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유식唯識마음을 변화시키는 지혜

백_일홍 2022. 8. 1. 19:00

유식唯識, 마음을 변화시키는 지혜 _ 나를 바꾸는 불교심리학

 

요코야마 코이츠

 

1장.도대체 무엇인가?

 

저는 이처럼 (생명이) '소중하다' '소중하지 않다'라고 가치판단을 내리기 전에, 앞에서 말했듯이,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사실로서 강하게 자각하는 사실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판단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적인 판단이 아니다. 눈이 보인다는, 넓게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제 이치를 따지지 말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사실로서 강하게 맛보고 자각할수록 '자각하는 새로운 자신'이 거기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 그 새로운 자신은 살아 있는 또 한 사람인 자신을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경이심은 경외감이 되고,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 최종적으로 사람들에 대한 자애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된다.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사실을 안다면 필연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해결된다. 그것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삶'일 것이다. 35

 

사과에는 '등근' 모양과 '빨간' 색이라는 속성이 있다. 이 소성은 내가 인식하는 것이지만, 그러하나 속성은 바깥에 있는 사과 그것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인식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영국 경험론의 대표 철학자인 로크는 사물의 속성을 제1차적 속성과 2차적 속성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전자는 외계에 있는 사물 자체에 필연적으로 속하며, 그것 없이는 어떤 사물의 존재도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성질로 연장과 불가입성, 운동과 정지, 도형과 수 등을 생각했다. 후자는 주관적인 성질을 말하며, 색, 소리, 냄새, 맛 등과 같은 감각이 이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불교에는 이미 기원후 3-4세기경부터 '사물의 속성은 바깥에 있는가? '내부에 있는가?'에 관한 논의가 학파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유식학파는 모든 '사물'과 그 '속성'은 모두 마음속에 있으며 아뢰야식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로크의 설에 반대해서, 버클리는 외부세계에 사물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다만 마음과 마음 속의 관념 뿐이라는 주관적 유심론을 제시했다. 버클리의견해는 유식사상에 가깝지만, 그가 신이라는 실재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완전한 유심론의 한 가지 문제점은, 모든 것이 마음 속의 관념이라면 산이나 냇가라는 자연은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버클리는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연 관념이 신 안으로 돌아와 있다고 주장한다. 

 

신이라는 초월자를 인정하지 않는 유식학파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유식사상은 심층의 아뢰야식이 자연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만들어 낸 자연을 항상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생각에 의하면, 자연에는 눈과 같은 감각이 파악한 자연과 아외야식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인식하고 있는 아뢰야식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두 가지가 있게 된다. 

 

아뢰야식은 자연뿐만이 아니라 일체를 즉, 자신의 신체, 몸을 둘러싼 생활도구, 산과 강 등의 자연, 그 위에 멀리 있는 별 등 이른바 '사물'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나아가 시각에서 촉각에 이르는 다섯 가지 감각과 사고하는 마음(의식), 즉 '마음'이라 불리는 것 등과 같은 모든 것을 만드는 근본적인 마음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일체 존재를 형성하는 식이기 때문에 '일체종자식'이라고도 부른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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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의 연기론, 유식에서 보는 인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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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기억도 마음에 있다

120억년 전 빅뱅 직후 우주의 모습이 마침내 포착되었다는 뉴스. 인간이 빅뱅 직후의 영상을 재생하고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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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와 마음속의 청소

 

바깥 세계에는 사물이 없다는 '유식'의 교리에서 봄면, (캠퍼스 내 담배꽁초를 줍는 행위) 그것은 각자 자신의 마음 속 세계를 청소하고 있는 것이다. 캠퍼스를 깨끗이 하는 이타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도 깨끗이 하는 것임. '쓰레기도 담배도 마음 속의 영상이다.' 102

 

 

관찰자인가 관여자인가

- 유식과 양자론

 

양자론, 전자는 (빛도 그렇지만) 입자성과 파동성 두 가지 성지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입자와 파동 두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 한가지는, '인간은 모두 선천적인 인식틀을 가지며, 그것에 맞춰서 사물을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자와 빛은 본래 그런 상태가 아닌데, 우리 인간이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시각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가지 상태밖에는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상태'를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나누었다. 1.본래적인 상태, 2.지각된 상태. 그리고 이 두가지 상태의 관계는 1의 상태가 인간의 인식 틀에 의해 2의 상태로 변형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존재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에로의 관여자'라는 양자론의 결과를 단숨에 유식사상의 '오직 식이 변한 것', '유식무경' '일체불리식'이라는 생각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러한 양자론의 발견을 근거로 '유식'이라는 생각이 적어도 독단적인 사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는 지금 하나는 과학의 양자론과 우주론 그리고 또 하나는 불교의 유식론, 이 두가지 이론을 병행해서 배우면서 자신과 자연 그리고 우주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사색을 깊게 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115

 

 

마음속의 자연

- 유식과 자연관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도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하면, "그런 어리석은 짓이!"라고 거의 모두가 반론을 제기하겠지요. 그러나 유식사상은 이 반론에 정면으로 맞서서,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이 자연계를 만들어 내며, 몸소 자신이 만든 자연을 자신이 계속해서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원자, 분자로 된 자연세계는 나의 바깥에 있다. 이것이 상식 혹은 과학적인 견개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비록 외계에 있다 해도, 나는 나의 마음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자연 그 자체를 내가 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구체적으로 보고 있는 자연은 마음 속에 있는 영상이다. 

 

표층에서 물결치는 마음을 가라앉혀 보자. 완전히 고용한 상태에서 눈을 감아 본다. 그러면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 어떤 '존재감'이 있게 되는데, 그 '존재'쪽이, 눈을 떠서 보거나 혹은 듣는 존재보다 더 본질적인 생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심층으로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아뢰야식의 영역가지 도달하여, 그것이 만들어 내고 동시에 인식하고 있는 '대상'을 몸소 알고자 하는 소원이 유식사상을 배울수록 저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솟아난다. 

 

고전역학, 즉 뉴턴 역학까지는 '나'의 바깥에 무엇인가 얼마의 크기를 가진 입자로서의 원자, 분자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양자론, 양자역학의 발전에 의해, '존재의 상태'에 나라고 하는 존재도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 

 

저는 지금, 이러한 양자론의 성과와 또 한가지 유식 사상의 자연관, 즉 '내가 표층의 감각으로 파악한 자연, 그리고 그것에 생각과 말로 채색된 자연, 그런 자연만이 자연은 아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아뢰야식이 대상으로서 있는 자연이 있다'는 자연관, 이 두 가지를 참고해서 자연에 대한 의식혁명을 행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하고 있다. 자연파괴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점의 개혁이 필요하지만 인간 각자가 자연에 대해 보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117

 

자연진화, 자연과 공생을 주장하기 전에 '자연은 도대체 뭔가' 그것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조용히 따져보는 것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각데이터와 생각과 언어로 파악한 '자연'의 맞은 편에 있는 본래 그대로의 '자연'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매우 차가웠던 자연이 따뜻하고 가까운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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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과 타인과의 대립 속에서 사는 인간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하자!"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나와 타인이 분리, 대립한 존재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전에 대학에서 실험하던 중, 현미경을 통해 짚신벌레가 먹이에 접근해서 그것을 체내에 섭취하는 현상을 관찰할 때 떠올랐던 정의이다. 물론 짚신벌레는 인간과 같은 자타 대립의 의식은 없지만 자신 이외의 다른 먹이를 섭취하는 이상 거기에는 자타의 구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자타대립의 상태가 최고조에 달한 생명, 그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대립은 인간만이 범하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인 전쟁이다. 

 

정말로 이렇게 타자와 대립하는 자기가 존재하는 것일까? 원래 자신, 자기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자신과 나는 언어의 울림일 뿐이다. 

 

고뇌를 짊어진 그리고 살 방향을 잃은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구제할 방법은 과연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저는 근본적으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을 개혁해서 이기주의에 근거하는 자타 대립의 상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 이외에는 즉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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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변혁을 가져 오는 두가지 힘

. 정문훈습

. 무분별지

 

바른 말,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반복해서 듣는 것. 그 가르침과 말이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에 배어들어 그곳에 잠재해 있는 청정한 종자에, 비유하자면 물과 비료 같은 영양분을 주어서 그것이 잘 자라도록 하기 때문이다. 

 

서원, 보살도와 같은, 을 마음 속에 새겨 반복적으로 상기함. 그러면 살아갈 용기가 생겨나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마음의 상태와 입에서 나온 말이 아뢰야식에 훈숩되어 심층에 있는 마음을 바꾸어 간다. 아름답고 청정한 말과 마음이 심층을 온화하게 하며 아름답고 청정하게 한다.. 

 

자기변혁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계기는 무분별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보시,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는 이타행에 의해, 역으로 자아의식이 보다 강화될 수도 있다.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물건도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지를 가지고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 이 무분별에 의한 행위는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첫째, 타인에게 진실로 깨끗한 행위를 전개한다. 둘째 그것이,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이 되어 나에게 되돌아와 나의 심층에 있는 마음, 즉 아뢰야식에 있는 오염된 종자를 불태워 버린다. 무분별지라는 불이 타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번뇌라는 연로가 타고 있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생겨난 에너지가 타인에 대해 자비로운 행위가 되어 전개된다. 

 

사람들 속에서 무분별지에 기반을 두고 행하지 않는다면, 불교 본래의 수행이 아니다. 그런데 무분별지에 기반을 둔 행위는 보시 이외에는 없다. 134

 

일상생활 속에서 청소, 세탁, 요리, 업무, 어떤 것이라도 그 행위에 완전히 몰두할 때, 거기에 무분별지가 나타나게 된다. 따러서 그것이 소위 붛이되어 아뢰야식에 있는 오염된 종다를 즉 이기적 행위를 생시게 하는 힘을 하나하나 태워 버리는 것이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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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로 사물(사람)을 보다

- 연기의 이치

 

무재7시

화안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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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연. 

제가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처음 알고, 놀라서 감동했던 교리는 인연 가운데 하나인 증상연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에는 유력한 증상연과 무력의 증상연이 있다. 유력의 증상연이란 적극적으로 힘이 되고 돕는 인연이다. 그 예로서 자연계에 있는 태양,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물건, 가까운 부모, 지인, 친구 들이 있다. 무력의 증상연이란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 증상연. 자신이 존재를 방해하지 않는 인연을 의미한다. 151

 

'근원적인 생명'을 사랑하다

지구는 얼마나 생명력이 풍부한 별인가? 

수많은 식물종들, 색과 형태를 자아내는 자연의 경탄할만한 조형미. 

왜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생물이 생겨난 것일까? 신화적, 종교적 관점이 아닌 다른 식으로 생각한다. '무엇인가 보편적인 하나의 생명력이 있고, 그 생명력 자체의 '의지'에 기초해서 생명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분화 발전해 왔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무와 꽃과 샆은 식물에도, 박테리아와 작은 곤충들에게도 '살고 싶어 하는' 의욕이 있다고 저는 상상한다. 그리고 그 의욕의 배후에 '자기에 대한 집착'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생명력이 자아에 집착하는 하나의 작용을 통해서 개체 속에 갇힌 것, 그것이 개개의 박테리아, 곤충,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의 '생명'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다. 이 보편적 생명력을 지금 '근원적 생명'이라고 명명하겠다. 

 

이러한 입장에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 속에 있는 그러하나 '근원적 생명'을 인지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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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말'에 굴복하지 않는 마음

이 우주는 50억년 전에 빅뱅이 일어나 생겨났으며 현재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개벽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자연과학적으로 봐서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저에겐 외부의 정보에 의해 주어진 소위 추상적인 사실이고, 저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저 자신이 몸소 만들어 낸, 저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세계는 매일 아침 빅뱅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뜬 순간, 시공없는 깊은 잠에서 단숨에,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 이 광대한 세계가 나타나기 때문. 이것은 제가 매일 아침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소위 빅뱅으로 생겨난 세계는 '나'와 나가 아닌 '타자'로 나누어진 세계로 변모한다. 164

 

나선적으로 살자

견고하고 집요한 이기심을 조금씩 줄여 가면, 서서히 보편적 목적이 보일 것이다. 

"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계속 말해 보자. 그 말이, 그 생각이 서서히 심층에 훈습되어, 자신의 심층에 잠재하는 보편적인 의지가 깨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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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3대 목적

저는 호모사피엔스인 인간은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1. 나는 무엇인가를 규명한다(자기규명)

2. 삶과 죽음을 해결한다(생사해결)

3.다른 사람을 구제한다(타자구제)

 

인간의 마음속에 두 가지 커다란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노력하면 그것을 배양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훌륭하다고 확신한다. 200

 

지혜와 자비, 촛불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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