이들에게 삼촌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쒀 남성들은 자신이 아샤오(들)와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는 어떤 의무도 가지지 않지만, 어머니 쪽 조카들을 돌보는 것에는 책임감을 지닌다. 남성인 삼촌으로서 그는 가족 내에서 아이들에게 중추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촌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전승하고 도덕의 잣대가 되는 전통 문화를 알려주는 것이다.
모쒀 남성은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가장인 할머니는 밤에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얼마 보이지 않는 고기 중 가장 큰 덩어리를 남자들의 몫으로 떼어준다.
가장인 할머니는 아들이나 손자가 돈을 벌어올 때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다. 모계 가정 내에서 여남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가부장적인 중국 남부 차오저우潮州계
✽
싱가포르인 친구의 가정에서 목격한 비현실적인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음식이 나왔을 때 식탁에 남성들만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실컷 저녁식사를 즐기고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나서, 여자들은 남은 음식을 주워먹었다. 이런 불공정한 대우는 모쒀족 가정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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